50.자존심, 그거 독이다
첫 리딩이 끝난 뒤.
두 번째 리딩도 수월하게 마무리되고.
드디어 <그 남자의 메모리> 본촬영 날이 밝았다.
기대작.
<긴 사랑>을 성공시키며 스타 PD 반열에 오른 유재훈.
<그대 내 품에>를 통해 유정연을 누르고 만년 2위 이미지를 벗어던진 강미나.
둘이 콤비를 이뤘다는 것만으로도 제작사에서는 많은 지원을 약속했는데, 여기에 주인공 3인방까지 쟁쟁하다.
<알고 있는가>로 라이징 스타가 된 최도윤.
<그대 내 품에>를 통해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며 안방 시청자들의 눈도장을 찍은 한유나.
오랜 기다림 끝에 <짧은 밤>이라는 드라마에서 매력적인 조연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한 이승원.
흔히 말하는 ‘톱스타’ 급은 아니어도, 앞으로 톱스타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3인방이 모인 게 중요한 셈.
그래서 이번 <그 남자의 메모리>를 편성한 방송사 CTBC의 지원도 빵빵했다.
최근 xvN의 약진에 고무된 건지 무려 회당 7억 원의 제작비를 투입시킨 것.
“이야, 이 장비를 여기서 다 보네. 기가 막힌다, 기가 막혀.”
“보조촬영자들 대기실 봐라. 으리으리하다야. 세상 좋아졌다. 우리 때는 대기실이 뭐야. 어디 드럼통에 장작 태우면서 바닥에 엉덩이나 깔았는데.”
새로운 촬영 장비들이 투입되며 카메라 숫자는 물론, 여타 장비들도 늘어나 스태프들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었다.
그렇다고 일이 줄어들 기대는 하면 안 되겠지만, 적어도 이전보다는 효율적으로 일하며 보다 좋은 결과물을 뽑아낼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배우들 노났네. 출연료도 대박이라면서?”
“요새 눈치 좀 있다 하면 다 케이블로 온다니까. 외주제작사들 봐. 지상파랑 협상하다가 다 방향 틀었잖아. 케이블로.”
“나 같아도 케이블 가겠다. 툭하면 방심위에서 그 난리를 쳐대는데.”
바야흐로 케이블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반면 고리타분하고 제약도 많은 주제에 여전히 위에 군림하려 들며 깐깐하게 구는 지상파의 시대는 서서히 저문다.
여기에.
도윤이 회귀하고 미래가 바뀌면서 <알고 있는가>가 신드롬을 불러일으켰고, 덕분에 그런 미래는 기존보다 더 빨리 다가왔다.
강미나가 <그 남자의 메모리>라는 기존에 없던 대본을 집필했고.
거기에 원래대로였으면 다른 드라마에 합류했을 배우들이 이 드라마로 몰려들었다.
그야말로 나비효과라는 표현이 더없이 어울리는 것이다.
그리고 회귀라는 날갯짓으로 거대한 태풍을 일으킨 배우.
최도윤은 지금-
“……형님.”
-하하, 뭘 그렇게 고마워할 것까지야. 후배한테 밥차 한 대 보내주는 거,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아예 촬영 끝날 때까지 보내줄까?
차정수가 촬영장으로 보낸 선물의 스케일에 어안이 벙벙한 상태다.
“갑자기 밥차를 보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너 덕분에 내 체면도 살았고, 후배 촬영 들어간다는데 선배 된 도리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체면이라 한다면.
아마 예능 프로그램 이야기일 것이다.
-내가 너 엄청 자랑했거든. 내가 본 후배 중에서 최고라고. 그런데 방송에서 도윤이 네가 딱 제대로 이겨주면서 정규 편성까지 된 거 아니냐. 내가 또 뭐라고 한 줄 알아? 도윤이는 연기도 잘하는데 인성도 된 배우라고 했지!
쉴 새 없이 칭찬 폭격이 이어지던 그때.
“죄송하지만 그러셔도 JS는 안 가요.”
-에이, 티 났냐?
도윤이 적절하게 끼어들어 자르자 들켰다는 듯,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낄낄대는 소리.
도윤은 피식거리며 밥차를 바라봤다.
가슴이 웅장해진다.
그냥 밥차도 아니고 프리미엄 밥차다.
지금까지 도윤이 촬영장에서 봤던 그 어떤 밥차조차 상대하기 힘든 어마어마한 스케일.
다만.
[내 사랑 최도윤 후배, 알지?]
밥차 앞에 세워놓은 차정수 본인의 등신대와 그 옆에 적힌 문구는 영 아니었다.
-참. 등신대 마음에 드냐?
“잘 나왔네요, 형님.”
-누가 안 물어봐도 내가 쏜 건 줄 알게 하나 딱 세웠지. 근데 내가 봐도 잘생겼더라. 크으.
