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과천선 배우님(4)
대배우, 차정수가 도윤에게 품은 흥미가 점점 크기를 더해갈 무렵.
“오케이-! 컷! 완벽합니다. 오늘 촬영 시마이합시다. 고생들 하셨어요.”
“고생하셨습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밝아 보이는 주섭이 촬영 종료를 선언하고 힘차게 엉덩이를 일으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강미나 작가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엥? 왜 웃습니까?”
“신나 보여서요.”
“그야 신나죠. 쓸만한 컷을 몇 개나 건졌는데. 뭘 써야 할지 고민돼서 편집할 때 죽어나겠지만…….”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주섭은 열정 넘치는 PD다.
그래서 최근 썩 좋진 않았던 촬영장 분위기도 좋아지고 좋은 씬을 많이 건진 오늘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웃기게도 두 이유 모두 도윤 탓이었지만.
촬영장 분위기가 안 좋은 것도 도윤 탓.
갑자기 촬영장 분위기가 좋아진 것도 도윤 탓.
“그렇죠. 저도 놀랐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머리라도 한 대 맞았나?”
“글쎄요. 그게 진짜라면 머리 때려준 사람 찾아가서 한우라도 사야 할 판인데요. 업진살로.”
하여튼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희한한 녀석이네.’
주섭은 마주치는 스태프며 배우, 매니저를 가리지 않고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도윤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봤다.
어제 촬영에서 있었던 일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 것치고는 전혀 비굴하게 보이진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래서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정말 머리라도 조아려댔다면 오히려 사람을 놀리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약이라도 잘못 먹었나.’
하지만 이유야 아무래도 좋았다.
마치 개과천선이라도 한 듯한 저 모습에.
오늘 내내 보여준 놀라운 연기력이 더해진다면…….
“PD님.”
“아, 차 배우.”
“차 배우가 뭡니까. 그냥 이름 부르시라니까.”
“미안. 입에 잘 안 붙네. 아, 맞아. 아까 고생했어. 조마조마했는데.”
“고생은요. 저는 오히려 재미있었는데요. 저 최도윤이라는 친구, 캐릭터 독특하지 않습니까?”
독특하다면 독특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개차반처럼 굴던 녀석이 하루아침에 싹 달라져 왔으니.
혹시 아는가.
내일 다시 그 개망나니로 돌아갈지.
“연기가 확 좋아졌어요. 느끼셨죠?”
“아, 음. 봤지. 잘하던데.”
“잘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물론 아직 좀 부족한 부분들이 좀 있지만…… 운만 좀 따라주면 다음 작품에서 주조연도 맡을 만한데요. 뭐,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개인적인 생각.
하지만 그 단어가 차정수쯤 되는 배우 입에서 나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시청률이랑 시청자 반응 기대되네요. 어떻게 나오려나?”
그리고 옆에서 미나가 거들자 주섭은 얼마 전 차기 연출작 제안이 들어온 작품을 떠올리며 시선을 옮겼다.
그 시선 끝엔 막 차에 오르는 도윤이 보였다.
* * *
드르륵.
문이 열리자 성호는 화들짝 눈을 떴다.
“아, 형. 죄송해요. 깜빡 졸아서.”
“아냐. 좀 더 자.”
잠이 확 달아났다.
더 자면 아마 영원히 자게 될 거란 예감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하, 하하. 잠이 싹 달아났네요. 출발할게요.”
“더 자라니까?”
그 말을 ‘어디 한번 자 봐’로 해석한 성호는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지, 진짜 괜찮아요.”
드륵.
그리고 다급한 기어 바꾸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카니발.
사람이 어디 쉽사리 바뀌겠는가.
조금만 거슬려도 무섭게 갈궈대던 어제의 도윤을 떠올린 성호는 서서히 엑셀을 밟기 시작했다.
‘진짜 피곤해 보이는데.’
도윤은 결국 다시 대본으로 시선을 돌렸다.
‘느낌이 완전히 달라. 하마터면 실수할 뻔했어.’
