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평소에도 좀 무서워해 봐라
<맛대결>.
방송국 개편 시기, 보통 붕 뜬 편성 일정을 위해 투입시키는 흔한 파일럿 프로그램.
때문에 세트도 그리 잘 갖추지 못했고, 출연진은 꽤 화려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수선한 느낌의 시작에 시청자들은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배우 최도윤입니다.]
[예. 실은 영화 홍보하러 온 거 맞습니다.]
[어, 혹시 제가 잘못 대답했나요……?]
하지만 최도윤이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하면서 시청자들은 <맛대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강민혁 셰프 팀이 질 것 같은 상황.
도진우는 이미 대중에 꽤 잘 알려진, 요리하는 취미를 지닌 엔터테이너였고 반면 도윤은 <기적의 레시피>를 제외하면 대중들에게 요리와 관련된 무언가를 보여준 적이 없었으니까.
아니, 사실 따지고 보면 <기적의 레시피>도 아직 개봉조차 안 한 영화다.
그런데.
[아! 최도윤 배우! 저희가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었나요! 빠르고 정확한 칼질로 당근을 썹니다! 이거, 연막작전이었나요!]
[일단 당근을 이용해 가니쉬를 만들 겁니다. 저희 강민혁 셰프님이 만드실 스테이크에 곁들일 겁니다.]
도윤이 보여준 매력은 어지간한 드라마 반전 뺨치는 수준이었다.
완벽한 칼질.
재료를 바라보는 진지한 눈빛.
집중할 때 아주 살짝 튀어나온 입술은 시선을 집중시키기까지.
그리고 마침내.
[그럼, 이제 발표하겠습니다. <맛대결>! 그 첫 번째 대결의 승자는…….]
[……완벽한 목살 스테이크와 당근 가니쉬를 선보인 강민혁 셰프 팀입니다! 축하드립니다!]
강민혁 팀이 6표 중 4표를 얻으며 승리하자 그날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한 건 <맛대결> 관련 키워드였다.
1.최도윤
2.맛대결
3.강민혁
4.파일럿프로그램
5.도진우
6.로건킴 셰프 몸무게
.
.
-대박. 최도윤 요리실력 무엇????
-ㅋㅋㅋㅋㅋㅋㅋ 이게 나라냐? 저 얼굴로 요리도 잘한다고?
-(슬픈 개구리 짤)
-인생...진짜...
-와... 영화 촬영하는 동안 배운 걸로는 설명이 안 되는데?
-예전부터 요리한 게 확실해 보임
-현직 요리사입니다. 손목 스냅이나 칼질, 재료 다루는 방식이나 요리 발상으로 볼 때 프로급은 아니어도 충분히 훌륭한 수준입니다.
댓글 반응 역시 폭발적이었고.
[최도윤, <맛대결>서 수준급 요리실력 자랑!]
[최도윤, 숨겨둔 요리실력 자랑!]
[최도윤, “이전부터 심심할 때마다 요리를 해먹었다.”]
[강민혁 셰프, “배우만 아니었으면 내가 마음먹고 키웠을 것” 애정 드러내]
기사 역시 폭발적으로 쏟아지며 또 한 번, ‘최도윤’이라는 배우가 지닌 화제성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된 셈.
그뿐만이 아니다.
아무리 립서비스가 있었다고 가정해도 시청자들은 상당한 퍼포먼스를 두 눈으로 확인했다.
덕분에 자연스레 도윤의 신작 <기적의 레시피>에 대한 관심도 올라가기 시작했고.
“허, 이게 무슨 일이래. 최 배우가 이런 데도 나갔어?”
“저번에 말씀드렸잖아요. 홍보 겸해서 예능 나간다고.”
“난 나가서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지.”
덕분에 이창욱 감독은 함박웃음을 지었지만.
정작, 가장 크게 함박웃음을 지은 쪽은 따로 있었다.
[……완벽한 목살 스테이크와 당근 가니쉬를 선보인 강민혁 셰프 팀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얘 요리를 이렇게 잘했나?”
“그때 뭐, 물어볼 때 씩 웃는 거 보면 뭔가 있는 것 같긴 했는데.”
“아니, 촬영장 소식 들을 때마다 좀 의외긴 했는데…… 저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죠.”
이엔 엔터 대표실에서 동민과 함께 영상을 보던 수철은 혀를 내둘렀다.
“아. 별명도 생겼네요. ‘요섹남’.”
“무슨 뜻이야?”
“요리하는 섹시한 남자요.”
“요새 줄임말은 참 어려워. 아무튼 뭐, 좋은 뜻은 맞지?”
