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신인배우 최도윤입니다(2)
꽤 치렁치렁한 패션.
리딩 날임에도 무슨 패션쇼라도 다녀온 건지 명품으로 몸을 둘둘 감고 선글라스까지 낀 채 화려하게 차려입은 태주는 여기저기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태주를 향한 시선은 그리 곱지 않다.
오히려 회귀 전의 도윤 때보다 더.
‘명품 자랑질하러 왔나?’
‘저런 녀석이 주연이라고?’
배우들은 안다.
단역 하나라도 차지하기 위해 도대체 얼마나 갖은 애를 써야 하는지.
실제로 여기엔 연극판에서 십수 년을 구르다 간신히 브라운관에 모습을 비추기 시작한 사람도 있었고, 긴 무명 생활 끝에 빛을 본 사람도 있었다.
그런 그들이 보기엔 연기에 대한 진지한 접근 없이 다른 분야의 인지도와 소속사의 지원 속에 주연 자리를 떡하니 꿰찬 태주가 곱게 보일 리 없는 것이다.
하지만 배우들은 그 사실도 알았다.
태주의 소속사, 숨(SUM) 엔터가 이번 드라마에 꽤 많은 제작비를 지원했다는 것을.
쉽게 말해 여기 있는 배우들의 출연료 상당 부분은 숨 엔터에서 나왔다는 것.
제작비가 필요한 스튜디오.
자신들의 소속 연예인을 주연으로 밀어 넣고 싶은 엔터 회사.
둘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건 이쪽 바닥에서 생각보다 흔한 일.
그래서일까.
‘이거, 그때랑 좀 다른데?’
본래 도윤에게 가야 했을 어그로를 태주가 다 받는 느낌이다.
도윤은 자신이 그때 사람들에게 얼마나 아니꼽게 보였을지 새삼스레 느끼며 속으로 피식거렸다.
“서태주입니다. 최도윤 배우, 맞죠?”
그러다 문득 도윤은 자신 앞에 불쑥 튀어나온 태주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악수했다.
“이번에 ‘강영준 대리’ 역을 맡게 된 신인 배우 최도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신인 배우.”
언뜻 보이는 묘한 웃음.
“알죠. 장안의 화제. <악마의 세계> 까고 여기 왔다면서요?”
<악마의 세계>를 까고 왔다.
그 말이 들리는 순간 잠잠해지는 분위기.
그러나 태주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는 듯 그대로 말을 잇는다.
“업계에 소문 쫙 퍼졌어요. 예술의 가치를 아는 친구가 있다고. 대단해. 나라면 거기 갔을 텐데.”
이 미친놈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원래 이렇게 오만한 녀석이었나?
아니면-
그때 자신이 너무 오만했던 나머지…….
이 녀석의 오만함에 별 이상을 느끼지 못한 건가?
“들어보니까 별명이 ‘괴물 신인’이라면서요? 잘 부탁해요. 보니까 나랑 대사가 제일 많더라고요.”
말 그대로다.
도윤이 맡은 ‘강영준’ 배역과 태주가 맡은 ‘신민재’ 배역은 자주 마주친다.
그리고 그건 둘의 연기가 극명히 대비되는 상황을 자주 만들 수 있다는 뜻.
때문에 도윤은 속으로 피식거렸다.
“예.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아이돌 출신이긴 해도, 열심히 할 테니까 잘 좀 봐주세요. 알았죠?”
“아닙니다. 제가 배워야죠.”
지금은 웃고 있지만, 저 얼굴이 조만간 일그러질 날을 상상했기에.
도윤은 웃으며 대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둘을 향한 다른 배우들의 묘한 시선이 허공에 얽히다 떨어졌다.
둘을 바라보는 시선이 심상찮은 배우도 있었고, 재미있다는 듯 웃는 배우도 있었다.
몇몇은 대놓고 싫은 티를 낸다.
정확히는 주연이랍시고 콜타임에 딱 맞춰 온 주제에 실례가 될 수 있는 말을 서슴없이 늘어놓는 태주를 향해서.
덜컥.
“다들 오셨군요.”
그때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섰다.
백제운 PD.
전아름 작가.
“안 오신 분, 손? 예. 없는 것 같네요.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전 이번 <알고 있는가>의 연출을 맡은 백제운 PD입니다. 반갑습니다.”
짝짝짝짝.
“저는 <알고 있는가>의 작가 전아름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짝짝짝짝.
이윽고 들어선 이 드라마의 공동선장, 제운과 아름의 소개 속에 박수가 울려 펴졌다.
이어서 각자 배우들의 소개가 이어지고, 도윤 역시 자신 차례에 인사를 마쳤다.
다른 배우들의 소개가 역시 모두 끝나자 제운이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안팎으로 우리 드라마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가 오가는 거, 알고 있습니다. 제작비도 부족하고, 작가는 데뷔작에, 편성 시간대도 애매하고, 심지어 PD는 한번 밉보였다가 쫓겨나고 간신히 복귀한 사람이죠.”
