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태주야
여포.
용맹하지만,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연의의 무장 중 한 명.
태주가 딱 그 모습이다.
“물론, 여포처럼 실력이 좋은 것도 아닌 것 같고.”
싸늘하게 얼어붙는 분위기.
이번 촬영 내내 단 한 번도 저렇게 크게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던 제운이, 드디어 폭발한 것이다.
“말 잘했다. 잘 찍어달라고? 주연 주제에 씬당 NG만 몇 번을 내는 새끼가 뭐? 잘 좀 찍으라고?”
“PD님!”
조연출이 다급히 그를 말렸지만, 제운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 그 염병할 제작비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참았는데, 이젠 못 해먹겠네! 오늘 촬영 접어!”
그리고 떨어진 충격의 선언.
이런 와중에 태주는.
“지금 이 일, 회사에 제가 분명히 이야기할 겁니다. 그전에 사과하세요.”
놀라운 일이다.
촬영장에서 무려 PD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주연 배우가 있다?
그것도, 짬 좀 되는 원로 배우도 아니고 이제 연기 경력 3년이 넘어가는 아이돌 출신 배우가?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가 탄식을 흘리며 직감했다.
저 녀석은 끝이라고.
‘드라마 성공하면 백 PD님도 다시 제자리 찾아가실 텐데…… 어쩌려고 저런 미친 짓을 하는 거야?’
‘이 바닥 소문 빠른 거 모르나.’
‘소속사 믿고 나대는 것도 한두 번이지.’
태주의 소속사, 숨 엔터는 분명 이 업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 선까지지, 저렇게 앞뒤 안 가리는 배우는 답이 안 나온다.
제아무리 아이돌 겸 배우라는 화제성을 내세운다고 할지라도, 업계 내에서 소문이 한번 퍼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제운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과 함께 물었다.
“사과?”
지금 나더러 사과를 하라 이거지.
그리고 태주는 여전히 PD를 바라보며 뻣뻣하게 목을 세운 채.
“예. 사과요.”
제운에게 답했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자신을 향한 시선들이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
‘대단한데.’
그리고 도윤은 태주의 멍청한 행동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저렇게 간단히 자멸하는 녀석이라니.
그때 조금만 덜 오만하고, 조금만 더 영리했다면 진작 저런 꼴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주야!”
이런 와중에 뒤늦게 촬영장으로 찾아온 용석은 태주가 시킨 커피도 내팽개치고 다급히 달려와 둘 사이를 막아섰다.
“지금 뭐 하는 거야!”
“형. 비켜. 나 사과 아직 못 받았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PD님이 사과를 왜…….”
“날 모욕했다고! 주연인 나를!”
용석은 그만 멍해졌다.
‘모욕?’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PD가 태주를 모욕할 만한 일이 뭔지.
그리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이러면 안 돼. 태주야. 진정하고…… PD님, 일단 제가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촬영장의 왕이자 지휘자인 PD에게 이래서는 안 된다.
“형, 지금 이쪽 편 드는 거야?”
그리고 용석의 읍소에도 기어이 태주가 상황을 악화시키던 그때였다.
“미친 새낄세.”
모여 있던 배우들 사이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그리고 앞에 나선 사람은-
“너 뭐 하는 새끼냐?”
‘진 과장’ 역의 신태규였다.
“지금 새끼라고 했습니까, 선배?”
“그래, 이 새끼야. 그리고 뒤에 ‘님’ 자 붙여. 선배님이라고.”
전혀 흔들림 없이 받아치는 태규의 모습에 태주의 눈동자가 부르르 떨렸다.
그사이 태규의 말이 속사포처럼 이어졌다.
“내가 너 같은 새끼들 많이 봤지. 소속사 믿고 뻗대는 새끼들. 누구는 단역 하나 따려고 그 개고생을 해대는데 넌 뭐냐? 소속사빨로 실력도 없는 주제에 주연 차지했으면 열심히라도 해야지. 근데 뭐? 잘 좀 찍어? 사과를 요구해?”
태규.
