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신인배우 최도윤입니다(3)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말씀드린 대로 잠시 10분 쉬었다 가겠습니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리딩이 이어진지도 1시간.
제운의 말에 답답하고 텁텁하던 분위기가 풀어졌다.
긴장이 풀리자 나른함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도윤은 전혀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주변 배우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선배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은. 아까 잘하던데요. 받아주는 내가 다 민망했어.”
‘진 과장’ 역의 신태규.
30대 중반에 최근 여러 작품에서 조연으로 얼굴을 비춘 배우.
그는 도윤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봤다.
“나랑 대사 많던데,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깍듯하면서도 싹싹한 태도에 태규가 빙긋 웃었다.
그리고 도윤은 그 미소에서 자신을 향한 시선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조금씩 바꿔가자. 급하게 보지 말고.’
이번 <알고 있는가>에 참여한 데엔 여러 이유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중 한 가지가 바로 지금도 가증스럽게 웃고 있는 저 서태주 녀석.
때문에 도윤은 모든 면에서 녀석을 앞서고, 찍어누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급하게 굴어선 안 된다.
도윤은 어디까지나 신인 배우.
괜한 오버는 언제나 의문스러운 시선만 부를 뿐이니까.
“자자, 아이고. 다들 모여 계셨네요. 언제 쉬는 시간 되나 했습니다.”
그때 강당 문이 열리며 몇 명의 사람들이 들어섰다.
그 모습을 본 태주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번 드라마 주연 맡은 저희 서태주 배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아주 능숙하게 간식거리를 돌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서태주의 소속사에서 보낸 직원들 같았다.
어느새 배우들의 테이블마다 쌓인 간식들.
태주는 그걸 보고 한껏 기분이 고양되어 외쳤다.
“선배님들, 앞으로 촬영장에서 간식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봐라, 어차피 이제 막 시작됐다.
그러니 너무 고깝게만 볼 필요는 없지 않냐.
우리 회사가 이런 곳이다.
뭐, 이런 의미가 담긴 간식이다.
몇몇 배우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잘 먹을게요.”
“맛있어 보인다.”
일부 배우들은 별생각 없이 감사를 표했다.
신인 배우들이 현장에 간식이나 커피를 돌리는 건 흔한 일이니까.
“최도윤 배우님도 와서 드세요.”
그리고 태주는 이거 보라는 듯 일부러 도윤을 불렀다.
하지만 그때.
“아이고. 오늘 신인들 애쓰네.”
태규의 목소리가 들렸고.
강당 문이 열리며 도윤도 잘 아는 두 명이 들어왔다.
성호와 민주.
둘의 양 손에 잔뜩 들린 커피 트레이.
“안녕하십니까! 이번 <알고 있는가>에서 ‘강영준 대리’ 역을 맡은 최도윤 배우 매니저입니다! 저희 형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스타일리스트 남궁민주입니다.”
성호의 우렁찬 목소리.
민주의 간단한 인사.
도윤은 생각지도 못한 둘의 등장에 잠시 멍해졌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둘이 잽싸게 강당 안으로 다가와 PD, 작가, 그리고 배우들에게 커피를 돌리는 모습을 보며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언제 사 온 거야?’
리딩 끝나자마자 안 들어오길래 뭐 하나 했는데.
저걸 사러 간 거였다니.
‘형, 저 어때요?’
와중에 도윤은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뿌듯하게 웃어 보이는 성호를 보고 하마터면 크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하여간 미워할 수가 없는 녀석이다.
민주도 마찬가지.
“저희 최도윤 배우 잘 부탁드립니다.”
“어머, 고마워요. 그런데 어쩌지? 나는 커피 못 마시는데.”
“제가 그래서 스무디로 사 왔습니다. 민트초코로요.”
“어머 세상에. 나 이거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대?”
“이옥주 선배님의 취향을 가장 잘 아는 분?”
민주의 덤덤한 대답에도 옥주는 이미 기분이 잔뜩 좋아졌는지 깔깔 웃었다.