자신의 치부까지 서슴없이 드러내는 제운.
그 모습에 배우 몇몇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저는 여기 계신 배우분들이야말로 최고의 배우분들이라 믿습니다. 왜냐하면 절 믿어주셨으니까요. 그러니 저 역시 좋은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운의 눈은 진지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안다.
밉보여서 밀려났다뿐이지, 제운은 실력 충분한 PD라는 것을.
아름 역시 마찬가지.
여기 있는 배우들 몇몇은 ‘대본’의 매력에 빠져 캐스팅 제안에 응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상황이 열악하긴 하지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주신다면 충분히 좋은 결과 있을 거라 약속드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배우.
여전히 의문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배우.
속으로 비웃는 배우, 아니 태주.
그리고.
‘더 크게 성공할 겁니다.’
자신이 알던 <알고 있는가>보다 더 크게 성공시킬 거라 다짐하는 도윤.
아직은 합치되지 않은 생각들이 얽히는 가운데.
“오늘 리딩은 중간 10분 휴식시간 제외하면 끊는 거 없이 쭉 갑니다. 아울러 리딩 결과에 따라 대사가 일부 수정되거나 변경될 수 있는 점, 참고 부탁드릴게요.”
제운과 아름이 착석했고.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조연출, 지문 부탁합니다.”
드디어 첫 리딩이 시작되었다.
* * *
리딩 현장은 언제나 뜨겁다.
PD의 성향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의 PD들은 첫 리딩에 꽤 공을 들이는 편이다.
단순히 배우들을 한데 모으는 것뿐만이 아니라 배우 간의 호흡을 체크할 수 있고, 배역의 싱크로율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재야. 오늘 이거라도 들고 가. 응? 엄마가 미안해. 어제 월세 내는 바람에 이것밖에 안 남았어. 이걸로 차비하고 밥 사 먹어. 알았지? 긴장하지 말고.”
“아, 엄마. 이걸 왜 줘. 엄마 써야지.”
“엄마는 괜찮으니까 가서 면접 잘 보고 와. 배곯으면 고달프다. 자고로 든든해야 말도 잘하고 걸음걸이도 힘찬 거야.”
배우에 대한 판단도 대강 할 수 있다.
배우의 연기는 단 한 개의 배역으로 판단 불가능하다.
어떤 작품에서 멋진 연기를 펼친 배우가 다른 작품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건, 배우마다 지닌 강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연 ‘신민재’ 역을 맡은 태주는…….
“알았어, 알았어. 챙겨갈게. 됐지?”
강점이 없어 보인다.
그래도 연기 경력이 있어서 전체적으로 아주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엄마, 밥 잘 챙겨 먹어요. 가서 열심히 하고 올…….”
“잠시 끊고 갈게요. 서태주 배우님. 좀 더 절박하고 불안한 느낌으로 갑시다. 지금 느낌은 생애 첫 면접을 앞둔 ‘신민재’ 느낌이 전혀 안 살아요.”
캐릭터 분석.
배우의 기본이자 배역이 정해지고 대본을 손에 쥔 그 순간부터 놓지 말아야 할 것.
때문에 리딩 날이면 어느 정도 기본적인 분석은 끝나야 하는데-
“다시 가볼게요. 선배님, 죄송합니다.”
태주는 그게 아니었다.
“아유, 아닙니다. 우리 백 PD님이 항상 고생이죠.”
그리고 PD의 사과를 받아 한마디 툭 던지는 원로 배우 ‘이옥주’.
방금까지 ‘신민재’와 대화를 나누던 ‘엄마’ 역할의 원로 배우가 마치 들으라는 듯 던진 그 말에 태주의 속이 타들었다.
‘하, 시발.’
그리고 결국 제운이 보다가 못해 그냥 씬을 넘긴 건 이후로도 세 번의 재시도를 한 후였다.
‘돌겠네. 저런 애를 주연으로 데리고 계속 가라고?’
요새는 욕을 하도 먹어서 좀 나아졌다지만 아이돌 가수 출신 배우의 연기력은 어지간해서는 다른 배우들을 따라가기 힘들다.
때문에 정말 뼈를 깎는 노력으로 임해도 모자랄 판인데, 지금 제운이 보기에 태주는 캐릭터 분석이 전혀 안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러다 시간 다 가겠네. 마지막 대사 두 줄은 스킵할게요. 바로 다음 씬 갑시다.”
결국 스킵된 대사.
서태주는 당황했지만 제운은 볼 것도 없다는 듯 속전속결로 넘어갔다.
그리고 제운의 눈엔 기대감이 깃들었다.
바로 도윤의 차례였기 때문이다.
‘얼마나 준비했는지 한번 볼까.’
어차피 뽑을 생각으로 시켜본 지정연기에서 제운과 아름 둘을 경악시킨 도윤.
그래서 방금 태주가 리딩할 때와 달리 비교할 수 없는 기대감과 함께 제운이 입을 열었다.
“지문 들어가 주세요.”
