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7화 (7/200)

7.러브콜(1)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자, 다들 잔 들고! 위하여!”

“위하여!”

드디어 쫑파티가 열렸다.

한번 탈환한 수목극 시청률 1위 고지를 꿋꿋하게 지켜내며 거침없이 달린 <그대 내 품에>.

-최도윤 진짜 미쵸따

-퍞퍄퍄 이건 소장용으로 DVD 나와야함

-대본집 재고 아직도 없네;; 중고로 팔 갤럼 없냐?

-형차니랑 혜선쓰 짤 쪘는데 가져갈 사람?

-아 이제 내일 종영임 ㅠㅠㅠㅠㅠㅠㅠ 도윤이 못 잃어 ㅠㅠㅠㅠ

-DVD 모금계좌 열었어! 인원 차면 예약 못 받으니까 다들 미리미리 해놔!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드라마는 이제 종영을 앞두고 시청자들의 아쉬움을 자아냈다.

주조연의 적절한 비중, 훌륭한 연기력, 뛰어난 스토리의 3박자가 잘 어우러진 수작이란 평가는 덤.

여기에 여주를 향한 순애보와 아프고 억눌린 성장환경의 ‘형찬’ 배역을 놀라울 정도로 잘 소화한 도윤의 인기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미 업계 사람들 다수가 도윤을 주목하는 상황.

광고주들 역시 도윤의 차가운 마스크에 눈독을 들였고.

예능 PD들은 도윤의 반전매력을 탐내며 섭외를 타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윤은 이 모든 제안에 대한 결정을 보류했다.

당장 노를 젓기엔 아직 물이 얕다.

둑이 터진 것처럼 물이 밀려들어 올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더 힘차게, 더 바쁘게 노를 저을 수 있을 테니까.

“다들 고생들 하셨습니다.”

“에이, PD님이 제일 고생 많으셨죠.”

“제가 한 게 뭐 있나요. 다 우리 배우들 덕인데. 안 그런가요?”

PD 주섭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배우들의 빈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이번에도 기대에 훌륭히 부응한 베테랑 차정수.

당차면서도 청초한 모습으로 남성 시청자들을 붙들어둔 한유나.

그리고 ‘개과천선’한 최도윤까지.

주섭은 유독 도윤에게만 넘치기 직전까지 잔을 따라주었다.

반응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도윤은 잔이 넘치려고 하자 허둥대며 입을 가져다 댔고, 그 모습에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오빠, 도윤이 놀리는 거 재미있다. 그치?”

“얘 싸가지 없게 굴던 시절 이야기하면 당황해. 재미있다니까?”

둘은 이제 이름을 스스럼없이 부를 만큼 도윤과 가까워졌다.

물론 좀 늦은 감은 있다.

하지만 그놈의 싸가지 때문에 그 사람 좋다던 주섭이 벼르게 만들고 어지간한 일은 쿨하게 넘어가는 미나까지 열 받게 만들던 녀석인 걸 감안하면…….

‘하여튼 신기하다니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도윤도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모습은 확실히 달랐다.

일시적인 변화일지, 아니면 진짜 그럴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아무튼 좋았다.

여기 있는 모두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그대 내 품에>가 중반 이후 탄력을 받고 1위를 굳히게 된 계기가 바로 도윤 덕이라는 사실 말이다.

원래도 뛰어났던 주연 배우들을 훌륭하게 받쳐주며 열연을 펼친 도윤의 연기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

그 덕에.

“마셔! 마셔! 어허! 이 강미나가 따라주는데 어딜! 그치, 그치. 술이 들어간다, 쭉! 쭉쭉쭉!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오늘 미나의 텐션은 최상이었다.

“작가님 오늘 찐텐이네.”

“그럴 만하지. 처음 1위 하시는 거라잖아.”

“진짜로?”

정수가 유나의 놀랍다는 반응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작품 네 개 하셨는데, 다 2위셨어. 운이 안 좋은 거지. 네 작품 다 경쟁작이 역대급들이었으니까.”

그 말을 들은 도윤은 강미나 작가의 커리어를 떠올렸다.

