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본촬영
-진짜? 진짜로? 오빠 대박! 그럼 언제부턴데? 언제부터 시작하는데?
“아직 일정 안 나와서 모르겠는데, 아마 8월부터일걸. 조만간 광고도 나갈 거야.”
-나 동기들한테 자랑해도 되는 거 맞지? 이제 입에 자크 풀어도 되는 거지?
“마음껏 풀든가.”
-아싸!
본촬영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하자 뛸 듯이 기뻐하는 리나.
도윤은 여동생의 반응에 피식거렸다.
“그렇게 좋냐?”
-그럼, 안 좋아? 어유, 집에서 뒹구는 식충이가 제발 오빠 반만 따라가면 좋겠…….
-야, 뒤질래? 누가 식충이야. 지는 뭐 주말마다 내려와서 잠만 퍼 자다 가는 주제에.
주말이라 아마 동하도 내려온 모양이다.
“나 촬영이라 끊는다. 적당히들 싸우고.”
-아, 아! 미쳤냐? 머리는 왜 뽑아! 탈모 온다고!
-그래, 탈모나 걸려라!
도윤은 전화기 너머로 느껴지는 투닥거림에 얼른 전화를 끊었다.
“오빠가 그렇게 웃을 때도 있네요.”
그리고 민주가 옆에서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물론 목소리는 늘 그렇듯 심드렁했다.
“내가? 내가 평소랑 뭐가 다른데.”
“오빠 평소에는 그렇게 안 웃어요. 연기할 때도 그렇게 안 웃고요.”
이른바 ‘찐웃음’이라는 건가.
“서태주 대할 때도 그러시던데.”
보기보다 눈치가 빠르다.
“뭐, 괜찮아요. 겉보기엔 사이 좋아 보이니까.”
거 참 다행이네.
도윤은 대답하는 대신 슬쩍 화제를 돌렸다.
“얼마나 남았냐?”
“앞으로 20분이요. 차 안 막혀서 금방 갈 것 같은데요. 아, 참. 이따 팀장님 촬영장 오신대요. PD님이랑 작가님한테 인사도 드리고 커피 돌리신다는데요.”
도윤은 요즘 들어 거의 반 포기한 듯한 수철을 떠올리며 속으로 피식거렸다.
처음에는 거의 혼 빠진 사람처럼 지내더니, 요새는 그냥 체념하고 지내는 모양이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 체념이 기쁨으로 바뀔 날도 머지않았다.
<알고 있는가>는 당연히 회귀 전보다 훨씬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서태주라는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사실 그건 문제도 아니다.
회귀까지 한 마당에 서태주 하나가 뭐 대수겠는가.
그냥, 앞으로 이어질 긴 레이스에서 보이는 장애물 정도겠지.
그렇다고 대충 할 생각은 없었다.
당했던 만큼, 철저히 돌려줄 생각이니까.
* * *
8주간 이어질 본방의 치열한 레이스에 앞서 본촬영이 시작되었다.
사전제작 드라마가 아직 정착되지 않은 한국 환경.
편성표가 나온 이상 이제 일정에 맞춰 분량을 뽑아내는 일만 남은 것.
때문에 분위기는 좋으면서도 상당히 살벌했다.
<알고 있는가>의 제작비는 한정적이다.
드라마 제작 환경에서 시간은 곧 돈.
장비 임대료, 장소 대관료, 스태프들의 임금 등 모든 것들이 촬영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돈을 먹는 하마로 변하는 것이다.
“빠르게 체크하고 움직입시다. 이번 시바이(상황) 동선 안 겹치게 잘 움직이시고.”
“이건 틸업으로 올려. 오케이. 좋네. 계속 가자고.”
“아니지, 아니지. 여기서 플래시백이 들어갈 예정이니까 잠시 텀을 둬야지. 감정 다시 잡아보세요. 플래시백 전후로 느낌이 달라야 합니다!”
재촉, 분노, 환호, 열망.
온갖 감정이 뒤섞여 비로소 하나의 결과물(컷)을 만들어내는 곳이 바로 촬영장이고, 이곳에선 그 어떤 실수도 쉽사리 용납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도윤은-
“어떻게 이렇게 NG 없이 바로바로 가지? 야, 최도윤 배우 오늘 NG 하나도 없었지?”
“예. 한 열 컷 동안 하나도 안 떴을걸요. 아, 서태주 배우랑 찍는 신에서는 두어 개 나왔어요. 서태주 배우가 동선을 착각해서.”
보면 볼수록 진국이었다.
주연까지 꿰차놓고 실수연발인 누구와는 다르게 말이다.
“허, 거 참. 물건이라니까. 진 PD가 아주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더만.”
“진 PD님이요?”
“그래. 아주 침을 튀겨가며 칭찬했다니까. 하여간 복덩이야, 복덩이. 우리 촬영장 복덩이. 야, 오늘 컷 몇 개나 남았지?”
“세 개입니다.”
“쉬는 거 없이 쭉쭉 가자고. 오늘 실내에서 논스톱으로 달리고 바로 밖으로 나가야 돼. 살수차 스탠바이시켰지?”
