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계약 얼마나 남았어?(2)
CF 촬영 때문에 평소보다 조금 늦게 촬영장에 도착해 곧장 스탠바이에 들어간 정수.
‘느낌이 다른데.’
정수는 평소와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유나의 연기에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주인공이 이별을 고하고 여주인공이 잡는 감정으로 범벅된 장면임을 감안해도 유나의 연기는 평소보다 특별했다.
뭐랄까.
감정선이 좀 더 유연하게 움직인다고 해야 할까.
덕분에 정수도 이에 맞춰 좀 더 애절한 느낌을 살려낼 수 있었고.
“컷! 와. 요새 NG가 하나도 없네? 둘 다 장난 아닌데? 오케이. 이대로 갑시다!”
PD도 흡족한 미소와 함께 오케이 사인을 내며 촬영장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해졌다.
그리고 유나는 아직 울고 있었다.
끌어올린 감정이 지나친 건지, 아니면 그 밀도가 평소보다 치밀한 건지.
정수는 다가오던 유나의 매니저로부터 손수건을 건네받아 유나에게 건넸다.
“오늘 좋은데?”
“……그러게요.”
“요새 달라진 사람이 도윤 씨만 있는 게 아니었네.”
정수는 씩 웃다가 약간 달라진 유나의 표정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유나는 도윤이 언급되었음에도 말을 돌렸다.
“손수건 고마워요.”
“네 매니저가 준 거야.”
“……그러네요.”
아무리 격한 감정 연기를 펼쳐도 컷 사인이 떨어지면 금방 침착해지는 유나치곤 오늘따라 조금 혼란스러워 보였다.
정수는 더 말하지 않고 다음 촬영까지 잠시 쉬기 위해 간이 휴게실로 향했다.
그런데 걸음을 옮기던 정수의 귓가로 삼삼오오 모여 있던 단역들의 잡담이 들려왔다.
“1위 먹은 이유가 있어. 주조연들 연기가 다 미쳤다니까.”
“아까 연기 봤어? 장난 없던데. 어떻게 그렇게 눈물을 바로 뽑냐? 난 문턱에 발가락 찧어야 겨우 나오던데.”
“그건 그냥 네가 못 하는 거고. 하여튼 차정수 선배도 그렇고 한유나 선배도 그렇고…… 최도윤 그 새…… 선배도 대단하지. 아까는 한유나 선배랑 대사 맞춰보던데.”
“나도 아까 옆에서 지나가다 봤어. 한유나 선배는 무슨 우는 것도 예쁘더라.”
‘울어?’
정수가 아는 유나는 필요할 때만 감정을 끌어올리는 배우다.
매일같이 피곤해 보이는 얼굴도 그 때문이다.
한순간의 선택과 집중이랄까.
리딩 때도 톤만 살리고 감정은 필요한 만큼만 쓰는 유나가 대사를 맞춰보는 데 울었다?
그리고 그 연습 상대가-
‘최도윤.’
요새 주의 깊고 흥미롭게 바라보는 그 배우라니.
이래서야 흥미가 안 동할 수가 없다.
정수는 휴게실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마침 눈에 띈 도윤의 매니저, 성호가 뛰어가는 방향과 같았다.
* * *
“푸웁.”
성호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정수를 발견하고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중간에 방향을 트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다.
성호는 얼른 일어나 다급히 기억을 더듬었다.
도윤이 이번 촬영에서 개차반처럼 굴어 얼굴이 화끈거렸던 수많은 기억들.
저 배우가 난데없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분명 그중 하나일 것이다.
“형, 형. 차정수 배우님 오시는데요.”
“누구?”
“차정수 배우님이요! 형. 오자마자 죄송하다고 하세요. 꼭이요! 저분 화나면 진짜 무섭다고 들었어요!”
도윤은 인상을 찌푸렸다.
대뜸 차 문을 열고 잔뜩 겁에 질려 횡설수설하는 모습.
“왜 호들갑이야?”
“호들갑이 아니라요!”
“목소리 좀 낮춰. 귀 떨어지겠네.”
도윤은 차에서 내렸다.
성호의 말처럼 정수가 보였고, 무표정한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아,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깍듯한 인사.