10년 동안 칩거생활을 하면서도 온갖 드라마를 거르지 않고 본 덕에 머릿속으론 미나의 커리어가 쫙 펼쳐졌다.

‘이 작품 다음이 시청률 20% 넘겼던 <햐안 바람>이었고, 그다음이 케이블에서 5% 기록했던 <너의 머릿속에서>였지? 그다음이…….’

회귀 전 삶의 미나는 <그대 내 품에> 이후로도 몇 작품에서 2위를 차지하거나 심지어 실패하기도 한다.

분명히 시청률이 잘 나왔음에도 실패라는 표현을 쓴 건, 경쟁 상대가 너무 강력했기 때문이다.

도윤의 머릿속엔 한때 언론에서도 흥미롭게 다뤘던 둘의 경쟁 구도가 떠올랐다.

“유정연 작가 때문이지. 매번 앞서잖아요.”

“조심해. 여기서 유 작가님 이름 강 작가님 귀에 들어가면 큰일 난다.”

“그럼 그게 진짜예요? 유 작가님이랑 우리 강 작가님이랑 라이벌…….”

정수와 소곤대던 유나는 헉,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미나는 그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으응…… 1등…… 내가 1등이야…….”

술에 취하면 사람의 억눌린 심리가 나오기도 하는 법.

미나의 경우는 정연이라는 같은 아카데미 출신의 강력한 라이벌에 대한 경쟁심리다.

‘그 뒤로도 계속 유 작가한테 밀리셨지.’

하지만 미래는 바뀌었다.

모든 게 도윤 덕분이라 할 수는 없지만, 이번만큼은 도윤의 공이 지대했다.

단순히 인성만 바뀐 게 아니라 연기력도 하루아침에 좋아지며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어모았으니까.

이른바 명품 조연으로서 말이다.

때문에 어쩌면 도윤은 앞으로 승승장구할 작가와 미리 인연을 맺은 거나 다름없는 셈.

그리고 기쁜 건 마찬가지인지.

“자, 작가님?”

스리슬쩍 도윤 옆에 다가와 도윤의 양 뺨을 잡는 미나.

“우리 도유니!”

혀가 격하게 꼬부라진다.

“우리 도유니…… 이 누나가 우리 도유니 때문에 마음고생한 거 알지? 짜식이 말이야, 얼굴 믿고 막, 막…… 씨, 근데 왜 이렇게 잘생겼냐? 분명 화가 나는데에…….”

눈빛도 격하게 풀린다.

도윤은 생전 처음 보는 미나의 모습에 입을 쩍 벌렸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낄낄대며 그 모습을 지켜보기 바빴다.

“우리 강 작가님, 또 발동 걸리셨네.”

그중 주섭이 제일 신난 표정이다.

“도윤 배우 부럽다. 나도 작가님이 뺨 만져줬으면!”

유나는 진심으로 재미있다는 듯 턱을 그대로 테이블에 괸 채 이 광경을 감상했으며.

“도윤이 더워 죽으려고 하네.”

정수는 맥주를 홀짝대며 기본안주로 나온 팝콘을 와작와작 씹었다.

그리고 유나와 정수가 뭐라 떠들든 도윤만을 바라보는 미나.

미나는 마지막 화까지 열연을 펼쳐준 도윤에게 이미 푹 빠져 있었다.

문제는 벌써 술에 잔뜩 취했다는 것.

웃기게도 술이 좀 들어가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부끄러워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도윤의 뺨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 너 마음에 든다. 알지?”

“가, 감사합니다. 저, 근데 작가님. 볼을 너무 꽉…….”

“아냐고 모르냐고옷. 그것만 딱 대답해에.”

그런 도윤의 모습에 몇몇 스태프와 단역 배우들이 시선을 집중시켰고, 심지어 한유나도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콧대와 눈매.

너무 당황해서일까.

차갑게만 보이던 인상이 오늘따라 부드럽고 경계심 없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런 와중에 집요하게 대답을 요구하던 미나는.

갑자기 스르륵 잠들어 버렸다.

“으응…… 엄마…… 나 1등 먹었어…….”

웅얼대는 잠꼬대까지.

