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많이 배우고 있다
촬영이 항상 근사하게 꾸민 스튜디오에서만 이뤄지는 건 아니다.
촬영장은 항상 고되고 피곤하다는 게 괜히 있는 말이 아니듯, 각본에 따라 지방으로 내려가 허허벌판에서 추위와 더위를 견뎌내며 찍는 일도 잦다.
전남의 어느 시골 마을까지 내려온 <기적의 레시피> 팀.
각본으로만 따지면 극 중반에 투입될 장면이지만, 촬영이라는 게 항상 각본 흐름대로만 찍는 게 아니다.
때문에 배우들은 후반부의 격정적인 장면을 먼저 촬영한 뒤 초반부의 잔잔한 장면을 촬영하거나, 다소 극단적인 예시긴 하나 결말부터 촬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좋습니다! 다시 한번 가죠. 박 배우, 약간 감정이 약간 아쉬웠는데 조금 더 세세하게 잡아봅시다.”
“네, 네엡! 죄송합니다!”
여하튼.
<기적의 레시피> 팀이 이런 시골까지 내려온 이유는 박유준이 맡은 배역, ‘김두진’이 전남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어머니를 보면서 요리에 대한 재능을 깨우쳤다는 설정 때문.
“자, 다시 들어갑니다. 레디…… 액션!”
그리고 지금 촬영되는 이 장면은, 홀린 듯 ‘김두진’을 제자로 받아들인 ‘오민석’이 그를 이해하게 되는 중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여기에요. 우리 집.”
“여기서 살았다고?”
“예. 모르겠죠. 엘리트 코스 밟으신 분이니까. 보시다시피 다 쓰러져 가죠. 그래도 예전에는 이 동네에서 제일 잘 나갔대요. 한 60년 전?”
“…….”
당황해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대는 도윤의 연기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유준의 덤덤한 연기.
둘의 모습에 창욱은 늘 그랬듯.
‘좋아. 아주 좋아.’
부쩍 늘어난 웃음을 오늘도 머금으며 이들을 지켜봤고.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저희 엄마가 요리를 좀 하셨거든요. 아저씨들 막 놀러와서 밥 얻어먹고 가고, 유명한 의원님인가 뭔가 하는 사람 와서 사진도 찍고 가고.”
“그게 재능의 이유라고?”
“그럴지도요. 유전이라는 게 진짜 있는지도 모르죠. 그도 아니면, 엄마가 너무 그리워서 그랬을 수도 있고.”
그 말에 묘한 시선으로 ‘김두진’을 바라보는 ‘오민석’.‘
“처음이 그랬거든요. 엄마가 해준 달래된장국이 너무 먹고 싶어서, 그거 다시 먹어보려고 된장 사서 온 게 처음이었어요.”
나름의 사연.
하지만 독백하듯 무심한 어조로 중얼거리는 모습에 ‘오민석’은 조용히 숨을 삼킨다.
마찬가지로.
촬영을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 숨을 삼킨다.
격정적이지도 않았고.
화려한 액션이 펼쳐지는 것도 아니고.
긴박한 상황도 아니었지만-
두 신인 배우가 주고받는 덤덤한 대사의 묵직함이 그들의 마음을 짓눌렀다.
특히.
많은 대사 없이도 복잡미묘한 감정을 드러내는 도윤의 연기는 그야말로…….
“일품이네.”
원로 배우, 광섭이 감탄하게 만들 만큼 훌륭했다.
그 모습에 옆에 있던 다른 배우 한 명이 조금 놀랐다.
연기 보는 눈이 까다롭기로 그지없는 원로 배우가 이런 날것의 반응을 보일 줄이야.
그래서일까.
광섭의 이런 시선을 따라 다른 배우들의 시선도 자연스레, 둘을 향해 고정된다.
정확히는 지금 표정만으로도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신인 배우, 최도윤에게.
이때 떨어지는 오케이 사인.
“좋습니다! 완벽했습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도윤과 유준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서로를 마주하고 웃었다.
“점점 나아지는데?”
“헤헤, 다 선배님한테 배운 거지 말입니다.”
마치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 듯, 도윤의 칭찬에 하릴없이 생글생글 웃기만 하는 유준.
왜 녀석이 잘 됐는지 알 것 같았다.
물론.
사람을 너무 믿는 걸 보면 살짝 불안하기도 하다만…….
“숙소 예약 체크해. 잘못되면 오늘 다 야외에서 꼴딱 밤샌다. <무박 2일> 봤지? 외양간에서 자는 거.”
“도시락 차 언제쯤 온대? 배고파 돌아가시겠네. 전화해서 재촉하는 김에 다음 일정도 빨리 잡아. 하여간 이 새끼들은 계약할 땐 그렇게 굽신대더니…….”
