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도라떼
긴 일정은 끝을 보였다.
총 16부작의 <알고 있는가>.
어쩌면 후반기 최고의 드라마가 될지도 모르는 <알.있>은 케이블에서 도달하기 힘든 시청률을 기록했고.
방영되는 날마다 큰 화제를 불렀다.
때문에 xvN에서 연장까지 논의했지만.
너무 늦은 감도 있었고, 극본을 담당한 아름이 가급적 깔끔하게 끝내길 원했다.
때문에 그대로 16부 종영이 확정된 <알.있>에 팬들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ㅠㅠㅠㅠㅠ알있 못잃어 ㅠㅠㅠㅠ
-이제 무슨 낙으로 자냐...
-이거 보고 다음날에 회사 출근하면 기분 참 묘했는데... 끝나면 참 아쉬울 듯
-PTSD 오는데 계속 보게 되는 드라마...너란 드라마... 나쁜 드라마...
-우리 강대리 너무 불쌍해 ㅠㅠㅠㅠㅠ 진짜 회사 쫓겨나나???
-신입 잘못 덮고 자기가 징계받은것도 불쌍한데 부장 꼰대쉑 커버도 안 쳐줌 ㅅㅂ
-사실상 좋소기업 실사판
-누가 우리 회사에 CCTV 달았냐? 이거 사생활치매 아닌가요?
현 시청률 12%.
‘실제 회사에 CCTV 달아놓은 줄 알았다’라는 극찬이 보여주듯, <알.있>은 어느새 드라마 역사에 한 획을 긋고 있었고.
[팬들, <알.있> 16부 종영 예정 소식에 아쉬움 표해…… “역대급 오피스 드라마였다”]
[‘케이블 기적’ <알.있>, 출연배우 중 최고 수혜자로 최도윤 꼽혀]
[<알.있>, 주연배우의 연기력만 더 좋았다면 완벽했다]
드라마의 인기 상승과 함께 출연 배우들은 엄청난 관심 속에 놓였다.
생기발랄한 신입사원 역할을 잘 소화한 해영.
매번 밝은 얼굴 뒤에 어두움을 감춘 연기를 훌륭히 해낸 선우.
자주는 아니더라도 출연할 때마다 코믹 연기로 눈길을 끈 석준.
그리고-
이른바 한국의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강 대리 앓이’를 일으키며 블루칩으로 떠오른 도윤은…….
“이엔 쪽으로 차기작 대본 보냈지?”
“꼭 잡자고. 비주얼도 비주얼인데, 연기력이 대박이야. 무슨 역할이든 꼭 합류시키자고!”
“이번엔 우리가 잡는다. 가능한 연락 다 동원해서 접촉해 봐!”
방송 관계자들의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덩달아 이엔 엔터는 그야말로 홍수처럼 쏟아지는 각종 제안에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상황.
하지만 도윤은 그 많은 제안들 중.
딱, 한 개의 광고만 받아들였다.
“우와. 진짜 그대로 재현했네. 제대로다.”
“처음엔 엄청 달았는데, 먹다 보니까 괜찮아. 형님, 이거 형님이 레시피 만든 거 맞죠?”
도윤은 연신 감탄을 터뜨리며 ‘도라떼(DoLatte)’를 마시는 둘의 모습을 바라봤다.
참, 인생은 알 수 없는 거구나.
‘그런 게 진짜 상품화가 될 줄이야.’
도윤에게 광고를 제안한 ‘커피앤탑’이라는 신생 브랜드는 이런 조건을 제시했다.
최근 유행하는 ‘최도윤 라떼’를 정식 상품화해서 팔아보자는 것.
그리고 그 수익의 일부는 난치병 환자들에게 기부하는 형식으로 적당한 명분도 제시해 줬다.
여기에.
도윤이 시청률 공약으로 내걸었던 ‘커피 1만 잔’ 공약에 들어갈 커피 1만 잔을 지원하겠다고 나서기까지.
꽤 큰 돈이지만, 신생 브랜드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이미지를 알리기엔 더없이 좋은 기회.
쉽게 말해.
공약을 내건 도윤과 성공적인 시장 진출을 원한 커피앤탑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뭐, 이럴 줄은 알았지만.’
사실 도윤은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몇 개의 광고, 특히 커피 관련 광고가 들어올 거라 이미 예상한 바 있었다.
아니, 예상한 게 아니라 회귀 전에도 도윤에겐 커피 광고가 들어왔었다.
그놈의 사건이 터지면서 계약을 해지당하고 위약금을 물어준 엔딩이라 문제였지.
아무튼.
언뜻 보면 출연료 다 날리게 생긴 말도 안 되는 공약을 내건 데엔 이런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도윤은 다른 모든 제안들은 일단 보류해도 커피앤탑의 전속모델 제안은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다.