“우리 작가님, 엄청 기분 좋으신가 보네.”

그리고 정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도윤은 일단 잠든 미나의 목을 받쳐 조심스레 쿠션을 끼워준 뒤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지난 삶에서 좋지 않았던 끝맺음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하나씩 바뀌겠지.’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도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시선이 완벽히 달라진 건 아니다.

촬영장엔 정수, 유나, 도윤만 있는 게 아니다.

부모님 배역을 맡은 중견 배우들도 있었고, 도윤과 함께 이런저런 조연들을 맡은 배우들도 있다.

지금 이렇게 웃고 떠들지만 그들 중 일부는 여전히 도윤을 못마땅하게 본다.

당연하다.

한번 박힌 이미지라는 건 쉽게 바뀌지 않고, 설사 그 사람이 바뀌었다고 해도 손바닥 뒤집듯 생각을 바꾸기란 어려운 일.

그러나 도윤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10년의 시간.

도윤은 단지 인내만 한 게 아니다.

생계를 이어가고, 연기에 대한 꿈을 잃지 않기 위해 기다리는 그 시간 동안 쌓아 올린 수많은 경험들.

‘한 번에 나아지길 바라는 건 욕심이지.’

오히려 여기서 다가가 친해지겠다고 손바닥을 슥슥 비비는 건 역효과와 의심만 부를 테지.

겸손한 것과 비굴한 건 천지 차이다.

차라리 촬영 초반으로 회귀했다면 모를까, 중후반부 시점으로 돌아온 이상 더 이상 미련을 둘 필요는 없다.

여하튼, 시작이 아주 좋았다.

술이 쭉쭉 들어갈 만큼.

끊기로 결심한 담배가 당기는 게 조금 흠이었지만 말이다.

* * *

<그대 내 품에> 종방연이 마무리되고.

도윤에겐 레이스를 마친 후 잠깐의 여유가 찾아왔다.

하필이면 촬영 중간에 회귀했던 탓에 미처 바로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수두룩하다.

도윤은 일단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부터 챙겼다.

바로 고향 영주에 내려간 것이다.

고맙게도 성호가 선뜻 나섰다.

고향에 잠깐 다녀오겠다고 하자 어차피 할 일도 없다면서 운전기사를 자처한 것.

‘안 태워주면 나중에 두고두고 지랄하겠지.’

개과천선이니 뭐니 해도 도윤의 지난 1년을 바로 옆에서 뻔히 지켜본 성호다. 그래서 단단히 박힌 착각은 꽤 오래갈 것 같았다.

‘뭐, 그래도 나 없으면 안 되는 형이니.’

그래도 요새는 기분이 좋았다.

아직 매니저라는 직업에 자부심이 충만할 2년 차에 막 접어든지라 <그대 내 품에>로 인기가 상승하며 주변에서 자기 배우 칭찬이 들려오는데 기분이 안 좋을 리 없었다.

원래 배우에 대한 평판이나 인기 상승은 곧 매니저에 대한 칭찬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법.

‘그래도 진짜 바뀌긴 한 건가?’

성호가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뒷좌석에서 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렇게 속도를 안 내?”

“네?”

“옆에 차선 비었잖아. 아직 인터체인지 빠지려면 20킬로나 남았는데 왜 오른쪽에 붙어서 가.”

도윤은 순수한 의문의 표현이었지만, 성호에게는 타박처럼 들렸다.

그래서 어이가 없었다.

‘흔들린다고 난리 칠 거면서.’

로드 매니저와 과속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하지만 성호가 기억하는 도윤은 조금만 흔들려도 잠에서 깰 만큼 예민했고, 그 예민함을 성호에게 그대로 쏟아붓던 배우다.

“진짜 이렇게 느리게 갈 거야?”

“예, 예. 들어갑니다.”

성호는 될 대로 되라는 듯, 결국 속도를 올렸다.

부아아앙!

RPM이 서서히 치솟고, 성호의 답답한 마음도 그제야 조금 풀린다.

속도를 내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일 줄이야.

그리고 얼마나 달렸을까.

영주에 도착했을 무렵, 도윤이 물었다.

“나 쉬는 동안 넌 뭐 하려고.”