도윤의 연기는 훌륭했다.
대본을 통째로 집어삼킨 듯 대사 한 번 버벅거리는 일이 없었고 그것도 모자라…….
“서류 하나 똑바로 못 챙깁니까?”
적당한 선에서 애드리브까지 치고 있었다.
태주가 연기 도중 실수로 파티션에 부딪치며 서류를 쏟자 튀어나온 대사.
대본에는 분명히 없는 대사였는데도.
‘어울려.’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심지어 어리둥절해하다가 뒤늦게 서류를 줍는 서태주의 연기까지.
물론 이 연기는 소가 뒷걸음질치다 쥐 잡은 격.
‘저건 아무리 봐도 연기가 아닌 것 같고. 뭐, 그래도 다행이네. 저 컷이 더 어울리겠는데.’
그렇게 도윤이 다급히 서류를 줍는 태주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고 자리를 뜬 후에야.
“컷-! 좋습니다! 아! 최 배우. 애드리브 훌륭했어요. 아주 좋았어요!”
제운의 만족스러운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도윤은 오케이사인이 나자마자 바로 표정을 바꾸며 태주에게 달려갔다.
“괜찮으십니까?”
누가 봐도 깍듯하고 배려심 깊은 신인 배우의 모습.
안 좋게 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어, 그, 그래요.”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애드리브가 튀어나왔네요.”
이쯤 되니 태주도 도윤의 페이스에 빠르게 휘말려 들어가고 있었으며.
“고마워요.”
착각과 의심을 오가다 이제 슬슬 착각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오! 느낌 좋아요.”
그리고 이런 둘의 모습을 향해 카메라를 가져가는 메이킹 필름 촬영 담당자.
쓸 만한 에피소드를 건졌다는 생각에 표정이 좋아 보였다.
“우리 찍을 때는 없으셨는데!”
“인정하자. 도윤 형님은 우리랑 클라스가 달라. 와, 어떻게 저기서 저렇게 애드리브가 팍! 하고 튀어나오냐.”
제운도 덩달아 흐뭇해졌다.
태주도 서서히 나아지고 있었다.
아직 아주 마음에 드는 수준은 아니지만, 가장 많이 대사를 주고받는 도윤이 그걸 커버해 준다고 해야 할까.
물론 가끔 곤란한 일도 있었다.
차이가 너무 심해서 분명히 ‘신민재’가 돋보여야 할 장면에서 ‘강영준 대리’가 더 눈에 띄는 그런 상황.
“이거는 여기랑 여기, 자르고 가는 게 어떠세요?”
“그럼 그나마 낫겠네. 하, 나 참. 조연 연기가 너무 좋아서 자르는 건 또 처음이네.”
그래서 이렇게 어쩔 수 없이 도윤의 단독 컷을 몇 개 잘라내는 일도 발생했다.
“어쩔 수 없죠. 안 그랬다간 거기 소속사에서 난리 칠걸요. 아니, 팬들이 더 난리 치겠다.”
“인기가 어느 정돈데?”
“콘서트하면 맨날 매진이래요. 암표값도 수십만 원이고.”
“에휴, 그럼 노래나 하지 왜 연기를 한다고 해서……. 야, 그래도 안 되겠다. 이건 살리자. 팬이고 뭐고 이건 어쩔 수 없어.”
“그쵸. 이건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제운은 알고 있었다.
이 드라마, <알고 있는가> 첫 방이 시작되면…….
화제가 될 사람은 주연 태주가 아니라, 저기 보이는 미친 신인 배우 도윤이 될 것이라는 사실.
이제는 말하면 입 아픈 배역 싱크로율.
점점 나아지는 딕션과 풍부한 감정 연기.
그리고 적재적소에 어울려 대본을 더욱 맛깔나게 만들어주는 애드리브까지.
‘도대체 어떻게 저런 배우가 튀어나온 거지?’
심지어 소문과 달리 깍듯하기까지.
지금 저기, 스태프들이 커피를 타자 얼른 달려가 받아오더니 선배들에게 직접 나눠주는 모습은 신인 배우의 정석 그 자체였다.
“어머, 고마워라. 우리 도윤이가 직접 날라주는 건가?”
원로 배우, 이옥주는 그런 도윤을 특히 마음에 들어 했다.
“잘 마실게. 하여튼 싹싹하다니까. 신인들이 다 이러면 얼마나 좋게.”
“사심 있어서 그런 건 아니시구요?”
그리고 막역한 사이인 태규가 낄낄대며 농담을 던지자 옥주는 질색하며 태규의 어깨를 때렸다.
“얘는. 내가 이 나이 먹고 서른도 안 된 애를 꼬시겠니?”
“왜요, 누님 예전에 끗발 날리셨는데. 도윤아, 그거 알아? 이옥주 선배님이 예전에 화보집으로만 수억을 버셨어.”
하긴, 이옥주는 지금 육십 줄에 접어 들었지만 예전에는 뭇 남성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던 배우들 중 한 명이었다.
“지금도 여전하신걸요. 솔직히 선배님, 엄마 배역은 아직 이르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도윤은 은근히 기대하던 옥주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게 만들었다.
