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할까, 말까
스펙트럼(Spectrum).
이쪽 바닥에서는 배우의 연기 폭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단어다.
배우는 보통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된다.
보통 고정된 역할을 맡는 배우(엄마, 아버지, 악당 등), 혹은 가리지 않고 다양한 배역을 맡는 배우.
사실 어느 한쪽이 좋다, 나쁘다를 따지기는 힘들다.
실제로 비슷한 배역만을 맡아오며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여러 배역에 도전하다 이도 저도 아닌 경우가 되는 배우가 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다만 도윤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10년 동안 참고 기다려왔던 탓일까.
그냥 욕심이 생긴다.
다양한 배역에 도전해 보는 거 말이다.
“안녕하십니까, 이번 드라마 연출을 맡은 PD 유재훈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인 배우 최도윤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대 내 품에> 후반부 캐리했다면서요?”
도윤은 그 말에 미나를 한번 바라보곤 고개를 저었다.
“그땐 많이 부족했습니다.”
“하하, 듣던 대로 겸손하네요.”
그리고 이어지는 미나와의 인사.
“그간 잘 지냈어요, 최 배우?”
“그럼요. 작가님은요?”
“쫑파티 이후로 최 배우만 생각하면서 살았죠. 내 마음속 별이 됐거든.”
미팅 시작부터 날아오는 낯뜨거운 칭찬에도 도윤은 오히려 가볍게 받아넘겼다.
“요새는 약주 잘 안 하시죠?”
“야, 약주요?”
순간 미나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대 내 품에> 쫑파티 날.
술에 취해 도윤에게 엉기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걱정돼서요.”
그리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도윤의 모습에 미나는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그, 그때 기억하고 있어요?”
“제가 머리 받쳐드렸었는데.”
“…….”
재훈이 슬쩍 끼어들었다.
“강 작가가 쫑파티 때 최 배우 코 꿰어놨다는 게 그거였어?”
“……그, 그게요.”
덕분에 잠시 웃음으로 가득해진 미팅룸.
뭐, 사실 미나가 술 좋아하고 많이 마신다는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라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그걸 입 밖으로 꺼낸 사람이 미나가 꼭 다음 작품 같이하자고 엉겨 붙었던 도윤이라 그렇지.
“그때 약속이 떠올라서요.”
“고, 고마워요. 안 잊어줘서. 하하, 덕분에 이렇게 봤네? 엉기길 잘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횡설수설하던 미나가 뺨의 홍조를 가라앉힐 즈음에야 시작됐다.
“대본은 어땠어요?”
“전작이랑 느낌이 확 다르던데요.”
“정확히는요?”
“좋았습니다. 샘플뿐이지만, 극의 흐름도 한눈에 들어오고…… 흥미도 충분히 동하고요. 무엇보다 여기 계신 유재훈 PD님의 연출법과 잘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윤의 입에서 대뜸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재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요?”
“네. 연출하신 작품 다 봤는데, 이번 작품 분위기에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플래시백 기법을 되게 세련되게 활용하시는 것도 그렇고, 단독 앵글에서 인물 심리를 표현하시는 게 최고시더라구요.”
“오호.”
재훈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감돈다.
‘이 친구, 마음에 드는데?’
보통 어지간한 배우들은 미팅에서 연출까진 언급하진 않는다.
그냥 배역 이야기, 연기 이야기 정도지.
그런 의미에서 흥미와 기쁨이 동시에 동한다.
이것만으로도 좋지만, 단순히 비주얼 좋고 요즘 좀 뜨는 배우인 줄로만 알았는데, 다른 젊은 배우들과 달리 자세가 된 것 같았다.
이런 와중에 본의 아니게 배우에 대한 재훈의 기준을 올려놓은 도윤은-
‘미리 기억해 내고 오길 잘했지.’
미팅 전, 사전에 기억을 헤집고 부족한 부분은 조사해 유재훈에 대한 정보들을 알아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도윤이 회귀 전 봤던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엔 재훈이 연출한 작품도 다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날아온 질문에도 거침없이 답했다.
“그럼 혹시…… 어떤 작품이 제일 마음에 들었는데요?”
“STB에서 연출하신 <그녀의 기억법>도 좋았지만, 개인적으로는 KBT에서 연출하신 <긴 사랑>이 제일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시청자로서 제 취향이 그쪽이라서요. 주요 등장인물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그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세세하게 묘사하는 방식이요. 시청자를 들었다 놨다 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요?”
물 흐르듯 막힘없이 이어지는 소감.
덕분에 재훈의 만면엔 환한 웃음이 번졌다.
묵혀둔 주식이 올랐다는 소식을 들어도 이것보단 기쁘진 않으리라.
“이거, 강 작가님이 말한 거 이상인데요?”
“제가 뭐랬어요. 대본 보고 분석하는 눈이 남다르다니까. 그래서 제가 무조건 1순위로 잡아야겠다고 그렇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이야기한 거 아니겠어요?”
“알지, 알아. 근데 직접 보니까 더 좋네.”