후배가 버릇없이 구는 걸 절대 참지 못하는 연예계의 유명한 군기반장.
그나마 다른 사람들이 있어 언어를 순화해서 망정이지, 아마 단둘이었다면 태주는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언어 폭력에 눈물을 머금었을지도 모른다.
그제야 태주는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을 향한 모두의 시선.
‘미친 새끼네.’
‘저거 뭐 하는 놈이냐?’
아무도 자신의 편이 없었다.
심지어-
용석마저도, 자신에게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사과하라고.
당장.
하지만 태주는…….
“태주야! 서태주!”
등을 돌려 촬영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 * *
당연하게도 그날은 최악의 분위기 속에서 촬영을 접었다.
그리고 제운은 조연출을 통해 배우들에게 앞으로 나흘 동안 촬영을 잠시 중단한다는 공지를 돌렸다.
와중에 사건을 일으킨 태주는 그 어떤 사과도,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나흘 뒤 촬영이 재개되고.
“자자. 슛 들어갑시다-!”
제운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힘차게 외쳤다.
프로답다면 프로답고.
의도적이라면 의도적이라고 해야 할까.
때문에 도윤을 포함한 몇몇 배우들은 그 모습에서 제운의 의도를 알아챘다.
“자자. 스탠바이해 주세요. 최 배우. 이번 씬에서 커피를 좀 더 무의식적으로 마셔봅시다. 직장인 느낌 확 살게. 자, 그럼 레디…… 슛!”
와중에 도윤의 연기는 점점 디테일을 더해가며 재개된 9부 촬영에 현재 물이 오른 상태.
“과장님. 이거 아무리 봐도 이상합니다. 이쪽 업체에 마진률을 이렇게 잡아주는 게 말이 안 됩니다.”
“강 대리야. 나가서 이야기하자.”
“과장님. 지금 이거 급한 문제입니다. 우리 이 건 3개월 매달렸습니다. 혹시라도 문제 생기면 그냥 끝나는 게 아닙…….”
순간 말을 멈춘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혹시…… 그거 아닙니까?”
어렴풋한 의심을 드디어 입 밖으로 꺼낸다.
“강 대리.”
지금 이 장면은 차갑고 날카롭게, 감정 없이 업무를 수행하던 ‘강영준 대리’가 회사의 비리를 의심하고 지금까지의 마음가짐이 흔들림을 느끼는 순간.
“과장님. 대융섬유 좀 다녀오겠습니다.”
“강 대리!”
결국 이상한 낌새를 느끼며 진 과장의 만류에도 자리를 박차는 강 대리.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카메라는 강 대리의 얼굴을 클로즈업했고.
도윤은 혼란스러운 눈빛 연기로 단 한 번에 오케이 사인을 받아냈다.
“오케이-! 좋았습니다. 캬. 느낌 좋네. 바로 써도 되겠다. 수고들 했어요. 10분 쉬고 다음 씬 스탠바이 들어갑니다! 아. 조연출! 다음 씬 출연배우들한테 스탠바이하라고 알려주고!”
“고생하셨습니다!”
훌륭한 분위기 속에서 다음 씬을 준비하러 가던 도윤은 촬영장을 슬쩍 둘러봤다.
태주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 무너지더니, 개념도 같이 출타한 모양인가?
뭐, 상관없다.
어차피 이건 예정된 일이었고.
이렇다고 해서 도윤의 계획이 달라지진 않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옆에서 성호가 다가왔다.
“형, 고생하셨어요.”
“아까 안 보이더니.”
“커피 사러요. 여기요. ‘최도윤 라떼’.”
그리고 얼른 달려온 성호가 내민 커피, 아니 커피를 내밀며 한 ‘최도윤 라떼’라는 말에 미간을 좁혔다.
“무슨 라떼?”
“‘최도윤 라떼’요. 요새 유명해요. 모르는 사람이 없다던데. 유당 없는 우유랑 바닐라 시럽 네 번 펌핑했고 거품 잔뜩에 휘핑 한가득. 마지막으로 너무 뜨겁지 않게. 엄청 유명해졌어요.”
