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요리 좀 하나?(2)
도윤은 <기적의 레시피> 오디션에 지원한 직후 <그대 내 품에>를 함께 촬영했던 배우 차정수에게 연락했다.
단순히 차정수가 차기작이 정해지면 알려달라고 했던 것 때문만은 아니다.
회귀 전 봤던 한 예능 프로그램, <아내의 멋>.
차정수는 거기 출연해 멋진 요리를 선보이며, 과거 레스토랑을 운영했지만 기획사 일이 바빠져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간단히 말해-
요리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
그래서 전문 요리사 경력이 있는 정수에게 자신의 요리에 대한 피드백도 받을 겸 연락한 셈.
“그 레스토랑 운영했던 게 거의 5년 전인데, 용케 기억했네?”
“선배님에 대해 많이 검색해 봤거든요.”
“스토커네, 스토커야. 날 너무 잘 알아.”
피식대던 정수가 문득 물었다.
“근데 다른 셰프들도 있었을 텐데. 나는 손 뗀 지 5년이야.”
“기왕이면 선배님한테 부탁드리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요.”
기특한 녀석.
정수가 흐뭇한 웃음을 짓는 사이 도윤은 집을 둘러봤다.
넓다 못해 광활하다는 느낌을 주는 집.
예능에서 봐 알고는 있었는데 눈으로 직접 보니 또 다른 느낌이다.
하긴, 현관문에 다다르기까지 몇 번의 보안을 거칠 만큼 까다로운 집인데 어련할까.
“집 좋지? 와이프가 인테리어 엄청 공들였어.”
“사모님 센스가 느껴지네요. 특히 여기 이 장식이요.”
도윤은 <아내의 멋>에서 정수가 엔티크샵에서 직접 고른 거라며 열심히 자랑했던 것을 기억하고 독특한 장식을 가리켰다.
그러자 정수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감돈다.
“아, 그거? 사실 와이프가 아니라 내가 사 온 거야.”
“정말요? 보는 눈이 대단하신데요.”
“도윤이 넌 역시…… 여기서 내가 손댄 거 그거 딱 하난데 그걸 알아보는구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안 그래도 한번 술이나 한잔할까 물어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연락 줘서 고맙지.”
정수가 씩 웃었다.
“참고로 그때 까여서 좀 벼르고 있었거든. 그래서 말 나온 김에 묻는 건데, 생각 어때?”
도윤은 정수가 자신의 회사 JS 엔터에 오라며 제안했던 일을 떠올렸다.
“죄송합니다. 아직은요.”
“그럴 줄 알았어. 나중에 꼭 꼬실 테니까 각오하라고.”
여하튼 정수는 도윤이 꽤 마음에 든 듯했다.
처음 소문이야 안 좋게 돌았다지만, 짧은 사이 급상승한 연기력과 확 달라진 태도 덕분.
거기다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패기와-
이렇게 조심스럽게 도움을 요청한 사실은 정수의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참 탐나는데, 어지간해서는 떠날 것 같진 않고…….’
어쩔 수 있나.
회사로 못 데려오면, 나중에 같이 연기라도 하는 수밖에.
“참. 차기작 <기적의 레시피> 대본 나도 읽어봤어. 좋던데. 탐나더라.”
순간 그 말에 도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순진한 모습에 정수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야, 농담. 후배 밥그릇 빼앗을 생각 없어. 그리고 난 한동안 쉴 예정이고.”
“쉬신다구요?”
“그래. 한 반년 정도? 와이프가 좀 쉬라고 해서. 안 그래도 몇 년 사이에 바빠서 같이 뭘 해본 적이 없거든.”
과연.
소문난 애처가답다.
“그래도 넌 결혼하지 마라. 농담이 아니야. 할 거면 젊음을 최대한 즐겨.”
자세히 보니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아무튼. 도윤이 네가 전화해서 <기적의 레시피> 한다고 했을 때는 좀 놀라긴 했지. 그 감독, 좀 까다로운 양반이 아니거든. 같이 작품해 본 건 아니지만,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아, 실력은 좋대. 어디까지나 까다로운 게 문제지.”
이창욱이 까다롭다는 거야 도윤도 잘 아는 사실.
“뭐라더라, 듣기로는 이번에 자기 마음에 드는 주연 없으면 영화를 엎겠다는 선언까지 했다던데. 한편으로는 대단해. 그렇게 따지는 걸 보면.”
이제야 추측된다.
회귀 전.
<기적의 레시피>가 결국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이유 말이다.
세상에, 그런 수준의 까다로움이라니.
“그 감독 실력이랑 대본이 좋아서 망정이지, 다른 감독 같았으면 그런 말 하지도 못했을걸. 제작사 눈치 보느라. 근데 또 모른다. 도윤이 네가 그 양반 마음을 흔들지도 모르고.”