그리고 이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수철은 흐뭇한 심경이었다.
‘예전에는 대본도 안 보고 그냥 무작정 하겠다고만 했던 녀석인데.’
고작 3년도 안 된 사이에 이런 격세지감이라니.
그제야 도윤이 왜 <알고 있는가>를 하겠다고 밀어붙인 건지 확실히 이해된다.
때문에 이제는 수철도 도윤의 선택이라면 꼭 동민의 지시가 아니더라도 믿고 밀어줄 작정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여기 이 자리에 온 것이고.
이런 가운데.
“그리고 PD님, 태정대 출신 맞으시죠? 연극영화학과.”
“아, 그랬었죠.”
“저도 태정대 출신입니다, 선배님.”
“아니, 하하하. 최 배우님이 태정대 출신이었어요? 와, 이거 여기서 후배를 다 보네. 그럼 몇 학번이죠?”
“경영학과 09학번입니다.”
“이야, 애기네, 애기. 캬아. 가만, 경영학과라고? 이거 대단하네. 브레인이잖아? 아니지, 요새 말로 ‘뇌섹남’이라고 하나?”
“휴학했는데요, 뭘.”
“그래도 태정대 경영학과 거기 가기가 어디 쉽나. 참, 그럼 영어도 잘하겠네?”
“그냥 약간 하는 정도입니다.”
“좋네, 좋아. 이제 이 바닥에서 영어도 중요해진다고.”
도윤은 미리 조사한 정보에 자신의 출신대학까지 활용하며 재훈의 호감도를 극한으로 올려버렸다.
“어머, 최 배우님 그럼 지금 학교 다니는 거예요?”
“아뇨. 휴학했어요. 군대 갔다 와서 잠깐 다니다 일반휴학이요.”
“아하. 그럼 아직 대학생이구나? 학교 계속 다니게?”
“아직 고민해 보진 않았습니다.”
“하긴, 이제 학교 가기도 힘들겠다. 다 알아보겠네.”
배우들 중에 학벌 좋고 특례입학도 아닌 사람들이 종종 있다 해도, 독특한 이력인 건 확실하다.
‘지적인 이미지까지…… 이거까지 이미지에 활용하면 대박이겠는데?’
결국 미나는 더 참지 못했다.
“그래서 최 배우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기 이 대본, 주연 해보시는 거.”
미나가 은근한 표정으로 물었다.
분위기는 좋다.
대본도 나쁘지 않다.
사실 스스로가 봐도 놀란 대본이다.
지금까지 미니시리즈만 줄곧 써 오다 그냥 되는 대로 쓴 대본이었는데 의외로 좋은 결과물이 나왔으니.
때문에 도윤의 오케이만 떨어지면 미나는 당장에라도 환호하며 소리를 지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전에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도윤은 그리 간단한 배우가 아니었다.
“말씀하세요.”
“주인공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원합니다.”
“주인공이라면…… 앞으로 어떻게 되고, 어떻게 이야기가 흘러갈지에 대한 건가요?”
“대략적인 정보만이라도 좋습니다.”
미나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샘플에서 본 것처럼 주인공은 과거 사이코패스 살인마였어요. 하지만 기억을 잃었고, 특정 계기를 통해서 하나둘 그 기억이 깨어나게 되죠. 드라마의 포인트가 바로 거기에요. 그 기억들이 깨어나면서 현재의 자아와 충돌하는 거죠. 그래서 사실 시청자들도 주인공이 사이코패스라는 건 몰라요. 처음엔 말이죠.”
도윤은 흥미가 동했다.
“이른바, ‘반전’이라는 거죠?”
“그렇죠. 일단 처음에는 이른바 ‘착각’ 느낌을 주는 거죠. 주인공의 직업은 연예인이고, 그중에서도 위에서 군림하는 톱스타. 하지만 인성이 그리 좋지 않고, 사이코패스의 행적이 군데군데 묻어서 주변 사람들이 기피하죠. 그러다 기억을 잃으면서…… 달라지는 거죠. 갑자기.”
반전.
때로는 시청자들에게 큰 충격을.
그러나 잘못 사용하면 큰 항의를 받을 수도 있는 기법.
몇몇 드라마가 그랬다.
기획 의도, 포스터, 인물 소개 등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의 분위기를 사용한다.
그러다 서서히 떡밥을 흘리고 중반부 혹은 중후반부부터 폭발시켜 장르를 변화시키는 드라마.
‘몇 개 있었지.’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대여섯 개.
그러나 성공한 건 그중 절반.
요컨대-
“무슨 고민을 하는지 알아요. 배우로서 연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일반적으로 작가나 PD가 캐스팅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소재라는 것.
매력적인 배역이긴 하지만, 두 인격을 연기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하긴, 안 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아쉬웠다.
이런 대본을 자신이 써냈고, 써놓고 보니 이 주인공에 도윤만큼 어울리는 배우가 도저히 떠오르질 않았으니까.
‘하, 이런 친구는 꼭 잡아야 하는데. 꼭 이게 아니더라도 언젠가 한 번은 꼭 작업해 보고 싶단 말이지.’
