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멀티!(2)
“자자, 오케이! 좋습니다! 이번엔 바스트 따고 갑니다! 준비해 주세요!”
본격적인 광고 영상 촬영 전.
등신대용 사진을 촬영하고.
휴대폰 대리점에 붙일 포스터 촬영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솔은 아까 매니저한테 애원하던 모습은 뒤로한 채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우, 이솔 배우님! 느낌 너무 좋습니다! 표정 아주 좋아요. 손가락 조금만 더 정면으로 뻗을게요. 좋습니다! 오케이!”
싱그러운 대학생이라는 콘셉트에 알맞게 촬영 감독의 주문대로 생생한 표정을 짓기도, 때로는 귀엽게 표정을 찡그리기도.
마이크와 춤 그리고 노래만 없었지, 그것만 있었다면 마치 음악방송 무대로 착각할 만큼 풍부한 표정이었다.
가수들을 데뷔시키기 전 표정 연기를 그렇게 시킨다더니, 표정만 보면 이솔은 어지간한 베테랑 배우 못지않았다.
그런 한편.
“와우! 최 배우님. 역시, 그겁니다! 그거! 완벽해요! 원더풀! 그대로 갑시다! 자, 오케이! 좋습니다! 한 번에 퍼펙트하네요!”
도윤 역시 카메라 앞에 선 순간 표정을 싹 바꾸며 감독의 요구를 완벽하게 수행했다.
그것도 감독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덕분에 이를 지켜보던 SPT 측 파견 직원이 흐뭇한 미소를 지은 건 당연한 일.
“이야, 장난 아닌데?”
“누나보다 더 잘하는 것 같은데.”
“뒤질래? 너 내 매니저 맞냐?”
“젤리 드실래요? 촬영 끝나고 한 봉지 드릴게요.”
“지, 진짜지? 진짜지?”
젤리 이야기가 나오자 팔짝팔짝 뛰는 이솔.
“너무 아름다우신 것 같아요.”
“여포가 초선을 봤을 때 딱 그런 눈빛이었을 거야.”
그리고 이를 바라보며 감탄하는 성호와 옆에서 한마디 툭 던지는 민주.
“저 그건 알아요. 여포가 초선을 사랑했었죠?”
“응. 근데 여포가 나중에 죽어.”
“……진짜 나빴다.”
이런 가운데 드디어 시작된 오늘의 광고 영상 촬영.
이미 대본을 완벽하게 숙지한 도윤은 가정집으로 꾸며진 세트장 소파에 이솔과 나란히 앉았다.
이솔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콘셉트에 불과하지만, 마치 정말 여자친구라도 된 것처럼.
“자기야, 나 무슨 티 입은 것 같아?”
“티? 무슨 티? 갑자기?”
“아잉, 알면서. 맞춰봐!”
“흰색 티잖아. 갑자기 왜 그래?”
시작부터 상당히 괜찮은 케미가 발휘되더니.
“틀렸어! 다시!”
이솔이 짐짓 화난 표정을 짓자 도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뭐지? 티? 어제도 입은 티?”
“아, 진짜아. 다시 맞춰봐아!”
“글쎄…….”
고심하던 도윤이 그때 알았다는 듯, 탄성과 함께 외쳤다.
“오늘도 입은 티!”
“야, 이 바보야!”
그리고 그때 들려오는 스피커 소리.
[그건 내가 알려주마!]
두 사람이 놀란 듯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나중에 CG로 처리될 테이블 위의 휴대폰에선 이런 음성이 흘러나온다.
[그것은 바로 멀티이니라! 멀티~ 유심!]
물론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둘은 매우 놀란 표정을 지으며 열심히 연기했다.
“멀티 유심?”
“그게 뭐지?”
[그것은 바로 유심에 두 개의 번호까지 쓸 수 있는 유심칩이느니라.]
그리고.
“컷-! 좋습니다! 오케이. 바로 가도 되겠는데요. 자, 이번엔 측면에서 따겠습니다. 준비해 주세요! 레디…… 액션!”
이어지는 추가 촬영 속에서도 둘은 정말 티격대는 연인처럼 광고 촬영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와, 이거 최도윤 씨랑 서이솔 씨 케미가 장난 없는데요? 광고 나가면 파급력 좀 있겠어요!”
도윤은 저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지금 얼굴이 후끈거려 미칠 지경이었으니까.
그놈의 티, 티, 티.
이제는 티 소리만 들어도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았다.
현자타임이 오는 게 이런 기분일까.
물론.
그 덕분에 이런 광고도 찍게 된 거지만.
‘잘 팔리길 바라야 하나, 안 팔리길 바라야 하나.’
어쩐지 이후 만나는 팬들은 질문의 강도가 더욱 높아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여하튼.
광고 촬영은 아주 성공적이다.
한 번에 오케이도 받아냈고, 모니터링 결과 둘 다 아주 매력적으로 나오기도 했고.
아주 흡족해 보이는 SPT 파견 직원 표정만 봐도 뭐.