“네. 씬 4.태진랩 사무실. 낮. 오늘따라 분주한 사무실. 자재관리부 강영준 대리가 출근 후 정장재킷을 벗은 뒤 옆자리 과장에게 묻는다.”
그리고 도윤은.
“아침부터 또 시작이네요.”
다른 배우들이 내뿜은 열기를 대번에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사장님이 또 일을 치신 겁니까?”
“내 말이. 하여간, 이놈의 회사 계속 다녀야 하나 싶다.”
“어제까진 잠잠했는데요.”
10년을 기다린 자신의 ‘연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발성.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
막 출근한 직장인에게서 느껴지는 약간의 숨 가쁨.
거기에 관심을 보이면서도 눈으로는 자신이 오늘 업무를 체크하는 직장인의 디테일까지.
‘그렇지!’
작가 아름은 속으로 환호했다.
작가에게 가장 기쁜 일이 바로 이거다.
자신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캐릭터가 뛰어난 배우를 통해 구체화되는 것.
지금 도윤은 아름이 상상한 ‘강영준 대리’를 완벽하게 구현해 내고 있었고.
‘이 맛이구나.’
신인 작가 아름은 난생처음 느껴보는 짜릿함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1초라도 더 빨리.
아니, 하루 종일 도윤의 대사를 듣고 싶을 정도다.
“나야 모르지. 인사팀에서 일정 공유 안 해주는 거 어디 하루 이틀이야?”
“이번에는 어디랍니까?”
“영업부. 보나 마나 이만춘 부장 그 양반이 또 징징거렸겠지.”
“또 시작이네요. 그분.”
“내 말이. 지가 관리 못 해서 애들 나가는 건 모르고 맨날 인력 타령이지.”
덤덤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대화 속에 언급된 ‘이만춘 부장’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듯한 톤.
덕분에 ‘이만춘 부장’ 역을 맡은 형원이 잠시 놀란 건 덤이다.
“아. 강 대리. 그리고 이따 시간 되면 면접 오는 애들 잘 보라고.”
“영업부 쪽 면접 아니었어요?”
“아까 부장님 영업부 면접 이야기 듣고 사장님 만나러 갔어. 혹시 아냐? 하나 이쪽으로 낚아채 올지? 강 대리 너도 솔직히 하나는 있어야지. 대리씩이나 달고 부하직원도 없다는 게 웬 말이야?”
그리고 새어 나오는 ‘강영준 대리’의 들릴 듯 말 듯한 옅은 한숨.
“그러게요. 열심히 할 놈보다 버틸 놈이 필요한데.”
제운은 씩 웃었다.
‘역시.’
디테일이 훌륭하다.
마치 정말 일에 치여 살고 어느새 염세적으로 변한 ‘강 대리’ 같은 모습.
그야말로 완벽한 분석이다.
제운과 아름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던 캐릭터 컨셉 그대로다.
대본을 찢고 나온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심지어 받아주던 ‘진 과장’ 역의 배우도 꽤 흥미롭다는 표정이었고-
‘꽤 하는데.’
‘소문이 다가 아니네.’
다른 배우들 역시 도윤을 향한 시선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완벽한 캐릭터 분석.
그 말 외엔 더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혹시 알아? 똘똘한 놈 들어와서 우리 강 대리 어깨 짐 좀 덜어줄지?”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 그리고 저 오후에 재연실업 납품 건으로 미팅 있습니다. 미팅 끝나고 다시 복귀할게요.”
그리고 신이 마무리된 직후.
“좋네요. 바로 다음 신 들어갑시다.”
제운은 방금과 달리 단 한 번에 오케이사인을 보내며 아주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이제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도윤을 향한 시선이 달라졌다는 걸.
그건 태주도 마찬가지.
‘이 새끼 봐라.’
태주의 마인드는 그랬다.
드라마 처음 찍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첫날에는 눈도장만 찍고 천천히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캐릭터 분석이 다소 부족하다는 지적이야 받았지만 어차피 갑은 자신이다.
이번 드라마에 제작비를 잔뜩 투입한 소속사가 자기 등 뒤에 있는데 두려울 건 없다.
하지만.
앞으로 자신과 계속 부딪쳐야 할 녀석이 저렇게 주목을 받는 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일.
‘그때도 그랬었지.’
이런 가운데 도윤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아무렇지 않은 척 싱긋 웃는 태주를 보고 속으로 피식거렸다.
회귀 전.
<알고 있는가>의 첫 리딩 현장.
그때도 태주는 도윤을 보며 적의를 불태웠다.
하지만 도윤은 그걸 몰랐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주연보다 조연인 자신이 더 주목받는 사실에 우월감에 젖어 있기 바빴다.
그래서 촬영이 끝날 무렵 웃으며 다가온 태주가 파티에 가자고 할 때도 아무런 의심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제야 날 알아보는구나 하며 자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떨까?’
도윤은 저 웃는 얼굴 뒤에 숨은 태주의 본모습을 떠올리며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