“그래서 선배님을 찾아왔습니다.”
“이거 봐. 이렇게 말하는 애가 별로 없어요. 아무튼 그래서, 오늘 요리를 좀 봐달라고?”
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해 온 요리도구 가방을 들어 보였다.
“준비 철저하네. 우리 집에도 다 있는데.”
“익숙한 도구가 좋아서요.”
정수는 도윤이 도구들을 늘어놓고 재료를 꺼내자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한때 배우 생활을 접고 진지하게 요리를 해볼까 고민했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그다.
때문에 오늘 도윤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이 자리는, 그런 실력의 정수가 도윤의 실력을 평가하는 자리였다.
사실 무슨 요리 오디션도 아니고, 단지 요리사 배역에 지원하는 거라 과한 게 아닐까 싶지만…….
‘진짜 요리사급을 원할 양반이지.’
이미 그런 면으로는 꽤 유명한 이창욱 감독의 소문에 정수는 이게 전혀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것보다.
도윤의 이런 자세가 마음에 들기도 했고 말이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이렇게 자기 요리한다는 사실까지 용케 알아내서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는 후배가 몇이나 되겠는가.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든단 말이지.’
아무래도 꼬시는 걸 포기하긴 힘들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도윤은 세팅을 마치고 손까지 씻은 뒤 재료 앞에 섰다.
“와우.”
그리고 도윤이 준비한 거대한 통 오겹살을 보자 정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나 나올지 기대되는데.”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오늘 준비한 요리는 통삼겹 오븐구이.
영국의 유명 요리사의 시그니처 요리 중 하나.
머지않은 미래에 한국의 요리 유튜버들이 앞다퉈 영상으로 찍으며 유명해지는 요리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 종류도 꽤 다양하지만-
도윤은 오늘 정수의 집에 오기 전 봐 뒀던, 오리지널 레시피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요리를 선보이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전문적으로 요리를 배운 정수에게 평가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때문에 도윤은 시작부터 날카로운 집중력으로 칼을 놀리기 시작했다.
사악- 사악-
미리 해동해두고 핏물을 씻어낸 거대 오겹살의 지방 위를 도윤의 칼이 빠르게 오가고.
순식간에 바둑판 모양의 칼집이 만들어진다.
서걱, 서걱.
그리고 희고 부드러운 지방 위로 그라인더에 갈린 소금이 눈처럼 내려앉아 스며들고, 도윤은 그걸 냉장고에 넣었다.
냉장고의 사막 같은 건조한 환경을 이용해 최대한 수분을 빼기 위해서다.
그리고 아직 한국에서는 생소한 채소인 펜넬(Fennel)을 썰고 마늘과 팔각, 말린 월계수 잎 등 각종 향신료를 썰어둔 펜넬과 순식간에 볶아낸다.
‘좋은데.’
손목 스냅, 칼질의 속도, 신속한 재료 투입.
어느 것 하나 지적할 만한 부분이 없었다.
다만, 디테일이나 섬세함은 약간 부족하다.
그러나 그걸 지적하기엔 좀, 아니 많이 민망하다.
요리를 책과 유튜브로 배웠다는 도윤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건 독학만으로 익혔다기엔 너무도 뛰어난 실력.
‘얘가 스물다섯이었나? 그럼 무슨 요리를 고등학생 때부터 한 건가?’
치이이익-!
의문이 솟는 사이 향신료와 뒤섞여 볶이는 펜넬 향이 주방을 가득 메웠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향.
그러나 코를 찌르거나 기분이 나빠지는 향은 아니다.
도윤은 여기에 냉장고에서 다시 꺼낸 통 오겹살을 팬에 시어링(Searing)하기 시작했다.
속까지 완전히 익히는 게 아니라 겉면만 보기 좋게 익힌다고 해야 할까.
치이이이익…….
곧장 지금까지 나던 묘한 향이 고소한 고기 굽는 냄새와 뒤섞여 침샘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겉면 시어링이 보기 좋게 끝나자 도윤은 화이트 와인 한 병을 모조리 쏟아부어 팬에 오겹살과 펜넬을 잠기게 만든 뒤.
“오븐 들어가겠습니다.”
언제 건드린 건지 예열을 마친 오븐을 열어 그대로 팬째로 요리를 투입, 재빠른 손놀림으로 시간과 온도를 맞췄다.
그리고 다 됐다는 듯 일어서는 도윤.
“끝입니다. 이제 2시간 30분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정수는 진심으로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밥을 조금이라도 미리 먹어두는 건데.
코를 자극하는 잔향(殘香)이 위장을 건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도윤이 물었다.
“어떠셨어요?”