“아하. 우리 매니저한테 물어봤구나. 아유, 이뻐라. 잘 마실게. 어머, 당도도 딱 맞네. 어쩜.”
그야말로 센스쟁이다.
안 그래도 배우마다 메뉴가 다 다른 것 같아 신기했는데, 강당에서 열띤 리딩이 이어지는 사이 성호와 민주는 나름 바쁘게 돌아다니며 배우들의 취향을 수집한 것이다.
“최 배우는 좋겠어. 이렇게 싹싹한 친구랑 같이 일하고.”
도윤은 옥주의 칭찬에 고개를 숙이며 슬며시 웃어 보였다.
이걸로 분위기는 순식간에 도윤 쪽으로 넘어왔다.
시작부터 기싸움을 펼칠 생각은 없었지만.
걸어온 이상 받아주는 게 인지상정.
도윤은 태주의 얼굴이 순간 흙빛으로 물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씩 웃었다.
봤어?
시작부터 네가 밀린 거야.
* * *
태주의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갔다.
‘저거 마음에 안 드는데.’
도윤은 분명 오늘 처음 봤다.
그리고 신경 쓸 이유도 없다.
녀석은 ‘배우’고, 자신은 지금은 ‘배우’지만 ‘아이돌 가수’의 가면을 언제고 꺼낼 수 있으니까.
심지어 소속사도 등에 업었다.
그래서 딱히 밀릴 이유도, 거슬리게 볼 이유도 없는데…….
왜인지, 신경이 쓰인다.
‘커피? 그럴 리가. 그깟 거 때문에?’
그러나 태주는 몰랐다.
‘그깟’ 커피 한 잔씩 돌린 게 지금 배우들에게 도윤에 대한 인상이 상당히 달라졌다는 것을.
인성 안 좋다던 소문이 돌던 배우.
신인 주제에 불손하다는 배우.
비주얼 믿고 까분다는 배우.
이런 편견들은-
생각보다 인성 좋은 배우.
생각보다 예의 바른 배우.
생각보다 연기 잘하는 배우.
-라는 생각으로 바뀌었고.
방금 배우들의 취향에 맞춰 돌린 음료들이 확실한 쐐기를 박아 주었다.
센스 있는 신인 배우라고.
본래 잘 못하던 사람이 잘하면 그 효과가 극대화되는 법.
잘하던 사람이 갑자기 못하면 더 안 좋게 보이는 것처럼.
‘엄청 거슬…….’
“……서태주 배우?”
“네, 네?”
“대사 안 칠 겁니까?”
그때 제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주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쟤는 뭐 하고 있냐.
그런 눈빛.
태주의 볼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선배님들도 많은 리딩 자리입니다. 서태주 배우, 집중해 주세요.”
결국 제운의 타박에 태주는 테이블 아래로 내린 손을 부들부들 떨다가 간신히 입을 열어야 했다.
“……죄송합니다.”
“자, 다시 가죠. 조연출, 미안하지만 지문 다시 부탁드릴게요. 아. 잠깐만요. 서태주 배우 몰입할 시간은 줘야죠?”
제운은 만만한 PD가 아니다.
비록 태주의 소속사가 많은 제작비를 댔다고 해도 주연 배우의 저런 모습을 그냥 넘길 만큼 말랑한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제운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은 기회였다.
기고만장해 별다른 준비도 안 해온 주연에게 적당히 면박을 주면서 자신이 주도권도 잡아나갈 기회.
“씬 29.회의실, 낮. 잔뜩 얼어 있는 신민재가 앉아 있는 가운데 강영준이 회의실로 들어선다. 전혀 관심 없다는 듯 민재를 한번 바라보고 서류를 탁자 위에 올려놓는 영준. 영준은 민재 맞은편에 앉아 서류를 살피다 묻는다.”
조연출의 지문.
이어진 건 도윤의 대사다.
“느낌이 어떻습니까?”
“이 회사에 대한 느낌 말입니다.”