“그렇습니다.”
요섹남.
그 별명이 붙은 건 도윤이 요리를 잘해서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맛대결>에서 전혀 요리를 잘할 것 같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다 갑자기 실력을 발휘하는, 반전 임팩트를 준 이유도 있었다.
“아무튼 도윤이는 이젠 뭘 해도 화제가 되네요.”
“정확히 하자고. 도윤이가 잘하니까 화제가 되는 거야. 아무리 유명인이면 똥을 싸도 박수를 쳐준다지만, 그전에 유명인이 되어야 하는 거잖아?”
“비유를 하셔도…….”
동민은 흥미를 보였다.
“재미있어. 이 팀장, 신기하지 않아? <그대 내 품에> 막 투입될 때만 해도 사람 조마조마하게 만들던 애가 이젠 저렇게 확 바뀐 게?”
“아마 성호가 제일 신기해할 겁니다. 옆에서 계속 지켜보던 애니까요.”
“그렇지. 그렇겠지. 성격도 예전보단 좀 부드러워진 것 같고, 연기력이야 말할 필요도 없지. 갑자기 벼락이라도 맞았나…….”
동민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말해놓고도 어처구니가 없군. 그치?”
“저도 대표님이었으면 그렇게 말했을 겁니다.”
“하여튼 좋은 일이야. 아주 좋은 일이지. 도윤이 보고 우리 회사 문 두드리는 연습생도 있고, 제안들도 계속 들어오고 있으니까. 지금 도윤이 앞으로 들어온 광고가 몇 건이지?”
“15건 좀 넘습니다.”
“도윤이랑 잘 조율해. 이 팀장이 제안 들어온 거 잘 설명해 주고. 이 팀장 안목 믿으니까. ‘로체’ 건도 이 팀장이 추천한 거라고 했지?”
“도윤이가 받아들인 거죠. 제가 한 건 뭐 없습니다.”
“도윤이가 받아들이게 한 게 중요한 거지. 알잖아? 도윤이 그 녀석, 다른 건 바뀌어도 고집은 안 바뀐 거.”
“그 고집. 지금까지는 다 맞았습니다.”
동민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다 맞았지. 지금까지는.”
“아직 의심하십니까?”
“아니. 날 의심하던 참이야. 왜 미리 알아보지 못했을까?”
사실 뭐.
이제는 달라진 도윤에 대해 의문을 품기도 어렵다.
지금은 놀라워하기도 바쁠 시간이니까.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지.”
톡, 톡.
책상을 두드리는 동민의 손가락.
이래서야.
궁금해진다.
도대체, 어디까지 성장할까.
* * *
기쁜 소식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최 배우님! 조만간 제가 연락드려서 거하게 한잔 쏘겠습니다!
바로 <맛대결>이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됐다는 소식.
-최 배우님 아니었으면 이만한 화제성 끌어내기 힘들었을 겁니다. 너무 감사드립니다. 정말, 제 은인이십니다.
“PD님이 편집을 잘하셨던데요.”
-어디 공구 좋다고 좋은 물건이 뚝딱 만들어집니까? 이게 다 재료가 좋아서 그렇죠. 하하하. 최 배우님은 재료로 치면…… 초초초 S급?
나쁘지 않은 비유다.
‘정규 편성이라니.’
듣기로는 시청률도 나름 잘 나왔고, 상당한 화제를 낳은 덕에 방송사에서도 좋게 본 모양이다.
도윤 덕에 미래가 또 바뀐 셈.
-조만간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제가 기깔나는 곳에서 고급으로다가…….
“기대하겠습니다.”
그렇게 기분 좋게 전화를 마무리한 뒤.
도윤은 다시 대본을 넘기기 시작했다.
사락, 사락.
어떤 대본을 고를지 고민이다.
현재 이엔 엔터 사무실에 온 대본은 무려 수십 개가 넘는다.
현재 떠오르는 배우.
최도윤을 위한 대본들.
예전에는 대본 수십 개가 들어오기는커녕 몇 개 정도에 그쳤고, 그마저도 찾아가 봐야 이미 캐스팅이 끝났다는 말을 듣기 일쑤였는데-
‘새삼 참.’
1년 사이 참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그리고 도윤은 그 모든 대본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읽고 있었다.
회귀했기에 이미 거의 모든 내용을 아는 것들이지만, 이렇게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래서 이 드라마가 폭삭 무너졌구나. 음, 이건 흥행할 수밖에 없었고.’
바로 대본 분석.
미래의 기억을 토대로 이 대본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 왜 흥행했고, 왜 부진했는지 따져보고 분석한다.