역시, 그럴 리가 있나.

쉬지 말라는 의미로 알아들은 성호는 재빨리 모범답안을 내놓았다.

“그야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형 프로필 넣고 PD님들 만나고 다녀야죠. 안 그래도 요 주변에 드라마 하나 촬영한다던데, 거기도 한번 가보려고요.”

“…….”

도윤은 침묵을 삼켰다.

그래.

'이런 녀석이었지.'

매번 잠이 부족해 잔뜩 충혈된 눈으로 우리 형 잘 좀 부탁한다고 피로회복음료를 돌리던 녀석.

매번 혼내고 면박을 줘도 남들 앞에서는 우리 형이 최고라고 말하고 다니는 녀석.

“형. 이번에 <그대 내 품에> 기깔나게 찍었으니까 다음 대본 잔뜩 들어올 거예요. 대본 들어오면 제가 PD님들 정보 쫙 읊어 드릴게요. 이래봬도 제가 요새 여기저기 쏘다녀서 좀 알거든요.”

고작 2년 차밖에 안 된 녀석이 무슨.

“제가 또 형 생각하는 마음은 지극하지 않습니까? 가끔 절 이해 못 하는 녀석도 있는데…….”

“뭔 소리야?”

“그야 당연히 성질 더러운 배우 밑에서 고생하…….”

입을 헙, 다문 성호에게 도윤의 따가운 눈초리가 쏟아졌다.

“눈물 나게 고맙다. 응?”

도윤은 혀를 차더니 잠시 고민하다가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조수석에 툭 던졌다.

“챙겨.”

“엥? 이게 뭔데요?”

“보면 알아.”

덤덤하게 답하는 도윤을 한번 물끄러미 쳐다본 성호는 봉투를 집었다.

그리고 묵직한 느낌에 설마 했다.

“형, 이거…….”

“내 눈앞에서 세지 마라.”

보너스였다.

회귀 전, 챙겨주기는커녕 살갑게 대한 적조차 없는 도윤 스스로의 속죄라고 해야 할까.

물론 도윤은 정작 부끄러워 그걸 티를 못 내고 있었지만.

“됐고, 알아서 써. 나 간다.”

“혀, 형. 제가 이거 진짜 받아도 돼요?”

“싫어?”

홱.

도윤의 손이 채 뻗어가던 그때.

성호가 얼른 품에 봉투를 숨긴다.

“우리 형 진짜 어디서 머리라도 맞았…… 아, 아! 알았어요! 알았어요! 감사해요!”

“알면 좀 잘해라. 응?”

“그럼요! 당연하죠!”

씩씩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웃음만 나온다.

“다음 주 금요일에 시간 맞춰 오고.”

“옙, 그럼 전 그동안 자유 좀 누리고 오겠습니다. 이게 얼마 만의 자유냐!”

“아무래도 안 되겠어. 다시 내놔.”

“아, 줬다 뺏는 게 어디 있어요!”

도윤은 그러면서도 슬쩍 차에서 내리며 문을 닫았다. 그러자 진짜 보너스라도 빼앗길까 성호가 얼른 카니발을 몰고 떠난다.

부우웅.

멀어지는 차를 보며 피식거리던 도윤은 주변을 둘러봤다.

고향이다.

나름 군 단위긴 해도 도시에 비하면 차라리 적막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곳.

도윤은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회귀 전에는 재기하기 전까지는 다시 찾지 않겠다고 다짐한 곳이었는데…….

‘간다고 말씀은 드렸는데, 잘 계시겠지?’

현재의 도윤은 몇 달 만이지만, 회귀하고 홀로 칩거하다시피 했던 도윤은 거의 몇 년 만에 보는 ‘가족’들.

도윤이 미소를 머금고 걸음을 옮기던 그때였다.

펄럭.

시내 건물 양쪽에 걸린 플래카드 하나가 시선을 집중시켰다.

뭔가 해서 올려다본 그때.

“세상에.”

도윤은 플래카드에 큼지막이 인쇄된 자신의 얼굴과 옆에 쓰인 문구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경] 영주의 아들 최도윤, 시청률 1위 달성!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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