도윤은 회귀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연기를 펼쳤다.
그리고 전혀 만족할 수 없었다.
지난 10년.
어떤 극단도, 어떤 촬영장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아 도윤은 혼자만의 연습을 해왔다.
유튜브에서 동영상을 찾아보고, 연기 개론서를 찾아보고, 강의 영상을 시청하는 등 기울였던 각고의 노력.
타고난 재능이 있어 10년 동안 켜켜이 누적된 노력은 회귀한 시점에서 분명 빛을 발했지만-
‘부족해.’
도윤은 부족하다고 느꼈다.
당장 오늘 상대역이었던 정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물론 현재 도윤의 나이 24살.
이런 연기를 펼치는 것도 엄청난 일이다.
그러나 도윤은 10년의 시간을 거슬러 돌아왔다.
그렇기에 결코 만족할 생각은 없었고…….
‘주변 사람들도 챙겨야겠지.’
과거의 실수를 결코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도윤의 매니저 성호.
도윤은 누명을 쓴 자신을 믿어준 몇 안 되는 사람이었던 성호를 잊지 않았다.
무혐의로 출소했을 때 구치소 앞에서 두부를 들고 환하게 웃던 성호의 모습도 잊지 않았다.
‘바보 같은 놈.’
빨리 꺼지라고, 다른 연예인 찾아보라고 그렇게 윽박을 질러도 끝까지 자리를 지켜준 놈.
결국 끝에 가선 헤어지기야 했다.
도윤이 거의 욕을 퍼부어대며 밀어냈으니까.
물론 성호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다.
자신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자기 살길 찾기보다 도윤의 재기를 돕겠다고 나서는 녀석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랬을 뿐.
전역하자마자 1종 보통 면허 하나 믿고 로드 매니저로 뛰어든 뒤, 매번 자신의 말에 군말 없이 따라주고 믿어준 성호.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앞으로 마주하게 될 수많은 사람들.
도윤이 한이라도 맺힌 것처럼 오늘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를 건네고 깍듯하게 대한 건 바로 그런 진심 어린 이유.
물론 깍듯한 것과 비굴한 건 다르다.
‘그땐 세상이 내 건 줄 알았지.’
원래 도윤은 연기와는 전혀 관련 없는 삶을 살아가던 경영학도였다.
외모 덕에 몇 번 캐스팅 제안을 받긴 했지만 그뿐.
그러나 학점이나 채울 요량으로 들었던 ‘연극과 시놉시스’라는 교양 과목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도윤은 연기의 매력에 푹 빠졌고.
때마침 엔터 관계자 한 명이 도윤에게 접촉해 오면서 배우의 길을 걷게 된 것.
그리고 첫 작품, <에이전트 윈터> 이후 수많은 광고와 작품 제안이 쏟아졌고…….
갑작스럽게 다가온 돈, 명예, 부러운 시선은 도윤을 빠르게 좀먹더니 급기야.
‘결국 그 지경이 됐지.’
그리고 10년이라는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고 다시 여기에 왔다.
하필이면 촬영 중간이었지만.
그래도 아무렴 어떤가.
‘미필 시절로 안 돌아온 게 다행이지.’
다시 군대를 가는 건 정말 사양이다.
여하튼.
돌아온 이상 자신이 해야 할 건 하나.
연기.
그렇게나 좋아하는 연기를 하다 지쳐 죽는 것.
‘아, 담배도 확실히 끊어야지. 조만간 건강검진도 받고.’
아까 성호에게 끊겠다며 패기 넘치게 말해두긴 했는데, 벌써부터 목이 까끌까끌한 게 담배가 살살 당겼다.
하긴.
현시점의 도윤은 담배를 거의 입에 달고 살던 골초였으니 금단증상이 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도윤은 담배 생각을 떠올리는 대신 다음 촬영에 쓰일 대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아까부터 룸미러로 도윤을 힐끗거리던 성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상 말세야. 최도윤이 촬영 끝나고 잠을 안 자고 대본을 보네.’
하지만 그 덕분일까.