“어머, 얘 말도 예쁘게 한다니까.”
“제가 말했죠? 요새 이런 친구 별로 없다니까요, 누님. 이참에 엄마 말고 이모 배역 하시죠.”
“넌 좀 맞자. 응?”
여하튼, 아주 다행이었다.
만약 도윤이 처음 제안받았던 대로 <악마의 세계>에 합류했다면…….
‘저 배역을 누가 맡아. 암.’
제운은 선배들에게 잔뜩 예쁨을 받는 도윤을 보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편.
<악마의 세계> 촬영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알고 있는가>와 달리 리딩 때 완벽한 합을 자랑했던 배우들.
황선욱 PD와 유정연 작가의 이름값에 힘입어 엄청난 투자를 받았고 그 덕에 원하는 배우를 잔뜩 캐스팅한 덕이다.
거기에 선욱과 정연의 압도적인 명성에 뒤따르는 카리스마까지.
그야말로 잘될 일만 남은 것.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유 작가, 자꾸 이럴 거야? 갑자기 대본 수정이라니.”
“황 PD님 스타일에 맞춰드린 건데 왜요?”
“아니, 내가 그냥 적당히 맞춰달라 했지 누가 통째로 바꿔 달래?”
황선욱.
유정연.
둘 다 업계 꼭대기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라서일까.
배우들 간의 합과 달리 둘의 합은 생각보다 잘 맞지 않았다.
심지어 성향도 비슷해서 서로 굽힐 줄을 모른다.
보다 못한 조연출이 말리거나 배우 중 한 명이 총대를 메고 나선 뒤에야 간신히 촬영이 재개될 정도였으니.
때문에 촬영은 지지부진했다.
<알고 있는가> 보다 한 달이나 일찍 시작한 촬영.
그러나 아직 1, 2부 편집은커녕 촬영도 다 안 끝난 상황이었고, 매일같이 지연되는 촬영에 배우들도 시작부터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사사건건 부딪치는데 무슨 촬영을 하겠다고.”
“황 PD님이랑 유 작가님이랑 한다고 해서 왔는데 이게 뭐냐.”
“어제는 스케줄 늦어서 또 욕먹었어. 변명도 하루이틀이지.”
대기가 길어지면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배우들도 이제는 슬슬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최도윤인가 뭔가 하는 애, 선견지명 죽이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걸렀지. 개판이네.”
와중에 <악마의 세계>를 거르고 <알고 있는가>를 택한 도윤의 결정이 재평가받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었으니.
그리고 그 배우들 중에는.
“오늘은 유나가 제일 고생 많네. 오늘 새벽에 한 씬 찍고 지금 6시간째 대기지?”
“전 괜찮아요.”
<그대 내 품에>에서 여주인공 역을 맡았던 한유나도 있었다.
“그러게 다른 거 하지 왜 여기 왔냐. 비아냥대는 게 아니라, 진짜로. 유나 정도면 이제 주연만 해도 될 텐데.”
“제가 유정연 작가님 팬이라서…….”
“하긴.”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선배 배우.
“근데 어쩌냐. 저 둘이 하루 종일 치고받고 싸우는데. 전생에 부부였나?”
한 선배의 농담에 주변에선 웃음이 터져 나왔고, 갑갑하던 분위기가 그나마 풀어졌다.
꽉 막혀 있던 유나의 머릿속도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그런데 그러면서 문득 떠오르는 기억 하나가 있었다.
‘그때는 재미있었는데.’
바쁘고 정신없긴 해도 재미있었던 <그대 내 품에> 촬영.
정확히는 도윤이 합류하면서부터였다.
작품 특성상 평면적인 연기만 해 오다가 남주인공의 연적이 등장하고 배역에 재미를 좀 붙였다고 해야 할까.
‘거기는 촬영 잘하고 있으려나.’
그래서 못내 아쉽기도 했다.
고작 몇 부 같이 찍고 종영됐으니.
도윤의 배역상 12부부터 합류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는 하지만…….
도윤의 인상적인 연기력을 느끼기엔 충분했던 시간.
더군다나 인간적으로도 꽤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 역시 새롭게 안 사실.
‘꽤 괜찮아 보였는데.’
쫑파티날.
취해서 잠들었던 강미나 작가.
그런 강미나 작가의 목 뒤에 쿠션을 받쳐주던 도윤의 모습.
묘하게, 시선이 가던 그 모습 말이다.
‘에휴. 나도 거기 합류할 걸 그랬나.’
물론 유나는 <알고 있는가> 측에서 제안을 받지 못했다.
마땅한 배역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
사실, 이제 주연급과 조연급 사이에 있는 유나에게 제안하기엔 당시 <알고 있는가>의 힘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래도 못내 아쉬웠는지 실없는 생각으로 피식대던 유나는 문득 휴대폰을 열었다.
최도윤.
쫑파티 날 등록한 연락처.
‘한번 보내볼까?’
그냥 안부나 물어볼 겸.
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고민하던 유나는 결국 살며시 대화창을 누르고 자판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기 시작했다.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과 달리-
아주 신중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