정말 무슨 일일까.
도윤의 인사를 본 정수가 물은 건 그때였다.
“도윤 씨. 잠깐 시간 되나? 물어볼 게 있어서.”
덤덤한, 그리고 의도를 짐작하기 힘든 목소리에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간이 휴게실로 가실까요?”
“아니. 거긴 다른 배우도 있어서.”
다른 배우.
방금 정수와 유나의 촬영 신이 끝났다.
그리고 오늘 촬영장을 찾은 주조연 배우는 셋뿐.
그렇다면 휴게실에 있는 배우가 유나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사실.
‘유나 선배와 관련된 일이구나.’
도윤은 낮에 있었던 유나와의 대본 연습을 떠올렸다.
도윤은 정수를 따라가는 사이 회귀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회귀 전엔 이 촬영 이후 만난 일이 없어 접점은 굵지 않지만, 적어도 자신이 10년 동안 기회를 기다리는 사이 정수가 더욱 큰 배우가 되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상이란 상은 다 휩쓸었지.’
미니시리즈, 사극을 비롯한 드라마와 각종 영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출연하면서도 매번 다른 연기를 보여주며 안방극장은 물론 20, 30대에게도 엄청난 지지를 받는 대배우.
그러나 지금 이 난데없는 상황을 해결하기엔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다.
“여기가 좋겠네.”
정수는 자신의 커다란 밴(VAN) 뒤에 등을 기대곤 이윽고 물었다.
“낮에 유나랑 대사 맞춰봤다며?”
도윤은 눈을 질끈 감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순간 하마터면 예전 버릇이 나올 뻔했다.
회귀해서 예전의 그 몸으로 돌아간 나머지 그런 걸까.
하지만 도윤은 이미 들킨 이상 변명 같은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즉각 고개를 숙였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그리고 정적.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공간 속에서 1초가 1년처럼 느껴지는 침묵이 흘렀다.
도윤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제 잘못입니다. 한유나 선배는 잘못 없습니다.”
그런데 정수는 대뜸 픽 웃어버렸다.
“유나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켜?”
“예?”
“농담이야. 유나가 먼저 이야기했겠지. 나한테 말하지 말라고. 속 깊은 애니까.”
도윤은 급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했고, 이어진 말에 더욱 당황했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 사실 예전 모습 생각해서 변명을 예상했는데, 바로 사과할 줄은 몰랐어.”
다시 정적.
그러나 이번엔 조금 다른 의미의 정적이었고.
“대충 무슨 일인지는 알 것 같다. 유나가 대사 받아달라고 부탁했고, 도윤 씨는 최선을 다했고. 맞지?”
역시 배우 짬을 무시할 수는 없다.
도윤은 솔직하게 답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유나가 본촬영도 아니고 단순한 리딩에서 울 정도였으면 도윤 씨가 그만큼 잘했다는 거겠지.”
그러다 정수는 갈수록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더니.
“도윤 씨. 당신 마음에 든다.”
기어이 도윤의 마음을 흔들어 버렸다.
“솔직히 말할게. 처음에는 안 믿었어. 나는 도윤 씨 안 좋게 보고 있었거든.”
당연한 일이다.
10년 전임에도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릴 일들이 이 촬영장에서만 수두룩하게 일어났는데.
“근데 이렇게 솔직한 것도 그렇고, 연습에서 내 배역에 그만큼 몰입해서 유나를 울리기까지 한 정도라면…… 확실히 뭔가 달라진 거겠지. 마음을 고쳐먹었든, 아니면 정말 소문처럼 불치병에 걸렸든.”
불치병.
불치병에 걸렸다가 회귀한 걸 생각하면 지극한 아이러니한 소문이지만.
“난 내 배역 좀 누가 연습한다고 신경 안 써. 오히려 좋은 일이지. 나랑은 분명 다른 연기였을 테고, 그 다른 해석으로도 유나의 감정을 건드린 거니까. 안 그래?”
고개를 끄덕이기엔 도윤은 방금까지 사과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정수는 웃음으로 분위기를 풀었다.