“오빠, 이거 판매량 장난 아니래요. 다들 줄 서서 먹는대. 그래서 나도 새벽에 가서 받아온 거지롱.”
“근데 그건 뭐냐?”
“아, 이거요? 도윤 오빠 포토카드.”
해영이 보여준 건 커피앤탑에서 ‘도라떼’를 구매하면 증정해 주는 도윤의 포토카드였다.
“여기 사인 좀 해주세요.”
도윤이 피식거리며 포토카드에 사인하자 해영은 기쁜 표정으로 히히 웃었다.
“사인도 받아놨으니까 소중히 간직해야지. 히히.”
“형님 진짜 부럽다. 아, 나도 커피광고 찍고 싶다!”
“선우 오빠는 건강식품 광고 들어왔다면서? 그거 드라마에 PPL 넣기 좋다던데.”
“그러면 뭐 하냐. 소속사에서 너무 세게 부르는 바람에 광고 다 엎어졌는데. 내가 억울해서 진짜…….”
솔직히 보기 좀 민망하다.
어감도 그렇고.
도라떼가 뭐야, 도라떼가.
“도라떼, 도라떼.”
그때 들려오는 성호의 흥얼거림.
도윤은 고개를 돌려 쏘아봤다.
“발음 주의해라.”
“도라떼, 돌아떼, 도랐…… 아, 아!”
“역시 넌 반항해야 어울려. 계속해.”
“사, 살려주세요! 형! 아, 아! 어깨! 아파요!”
그리고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해영와 선우는 도윤이 성호를 붙잡아도 자기 할 일에만 열중한다.
아무튼 도윤의 까다로운 라떼 취향이 생각지도 못하게 인기를 끈 아이러니한 상황.
사실 ‘도라떼’의 레시피는 이미 인터넷에 잔뜩 공개되어 있고, 따로 그 레시피에 특허가 적용되는 게 아니라 이미 많은 카페에서 판매하고 있다지만…….
사람들은 원래 브랜드 가치에 끌리는 법.
그런 의미에서 도윤과 전속모델 계약을 맺고 성공적으로 런칭한 커피앤탑에 사람들이 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알.있>의 대성공이 아니었다면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긴 하지만.
“어? 도윤 오빠 별명 생겼다.”
“뭔데?”
“도언자.”
와중에 해영은 휴대폰에 댓글창을 띄워 도윤에게 보여주었다.
-도언자 ㄷㄷ해
-ㅋㅋㅋㅋ 꽉 잡아라 시청률 내려간드아
-<악마의 세계>는 진짜 ㅋㅋㅋㅋ 갈수록 개막장이네. 차라리 그냥 막장을 찍지 막장 아닌 척해서 더 망한 듯
-전개 진짜 왜 이러냐? 한유나는 왜 9화에서 죽음? 작가랑 싸웠나?
-주연도 답 없음. 나 저 바닥 좀 아는데 요새 쪽대본으로 찍는다는 말도 있더라. 그러니 배우들 연기가 엉망이지.
바로 현재 추락을 거듭하는 <악마의 세계>에 대한 반응 댓글이었다.
[‘악세계’, 끝없는 추락…… 스타 작가의 굴욕]
[‘악세계’, PD와 작가 불화설 솔솔…… 관계자, “확인해 줄 수 없다”]
[‘악세계’, 온갖 악재 속 시청률 5%대로 추락…… 실패로 끝난 ‘유‧황’ 조합]
간단히 말해.
처음만 해도 욕을 먹고 의구심을 낳았던 도윤의 판단.
하지만 이제 <악마의 세계>를 거르고 <알고 있는가>를 선택한 그 판단이 재평가되고 있는 셈.
그나저나 도언자라니.
생각지도 못하게 선구안이 좋은 배우가 된 셈이기도 하다.
“아, 여기들 계셨네요. 곧 스탠바이 들어갈게요. 씬 넘버 48, 준비해 주세요.”
“네에!”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아직 드라마는 끝나지 않았다.
“가죠, 형님. 열심히 구경하겠습니다.”
“그래.”
도윤은 선우의 말에 피식거린 뒤 곧장 극중의 ‘강 대리’가 품은 감정을 서서히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강 대리’는 이제 퇴사를 고민한다.
처음에는 그저 묵묵히, 싸늘하고, 까칠하게 주어진 일만 하던 흔한 직장인에 불과하던 ‘강 대리’.
그의 심리가 마침내 흔들림을 멈추고 자리를 잡는 씬.
그리고 그 계기를 제공한 ‘민재’와 회사 옥상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씬이 시작된다.
석양이 지는 가운데.
‘강 대리’가 입을 열었다.
“신민재 씨. 당신은 이 회사를 나간다면 뭘 하고 싶습니까?”
여전히 까칠하고 무뚝뚝한 목소리지만 초반 ‘강 대리’가 ‘신민재’를 대할 때와 비교하면 천양지차나 다름없는 뉘앙스.