도윤은 어처구니가 없어 되물었다.
“그게 왜 유명해진 거냐고.”
성호가 슬며시 웃었다.
“요새 형이 좀 핫하잖아요? 그래서 저번에 카페 직원이 최도윤 매니저 맞냐고 물어봤는데, 맞다고 하니까 이거 최도윤이 마시는 거냐고 하길래…….”
그 말인즉슨.
성호가 맨날 커피를 사 오는 가게에서 ‘최도윤 라떼’라는 레시피를 인터넷에 공유하며 유명해졌다는 뜻.
‘별게 다 유명해지네.’
회귀 전, 도윤이 부리던 꼬장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저 주문 복잡한 바닐라 라떼가 대뜸 인기를 끌다니.
역시 알다가도 모를 세상이다.
“너 마셔.”
“네에?”
“이제 안 마셔. 너무 달아.”
“에이, 형. 혹시 몰라요? 이러다 커피 광고라도 하나 들어올지? 아니면 형 이름으로 PPL이 들어오거나…….”
행복회로를 돌리는 성호.
“이제 커피도 안 마시는데 PPL 퍽이나 주겠다.”
“그러다 PPL 들어오면 마셔야죠. 형, PPL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요? P.P.L.”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하는 성호를 향해 도윤의 싸늘한 음성이 날아갔다.
“PPL 각 철자 뜻 말해봐.”
“그, 그건.”
궁지에 몰린 성호는 대뜸 화살을 돌렸다.
“혀, 형은 알아요?”
“Product PLacement.”
“오올.”
“오올은. 딱 대.”
“어, 어어? 배, 배우가 매니저 친…….”
성호가 뒷걸음질 치던 그때였다.
“오빠, 큰일 났…… 어머.”
문이 벌컥 열리며 해영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해영은 막 성호에게 다가가던 도윤을 보더니 놀란 토끼 눈이 되었고, 성호는 이때다 싶어 얼른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해영아, 나 너 매니저 하면 안 될까?”
“음. 미안. 그럼 도윤 오빠가 슬퍼할 것 같아.”
“하…….”
도윤이 물었다.
“무슨 일인데?”
“아, 그게요.”
그사이 열린 문 사이로 전해지는 약간의 소란스러움.
해영은 문밖을 살짝 내다보더니 조심스레 소곤거렸다.
“태주 선배가…… 스탠바이 시간 다 됐는데 차에서 안 나온대요.”
* * *
30분 전.
<알고 있는가>의 촬영장이 위치한 메트로빌딩 주차장.
그곳에 주차된 스타크래프트 밴에서는 누군가의 잔뜩 화가 난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안 간다고!”
기어이 발악하듯 소리 지르는 사람은 태주였다.
“도대체 어쩌려고 그러는 건데? 촬영 막판도 아니고 중반밖에 안 됐는데 촬영을 안 하겠다는 게 무슨 말인데?”
그리고 그 모습에도 최대한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용석.
그러나 태주는 막무가내였다.
“X발. 주연인데 이따위로 무시당하는 촬영장에 내가 왜 가야 하는데? 그 개새끼들, 나한테 주연 대접 한번 제대로 해준 적이라도 있어?”
순간 용석의 말문이 막혔다.
태주의 말이 맞아서 그런 게 아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다.
‘이 새낀 아직도 세상이 자기 위주로 돌아가는 줄 아나.’
여기는 팬들이 환호를 보내주는 무대 위가 아니다.
그러나 아직 포기할 때는 아니다.
“태주야. 너 이런 식이면 다음에 드라마 못할 수도 있어. 이 바닥 소문이 얼마나 빠른지 내가 이야기 안 했어?”
“그딴 거 모르겠고, 나 오늘 촬영 못 한다고 해. 다쳤다고 하든 컨디션이 안 좋다고 하든!”
이렇게 막무가내일 수가 있을까.
“나 주연이라. 주연이라고! 이 드라마 시청률 누가 만든 건데? 드라마에 누가 제일 많이 출연했는데? 그런데, 그런데 나를 왜 무시하는 거야!”