오늘따라 카니발이 좀 더 경쾌하게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 * *
<그대 내 품에> 촬영 회의실.
“이야. 반응 괜찮네. 온통 최도윤 이야기야.”
주섭은 노트북으로 댓글 반응을 살피며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현장에서 느꼈던 그 느낌이 시청자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진 모양이다.
-최도윤 연기 원래 이렇게 좋았음?
-대사 쫌 치던데
-어제부터 입덕함 팬카페 가입도 완료
-주인공 잡아먹으려고 하더라. 차정수 아니었으면 벌써 먹혔음.
여기에 시청률도 소폭이나마 상승하며 소소한 기쁨도 선사했다.
[‘그대 내 품에’ 최도윤 열연 속 수목극 1위 자리 바짝 추격]
[최도윤, 명품 연기로 시청자 눈길 사로잡아]
[‘놀라운 신인’ 최도윤]
물론 시청률이라는 게 입소문을 타야 하는 만큼 즉각 반영되는 지표는 아니지만, 반응을 보건대 입소문을 타는 건 시간문제로 보였다.
현재 시청률은 약 11%.
경쟁작 시청률이 15%이고, 종영까지는 5부가 남았으니 충분히 1위 탈환을 노려볼 만하다.
‘원래 연기 좋았던 신인인데 인기까지…… 진짜 차기작으로 미리 꼬셔둬야 하나?’
주섭이 고민할 즈음 미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음. 이만하면 비중 좀 올려도 될 것 같은데요.”
“엥? 또 수정하시게요?”
“못할 거 없죠. 원래도 그럴 계획이었구요. 하도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어서 다른 배우들 반발할까 봐 안 했던 거지.”
미나는 입술을 샐쭉 내밀더니 노트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정말 대본을 수정하는 모양이다.
주섭은 그런 모습에 피식거렸다.
오랜만에 보는 초롱초롱한 미나의 눈.
요새 분위기도 안 좋고, 이번에도 수목드라마 시청률 2위라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같았는데…….
주섭이 혹시나 싶어 물었다.
“그러다 다시 헤까닥 돌면 어쩌려구요? 또 싸가지 없게 굴면?”
“팔자려니 해야죠.”
“거 참, 오락가락하시네.”
“솔직히 어제까지는 무사히만 마치면 다행이라 생각했으니까요. 아무튼 이 지경까지 왔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도윤 끝까지 끌고 가야 해요.”
강미나.
자존심 강한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 오점이 남는 걸 누구보다 싫어하는 사람이다.
촬영장 내의 트러블이나 제작사의 알력다툼으로 배우 교체나 PD 교체로 대본에 손이 가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작가.
그래서 최도윤의 변화는 정말 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어제 그야말로 사달이 났을 테니까.
여하튼 좋아지고 있는 건 분명해 보였으며.
“오케이-! 컷! 좋습니다! 바스트만 마지막으로 따고 갈게요!”
다음 촬영에서도 도윤을 주섭을 완벽히 만족시켰다.
또한 이번에도 역시 수정된 대본을 완벽하게 숙지하며-
“그냥 좋은 정도가 아니네. 물건이야. 딕션이야 좀 손볼 필요가 있는데, 소화력이 장난 아니야.”
미나의 의뭉스럽기만 하던 시선에 확신이 더해졌다.
그리고 오늘도 상대역으로 열연을 펼친 정수 또한 마찬가지.
“더 좋아졌다?”
“선배님이 잘 받아주신 덕분입니다.”
“겸손도 떨 줄 아네. 비결 좀 알려줄래?”
“비결이요?”
도윤이 대답할 말을 찾느라 고민하던 그때였다.
“그냥 해본 말이야. 종영까지 몇 화 안 남았으니까 마지막까지 잘해보자.”
“예, 감사합니다. 선배님.”
깍듯한 그 태도에 정수의 입가에 미소가 흘러내렸다.
“최도윤 씨, 이따 1시간 뒤에 단독 슛 들어갑니다. 감정선 관리 잘해주시구요. 아까도 인상적이었어요. 지금처럼만 합시다.”