“참고로 혼내는 거 아니다. 내 키가 좀 커서 누가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겠다만…… 아무튼 더 이상 신경 안 써도 돼.”
“아닙니다, 선배님.”
폭풍이 한차례 지나가는 동안 지하실에 숨어 있다가 다시 밖으로 나와 세상 빛을 보는 기분이 이럴까.
“나중에 시간 되면 그 연기 한번 보여주고. 꼭. 종영 얼마 안 남았지만, 그래도 참고할 게 있으면 참고해야지.”
그때 도윤이 무언가 결심했다는 듯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지금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네.”
대단한 자신감이다.
정수는 그렇게 생각했고.
“대사는?”
“다 외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좋아. 해봐.”
그 순간 정수는 방금까지 호탕하게 웃던 선배가 아니라 후배 연기자의 연기를 평가하는 매서운 눈으로 돌변했다.
마치 안구를 갈아 끼우는 것처럼 변화무쌍하다.
도윤은 그 모습에 일순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면서도 침착하게 대사를 떠올리고, 감정을 끌어올린 뒤-
“헤어지자고. 지친다. 정말로.”
방금과는 다른 분위기를 뿜어내며 즉석에서 연기를 펼쳤다.
미니밴 뒤.
사람은 없다지만 연기하기엔 그다지 적절한 공간이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 도윤이 밟고 있는 이 땅에선 가상의 카메라들과 가상의 스태프 수십 명이 존재하는-
“그만하자. 우리, 여기까진 것 같다. 서로 힘들게 하지 말고 이쯤에서 끝내고 각자 갈 길 가자. 너 집에 돈 많잖아. 나 같은 남자 만나서 고생하지 말고…….”
심지어 대사를 받아주는 상대역이 없음에도 마치 도윤은 눈앞에 ‘혜선’이 실재하는 것처럼 능숙하게 템포를 끊고 적절한 타이밍에 대사를 이어갔다.
사정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퍽 신기한 독백(獨白), 혹은 대배우의 연기 지도쯤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정수에게는 아니다.
‘역시.’
정수의 눈이 이채를 띠었고.
“이상입니다.”
마침내 도윤이 실제 카페 문을 열고 자취를 감추는 동선까지 마무리한 후 돌아오자 그는 박수를 쳤다.
짝. 짝.
짧게, 두 번.
“하마터면 배우계의 카사노가 탄생할 뻔했는데.”
“네?”
“카사노 몰라? 축구. 악마의 재능. 뭐, 축구랑 연기는 다르지만. 마음 고쳐먹어서 다행이다. 아니면 진짜 불치병인가?”
정수 나름의 극찬에 도윤은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회귀 전엔 이런 칭찬은커녕 욕이나 안 들어먹으면 다행이었다.
누구나 재능은 인정하지만 그 쓰레기같은 인성 덕에 그 재능을 칭찬하는 것조차 꺼려지던 인간, 최도윤.
그래서 정수에겐 더욱 흥미로웠다.
얼마 전까지도 인사도 고개 까닥으로 대충에 제멋대로 굴던 녀석이 이렇게 갑자기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흐음. 그렇게 할까?’
정수는 그래서 얼마 전 희미한 고민으로만 남겨두려 했던 이야기를 마음속에 음각하기 시작하며 입을 열었다.
“도윤 씨, 지금 회사랑 계약 얼마나 남았지?”
“네?”
“이제 한 2년 남았나? 업계 사람이라 대충 이야기는 들리거든.”
정수는 배우이자 엔터 대표다.
성공한 배우가 엔터를 차리는 건 흔한 일.
그러나 정수는 그 흔한 일을 성공시켜 궤도에 올리기까지 한 수완 있는 사업가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갑자기 남은 계약 기간을 언급하는 건.
“JS 엔터로 올 생각 없어?”
특별한 제안을 위한 빌드업이다.
“JS 엔터라면…….”
“내 회사.”
정수의 회사, JS 엔터.
현재 급성장 중이고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기획사.
다수의 능력 있는 배우와 예능인을 보유한 데다 좋은 신인 배우를 지속적으로 발굴하기까지.
자체 아카데미도 운영 중이고, 덕분에 배우들은 JS 엔터라면 별다른 고민 없이 오케이할 만큼 그 명성이 높다.