“그게…….”
“좋다고 생각하면 당신은 이 회사와 안 맞는 겁니다.”
무섭도록 차가운 톤.
사락, 사락.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서류 대신 대본을 넘기는 도윤의 애드리브까지 더해진다.
마치 진짜 직장 상사를 보는 모습에 단역 몇몇은 마른침을 삼켰고, 선배 배우들은 도윤에게서 자신들과 같은 ‘배우’의 냄새를 맡는다.
“신민재 씨라고 했죠. 당신이 뭘 하다 왔든, 어느 대학을 나왔든, 스펙이 뭐고 학점이 어떻든 난 신경 안 씁니다.”
싸늘하게 귓가를 울리는 대사.
태주는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생전 직장생활 따윈 해본 적도 없는데, 정말로 직장상사 앞에 선 신입사원이 된 기분.
‘아니야.’
그건 태주가 도윤에게 연기로 압도당했다는 증거.
아무리 부정해 보려 해도.
“신민재 씨. 나한테 중요한 건 당신이 이곳에서 일을 잘하는 겁니다. 열심히 하는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철저한 사전 분석 없이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도윤의 강렬한 대사는 태주의 귓가에 끈적하게 들러붙고 있었다.
표정부터 톤, 덤덤한 감정과 중간중간 태주 쪽을 힐끗거리는 모습까지.
모든 게 ‘강영준 대리’의 현신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흐름은 아주 좋았다.
태주가 바로 다음 대사를 치기 전까지는.
“……그럼 제가 어떤 일을 하면 되죠?”
순간 미간을 좁히는 제운.
“신민재 씨. 여기서는 어떤 일을 할지 묻는 것보다 지금 바로 나가서 당신이 할 일이 뭔지 찾아보는 겁니다. 스스로요.”
“어떻……게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리고 이제는 아름도 서서히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그 방법은 알아서 찾아야죠.”
“대, 대리님!”
마침내 세 번째 대사에서 결국 제운이 손을 들었다.
“잠깐. 서태주 배우. 여기서 그 느낌이 맞나요?
“네?”
“분명 이전 지문도 그렇고, 지난 장면들을 종합했을 때 신민재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회초년생입니다. 덜덜 떨면서 면접을 봤고, 그전까지 뭔가 자립적이거나 당당한 느낌을 주는 대사는 없었어요. 그런데 왜 ‘강영준 대리’에게 따지듯 묻는 거죠?”
“…….”
“오히려 ‘신민재’는 여기서 따지듯 묻는 게 아니라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물어야 합니다. 갓 입사해 어리바리한 신입사원처럼요.”
거기까지 설명한 제운은 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쭉 ‘신민재’ 대사들이 나올 텐데, 계속 이러면 곤란합니다. 오늘 리딩은 연습하는 자리가 아니에요. 조율하고 본촬영 전 점검을 하는 자리입니다.”
“……죄송합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가자 태주도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누가 봐도 어쩔 수 없이 숙이는 모양새라 분위기는 더더욱 좋지 않았고, 한번 가라앉은 분위기는 쉽게 풀리지 않을 듯했다.
“후우. 일단 계속 가죠. 그리고 최도윤 배우.”
“네, PD님.”
“최 배우는 지금 그 느낌 그대로 가져가면 됩니다. 잘했어요.”
“감사합니다.”
극명한 대비에 태주는 다시 울컥했다.
별것도 아닌 놈이.
태주의 눈에는 도윤이 칭찬 좀 받았다고 기고만장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도윤은 태주 따윈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대본에 몰입해 있었고. 이런 모습 때문인지 태주는 불안에 떨었다.
자신이 불안에 떠는 줄도 모르고.
그 증거로 여전히 붕대를 감은 손등을 긁고 있었다.
그 모습에 도윤의 눈이 이채를 띠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대사를 이어갔다.
