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러브콜(3)
“다시 봐도 좋은데?”
스타 작가, 유정연의 첫마디였다.
노트북에선 <그대 내 품에>에서 도윤의 컷만 편집한 영상이 막 끝난 참이다.
“유 작가가 그렇게 말하는 건 또 오랜만인데.”
“사실이잖아. 황 PD도 봤을 거 아니야?”
“봤지. 유 작가가 하도 그렇게 흥분해서 나한테 연락을 했는데 안 볼 수가 있나.”
그리고 반대편에서 흥미롭다는 미소를 짓는 사람은 드라마 쪽에서는 잔뼈가 굵고 여러 히트작은 연출해낸 황선욱 PD.
단독으로 움직여도 수많은 배우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두 사람이 새 드라마를 위해 한데 뭉쳐 논의하는 이 자리에서-
“훌륭해. 신인치고는 분명히.”
도윤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음. 그나저나 소문이 좀 애매하던데. 싸가지가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거 다 옛날 일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후자는 주로 이번에 같이 촬영한 사람들.”
“소문은 상관없어. 어차피 배우는 연기로 말하는 거니까.”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정연에 짐짓 인상을 찌푸려 보이는 선욱.
“촬영장 분위기 관리할 내 생각은 안 해?”
“우리 황 PD가 그거 가만히 두고 보겠어?”
정연의 말에 선욱이 피식거렸다.
“하긴.”
감히 이 드라마 바닥에서 선욱에게 기싸움을 걸 녀석은 몇 안 된다.
어지간한 경력의 배우들도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하는 게 두 사람의 경력.
사실 애초에 이 바닥에서 배우가 PD에게 싸움을 거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지만.
“잡아야겠네. 감정선도 좋고. 비주얼이야 뭐…….”
여하튼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이야 연기력도 주목을 받지만, 애초부터 저 훌륭한 비주얼로 시선을 끈 배우니.
특히나 이번 드라마 <악마의 세계>의 작가 정연이 생각해둔 배역에 도윤의 이미지는 너무나 잘 어울렸다.
“최도윤, 이전에 연기 경력 하나도 없다고 했지?”
“들어보니까 원래 그냥 학교 다니던 대학생이었다는데. 경영학과. 그러다 <에이전트 윈터>에서 주목 좀 받았지. 여기 <그대 내 품에>에서 터지기 시작한 거고.”
“괴물이네.”
정연의 평은 간단하고 확실했다.
정연이든 선욱이든 둘이 아는 한 연기 경력도 없이 이렇게 뜬 배우는 얼마 없다.
그리고 그들 중 확실한 연기력은 갖춘 배우는 더더욱 없다.
“스케줄은 어떻대?”
선욱은 수철과의 통화를 떠올리고 답했다.
“바로 오케이할 줄 알았는데, 물어보니까 차기작 논의 중이라던데.”
“너무 싸 보이긴 싫다 이거지?”
“그렇겠지. 알잖아. 이엔 거기 최도윤 하나뿐인 거.”
정연은 피식거렸다.
그래도 최소한의 자존심은 있다는 거겠지.
“그나저나, 강미나 걔가 침 발라둔 거였으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빼앗는 재미가 있잖아.”
“아직도 강 작가 신경 쓰여?”
“신경이라니. 그냥 가끔 거슬리는 거지. 걔가 아카데미 동창회에서 좀 나대거든. 아줌마들이나 좋아하는 미니시리즈나 쓰는 주제에.”
‘나도 미니시리즈 좋아하는데.’
선욱은 취향을 드러내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강미나와 유정연의 신경전은 이 바닥에서도 꽤 유명한 일화.
굳이 그 싸움에 코멘트를 달고 싶진 않았다.
선욱은 다시 원래 이야기를 꺼냈다.
“여하튼 좋네. 캐스팅하자고. 연기는 봐야겠지만.”
더군다나 도윤의 나이 스물다섯.
나이를 생각하면 앞으로의 커리어는 탄탄대로다.
그래서 더욱 탐이 났다.
PD는 자신의 라인에 탄탄한 유망주 한 명을 추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작가는 배역에 더없이 훌륭하게 부합하는 배우를 찾았다는 생각에.
“평판 문제야 뭐, 우리가 컨트롤하면 될 일이고. 안 좋은 싹이 좀 보인다 싶으면 알아서 납작 엎드리게 하거나 하차시켜야지.”
그렇기에 아직까지는 안 좋은 소문이 드문드문 들린다 할지라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정연과 선욱은 이런 부분에선 생각이 일치했다. 어떤 배우든 일단 연기력에서 최상의 결과를 낼 수 있으면 불러본다.
나머지는 알아서 핸들링한다.
스타 작가와 스타 PD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여하튼 둘이 의기투합한 이상 수많은 기획사와 배우들이 출연하고자 온갖 애를 쓸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이미 둘의 눈에 든 도윤은 큰 횡재를 한 거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둘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이이잉.
“마침 왔네.”
선욱은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씩 웃었다.
진동하는 휴대폰 화면에는 ‘이수철’ 석 자가 적혀 있었다.
“이번에는 저장했네?”
“가치가 있으니까.”
어깨를 으쓱이던 선욱은 전화를 받았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일부러 모른 척, 상대의 애를 태우기 위해 자신의 이름도, 상대의 이름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선욱이기에 보일 수 있는 여유만만한 태도.
그러나.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곧 그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 * *
하루 전.
“도윤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응? 이거 진짜 말도 안 되게 큰 기회야. 편성도 황금시간대에, 16부작 내내 너 얼굴 나와. 심지어 대사 봐. 미쳤다고. 캐릭터도 잘만 하면 주연보다 더 인기 끌 수 있어.”