욕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지금 저 억울하다고 말하는 것들은 모두 태주가 자초한 일들.
첫 촬영에서 지각한 걸 시작으로 촬영장에서 다른 배우들과 친하게 지내기는커녕 자격지심과 열등감에 벽을 쌓았고, 심지어 PD 앞에서 마치 대배우인 양 굴었던 건 다 서태주 본인의 행동이다.
“우리 회사 아니었으면 시작되지도 못할 드라마였어. 근데, PD 새끼가 뭐? 연기가 너무 평이하다고?”
하지만 태주는 그게 잘못된 건지 애초에 생각 자체를 못 하는 듯했다.
이 바닥에서 꽤 오래 구르며 어지간한 배우들을 다 지켜봐 온 용석조차 어처구니없어할 정도로 뻔뻔한 태도였다.
“태주야. 네 마음 잘 알겠는데, 조금만 더 참자. 사장님한테도 조만간 불만 이야기할 자리 있을 거야. 근데 여기서 촬영 안 한다고 하면 일이 커질지도 몰라.”
차근차근, 최대한 태주를 어르고 달래는 용석.
“아니, 오늘은 안 해. 그럼 지들도 알겠지. 내가 얼마나 여기서 중요한 사람인지.”
푸대접.
태주는 최근 들어 눈에 띄게 싸늘해진 PD의 태도에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그게 자신이 자초한 건 줄도 모르고.
하긴.
지금까지는 어딜 가든 유명 아이돌 그룹의 리더로서 대접받았던 태주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드라마 촬영 때는 PD들이 거의 상전처럼 모시기까지 했다.
자신들의 드라마에 화제성을 더해주고 팬들의 막강한 화력을 지원받게 해주는 소중한 자원이었으니까.
하지만 <알고 있는가>는 다르다.
태주의 평이한 연기를 모두 메우고도 남는 다른 배우들의 열연.
시청률이 상승함에 따라 드라마에 배정된 광고들이 하나둘 팔리기 시작하고, 그 덕에 부족한 제작비 문제도 해결되고 있다.
여기에 제운은 노련한 PD답게 구도나 연출 등을 통해 태주가 그리 부각되지 않아도 다른 배우들이 그 틈을 메울 수 있도록 최근 회차들을 구성하는 상황.
무엇보다 태주는 주연이다.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 주연은, 있어선 안 될 존재.
“너, 진짜 이러다 큰일 나. 태주야. 나 봐서 한 번만 참자. 응? 나중에 내가 사장님한테 말하든 PD님한테 가서 말할 테니까…….”
“안 가. PD가 나한테 와서 사과하기 전까지는.”
“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백 PD님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래?”
“아 모른다고! 내 소속사 아니었으면 드라마도 못 찍고 빌빌대고 있었을 인간인데 무슨 상관이야! 형이 가서 말해! 나한테 사과하라고!”
용석은 결국 할 말을 잃어버렸다.
‘진짜 이 지경일 줄은 몰랐는데…….’
이젠 촬영장에 있는 모두가 아는 사실.
태주는 밀려나고 있었다.
이 촬영장에서.
그리고 PD의 눈밖에 이미 난 상황인데.
여기서 오늘 촬영을 펑크낸다면?
‘끝장이지.’
때문에 지금은 태주가 꼬장을 부릴 때가 아니다.
당장 가서 죄송하다고, 앞으로 열심히 하겠다고 고개를 숙여도 모자랄 판.
물론 정상적인 배우라면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지도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똑똑.
그때 창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용석이 창문을 내렸다.
촬영 스태프의 다급한 표정이 보였다.
“저, 서태주 배우님 여기 있나요? 지금 스탠바이 들어가야 해서요.”
결국 올 것이 왔다.
* * *
“지랄났네.”
제운은 스태프에게 전화로 상황을 보고받자마자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순간 옆에 있던 스태프들의 표정이 싹 굳었다.
백제운.
여러 일들을 겪으며 지금은 많이 부드러워졌지만, STB에서 활약하며 여러 작품들을 만들어낼 당시만 해도 제운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배우를 다루는 방식은 상당히 유명했다.