“신민재 씨. 엑셀 하나 다룰 줄 모릅니까? 수식 아는 거 하나라도 있으면 말해보세요. 아, 없다고요? 여기서 나와야 할 대답이 뭔지 모릅니까?”
“신민재 씨. 뭔가를 하고 싶다면 뭘 해야 하는지부터 알아보세요.”
“설마 복사는 할 줄 알겠죠. 그것마저 못하면 대학 4년은 왜 다닌 건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시길 바랍니다.”
잔뜩 주눅이 든 태주를 연기로 완벽하게 압도하며 이곳 강당을 자신의 영역으로 장악해 버렸다.
“야, 강 대리야. 살살 좀 해라. 그러다 애 울면 어쩌려고? 저번에 너 여자애 하나 울려서 결국 퇴사한 거 기억 안 나?”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요. 미리 거를 수 있으니까요. 전 울어서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구는 사람들, 딱 질색입니다.”
여기에 생활연기의 달인, ‘진 과장’ 역의 신태규가 펼치는 차진 연기는 차갑고 칼 같은 ‘강 대리’의 캐릭터에 맛을 더해주었다.
“좋습니다. 계속 가죠.”
그러면서 ‘신민재’가 잠시 나오지 않는 대본에서는 탄력이 빠르게 붙더니 급기야 태주가 소외감을 느낄 정도.
‘이런 개 같은…….’
태주는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떨었지만.
여기는 자신이 왕처럼 군림하던 인기가요 무대가 아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군무와 노래에 환호를 보내주는 팬들도,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러대며 스포트라이트를 뿌리는 기자도 없다.
오로지 연기에 대한 열의와 책임감만이 가득한 자리.
이런 열띤 현장에, 아무런 분석도 없이 무려 ‘주연 배우’를 연기하러 온 태주의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후우. 그냥 그대로 갑시다. 이러다 오늘, 날 새겠네.”
다시 돌아온 태주의 차례에는 결국 제운도 포기하고 어지간하다 싶으면 바로바로 오케이를 할 정도였고.
“자자,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세 시간에 걸친, 예정보다 30분이나 더 걸린 리딩이 드디어 마무리되었다.
“고생했어요. 최도윤 배우.”
“감사합니다, PD님.”
도윤은 오늘 자신과 꽤 좋은 케미를 보인 ‘진 과장’ 역의 신태규와 악수하며 씩 웃었다. 그런 둘 사이엔 이옥주도 끼어들었다.
“벌써 사이가 좋아 보이네?”
“그럼요. 영혼의 듀오가 될 것 같은데요.”
“우리 태규 이번 촬영도 안 심심하겠네. 참, 둘 다 회식 갈 거지? 백 PD가 아까 쉴 때 회식 이야기하던데.”
그 말에 태규가 도윤을 바라봤다.
도윤은 당연하다는 듯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배님 가시는 곳이라면 따라가겠습니다.”
“시원시원해서 좋네. 참, 술 좋아하나?”
“소주가 자고로 최고라 배웠습니다.”
태규가 낄낄대며 도윤의 어깨를 두드려줄 때 제운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자, 오늘 리딩 끝났는데 회식 가시죠! 제작비 어쩌구 해도 우리 배우분들 굶는 일, 덜 취하는 일은 없게 해드리겠습니다!”
“백 PD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시청률 왕창 올려서 제작비 충원받죠 뭐!”
제운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최 배우. 아까 커피 잘 마셨어요. 내 취향 제대로 저격했던데?”
“아이스티 비율이 기가 막히던데.”
“우리 매니저도 맨날 제대로 못 사오는 메뉸데, 최 배우 매니저가 능력 있나 봐?”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도윤에게 저마다 한마디씩 던지는 배우들의 각 자리에 놓인 건-
텅 빈, 바닥에 남은 한 방울까지 빨대로 쪽쪽 빨아들인 일회용 커피잔이었다.
도윤은 성호와 민주를 떠올렸다.
‘귀여운 녀석들.’
서태주와 달리-
그야말로 첫 만남부터 제대로 눈도장을 찍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