자화자찬도 차정수가 하니 웃음만 나온다.
-아무튼 잘 나눠 먹어라. 나도 대본 분석 때문에 정신이 없거든. 직접 못 가서 미안하다.
차정수는 현재 신작을 준비 중이다.
도윤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아마 그건 메디컬 드라마일 것이다.
“아닙니다, 이렇게 보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제가…….”
-야, 됐어. 선배 체면에 후배가 쏜 밥차 얻어먹으면 뭐가 되겠냐? 사람들이 보면 욕해요. 밥차 돌려받으려고 그런 거 쐈다고. 그런 행동도 조심해야 돼. 너쯤 되는 애가 그런 거 잘못하면 다른 애들이 따라 해서 이상한 전통 생길 수도 있다고.
너쯤 되는 애.
도윤도 이제는 남들의 시선을 어느 정도는 의식해야 한다는 이야기.
그만큼 급이 올라왔다는 이야기와 동일하다.
사뭇 진지한 이야기에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래. 밥차 물어보면 꼭, 꼭! 내가 쐈다고 하라고. 참, 비상금으로 했다고는 하지 말고. 알았지?
정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이 쏜 사실을 강조했다.
“……예. 들어가세요. 형님.”
-오냐. 조만간 또 보자. 이번엔 모임에서.
전화가 끊어진 뒤.
도윤의 머릿속엔 ‘모임’이라는 단어가 맴돌았다.
그때 정수의 집에 들렀을 때 한번 들었던 모임.
‘기대되는데.’
그때 유나가 다가왔다.
“정수 오빠 참 대단해.”
“아, 네. 그렇죠. 이렇게 좋은 밥차도 보내주시고.”
“아니. 그거 말고. 자기 등신대를 저기 세울 생각을 누가 했겠어.”
도윤은 등신대 근처에서 깔깔거리며 사진을 찍는 스태프들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정수 오빠가 너 진짜 아끼나 보다. 이렇게 밥차까지 보내줄 정도면. 어지간해서는 이런 거 잘 안 해주는데.”
“누나한테는 안 해줬어요?”
“나도 받긴 받았었지. 누구랑 다르게 커피 트럭이었지만.”
“하, 하하.”
도윤이 어색하게 웃자 유나는 어깨를 툭 쳤다.
“농담이야. 근데 <맛대결> 잘 나가더라. 그거 너 덕분이라면서?”
“네. 제 덕분이라고 하시더라구요.”
“어머, 너 많이 뻔뻔해졌다?”
도윤의 농담에 유나는 나쁘지 않다는 듯 피식거렸다.
그나저나.
“아까보다 덜 피곤해 보이시네요. 차에서 내리실 때는 무슨 좀비 같았는데.”
“그래? 나 원래 맨날 그런데? 이상하다.”
카메라 앞에 서기 직전까지는 무슨 힘을 아끼는 것처럼 축축 늘어지기 바쁜 배우가 유나다.
하지만 지금 유나의 얼굴에는 생기가 감돌았다.
“참. 너 저번에 서이솔이랑 광고 찍었더라?”
“어떻게 아셨어요?”
“이 바닥 소문이 좀 빠르니. 그래서, 소감은?”
은근히 묻는 유나.
도윤은 별생각 없이 솔직하게 답했다.
“좋았어요. 처음 뵀는데 쾌활하게 대해줘서 사람도 좋아 보였구요. 촬영도 즐거웠는데요.”
“그래?”
유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얼굴은 다시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도윤은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막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최 배우님! 밥 잘 먹을게요! 참, 차정수 배우님한테도 고맙다고 전해줘요!”
PD, 유재훈의 외침이었다.
어느새 밥차 앞에는 새벽같이 나와 촬영을 준비하던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캬. 죽인다. 바비큐잖아?”
“삼겹살! 첫날부터 호강하네. 잘 먹을게요, 최 배우님!”
“근데 최도윤 배우님이랑 차정수 배우님이랑 이렇게 친한 사이였어?”
“왜, STB <그대 내 품에> 같이 찍었잖아. 거기 있던 애한테 들었는데, 차정수가 최도윤 되게 마음에 들어했대. 연기도 잘하고 깍듯해서.”
“부럽다, 부러워. 나는 어디 톱스타 인맥 안 생기나.”
그리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도윤에 대한 칭찬들.
“최 배우님! 얼른 와서 먹어요! 최 배우님 이름으로 왔는데 왜 먼저 안 받아요!”
“아, 지금 가겠습니다!”
그때 맨 앞줄에 서 있던 미나의 외침에 도윤이 고개를 돌렸다.
“누나도 같이 가요.”
“어, 으응. 그래.”
“왜 그러세요?”
“아, 아니. 갑자기 좀 피곤해서.”
“괜찮으세요?”
도윤이 얼른 유나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안색을 살폈다.