“예, PD님.”
도윤은 주섭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감개무량한 기분을 느꼈다.
지난 삶의 도윤이었다면 저런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설사 들었다 해도 시큰둥한 반응만 보였을 테니까.
적당한 예의.
적당한 존중.
왜 그땐 그걸 몰랐을까.
‘군대도 다녀온 놈이.’
도윤은 고개를 털었다.
이제부터라도 잘하면 그만.
도윤은 다시 대본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스탠바이해 주세요. 조명 각도 조금만 더 이쪽으로. 오케이. 좋습니다. 저기, 저기 가이드라인 흔들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촬영 준비에 돌입했다.
이번 신은 단독촬영.
‘형찬’은 끝내 ‘혜선’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다.
그런데 그런 ‘혜선’에게 ‘형찬’의 어머니가 찾아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게 된다.
남주의 연적이란 이유로 싫어하는 시청자도 있었지만, 반대로 혜선을 향한 진심 어린 순애보와 서툰 감정 표현에 반한 시청자도 많은 캐릭터.
그 캐릭터가 마침내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에게 억눌리기만 해 왔던 감정을 폭발시키는 순간이었다.
“슛 들어갑니다. 레디…… 액션!”
감정.
배우들에게 감정이란 중요하다.
‘슬픔, 분노, 사랑…… 추상적인 감정은 안 돼.’
도윤은 이 순간 ‘형찬’에 완벽히 몰입했고.
머릿속으로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폭언을 퍼부어대던 가상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감정을 끌어올렸다.
갈팡질팡.
그간 억눌린 분노와 부모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다.
툭.
마침내 한쪽으로 기운다.
“엄마…… 도대체, 도대체 왜 그랬어요!”
뻔한 대사로 쓰인 텍스트가 도윤의 입에서 대사로 치환되는 그 순간.
그 뻔한 대사는 더 이상 뻔한 대사가 아닌 생동감 넘치는 분노의 언어로 허공을 가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왜! 왜 항상 제멋대로예요? 난…… 난 엄마가 시키는 대로 다 했어요. 1등 하라고 해서 1등 했고, 유학 가라고 해서 유학도 다녀왔어요. 다녀와서는 회사를 이으라 해서 그것도 따랐는데 엄마는 왜…… 내 말을 한 번도 안 들어줘요? 나는 엄마가 시키는 모든 걸 다 했는데!”
도윤을 둘러싼 기류가 달라지고.
흘러나온 대사가 PD 주섭과 작가 미나를 비롯한 사람들의 귓가에 끈적하게 달라붙더니.
“왜, 도대체 왜…… 왜 혜선이한테 그러셨어요……. 왜…… 찾아가서 그러셨냐구요!”
촬영장을 찾은 건 무거운 정적이었다.
부르르 떨리는 안면 근육.
흔들림이 가득한 동공.
거기에 더해진 쩍쩍 갈라지는 톤의 대사까지. 그러다 이내 물기에 젖더니.
툭.
도윤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힘없이 떨어뜨린 뒤 그대로 소파 위에 무너진다.
꿀꺽.
그 광경에 누군가는 마른침을 삼켰고.
“어떡해…….”
“너무 불쌍해…….”
누군가는 촬영장 마이크에 전혀 잡히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지금 이 순간.
모두가 도윤의 감정 연기에 지배당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그건 이미 대사가 끝나 컷을 외쳐야 할 주섭도 마찬가지였다.
“컷, 컷-! 오케이!”
주섭은 뒤늦게 미나를 보고 다급히 컷을 외쳤다.
그리고 이 완벽한 신 촬영 결과에도 웃을 수 없었다. 방금 도윤의 연기에 자신 역시 섬뜩한 감정을 느낀 것이다.
마치 연기자들이 신 촬영이 끝나고도 연기를 위해 끌어올린 감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이런 가운데.
“후우.”
“와. 미쳤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약속이라도 한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도윤의 연기에 대한 찬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