“마음 고쳐먹은 건 분명해 보이고…… 뭐, 마음 고쳐먹은 것과 별개로 이 정도 연기력이면…….”
거기까지 말한 정수는 잠시 말을 정리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확실히 말할게. 도윤 씨. 난 당신이 탐나.”
그 직선적인 선언에 도윤의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도윤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정수는 더욱 도윤이 흥미로워졌다.
“이유라도 듣고 싶은데.”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 일, 내 회사로 오면 못 하게 되는 건가?”
“아닙니다. 단지…….”
정수가 꽤 오랜만에 초조한 감정을 느끼던 그때.
“때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때가 아니다.
적절한 답이면서 여러 의미를 내포한 답변.
회귀 후의 도윤이기에 꺼낼 수 있는 대답.
‘거절이라. 더 재미있는데.’
정수는 한 번 더 물으려다 결국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눈빛이 다르다.
잠시 고민하긴 했지만 그것으로 흔들렸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오히려 그래서 더 흥미롭다.
덥석 물었다면 아마 이만한 흥미는 못 느꼈으리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란 말은 못 하겠다. 거절당했는데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아서.”
“죄송합니다.”
“아니, 오히려 바로 오케이 안 해서 더 재미있는데?”
정수는 나중에라도 꼭 잡겠다는 뉘앙스의 말로 도윤을 다시 한번 당황시켰지만, 도윤은 더 이상 아까처럼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았다.
그래도 여지는 남았다.
‘때’를 언급했으니까.
다음에 다시 물어볼 명분은 충분하다.
“도윤 씨 회사 상장되면 주식이나 사야겠다.”
정수는 어깨를 으쓱이며 씩 웃었다.
“아, 시간 됐다. 진 PD 기다릴 텐데. 이따 나랑 촬영이지? 기대할게. 도윤 씨. 아니, 최도윤 배우.”
경쾌한 발걸음으로 밴을 지나 사라진 정수.
홀로 남겨진 도윤은 잠시 그 방향을 바라보다가 몸을 감싸는 묘한 흥분에 저도 모르게 웃었다.
인정받은 기분.
그래, 이거였지.
도윤은 짜릿한 쾌감에 얕은 고양감마저 느끼며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그리고.
“형! 형! 괜찮아요? 어디 맞았어요? 세상에! 웃고 있어!”
정수가 사라지자마자 여지없이 달려와 호들갑을 떠는 성호의 모습에 그만 바람 빠진 웃음을 지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패는 게 어디 있어요? 장소 봐라. 개자식,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그래, 이런 녀석이었지.
맨날 욕하고 면박을 줘도 끝까지 자기편이 되어 준 녀석.
하지만 그것도 과하면 좀 그런 법.
“형. 아무리 형이 평소에 좀 개 같이 굴었다지만 이건 아니죠. 아니, 그래도 그렇지 사람 싸가지가 좀 없다고 팰 게 어디 있어? 말로 하면 모를까…….”
흥분한 성호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팩트 폭격에 도윤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시끄러워.”
“형! 회사에 이야기합시다! 아무리 대배우라도 폭력은…….”
“아 씨, 안 맞았다고.”
“정말요? 쪽팔려서 안 맞았다고 한…… 아, 아! 알았어요! 알았어요!”
1절, 2절, 뇌절까지 할 기세다.
“진짜죠? 안 맞았다고 말하라고 협박당한 건 아니죠?”
“그냥 갈래, 보너스 까이고 갈래?”
보너스란 말이 나오자 성호가 재빨리 돌변했다.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어, 근데 저 보너스 있었어요?”
“가라, 쫌. 응?”
조용히 주먹을 올린 도윤은 후다닥 뛰어가는 성호를 보며 슬쩍 다시 주먹을 내렸다.
“후우.”
그놈의 호들갑은.
도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손에 들린 대본이 문득 눈에 띄었다.
그리고 자신이 방금 정수 앞에서 펼친 연기가 예전의 자신이었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오늘만 두 번이나 들은 걸까.
‘배우’라는…….
같은 배우들에게 그토록 듣고 싶었던 그 호칭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