“…….”
침묵하는 ‘신민재’.
그리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 대리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뚝, 부러뜨리며 선언하듯 말한다.
“나는 이 회사를 나갈 겁니다.”
처음으로-
‘신민재’ 앞에서 미소를 띠면서.
‘완벽해.’
지켜보던 제운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서서히 변화하는 캐릭터성을 확정 짓는 중요한 씬을…….
도윤은 조금의 망설임도, 막힘도 없이 단 한 번에 해낸 것이다.
“당신은 앞으로도 잘할 겁니다. 뭐, 조금 실수가 많고 당황도 자주 하지만, 처음엔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여기에 화룡점정.
지금까지 ‘신민재’에겐 하지 않았던 따뜻한 말들이 ‘강 대리’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신민재’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떤다.
“나는 버티지 못해 나가는 겁니다. 서류상으로는 자진퇴사지만요. 그러니까 슬퍼할 것도, 아쉬워할 것도 없습니다. 신민재 씨.”
그리고 현실을 일깨워주는 대사.
알고 있는가.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이 세상을.
알고 있는가.
부조리로 가득한 이 세상을.
‘강 대리’는 이 회사로 오기 전, 이전의 회사에서 부조리에 맞서다 눈총을 받고 퇴사하게 되며 현실과 타협하게 된 인물.
그러면서 더없이 냉소적이고, 더없이 까칠하고, 더없이 냉철한 사람이 되었지만.
신입사원, ‘신민재’를 마주하면서 자신의 잃었던 마음가짐과 꿈을 되찾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바로-
‘강 대리’가 과거에 맞서고 다시 자신의 길을 향해 나아가겠다고 결심을 내리는 장면.
때문에 이제.
“아니면, 당신도 하고 싶은 걸 찾으세요. 퇴사하라는 말이 아니라, 뭘 하고 싶었는지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하이라이트다.
‘여기서 클로즈업!’
마침내.
카메라가 클로즈업한 ‘강 대리’의 얼굴을 비추는 것으로 씬이 마무리된다.
“컷-! 좋습니다! 오케이! 아, 너무 완벽했어요. 좋았습니다! 최 배우!”
제운의 힘찬 박수와 함께 터져 나오는 환호.
모두가 감탄하고 있었다.
서서히 변화한 끝에 마침내 자리를 찾은 ‘강 대리’의 감정과 그 ‘강 대리’를 지금껏 훌륭하게 소화해낸 도윤의 연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도윤에게 의구심을 보냈던 사람들.
그러니까, 도윤이 단순히 비주얼로 데뷔했고 운이 좋아 여기까지 왔다고 여기던 소수의 사람들조차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최도윤이라는 배우의 실력을.
“저 녀석…….”
그리고 항상 옆에서 이 연기를 지켜보던, ‘강 대리’의 파트너이자 가장 많이 호흡을 맞췄던 ‘진 과장’역의 태규는.
“크게 되겠네.”
단 한 줄로 도윤에 대한 평가를 압축시켰다.
아마, 여기 있는 그 누구라도 이 말을 들었다면 동의했을 것이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면.
“저거 또 컷사인 나니까 바로 나가네. 촬영 없나?”
“뭐 하러 신경을 써. 이제 곧 촬영도 쫑인데.”
서태주.
두 건의 미친 짓을 연달아 터뜨리며 제운의 눈 밖에 난 주연 배우.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촬영 중반을 이미 넘어선 시점이라 이 지경이지, 촬영 초반이었다면 아마 가차 없이 하차당했을 거라고.
그만큼 태주가 저지른 짓은 이 바닥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던 셈.
때문에 태주는 사과한 이후 별다른 사건을 일으키지 않으며, PD의 눈 밖에 난 채 조용히 지내고 있었지만…….
부르르르.
지금 이 순간,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즐겁게 웃고 떠드는 도윤을 노려보는 그 눈빛만큼은 처절하게 떨리고 있었다.
물론.
도윤은 이제 태주 쪽으론 시선조차 주지 않았고.
이제 더 이상.
이 촬영장에서 태주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연 배우임에도 그 누구의 신뢰도 얻지 못한 배우, 서태주.
‘X발…….’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난리를 칠 명분도, 힘도 없었다.
두 번의 사건.
드라마의 인기로 더 이상 태주의 기획사에 쩔쩔매지 않아도 될 만큼 늘어난 제작비.
그래서 태주는 어쩌면, 이 드라마가 그냥 아주 망하지 않을 정도의 시청률만 나오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자신의 영향력이 유지될 테니까.
하지만-
<알.있>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성적을 거두며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고.
이 드라마를 통해 입지를 굳히고 날아오른 건 태주가 아니라…….
신인 배우.
괴물 신인.
최도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