“기철야, 기철야! 나 젤리 주세요!”
“차에 가서요.”
“아 왜에! 여기서 줘! 촬영 끝났잖아!”
이런 와중에 하는 수 없다는 듯 젤리를 내미는 기철.
그리고 그걸 받아든 이솔은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젤리를 오물오물 씹기 시작했다.
“역시, 이거야. 아, 드라마 촬영만 아니었어도…….”
그 말에 도윤이 물었다.
“촬영 들어가세요?”
“네에. 두 달 뒤에 크랭크 인인데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앨범도 준비해야 하니까…….”
이솔은 어딘가 모르게 피곤해 보였다.
하긴, 쉽진 않을 것이다.
가수와 연기 활동을 병행하는 거 말이다.
한편으로는 그래서 대단하게 느껴졌다.
도윤보다 고작 한 살 많은 이솔이 지금 전국민이 다 아는 톱스타가 된 건, 이런 치열한 노력 덕분이겠지.
“최도윤 배우님도 체중 관리하느라 힘들죠?”
“그거야 뭐, 배우의 숙명이니까요.”
“전 큰일이에요. 데뷔 준비할 때도 먹을 거 때문에 엄청 힘들었는데 데뷔하고 좀 살 만해지니까 집착이 생겨서…… 어머. 저 그렇다고 엄청 먹진 않아요!”
이솔의 다급한 셀프 항변에 도윤은 회귀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언젠가 봤던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솔이 핫도그 다섯 개를 순식간에 먹어치우던 장면이 떠올랐다.
“누나. 스케줄 1시간 남았어요. 20분 뒤에는 출발해야 합니다.”
“아, 진짜 정신없네. 알았어. 그래, 가야지. 휴우. 새벽부터 오늘만 몇 개야.”
한편으로는 묘하게 지쳐 보이기도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나라에서 이솔을 원하는 곳은 사방에 널려 있으니까.
“최도윤 배우님.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나중에 또 봐요. 참, 그리고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어도 돼요?”
“저야 영광이죠.”
“헤헤, 고마워요. 사장님이 어떤 식으로든 이렇게 사람 만나면 꼭 인연을 기억해 두라고 하셔서요.”
좋은 말이다.
찰칵!
그렇게 도윤은 성호의 부러운 시선 속에서 이솔과 사진 촬영을 하고, 이솔의 번호도 받았다.
“나중에 드라마 들어가면 알려주세요? 최도윤 배우님이 눈이 좋다고 들어서요.”
“미리 작업해 두시는 건가요?”
“그런 셈이죠?”
생글생글.
웃는 모습을 보니 왜 전국민이 좋아하고 광고주들이 가장 선호하는 연예인인지 알 것 같았다.
때문에 도윤은 이런 이솔을 좋아하는 둘을 떠올리며 물었다.
“아 참. 혹시 사인 한 장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당연하죠. 기철야, 앨범 좀. 오케이. 어떻게 적어드릴까요?
“하나는 ‘유동하’라고 적어주시고 또 하나는 ‘유성호’라고 적어주세요.”
“응? 최도윤 배우님이 가지는 거 아니구요?”
섭섭하다는 듯 울상을 짓는 이솔의 모습에 도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저도 당연히 받아야죠. 근데 저보다 훨씬 더 원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그 친구들 이름 먼저 말했어요. 그리고 괜찮으면…….”
그러곤 조용히 귀엣말로 무언가 속삭이자 이솔이 성호 쪽을 한번 바라보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리하자면, 최도윤 배우님 매니저님이 제 찐팬이라 이거죠?”
“이참에 매니저 서로 바꿔볼까요?”
“그래 볼까요?”
농담을 하며 웃는 두 사람을 보며 질투심을 불태우는 성호.
“나도…… 나도 배우 할 거야…….”
“중국 가봐. 수염 기르면 딱 장빈데.”
옆에서 심드렁하게 민주가 핀잔을 던지던 그때.
“어, 어어?”
이솔이 이쪽으로 다가오자 성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솔은 성호의 혼을 쏙 빼놓는 미소와 함께 휴대폰을 흔들어 보였다.
“매니저님. 우리 사진 한 장 찍을까요?”
“저, 저, 저, 저랑요?”
말을 더듬는 그 모습에 이솔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풋” 웃음을 터뜨렸고, 성호는 혼절 직전인 표정으로 어버버거렸다.
“같이 찍어요. 소원이라고 들어서. 제가 들어드릴게요.”
그리고 성호는 이쪽을 바라보며 웃는 도윤을 발견했다.
‘형…….’
이날.
성호는 도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 * *
광고 촬영을 마친 후.
도윤은 바로 옆 스튜디오 건물에 들러 오랜만에 주섭을 만났다.
STB 시상식 이후로는 몇 달 만이었다.
“이거 오랜만이네요! 그간 잘 지냈죠?”
주섭은 도윤을 진심으로 반겼다.