이미 아는 내용이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으니까.
이런 와중에 고민이 고개를 들었다.
뭘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혀서.
마음에 드는 대본은 많았지만, 이거다 싶은 대본은 없었다.
회귀 전에는 무슨 배역이든 그냥 들어만 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사람 참 간사해.’
하지만 신중해서 나쁠 건 없다.
어쩌면, 더 좋은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고.
일단 도윤은 드라마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운이 좋으면 영화 개봉 시기와 드라마 방영 시기가 겹칠 테고, 그렇게 되면 양쪽에서 시너지 효과가 날 수 있으니까.
어떤 배우가 예전에 찍어둔 영화로 인기를 끌어 영화 흥행에 도움이 되거나, 반대의 경우는 이 바닥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
소속사에서는 아예 그걸 노리고 작품을 투입시키는 경우도 왕왕 있고 말이다.
‘참, 열심히 하셔.’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성호는 가급적 도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업무를 처리했다.
지금 성호가 처리하는 건 이엔 엔터 소속사로 온 팬들의 선물을 확인하는 것.
혹시라도 배우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는 물건이 있기에 미리미리 확인하는 것이다.
마치 기미상궁처럼.
‘그렇다고 설마 독 든 선물 보내는 팬은 없겠지.’
도윤이 첫 담당 연예인이었기에 한 번도 겪어보진 못했지만, 촬영장에서 다른 매니저들과 시간을 보낼 때마다 들었던 사례들을 보자 기분이 섬뜩해졌다.
그런 가운데.
“혀, 형. 이것 좀 보세요.”
“뭔데?”
“어느 팬분이…… 칼을 보내셨어요.”
“칼?”
기겁하는 성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 도윤.
슬쩍 보니 택배 상자에 ‘안에 칼이 들어 있으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손수 쓴 문구가 적혀 있었다.
“뜯어봐.”
“혹시 살인예고 아닐까요.”
“살인예고면 칼이 아니라 다른 걸 보내겠지.”
“다, 다른 거요?”
“그래. 좀 더 무서운 거. 예를 들면…… 피 묻은 편지?”
성호는 도윤의 표정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이 상자보다 형이 더 무서워졌어요.”
“평소에도 좀 무서워해 봐라.”
이내 표정을 푼 도윤이었지만, 방금 성호가 본 도윤의 표정은 정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무서웠었다.
지이익.
그사이 도윤은 손수 상자를 뜯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리고 드러난 건…….
“진짜 칼이네?”
칼이었다.
그러니까.
요리에 쓰이는 칼.
“허.”
그리고 도윤은 단박에 칼을 알아봤다.
엄청나게 비싼 칼은 아니지만, 튼튼하고 오래도록 쓸 수 있는 식칼로 유명한 브랜드.
유명 셰프들도 자주 사용하는 브랜드이기도 했다.
심지어 한 개가 아니라 총 여덟 개가 종류별로 담긴 세트였다.
“제가 봐도 비싸 보이는데요?”
“응. 엄청 비싼 거야.”
“진짜요?”
“다 합치면 100만 원도 넘을걸?”
슬슬 도윤도 궁금해졌다.
이걸 도대체 누가 보낸 건지.
그러다 식칼 세트 옆에 담긴 편지를 확인한 도윤.
“강 셰프님이 보내셨네.”
“강 셰프님이요?”
“응.”
-최도윤 배우님, 덕분에 제가 고정 일자리를 얻었네요.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마, 이번 <맛대결>이 고정 프로그램이 되면서 고정 패널로 합류하게 된 민혁이 보낸 선물.
“강 셰프님 진짜 감동하셨나 보네요. 이런 걸 다 보내시고. 하긴, 형 덕에 그게 고정이 됐으니까. 크으, 그야말로 킹도윤!”
“그건 또 무슨 별명이냐.”
“그냥 제가 지은 건데요.”
아무튼 뭐.
‘이래서야 거절하기도 힘들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셰프가 보내준 칼이다.
달리 거절하기엔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선물을 받은 도윤이 지금 굉장히 기쁜 심정이었기에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았고.
마냥 사양하는 것도 예의는 아닌 셈.
‘잘 쓰겠습니다, 셰프님.’
아무래도 이제부터는 이 칼이 아까워서라도 시간을 내 요리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형, 제가 아까 형 표정 보면서 느낀 건데요…….”
그때 문득 성호가 묘한 제안을 던졌다.
“제가 연기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 표정 보면서 딱 하나 느꼈거든요?”
“뭔데.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성호는 잠시 고민하다 진지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형, 악역 한번 해보시는 건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