그리고 정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맛을 보기야 하겠지만 어차피 관객들은 맛을 못 보니까. 그런 의미에서…… 감독님은 좋아할 것 같은데? 사실, 칼질만 봐도 합격일 것 같아.”
그거면 충분하다.
“대신, 그전에 좀 디테일 좀 잡고 가자. 솔직히 내가 이렇게 알려주는 것도 좀 민망해. 네가 워낙 잘해서. 와, 이렇게 잘할 줄은 몰랐는데. 어디서 배웠어?”
“그냥, 여기저기서요. 그리고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선배님께 연락드렸던 거구요.”
여전한 겸손에 흐뭇한 미소를 지은 정수가 흔쾌히 입을 열었다.
“좋아. 칼 다시 잡아 봐. 그래. 아까 펜넬 썰 때 봤는데, 양파도 비슷하거든? 양파가 좀 더 무르긴 하지만 마지막에는 사선으로 톡, 톡. 그래. 그렇게. 잘하네.”
안 그래도 좋게 보던 후배의 또 다른 장점을 발견한 덕일까.
어지간해서는 이렇게 후배를 집에 초대하는 일이 없는 정수의 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내려앉아 있었다.
* * *
맛은 훌륭했다.
오븐에 굽는 동안 수분이 날아가 바삭해진 오겹살 껍질은 칼이 지나간 부분이 보기 좋게 벌어지며 크리스피한 식감이 극대화되었다.
적절하게 투입한 향신료가 이루 말할 수 없는 향을 선사하고.
도윤이 고기만 건져내고 팬에 남은 것들을 제대로 볶아내 만든 그레이비(Gravy) 소스를 곁들이자 환상적인 저녁이 되었다.
“나보다 네가 낫다.”
“과찬이십니다.”
“아냐. 이런 건 쉽게 시도하기 힘든데. 진짜 맛있어.”
와작!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입 또 베어 물자 입안에 선사되는 황홀한 맛.
바삭한 식감 아래 부드러운 속살이 공존하는 이건 정말-
최고였다.
“너, 레스토랑 해라. 나랑 동업하자.”
“하하하.”
정수는 요리를 먹으며 쉴 새 없이 극찬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아까 요리를 완성시키고 찍은 사진을 누군가에게 전송했다.
“사모님한테 보내세요?”
“응. 아, 절대 보고하는 건 아니고. 그냥. 뭐 먹는지 알려주는 정도?”
그게 보고가 아닐까.
“큼, 크흠. 아무튼 맛 좋고, 실력도 좋아. 이만하면 카메라로 찍어도 오히려 대역 쓴 거 아니냐고 의심할걸. 뭐, 감독님 특성상 보나 마나 풀샷(Full-shot) 잡아서 찍을 테니 그런 오해는 없겠지만.”
“감사합니다. 오늘 많이 배웠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맛있는 것도 얻어 먹었는데 뭘. 이따 와이프 데리러 가야 해서 여기에 술 한잔 못 한 게 한이라면 한이다. 크으.”
역시, 애처가가 분명했다.
“그리고 고마우면 나중에, 알지?”
“아직은요. 죄송합니다.”
“벌써 몇 번을 거절당한 거야.”
투덜거리고 있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은 듯했다.
“아무튼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자. 너만 괜찮으면 내 친구들 소개시켜 줄게. 너 이야기 하니까 궁금해하는 애들 많아.”
도윤은 그 말에 속으로 씩 웃었다.
다른 배우들을 소개시켜 준다면…….
‘분명 그 사교 모임이겠지.’
배우, 가수, 예능인, 재벌가 자녀, 법조인 등.
차정수 특유의 사교성을 중심으로 결성된, 이 바닥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그 모임.
모임 회원의 추천이 있어야만 가입할 수 있는 폐쇄성.
소속된 사람들의 엄청난 명성과 재력.
가입한 그 순간부터 성공이 보장된다고 할 만큼 끈끈한 유대감.
정수가 지금 말한 이 ‘소개’는 그 모임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도윤이 알기로 서태주가 이 모임에 들어가고 싶어서 아주 기를 썼었다고 들었는데…….
‘대신 내가 가주마.’
도윤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선배님은 무슨, 오케이. 좋아. 앞으로 형이라 불러.”
“예, 형님.”
“어, 좀 빠르다? 자식.”
도윤의 재빠른 대답에 정수는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무튼, 이만하면 오디션 통과는 하겠네.”
“그렇게 보이셨다니 다행이네요.”
“단, 다른 문제만 없으면.”
다른 문제?
자신이 모르는 이창욱 감독에 대한 무언가가 또 있을까?
도윤이 기억을 더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였다.
“네가 요리는 잘하는데 연기를 못한다면 떨어지겠지. 거긴 요리 경연장이 아니라 오디션장이니까.”
아.
도윤은 속으로 씩 웃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