무시.
완벽한 무시.
연기 지적은커녕 일절 대화조차 없다.
그냥 촬영장에 와서 리허설 및 촬영만 시킨 뒤 집에 돌려보내는 수준.
간단히 말해 그게 누구든 대충 컷만 따내고 아무런 신경을 안 쓴다는 것.
그리고 부족한 부분은 자신의 편집과 연출로 메우며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만든다.
시청자도, 팬들도 눈치챌 수 없게.
심지어 그게 주연 배우라 할지라도.
그 대상은 지금 태주가 되어 있었고.
태주는 과거 어지간한 톱배우들도 안 하던 짓을 저지르며 제운의 뚜껑을 완전히 열어버렸다.
‘제작비? 지랄.’
이제 더 거칠 것도 없다.
시청률이 화를 거듭할수록 상승하며 회사 쪽에 PPL 문의가 쏟아지는 상황.
물론 그중에는 ‘V.I.C의 리더 태주’를 노리고 들어온 PPL도 있을 테지만, 이제는 상관없다.
“그래? 그럼 다음에 와서 찍으라고 해.”
여기서 기 싸움을 벌이는 건 제운의 스타일이 아니다.
어디 원하는 대로 해봐라.
그럴수록 너만 무너지는 거니까.
제운은 이 방법으로 ‘시위’하던 배우들 여럿을 당황시키고, 끝내 백기를 들게 만들었다.
태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 배우들은 차라리 연기력이라도 좋고 경력도 풍부했지만, 서태주는 이 바닥에서 아직 ‘아무것도 아닌’ 놈이니까.
“저, 감독님. 지금 스탠바이 중인 배우들한테는…….”
“아. 가서 정확한 이유 말해줘. 서 배우님 때문에 촬영 지연된다고.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제운의 시퍼런 서슬에 스태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달려갔고, 제운은 곧바로 전화를 끊은 뒤 의자에 걸터앉았다.
어디, 얼마나 버티나 한번 볼까 하는 심산으로.
그리고 5분이나 지났을까.
“저, 감독님.”
제운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아. 최 배우. 좀 쉬지, 또 나왔어요?”
“곤란한 일이 생겼다고 들었습니다.”
제운은 피식거렸다.
“흔히 있는 일이죠. 최 배우는 처음인가?”
“예. 근데…… 저는 괜찮은데 다른 배우분들이 기다리시는 것 같아서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태주 선배가…….”
“그래. 서태주 ‘배우님’이 지금 뻐팅기고 있지. 시위하시느라고.”
제운은 비아냥대더니 이내 들려온 도윤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가서 한번 말해볼까요?”
“최 배우가?”
“예. 무슨 사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안 그래도 요새 너무 피곤해 보였는데, 제가 가서 한번 그냥 물어보기라도 하겠습니다.”
“허. 이거 참. 이건 누가 봐도…….”
거기까지 말하던 제운은 속으로 생각했다.
‘너무 순진한 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내색 하나 안 하고 항상 웃고 다니는 도윤의 이미지야 이미 촬영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오히려 순진하다고 느껴질 정도.
‘하긴, 이 친구도 신인이었지.’
너무 연기력이 뛰어나고 임기응변이 좋은 나머지 종종 잊고 다니던 사실을 떠올린 제운.
“최 배우. 그러다 나중에 크게 뒤통수 맞아. 너무 착한 것도 이 바닥에서는 안 좋아.”
“지금은 다행이네요. 제가 태주 선배를 설득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결국 제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 봐요. 가서 내 이야기는 하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곧바로 촬영장을 나서는 도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성호.
제운은 생각했다.
모든 신인들이 도윤의 반만 닮았으면 참 좋겠다고.
* * *
“좋아. X발. 갈 데까지 가보자 이거지?”
그럼 다음에 와서 찍으라는 말에 당황한 것도 잠시.
태주가 탄 밴은 여전히 주차장에 서 있었고, 태주는 PD가 그저 오기를 부리는 거라 생각했다.