정말 표정이 안 좋았다.
평소 모습대로 돌아갔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 바람에 유나가 오히려 얼굴을 살짝 붉혀 버렸다.
“뭐, 뭐 해.”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이상하다는 듯 말하는 도윤의 모습에 그만 고개를 돌리는 유나.
“빠, 빨리 가서 밥이나 먹자. 얼른 가. 너 와야 사람들 다 먹겠네.”
“진짜 괜찮아요? 매니저 안 불러드려도 돼요?”
“괜찮다니까. 걱정도 많아. 얼른 가봐.”
도윤은 결국 묘하게 풀리지 않은 의문을 품은 채 밥차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 * *
밥차가 왔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먹는 건 아니다.
“아! 왜! 나 살 빼야 할 때!”
배역상의 이유로 체중 관리를 위해 샐러드와 함께 눈물만 삼키는 배우도 있었고.
일이 너무 바쁜 나머지 조금 뒤에 먹으려고 밥만 미리 받아둔 스태프도 있었다.
그리고 이승원처럼 조금 ‘다른 이유’로 밥차 쪽에는 시선도 안 주는 배우도 있었다.
“참, 너도 유별나다. 유별나.”
“왜요.”
“너 좋아하는 메뉴 한가득이야. 또 그 이유 때문에 안 먹냐?”
“…….”
승원은 모락모락 김이 나는 식판을 들고 다가온 선배 배우, ‘유종탁’의 물음에도 입을 다물었다.
종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너랑 같은 극단도 나왔고 이 바닥으로 뜬 지도 벌써 15년인데 너 같은 애는 처음 본다. 니가 무슨 투사야? 극단 출신 아니면 배우도 아니야?”
“그야…….”
“정신 차려, 인마. 다 좋은데 왜 거기서만 불통이냐. 지금이 어느 땐데 출신 성분으로 사람을 대하고 말고를 정해? 극단 출신 아닌 게 무슨 범죄냐? 좀 고친 줄 알았는데 계속 이러네. 너 그러다 큰코다친다.”
와다다 쏟아지는 잔소리에 승원은 말없이 고개만 돌렸다.
종탁은 한숨을 쉬며 승원의 과거를 떠올렸다.
‘아무리 사연이 있다지만…….’
승원과 종탁은 같은 극단 출신이다.
종탁은 승원보다 몇 년이나 일찍 극단에 나와 이쪽 바닥에 도전한 케이스.
물론 그 전부터 함께했기에 둘의 관계는 막역했고, 종탁은 선배로서 승원을 꽤 오래 지켜봐 왔다.
그렇기에 이렇게 타박하면서도 승원이 타협 없이 나오는 데에 더 이상 이야기할 수 없었다.
승원은 원래대로였으면 더 일찍 주목받았어야 했다.
적어도 승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온갖 노력 끝에 따낸 드라마 조연 배역을 갑자기 빼앗겨 버렸으니까.
그것도 연기라곤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아이돌에게.
‘나 같아도 화나지.’
그래서 승원은 그때부터 극단 출신이나 아역 배우 출신처럼 연기를 계속해 오던 사람이 아니면 색안경을 끼고 보기 시작했다.
도윤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같은 맥락.
극단은커녕 보조출연, 현장 경험도 없이 비주얼 하나로 데뷔하더니 이제는 자신보다 중요한 배역을 차지한 도윤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해는 하는데, 그래도 어울려라. 이 바닥, 혼자 한다고 되는 바닥이 아니다.”
“상관없어요. 연기만 잘하면 됩니다.”
“그치. 그 연기만 잘하면 되는 게 맞지. 근데 그거 아냐? 최도윤 저 친구도 연기 잘해서 주연 자리 먹은 거야.”
“…….”
“승원아.”
참고로 그때 승원의 자리를 빼앗았던 아이돌은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다.
연기를 못 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은퇴를 한 건지.
종탁은 차마 이 말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때 이를 악물고 올라왔기 때문에 여기 올 수 있었던 거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였으니까.
“일단 받기나 해.”
가타부타 말이 없는 모습에 종탁은 결국 따로 음식을 받아와 억지로 승원의 손에 식판을 들려줬다.
“진짜 괜찮…….”
“괜한 자존심 그거, 독이다.”
“……안 먹는다니까요.”
“아, 먹든 말든.”
종탁은 짐짓 무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최소한 받아서 먹는 시늉이라도 해. 그게 예의다. 알았냐?”
종탁은 그렇게 말하더니 휙 하고 가버렸고.
승원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식판을 바닥에 도로 내려놓으려던 그때였다.
꼬르르륵.
승원의 배에서 격한 신호가 들려왔다.
마침 코 끝에 스미는 먹음직스러운 향기까지.
결국.
승원은 주변을 슬쩍 둘러본 뒤.
지이익.
일회용 수저를 조심스럽게 뜯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