재훈 역시 마찬가지.
PD로서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상세히 꿰고 있는 배우와 작업해 보는 게 어디 쉬운 일도 아니고.
“흠…….”
이런 가운데 도윤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이 애타는 심정으로 마른침을 삼킬 만큼, 깊은 고민에 빠진 표정.
‘어쩔까.’
사실 이 작품, <그 남자의 메모리>를 하지 않아도 도윤의 커리어에는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당장 제안이 들어왔던 작품들 중 미래에 성공할 것들 중 하나를 고르면 되니까.
그래서 이건…….
모험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그래서 오히려 끌린다.
10년을 기다려왔으니까.
그래서 안정적인 것보다는, 그냥 뭐든 손에 집히는 대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
물론.
이 대본은 손에 잡히는 대로 집은 대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대되는 건 사실이지.’
확실히.
이 배역은 탐이 난다.
지금껏 수많은 작품을 보고 분석해 온 도윤조차 흔들릴 만큼.
그래.
사실, 회귀했다고 해서 꼭 미래에 성공할 작품만 잡아야 하는 건 아니다.
이렇듯-
마음을 흔드는 작품이 다가오는, 배우로서는 어쩔 수 없는 순간.
‘배역에 마음을 빼앗긴 거지 뭐.’
도윤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강미나가 쓴 이 대본의 주인공, ‘이다한’은 어느 배우든 탐을 낼 배역이라고.
물론 모두가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누군가는 할 것이다.
성공해내기만 한다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킬 캐릭터니까.
그래서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여기에 그럴싸한 한 가지 이유를 더 추가한다면.
‘어딘가 닮았단 말이지.’
굳이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이 1인 2역이라는 키워드 자체가 닮았다.
오만했던 과거로 돌아와.
갑자기 달라진 자신의 모습과 말이다.
물론 도윤이 사이코패스는 아니지만.
그런데.
이런 도윤의 모습은 미나의 눈엔 아주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할까, 말까.
그런 고민.
“혹시 배역의 문제라면 좀 더 같이 고민해 볼 수 있을 거예요. 큰 틀이나 주요 미장셴, 장치들을 변경하는 건 어렵지만 촬영장에서 편의를 봐주는 쪽으로는…….”
그래서 애가 탄 나머지 미나가 참지 못하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니면 좀 더 고민해도 되고요. 이 자리에서 꼭 결정할 필요는 없어요.”
“아뇨. 결정했습니다.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그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주연이고, 여기서 제가 망설여서 피해를 끼치면 안 되니까요.”
단호하게 말하는 그 모습에 두 사람이 설마, 하는 마음에 기대감을 조금 접으려던 찰나.
“하겠습니다.”
도윤의 대답이 들려왔고.
“오늘 오길 잘했네요. 며칠 늦었으면 다른 배우가 이 배역 연기하는 걸 봐야 했을 테니까요.”
씩, 웃으며 말하는 그 모습에 순간 미나는 환호할 뻔했다.
너무 기뻐서.
그러다 결국-
“하, 하겠다는 거죠?”
“네. 하겠습니다.”
도윤의 대답이 떨어지자 미나는 곧바로 소주를 떠올렸다.
그래, 오늘 같은 날은 마셔도 된다.
왜냐? 최도윤이 하겠다고 했으니까!
저 차가운 비주얼로 사이코패스 연기를 할 걸 생각하니 오금이 저릴 시청자들에게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최도윤이 한다고 했는데!
“배역 관련해서 고민하는 것 같던데, 정말이죠?”
“네. 그리고 배역 관련 부분은 걱정 안 합니다. 오히려 작가님 설명을 들어보니 더 탐이 나기 시작하는데요.”
함박웃음을 짓는 미나.
그걸로 도윤의 <그 남자의 메모리> 캐스팅이 전격 결정되었고-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최 배우님. 아, 따로 오디션은…….”
“무슨 말이에요, PD님!”
“하하, 장난이야, 장난. 괜히 오디션 보고 초장부터 소름 끼칠 일 있어?”
미팅룸엔 행복한 웃음이 넘쳐흘렀다.
물론 아닌 두 사람도 있었다.
‘촬영장 위치가 엘리하우스랑 먼 곳이려나? 오일 좀 갈아놔야겠네.’
운전할 생각에 대충 거리를 가늠해 보는 성호.
‘사이코패스. 연예인. 조합 좋네.’
캐스팅이 결정되자 곧장 배역에 맞춰 도윤의 코디를 상상해 보는 민주.
그리고.
“조건과 관련해서는 여기, 저희 이수철 팀장님과 이야기 나누시면 될 것 같습니다.”
웃는 낯이지만 오늘 이 자리에 자신이 온 목적을 실행하기 위해 일어서는 수철.
“자, 이제 이쪽에서 건설적인 이야기가 마무리됐으니까 저희 쪽에서 건설적인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이렇듯 저마다 각자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가운데-
‘재미있겠는데.’
도윤은 첫 리딩이 시작될 날을 기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