그도 그럴 게, <그대 내 품에>의 후반 시청률 1위 탈취에는 도윤의 공이 꽤 컸으니까.
그 덕에 <그대 내 품에>는 연말에 상도 받고 주섭의 몸값도 더더욱 올라갔다.
미나가 지금 도윤의 기억 속에 없는 신작을 시작한 것도 비슷한 맥락의 나비효과.
그런데.
주섭이 지금 준비하는 작품은 도윤이 이미 알고 있는 작품이었다.
<청춘 에세이>.
미니시리즈, 그리고 로맨스 장르에 강한 주섭답게 차기작 역시 여섯 남녀의 사랑을 다루는 드라마.
그리고 도윤이 알기로 이 드라마는-
상당한 마니아층을 양산하며 나쁘지 않은 성공을 거둔다.
아마 몇몇 배우들의 연기만 좀 받쳐줬다면, 더 큰 성공을 거뒀을 작품.
“준비는 잘 되어가고 계세요?”
“아뇨. 캐스팅 논의하던 배우들이 연달아 거절해서. 어이쿠, 내가 무슨 말을.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하하.”
그리고 주섭은 꽤 수심이 깊어 보였다.
늘 그렇듯, 작품을 준비하는 캐디(캐스팅 디렉터)와 PD의 가장 큰 고민은 역시 캐스팅일 것이다.
그런 와중에 배우들이 거절까지 했다니.
“배우들이 거절했다구요?”
안 물어볼 수가 없었다.
“네. 요새 케이블에서 짱짱하게 풀잖아요. <알고 있는가> 성공하니까 너도나도 뛰어드는 거지. 솔직히 나 같아도 케이블 간다. 안 그래요? 검열 덜 빡세지, 출연료 더 준다고 하지, 잘만 하면 조연급에서 주연 갈 수도 있지…….”
틀린 말은 아니다.
케이블의 공격적인 투자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시작됐고, 이번에는 <알고 있는가>가 예상지 못한 성공을 거두며 그 규모가 더욱 커진 듯했으니까.
그런데 그때.
“하아. ‘민아’랑 ‘주윤’이는 도대체 어디서 누굴 데려와야 하나.”
도윤의 귓가에 익숙한 배역 이름이 들려왔다.
‘민아와 주윤이라면…….’
도윤을 기억을 더듬었다.
도윤은 이미 <청춘 에세이>의 모든 내용을 안다.
그래서 모든 배역들의 이름을 거의 다 기억하고 있는데…….
저 두 배역은, 온갖 욕을 들어먹었던 배역이다.
정확히는 배우들이 연기를 너무 못해서.
볼 때마다 혈압이 오를 정도로 연기가 애매했던 배우들이라고 할까.
하긴.
지금 주섭의 상황을 보면 안 쓸 도리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에휴. 이거 원. 최도윤 배우가 딱 합류해 주면 좋을 텐데,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참, 강 작가는 잘 지내죠?”
“아직 팔팔합니다.”
“우리 강 작가, 패기랑 목소리 빼면 시체지. 아, 술도 있구나.”
주섭이 문득 물었다.
“저, 최 배우. 오늘 나 이렇게 찾아와주기까지 했는데 이런 거 물어서 미안하지만…… 혹시 주변에 아는 젊은 배우 있어요? 톡톡 튀고, 개성 있고, 그런 배우들.”
그러다 이내 한숨을 쉬었다.
“하기야, 있으면 다들 캐스팅됐겠지. 미안해요. 괜한 거 물어서.”
그때였다.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네? 정말요?”
“한 명은 저랑 같이 드라마 했던 친구고, 한 명은 영화를 같이 한 친구입니다.”
주섭의 눈동자가 흥분으로 물들었다.
“두, 둘 다 지금 스케줄 없대요?”
“얼마 전에 연락하기로는 그랬습니다.”
주섭이 도윤의 어깨를 잡았다.
“최 배우. 다른 거 필요 없고 그 두 사람 번호만 알려주면 내가 술 거하게 쏘겠습니다! 네? 부탁 좀 합시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바싹 다가온 주섭.
도윤은 괜히 말을 꺼냈나 싶어 후회했지만-
“류해영…… 박유준…… 오케이. 접수! 고마워요!”
기왕 이렇게 된 거, 둘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청춘 에세이>는 그만큼 좋은 작품이니까.
그때 두 배우의 발연기가 작렬해대는 와중에도 꾹 참고 봤을 만큼.
‘팬의 심정이지. 암.’
차라리 잘됐다.
이 배역에 해영과 유준이 합류하면 훨씬 좋은 퀄리티의 드라마가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근데 박유준 배우는 누구예요? 처음 들어보는데?”
“저랑 같이 영화 찍은 친군데, 잘합니다. 믿으셔도 됩니다.”
무려 미래의 스타 배우니까.
“최 배우 말이니까 믿어야지. 오케이. 이따 내가 연락해 볼게요. 고마워요. 하하하!”
아무튼.
캐스팅이 성사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가능성은 보인다.
‘둘이 주목받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