이런 가운데.
<기적의 레시피> 팀은 단순히 촬영을 준비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틀에 걸쳐 진행되는 일정을 위해 숙소를 잡고, 식사를 준비하는 등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었다.
물론 여기서도 배우들은 최우선으로 고려된다.
스태프들이 낡은 모텔에 묵을지언정 배우들은 약간 떨어진 거리에 있어도 조금 더 시설 좋은 숙소에서 잠을 잘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다.
“선배님, 이따 숙소 가시면 술 한잔 어떠십니까?”
“술이 그렇게 좋냐?”
“헤헤, 선배님이랑 마시면 좋지 말입니다. 선배님은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니까요.”
도윤은 그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난 잘 모르겠다.”
“에이, 맞지 말입니다. 제가 말이 좀 많은 편인데, 지금까지 술자리에서 제 이야기 끝까지 들어주신 분은 선배님이 유일하지 말입니다.”
하기야.
유준은 말이 좀 많은 편이다.
저번에 술 한잔하자고 해서 같이했을 때, 솔직히 도윤은 도망갈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뭐 그렇게 할 이야기가 많은지.
무슨 입을 꾹 다물고 지내다 출소한 장기수(長期囚)처럼 말이다.
그때 뒤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이 죽 잘 잘 맞네.”
“선배님.”
“서, 선배님!”
출연 배우들 중 가장 긴 경력을 자랑하는 광섭이었다.
‘오민석’이 일하게 되는 백반집 주인 역할을 맡은 배우이자, 필요하다면 촬영장의 분위기도 잡는 배우.
그러나 평소에는 아주 인자한 모습을 보여주는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유준은 마치 신을 영접한 교인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바짝 움츠렸다.
아직 스크린에 데뷔도 안 한 유준과 45년 동안 수많은 작품에 얼굴을 비춘 광섭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나니까.
하지만 그런 것치곤 광섭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유준을 바라보고 도윤에게 물었다.
“도윤이, 오늘 혹시 시간 괜찮나? 밤에 말이야. 괜찮으면 술이나 한잔하고 싶어서.”
그런 광섭은 도윤에게 술 한잔하자는 제안을 건넸다.
그리고 그때.
“저, 저도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유준은 아주 시기적절하게 나서줬다.
물론 유준과 약속이 있다는 이유로 대선배가 권하는 술을 마다할 리 없지만.
그래도 마음에 걸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물론.
‘얘는 그냥 술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유준이 꼭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무서워 차마 말 한 번 못 걸었던 대선배와 술자리를 한다는 사실에 꽤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광섭은 당연히 흔쾌히 수락했다.
“당연하지. 이거, 늙은이한테 먼저 마셔주자고 하니까 너무 좋은데. 하하하.”
“아닙니다, 선배님. 그럼 이따 숙소에서 한잔하시겠습니까?”
“그러자고. 그럼 도윤이 네 방에서 마실까? 내 방에서 마시면 좀 부담스러울 텐데.”
“저야 좋습니다.”
“그래, 그래. 이따 보자.”
껄껄 웃으며 바로 자리를 떠난 광섭.
유준은 흥분해서 말을 쏟아냈다.
“저희 진짜 광섭 선배님이랑 술 마시는 겁니까?”
“그런 것 같은데.”
“야호!”
참 특이한 녀석이다.
어지간한 신인이면 원로 배우와의 술자리가 불편할 법도 한데…….
이 녀석은 오히려 기뻐하고 있다니.
그러다 유준은 별안간 도윤의 표정을 살피더니 지레 겁을 먹었다.
“물론 선배님이 제일 좋지 말입니다.”
“알도록 노력해 볼게.”
“선배니임!”
물론 도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준을 놀려먹었다.
* * *
원로 배우.
보통 이 단어에 사람들이 떠올리는 생각은 고리타분함과 따분함이다.
옛 촬영 환경에서 왕처럼 군림하던 그때를 잊지 못해 꼰대처럼 군다는 비난을 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그런 원로 배우들이 있기야 하다.
하지만 광섭은 그런 쪽이 아니다.
대접을 바라기보다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노력하는 쪽이라고 해야 할까.
실제로 광섭은 촬영장에 항상 일찍 오는 도윤과 비슷하게 촬영장에 도착하고,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보며 분석하다가 돌아간다.
보다 못한 창욱이 선배님 몸 상한다며 제발 좀 쉬시라고 해도 말을 안 들을 지경이었으니.
