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12화 (12/200)

12.팀 최도윤(2)

작은 폭풍이었다.

대중들은 모르지만 도윤이 황 PD의 <악마의 세계>를 거르고 백 PD의 <알고 있는가>를 택한 건 업계에서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미친놈 아냐? 황 PD랑 유 작가 작품을 까고 백 PD를 골랐다고?”

“접대라도 거하게 받았나.”

“싸가지가 없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사리 판단을 더럽게 못 하는 건가.”

“굴러들어온 복을 아주 홈런을 날려 버리네.”

“황 PD 작품이면 단역도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야지. 그리고 유정연 작가가 캐릭터를 좀 잘 살려? 출연만 했다 하면 짤방만 수십 개 기본인데.”

대부분은 부정적인 반응.

하지만.

“대본이나 한번 보자고. 얼마나 대단한 작품인지.”

“나쁘지 않은데? 신인답네. 톡톡 튀어. 메인 작가 하나뿐이라고 했지?”

“꼴에 주연이 아이돌이네. 화제성은 있겠는데?”

그런 배경에 관심이 쏠리자 <알고 있는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늘었다.

도윤이 바꾼 미래였다.

원래대로였다면 <악마의 세계>에서 제안이 오기는커녕 어쩔 수 없이 <알고 있는가>에 출연했을 도윤.

하지만 이번에는 ‘유명 PD의 제안을 깐 배우’이자 주연 못지않은 중요 역할을 맡게 되면서 <알고 있는가>는 생각지도 못한 반사이익을 얻었고.

“진짜 살았네요.”

“그러게. 와, 이거 진짜…….”

PD 제운과 작가 아름은 캐스팅 보드를 바라보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관심을 가지는 배우들이 늘어나며 자연스레 캐스팅도 이전보다 원활해졌다.

주연은 이미 확정됐고, 가장 중요한 조연도 정해진 상황이지만 나머지 배역들이 문제였었는데…….

“최도윤 배우한테 나중에 한턱 쏴야겠는데. 이상한 쪽에서 관심이 끌렸어.”

“전 언제든지요. 3박 4일도 마시라면 마실 거예요. 아, 이제야 좀 윤곽이 보이네요!”

물론 출연료 문제를 포함해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시작 전부터 주변에서 망조 운운하는 것치고는 나쁘지 않다.

이런 가운데.

“최도윤?”

유명 남성 아이돌그룹 ‘VIC’의 리더, ‘서태주’는 <알고 있는가>의 주연인 자신 다음으로 캐스팅되었다는 도윤의 이름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요새 인기 좀 끄나 봐. 그 뭐더라…… <그대 내 손에>였나?”

태주의 매니저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다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다. 뭐 미니시리즈라던데. 그 있잖아, 아줌마들 좋아하는 드라마.”

“아.”

태주는 알 만하다는 듯 피식거렸다.

본능적인 가늠이다.

언제나 돋보여야 할 자신에게 위협적인가, 위협적이지 않은가.

태주는 급이 안 맞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태주는 탑급 아이돌그룹의 리더로 5년을 보냈고, 기획사의 사업 다각화에 맞춰 연기에 도전한 배우.

물론 아이돌그룹 활동을 하다가 배우에 도전하는 아이돌들은 대개 고운 시선을 받지 못한다.

연기력보다는 화제성, 소속사의 자금력을 활용하고.

제작사들은 이를 환영한다.

안 그래도 <알고 있는가>는 제작비 부족으로 꽤 난항을 겪고 있다.

아마 태주의 기획사에서 태주를 주연으로 투입시키는 대가로 제작비를 지원해 주지 않았다면,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때문에 이번 주연은 ‘기획사 빨’이 조금 컸던 셈.

태주의 연기력은 아주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원톱 주연이 될 만한 수준은 아니었으니.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그 최도윤이라는 녀석은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보였다.

슥슥.

태주가 손등을 긁으며 물었다.

“리딩이 언제지?”

그 모습에 매니저의 눈이 이채를 띠었으나, 이내 대답이 흘러나왔다.

“보름 뒤. 5월 12일.”

“별일 있으면 전화해. 나 중국 좀 나갔다 오려고. 한 일주일? 사장님한테는 말해놨어.”

“또?”

“알잖아. 거기 내 친구들 많은 거.”

씩 웃은 태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태주의 매니저, 용석은 그런 태주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지만-

“그래, 알았다.”

“뭘 그렇게 봐. 내가 가서 뭐 사고 칠 것도 아니고.”

태주는 피식거리며 용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용석은 태주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다친 건가?’

어제까지만 해도 못 보던 붕대가 보였다.

하지만 그걸 묻기도 전에 태주는 이미 대기실을 나선 뒤였다.

‘정신머리 없는 새끼.’

용석은 문이 닫히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천지에 리딩 앞두고 놀러 가는, 그것도 해외로 놀러 가는 배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보다 더 걱정되는 건 따로 있었다.

‘제발 별일 없이만 돌아와라.’

언제나 자신만만한 태주.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른 배우를 담당하다 온 용석은 이쪽 바닥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 *

도윤이 일으킨 작은 폭풍도 잠시 잦아들고.