‘분명히 오겠지. 안 올 리 없어.’
용석의 생각은 달랐다.
“태주야. 진짜 일 커질지도 모른다. 올라가서 사과드리고 촬영하자. 응?”
“기다려봐. 누가 이기나 한번 보자고.”
주먹을 올릴까 말까.
차라리 한 대 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사실 주연배우 얼굴에 멍이 크게 들어 촬영하기 힘들었다고 하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명분이 될 테니까.
‘진짜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용석이 한탄하던 그때였다.
“봐, 내 말이 맞지?”
태주가 턱짓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한 사람.
누가 봐도 알아볼 수 있는 실루엣.
똑똑.
다가와 문을 두드린 그 사람은 바로 도윤이었다.
지이이잉.
창문이 열리고.
“선배님. 괜찮으십니까?”
도윤의 그 예의 바른 목소리와 함께 걱정 가득한 얼굴이 보였다. 그 순간 용석은 태주의 얼굴이 조금 풀어지는 걸 발견했다.
“아, 우리 도윤 씨.”
“선배님, 표정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안 좋을 수밖에 없지.”
기다렸다는 듯 한숨까지 쉬는 태주.
하지만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아주 감출 수는 없었다.
“PD, 아니 PD님이 시킨 거야? 나한테 가보라고?”
“아뇨. 그냥 왔습니다. 선배님이 걱정돼서요. 혹시 안 좋은 일 있으신 건 아니죠?”
역시.
이 녀석은 내 편이다.
가끔 나보다 많이 주목받아 아니꼽긴 해도 매번 이렇게 깍듯한 걸 보면.
써먹기 좋은 녀석이 분명하다.
“그런 건 아니고…… 담배나 한 대 피우면서 이야기하자.”
덕분에 놀랍게도 태주가 엉덩이를 떼고 일어서며 차 밖으로 나왔다.
태주는 도윤을 보더니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후우. 참, 연기하기 힘들어. 그렇지?”
“선배님.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신 건 아니죠?”
“아니야.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짜증 나서. 너도 내 마음 알 거야.”
“제가 아직 주연 배우를 못 해봐서 어떤 마음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감히 짐작하기가 힘드네요.”
“그래. 그렇겠지. 원래 이런 건 주연들이나 하는 고뇌거든.”
태주는 마치 연기에 통달한 사람처럼 말하며 자연스레 도윤의 어깨에 팔을 두르더니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저기 가서 이야기하자. 스태프 거슬려서. 또 쪼르르 달려가서 PD한테 보고할까 무섭다, 무서워.”
그 뒤를 용석이 따라오나 싶었지만 태주가 손을 들어 보이자 이내 멈춘다.
그리고 태주는 주차장 구석 쪽으로 가더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후우. 진짜 개 같다니까. 주연 대접 안 하는 거, 너도 보이지?”
“…….”
“내 소속사 덕분에 드라마 찍고 있으면 최소한 누가 중요한지는 알고 있어야지. 안 그래?”
도윤은 말이 없었다.
잠자코, 태주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처럼 보일 뿐.
덕분에 태주는 도윤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거라 확신하며 서서히 흥분하기 시작했다.
“PD 그 새끼, 봤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좀 늦었다고 꼽을 주질 않나, 이제 시청률 좀 나온다고 다른 사람 다 보는데 대놓고 연기 지적을 하질 않나. 아, 요샌 또 안 그러더라고? 그래서 뭔가 좀 느낀 줄 알았는데 봐봐. 지금 또 이렇게 대접하는 거.”
그 흥분이 커질 무렵.
“작가 걔도 마음에 안 들어. 신인 작가라면서? 근데 뭐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서태주 선배님, 아니.”
도윤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태주야.”
툭.
그리고 태주의 입에 물려 있던 담배 끝에서 담뱃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만 좀 지랄하자.”
“뭐, 뭐?”
여기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도윤의 싸늘한 음성이 태주의 귓가를 날카롭게 갈랐다.
“쪽팔려서 도저히 못 봐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