애원하듯 말하는 수철.
어지간해서는 이러지 않는 수철이 이렇게 나온다는 건 상황이 그만큼 당황스럽다는 이야기다.
“도윤아. 이거 진짜 잘 생각해야 한다. 괜히 거절하면 너만 힘들어져. 우리 회사 작다. 나랑 대표님, 아니 형님이랑 맨손으로 세운 회사야.”
수철의 다급한 말이 이어졌다.
“3년 전이랑 지금이랑 큰 차이 없었고, 이제 너 오면서 좀 살아나려고 하고 있다. 근데 알지? 이 바닥에서 PD나 작가한테 밉보이면 못 살아남는 거.”
지금 수철이 말하는 건 회사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왜 모르겠나.
도윤이 그걸 가장 절절하게 경험했는데.
자신의 업보 때문이었지만, 도윤은 마약 사건이 터지고 이엔 엔터가 끝내 문을 닫는 걸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
“굳이 이 작품으로 성공해야 하나요?”
그럼에도 도윤의 태도는 단호했다.
마치 그렇게 만들 수 있다는 듯이.
“야, 도윤아.”
물론 두 사람은 미칠 지경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선욱이랑 유정연이라고!’
단역도 아니고 조연이다.
심지어 두 사람이 먼저 원하기까지 했다.
흥행이 보장된 거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분량도 쏠쏠한데 이걸 거절한다?
이엔 엔터 같은 영세 기획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수철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윤은 수철이 직접 데리고 온 배우다.
처음에는 모델로 써볼까 하고 데려왔지만, 단역으로 주목받게 되면서 계획을 수정했다. 그리고 지금 그 계획이 조금씩 결실을 맺어가던 상황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유는 묻고 싶었다.
“도윤아. 혹시 거절하는 이유가 뭐니?”
자신의 관점에서 그런 이유 따윈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물어는 봐야겠다.
그래야 이 속이 조금 풀리든 더 답답해지든 결정이 날 테니까.
“하고 싶은 작품이 있어서요.”
도윤의 대답에 수철이 바로 물었다.
“그게 뭔데?”
“<알고 있는가>요.”
순간 수철은 멈칫했다.
작품이 바로 떠오르지 않아서다.
그러다 기억을 헤집어 <알고 있는가>가 쌓여 있던 대본 중 하나의 겉면에 적힌 이름이었다는 걸 깨달은 수철이 기함을 토했다.
“<악마의 세계>를 포기하고…… 그걸 들어가겠다고?”
“포기한 적 없는데요. 처음부터 봐둔 거였어요. 이번 드라마 종방되기 전부터. 전 그 대본이 더 마음에 들어요.”
도윤의 말에 흐르는 묵직한 적막.
동민이든 수철이든,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을 만한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
덕분에 지금까지 입 한번 벙긋 못 하고 소파 구석에 처박혀 있던 성호는 죽을 맛.
‘역시 최도윤이야. 미친놈이었지.’
보너스 하나 준다고 사람이 달라질 리 있겠는가.
지금 성호가 봐도 <악마의 세계>를 거르고 <알고 있는가>를 하겠다고 나서는 도윤은 제정신이 아니다.
<알고 있는가>.
<악마의 세계>에 비하면 더없이 ‘떨어지는’ 급의 작품.
작가는 신인.
PD는 한번 밑바닥을 찍어본 사람.
방송사는 케이블.
덕분에 하겠다고 나서는 배우가 별로 없어 돌고 돌다가 이엔 엔터까지 흘러들어왔다.
특이하게도 주연은 이미 확정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나머지 캐스팅에서 난항을 겪는다고 한다.
물론 평소의 이엔 엔터라면 덥석 물었을 것이다.
도윤이 기억하는 미래에서도 그랬다.
현시점에서 <악마의 세계>를 뺀다면 할 수 있는 작품은 <알고 있는가> 외엔 없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이엔 엔터가 찬밥 더운밥 곰팡이 핀 밥 따질 겨를이 아니라지만, 지금은 <악마의 세계> 캐스팅 제안이 들어왔다.
고민의 여지조차 없는 상황인데-
왜 저기 앉은 차가운 인상의 배우는 자꾸 <악마의 세계>를 거절하고 있는 걸까.
연쇄살인범을 쫓는 스릴러물.
어두운 배경에 더없이 잘 녹아들 마스크인데. 화제성 면에서도 비교할 수조차 없다.
“도윤아. 차라리 오디션이라도 한번 보자. 혹시 떨어지면 그다음에 <알고 있는가>하면 되잖아?”
그래서 수철은 다급히 절충안을 제시했다.
사실 절충안의 탈을 쓴 애원이다.
“그러다 합격하면요? 그땐 발 못 빼잖아요. 그리고 그쪽에서는 절 원하는 거니, 당연히 합격시킬 생각으로 부를 테고요.”
“그건 그런데…… 후우.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똑같이 조연할 거면 거기 가야지.”
“하고 싶은 작품 두고 다른 작품 하는 거, 마음에 안 드는데요.”
“도윤아. 때로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할 때가 있는 거야.
하지만 뒷말은 삼킬 수밖에 없었다.
수철로선 도저히 그 말만큼은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수철의 커리어에 큰 타격을 입힌 작품.
수철은 곧바로 생각을 털어내고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그때 도윤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마음 정했습니다. 대표님, 팀장님.”
다시 침묵.
어떤 말이 적절할까.
수철이 설득의 언어를 떠올리느라 머리를 굴리던 그때였다.
“이 팀장. 지금 <알고 있는가> 대본 여기 있나?”
이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대표 동민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