“이 감독님? 그 양반이 아직 날 잘 몰라서 그래. 아주 튼튼하다고. 술도 아직 말술로 마시는데 뭘. 마누라가 그만 좀 마시라고 타박해도 안 듣지. 허허허.”
실제로 광섭은 숙소로 이동한 후 바로 가진 술자리에서 벌써 소주 세 병을 비우고도 흐트러짐이 하나도 없었다.
그야말로 괴물이다.
도윤이 페이스를 맞추려 할 때마다 광섭이 제지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선배 앞인 것도 잊고 바닥에 누워 있을지도 몰랐다.
‘성호한테 숙취 해소제라도 부탁할 걸 그랬나.’
하지만 지금은 이미 12시가 넘은 시각.
안 그래도 여긴 시골인데, 깨워서 사 오라고 하기엔 너무 미안한 짓이다.
“그나저나 도윤이, 옥주가 그러던데. 아주 착실한 배우라고.”
“이옥주 선배님을 아십니까?”
“그럼. 우리 때는 그 배우가 그 배우라서 서로 다들 친하게 지냈지. 왜, 예전에는 방송사가 배우들을 전속계약으로 묶어뒀거든. 나랑 옥주는 같은 방송사였고. 어디 보자, 부부 역할로만 거의…… 스무 번도 넘게 나왔지?”
유준이 입을 쩍 벌렸다.
“어, 엄청 대단하시지 말입니다.”
“허허. 그때는 뭐, 하기 싫어도 시키는 대로 해야 했던 시대니까. 그나저나 군대 다녀와서 바로 들어왔나? 특이한 말투네.”
“그, 그게 제가 극단 출신이라…….”
“오. 극단. 어느 극단 출신이야?”
유준은 긴장한 것치고는 더듬거리면서도 꽤 말을 잘 이어갔다.
하긴, 적응이 빠른 녀석이니까.
“……오호. 거기 출신이라고? 거기 좋지. 대신 좀 군기가 있다고 들었어. 그래서 말투가 그렇구나.”
껄껄 웃는 광섭에게 유준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마, 많이 배우겠습니다!”
“그래. 이것저것 다 보고 배울 때지. 신인들은 다 그러니까. 잘하고 있어. 뺀질뺀질한 누구랑 다르게 말이야.”
“감사합니다!”
뺀질뺀질한 누구.
굳이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매번 촬영장에서 NG만 내고 스태프들에게 함부로 구는 어떤 배우가 떠올랐다.
처음에 도윤에게 시비 좀 걸다가 요새 찍소리도 못하는 그 배우 맞다.
광섭은 깍듯한 유준의 모습에 씩 웃더니 별안간 도윤을 바라봤다.
“나도 그래서 요즘 많이 배우려고 하고 있고. 특히, 도윤이 너한테.”
도윤은 조금 당황했다.
“저, 저한테 말씀이십니까?”
“그래. 요즘 많이 배우고 있다, 도윤아.”
광섭은 곧장 소주 한 잔을 단숨에 비우더니 말을 이었다.
“그렇거든. 나이를 먹으면 연기도 비슷해지고, 밑에서는 치고 올라오고. 결국 늙은이 역할밖에 못 맡는 거지.”
“선배님은 아직 훌륭하십니다.”
“그래, 훌륭하게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어. 그래서 미안한 말이지만, 후배들 연기도 훔쳐보고 있지. 하하.”
무게가 느껴지는 그 말.
광섭은 도윤의 잔에 소주를 따라주었다.
“도윤이 너한테는 특히 더. 데뷔 3년 차라고 했지? 극단 출신도 아니라고 했고. 근데 말이야.”
그리고 잔을 들어 올리더니 눈을 빛낸다.
“도윤이 네가 연기하는 걸 보면 무슨 10년 넘게 아등바등 버티다가 온 녀석처럼 절절하고 절박해 보여.”
그 말에 도윤이 흠칫했고.
“뭐라고 해야 할까…… 내일 죽을 녀석이 연기하는 느낌?”
소름이 돋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과연.
원로 배우라서일까.
통찰력이 보통이 아니다.
“너무 취하지 마라, 도윤아. 연기에 잡아먹히지 말라고. 내가 그랬었거든. 연기에 잡아먹혀서, 나와 배역을 분간할 수 없을 때가 있었지. 근데 말이야, 그거 카메라 앞에서는 좋지만 카메라 밖에서는 하등 쓸모도 없어.”
배우.
배우가 되기 위해 인내했던 시간.
광섭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도윤은 그 시간 때문에라도 연기에 온 힘을 쏟아 넣고 배역 그 자체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갈아 넣고 있었으니까.
“배우는 연기를 하는 직업이지, 연기에 매몰되는 직업이 아니야. 내 말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도윤이 너는 언젠가 이해할 수 있을 거다. 그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니까.”