슬슬 전사적(全社的)인 차원에서 <알고 있는가>에 대한 본격적인 지원이 시작되었다.

그야말로 이엔 엔터가 이번 드라마에 사활을 걸었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였다.

안 그래도 도윤이 <악마의 세계>를 까고 듣도 보도 못한 신인 작가의 작품에 합류했다는 소문은 업계 전체에 쫙 퍼져 있는 상황.

이런 가운데 이엔 엔터 회의실에선 도윤과 성호가 새 스타일리스트와의 미팅을 기다리고 있었다.

“형, 안 쉬세요?”

“네 눈엔 내가 뭐 하는 것 같냐.”

“같은 대본만 벌써 200번은 넘게 보시는 것 같은데요.”

“배우의 본분을 다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가서 커피 사 와. 네 거 빼고. 디카페인으로 사 와라. 바닐라시럽 한 펌프 넣고. 전에 거는 이제 안 마셔.”

지랄도 이 정도면 상당히 디테일하다.

“곧 새 스타일리스트분 올 시간인데요.”

전속 스타일리스트.

회사에서 약속한 지원 중 하나.

그 말에 도윤은 시계를 힐끗거렸다.

6시 1분 전.

약속 시간은 6시.

도윤이 성호에게 물었다.

“어떨 것 같냐?”

“저야 모르죠. 안 봤으니까.”

아까의 복수일까.

도윤은 그런 성호를 흥미롭다는 듯 바라봤다.

“요새 편하지? 아예 쭉 편해지는 건 어떠냐?”

“혀, 형?”

가끔 반항해서 그런지 더 괴롭히는 맛이 있는 녀석이다.

도윤이 대본을 책상 위에 툭 던지고 성호에게 다가가던 그때였다.

똑똑.

문이 열리고.

째각.

막 시침이 6시를 정확히 가리킬 때.

한 사람이 나타났다.

막 성호의 어깨를 잡아가던 도윤, 그런 도윤의 손을 피해 몸을 움츠리던 둘의 시선이 문 쪽으로 돌아갔고.

철그럭, 철그럭.

새파란 배기팬츠에 탱크톱, 파란색과 빨간색이 조합된 재킷.

귀에 보이는 피어싱.

손목에 언뜻 보이는 헤나(Henna).

그냥 봐도 패션이 범상치 않은 여자가 척척 걸어들어와 고개를 까닥거렸다.

“여기 맞죠?”

“……예?”

성호가 멍하니 반문하고.

“최도윤 배우님 미팅 장소요. 스타일리스트 채용 건으로 왔는데, 제가 잘못 찾아왔나요?”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성호는 자신의 어깨에 닿기 직전인 도윤의 손을 황급히 밀어내고 더듬거렸다.

“그, 그럼…… 오늘 오시기로 한…….”

“네. 제가 남궁민주예요. 최도윤 배우님 전속 스타일리스트. 얼굴 보니까 맞는 것 같은데.”

남궁민주.

그녀는 문득 둘을 보며 물었다.

“조금 이따 들어올까요?”

“아, 아니에요! 앉으세요!”

성호는 기겁하며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고, 민주는 어깨를 으쓱이곤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때까지도 아무 말 않던 도윤이 시계를 바라보며 물었다.

“딱 맞춰 왔네요.”

“제가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사이 좋아 보이시던데.”

만만찮다.

도윤은 첫인상에 대한 평가를 마쳤다.

그러나 실력만 좋다면 상관없다.

애초에 성호처럼 예전에 알던 사이도 아니고, 심하게 문제만 있는 게 아니라면 오케이다.

패션은 좀 남달라 보였지만.

하긴, 스타일리스트인데 패션이 남다르면 또 어떤가.

오히려 장점이면 장점이겠지.

심지어 배우인 도윤조차 소화가 어려울 것 같은 패션을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연출해 내고 있다는 점에서 신뢰가 가기도 한다.

하지만 평가를 완전히 마치기엔 이르다.

“소개 좀 부탁드릴게요.”

“남궁민주예요. 남 씨 아니고 남궁 씨에요. 그리고 음…… 잘하겠습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도 아니고 ‘잘하겠습니다’라니.

인상답게 담백한 소개다.

좀 뭐라고 해야 할까.

“당당하네요.”

“그런 말 많이 들어요.”

피어싱이나 체인 등 힙한 패션에서 느끼는 편견과 달리 어투 자체는 그다지 예의가 없거나, 딱딱한 건 아니다.

오히려 도윤의 얼굴을 보며 눈을 빛내더니.

“듣던 대로 최고의 마네킹 같아요.”

대뜸 비주얼을 칭찬했다.

“네?”

“배우님이요. 아, 너무 딱딱한가요?”

“편하게 부르세요.”

“그럼 오빠라고 할게요. 오빠도 말씀 편하게 하세요.”

호칭도 순식간에 자연스레 정리되고.