“새겨듣겠습니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게 하나도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단지, 지금 이 말을 해주는 사람이 대배우 광섭이라서가 아니었다.
도윤도 요새 느끼던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연기에 매몰되지 마라.’
도윤은 그 말을 가슴 깊숙한 곳에 새기던 그때.
“하하하! 내가 좀 꼰대 같았지? 역시 나이를 먹으면 다 이렇게 되는구만. 근데 어쩔 수 없더라고. 너 같은 친구들 보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아무튼 주변 사람들도 잘 챙기고. 주변 사람들한테 소홀히 대했다가 무너지는 애들 한둘 본 게 아니야. 오늘 내가 좀 낡은 이야기만 해서 좀 듣기 거북하지?”
그사이 유준을 바라보는 광섭.
“그리고 뭐…… 유준이라고 했지? 너도 잘할 것 같다. 그러니까 잘 배워. 도윤이한테든, 다른 배우들한테든.”
“네, 아, 알겠습니다!”
단순한 칭찬에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모습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야 만다.
“순수하네, 순수해. 허허. 나 신인 때도 그랬는데. 허, 이거 그나저나. 술이 좀 부족하겠는데. 아니다, 그래도 이것만 먹고 일어나야지. 늙은이가 젊은 사람 둘 붙잡고 술 마신 것도 욕먹을 일인데. 안 그래? 허허.”
“무슨 말씀을요. 오늘 같은 자리가 얼마나 저희들에게 얼마나 귀중한지 모를 겁니다.”
“맞습니다! 선배님!”
도윤과 유준은 진심으로 대답했다.
그 모습에 껄껄 웃던 광섭은 이제 곧 술이 떨어진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운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똑똑.
숙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곧 문이 열리며 웬 덩치 한 명이 들어섰다.
성호였다.
그리고 양손에는 묵직한 검은 봉지를 들고 있었다.
“뭐야? 안 잤어?”
도윤이 놀라 묻자 성호는 멋쩍게 웃었다.
“내일 오후 촬영이잖아요. 안녕하세요, 최도윤 배우 담당 매니저 유성호라고 합니다.”
“오, 그 덩치 큰 친구. 인상 좋네.”
광섭이 허허 웃는 사이 성호는 봉지를 슬쩍, 바닥에 내려놓았다.
한눈에 봐도 묵직한 게.
“이야. 냄새 장난 아닌데.”
광섭의 감탄처럼 포장된 음식과 술이 잔뜩 들어 있었다.
“아직 술자리 안 끝나서 다행이네요.”
도윤이 뚜껑을 연 뒤 내용물을 보고 멍해져 물었다.
꼬리찜이었다.
그것도 아직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먹음직스러운 꼬리찜.
“이걸 어디서 사 왔어?”
“읍내에 기가 막힌 꼬리찜이 있다고 해서요. 형 꼬리찜 좋아하시잖아요. 술 드신다고 하셔서 뭐 좀 사러 간 김에 같이 사 왔죠.”
그야말로 기가 막힌 타이밍.
이대로 헤어지기엔 살짝 아쉬웠는데.
성호는 대수롭지 않은 척 말하다 아차 싶어 덧붙였다.
“절대, 절대 꼬리찜만 사러 간 거 아닙니다?”
뻔히 보이는 핑계지만, 그래서 기특했다.
도윤은 그 말에 성호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꼬리찜 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기억을 떠올렸다.
“참, 그리고 혹시 몰라서 술도 사 왔는데…….”
소주와 맥주가 나타나자 광섭이 흐뭇하게 웃었다.
“허허. 이거 좋은 매니저 뒀네.”
“선배님, 부럽지 말입니다.”
광섭은 아까 주변 사람을 잘 챙기라고 말한 것을 상기시키듯, 도윤을 바라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너도 같이 한잔…….”
“에이, 저 자야죠. 내일 촬영 끝나면 바로 장거리 뛰는데요. 민주 누나는 벌써 자요.”
아까는 오후 촬영이라면서.
그리고 그런 놈이 이 야밤에 차 끌고 읍내까지 나가서 이걸 사 오냐.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래. 고맙다. 가서 쉬어.”
“네, 형.”
도윤은 멋쩍은지 결국 그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도윤이 고마워하고 있다는 걸.
“그럼, 좋은 시간 되세요.”
성호가 다시 방을 나서고.
도윤을 바라보던 광섭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주변 사람도 잘 챙겨라.
그 조언까진 필요하지 않았던 듯했다.
‘이미 잘하고 있네.’
잘 챙겨주지 않고서야, 매니저가 저럴 리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