“날카롭고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지만…… 코디하기 나름이죠. 오빠는 좀 포멀하게 연출하면 충분히 날카로움도 감추고 느낌도 다양해질 것 같아요. 아니면 헤어를 좀 댄디컷으로 바꿔서 부드러운 느낌을 주거나, 브래드컷으로 자유로운 이미지를 주거나. 이미지 고민, 해본 적 없으세요?”

이야기를 주도한다.

어느새 둘은 민주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있죠. 아니, 있지. 인상이 차갑다고 들으니까.”

배우에게 인상은 배역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

어떤 배우는 타고난 인상 때문에 배역이 고정되고, 이미지가 고착화되어 연기 변신을 시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도윤의 대답에 민주가 곧바로 꺼낸 건 두꺼운 파일철이었다.

“제 포트폴리오예요. 오빠 드라마 나온 거 돌려보면서 이번 드라마 코디랑 샘플 몇 개 준비해 봤어요.”

촤르륵.

포트폴리오를 펼친 도윤은 꽤 놀랐다.

도윤이 출연한 <그대 내 품에>는 물론이고 첫작 <에이전트 윈터>의 모든 컷들이 카테고리별로 정리되어 있었고, 그 옆엔 예쁜 글씨체로 민주가 적어 놓은 분석이 보였다.

“대단한데.”

도윤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옆에서 슬쩍 들여다보던 성호도 마찬가지.

“우와.”

다만 성호답게 도윤의 것보다는 좀 더 날것의 반응이다.

“이번 작품, 오피스 드라마라 들었어요. 배역도 꽤 차가운 역할이라 들었고. 그래도 인간미가 중간중간 있다고 들었는데, 그때는 조금 초췌하고 흐트러지게 코디하면…….”

또 이어지는 설명.

파일철 뒤쪽에는 도윤이 찍을 <알고 있는가>에 대한 컨셉 의상에 대한 스케치들이 보였다.

꽤 좋은 솜씨다.

설명도 전혀 지루하지 않고 꼼꼼한 편.

“어차피 대다수의 의상은 수트나 셔츠 차림이지만, 꽤 비중 있는 조연이라 혹시 일상 쪽도 찍게 되면 이런 스타일들은 어떨까 해서 해봤어요.”

좋다. 당장 평소에 입고 다녀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스타일들이 한가득이다.

도윤은 꽤 실력 좋은 스타일리스트를 만난 거라 확신했다.

“좋네.”

설명이 끝난 후 흘러나온 도윤의 반응.

민주가 물었다.

“그럼 내일부터 출근이죠?”

“이미 확정된 거 아니었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주거니 받거니.

대답 빠르고, 행동도 시원시원하다.

도윤과 성호는 민주와 차례로 악수를 나눴다.

나쁘지 않다.

이제야 퍼즐이 좀 모인 기분.

회귀 전에는 전속 스타일리스트는커녕 사고 터져서 매니저마저 잃었던 걸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그럼 이제 우리도 ‘사단’ 만들어진 건가요? ‘최도윤 사단’?”

성호가 잔뜩 들뜬 기분으로 말을 꺼냈다.

하지만 도윤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사단이 뭐냐. 좀 더 트렌디한 표현 없어?”

“음…… 그럼 더(The) 최도윤?”

그 말에 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본 내가 미안하다.”

그때 민주가 꽤 좋은 의견을 내놓았다.

“‘팀 최도윤’은 어때요?”

“그거 좋네.”

“아니 형. 저는 왜 한숨이고 이 의견은 왜 바로 오케이에요?”

도윤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더 좋으니까.”

“서러워서 못 살겠네.”

성호는 투덜거렸지만, 곧바로 ‘팀 최도윤’을 몇 번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어감 좋네요.”

“너답지 않게 납득이 빨라서 좋다.”

그렇게 ‘팀 최도윤’이 결성되었고.

“저, 민주 씨. 뭐 좋아해요? 혹시 못 먹는 거 있어요?”

예정된 회식을 위해 이동하던 중 성호가 묻자 민주가 바로 답했다.

“전 다 잘 먹어요. 아, 파스타 종류는 별로 안 좋아해요.”

파스타 싫어한다는 사람은 또 처음이다.

“포크 불편해서 젓가락 좀 달라고 하니까 같이 먹던 친구가 뭐라 타박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싫어했어요.”

하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것도 그럴 듯한.

“가장 좋아하는 건…… 선짓국이랑 길거리에서 파는 번데기요. 통조림에 담긴 건 별로.”

덤덤한 대답에 두 사람은 멍해졌다.

취향 참 구수하다.

하지만 도윤은 그런 모습이 더욱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오히려 빨리 친해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내친김에 물었다.

“취미는? 좋아하는 거 있어?”

서로 잘 모를 때 가장 편하게 꺼낼 수 있는 질문.

“삼국지요.”

“응?”

“네?”

하지만 예상 외의 대답에 도윤과 성호, 둘은 비슷한 표정을 지었고.

“삼국지 읽는 거요. 게임도 좋아하고, 토론도 좋아하구요. 오빠는 삼국지 안 좋아해요?”

그게 왜 이상하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당당히 말하는 민주.

아무래도-

다소 독특한 친구가 합류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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