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3화 (3/200)

3.개과천선 배우님(3)

스탠바이 직전까지 자다 슬금슬금 기어 나오던 모습.

스태프가 조금만 심기를 건드려도 불같이 화를 내며 꼬장을 부리던 모습.

한낱 조연 주제에, 아니 배역이 뭐가 됐든 그래선 안 되는데도 안하무인으로 굴어대는 태도.

그런데…….

‘도대체 뭐야?’

도윤은 오늘따라 달랐다.

2시간 전부터 차에서 나와 각을 잡고 대본을 살피는가 하면.

“아, 고마워요.”

현장에 있던 음료수를 돌리는 스태프에게 미소까지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다.

덕분에 음료수를 건넨 스태프는 헛것이라도 본 사람처럼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런 가운데 씬 촬영 준비가 모두 끝났고.

스탠바이에 앞서 대본을 살피던 PD 주섭의 귓가로 이번 <그대 내 품에>의 강미나 작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도윤 씨가 오케이했다구요?”

“네.”

“한 푸닥거리 하셨겠네요.”

“아뇨. 바로 오케이했어요.”

“네?”

“바로 오케이했다구요. 고민 없이.”

주섭은 자기도 신기하다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한 뒤 배우들의 동선을 체크했다.

그 뒤로 멍한 미나의 시선이 들러붙었다.

‘바로 오케이했다고?’

시나리오 라이터가 좋은 취급을 못 받는 영화 촬영현장과 달리 드라마 촬영현장에서 작가의 위치는 PD와 거의 동등하다.

때문에 주섭과 마찬가지로 미나 역시 이번 대본 수정 때 도윤이 이유 없이 반발한다면 이를 빌미 삼아 제대로 혼쭐을 내줄 참이었다.

안 그래도 벼르고 있었으니까.

재능이 워낙 뛰어나 아까운 녀석이긴 하지만, 저대로 두다간 현장 분위기를 깡그리 망쳐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본래 이 바닥은 연기력은 기본으로 깔고, 거기에 관계자들의 평판이 더해져야 좋은 평가와 함께 롱런할 수 있다.

연기력이 너무 뛰어난 나머지 모두를 압도할 수준이 아니고서야 도윤 같은 태도는 분명 발목을 잡을 테니까.

‘도대체 뭐야?’

그런데 바로 오케이했다고 한다.

어떤 의문 제기나 반발도 없이.

미나는 고개를 홱 돌려 도윤을 바라봤다.

스탠바이 직전까지도 대본에 몰입하는 모습.

코디가 달라붙어 헤어를 점검해 주고 협찬사 옷의 실밥을 떼어내는데도 흔들림조차 없다.

심지어.

“쟤, 나한테 인사한 거야?”

우연찮게 눈이 마주치자 공손하게 고개를 꾸벅 숙인다.

인사는커녕 고개나 대충 까닥이면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자자, 슛(Shot) 들어갑니다!”

의문 속에서 드디어 촬영이 시작되었고.

“레디…… 액션!”

* * *

최도윤이라는 배우는 사실 차가운 마스크와 우월한 비율,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 같은 비주얼로 유명해졌다.

경력도 없고 대학 연극 교양 수업에서 주연을 맡아본 게 고작이었던 도윤.

그가 시작부터 <에이전트 윈터>라는 한국형 첩보 드라마에 캐스팅된 건 바로 그런 훌륭한 비주얼 덕이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첩보물에 더없이 어울리는 저 차가운 인상이 전부일 거라 여겼다.

거기다 단역에, 캐릭터는 애초부터 과묵하고 몸으로 말하는 형사라는 설정.

그래서 도윤의 비주얼에 주목하는 사람은 많아도 정작 도윤의 연기력에 대해 칭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왔다 해도 그냥 뒤에 병풍처럼 서 있는 게 전부였으니까.

그러다.

‘선배랑 일해서 영광이었습니다.’

주인공 일행이 적들에게 둘러싸여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 자신의 몸을 희생하며 던진 그 대사 하나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어 보이는 긴장감과 위기 속에서 등장하며 카타르시스를 던지고, 심지어 주인공 일행을 구해내며 스스로를 희생한다.

마치 지금까지 출연한 모든 장면들이 이 한 장면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심지어 신인 주제에 안면 근육까지 자유자재로 비틀며 펼친, 죽는 순간의 연기까지.

고작 대사 한 줄, 그리고 표정만으로 브라운관을 압도하고 시청자들을 긴장과 충격에 빠뜨려버린 것이다.

요컨대.

단순히 비주얼만 뛰어난 배우가 아니라는 뜻.

물론 부족한 부분은 아직 많다.

긴 대사를 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도 있고, 아직 딕션이 썩 좋지 않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어쩔 수 없는 일. 도윤은 아역 배우 출신도 아니고, 연극영화학과에서 연기를 정식으로 배운 사람도 아니며, 비주얼과 풍기는 분위기만으로 온 녀석이니까.

하지만 그래서 더 대단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거기다 연기력이야 차차 나아질 일.

단역으로 그런 인기를 얻고 순식간에 주요 작품의 조연을 꿰찼다는 점에서 도윤의 재능은 차고 넘쳤다.

‘어디서 그런 신인이 나올 줄 누가 알았겠어.’

때문에 이후 주섭은 도윤에게 푹 빠졌다.

그래서 도윤이 다음 작품에서 바로 조연을 맡은 뒤 그게 끝나기도 전에 바로 이 <그대 내 품에>로 낚아채온 것이다.

설마 그렇게 싸가지를 밥 말아 먹은 녀석일 줄은 몰랐지만.

사실 갑자기 인기를 얻은 배우들이 오만해지는 건 흔한 일.

도윤은 그 정도가 너무 심해 아까까지만 해도 주섭이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것.

그런데 지금은 또 아니다.

주섭은 일단 이번 씬 촬영을 마친 뒤 다시 도윤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곧 알게 되겠지.’

정말 뭔가 달라지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일시적인 변덕인지.

사실 그가 조연 배우 한 명에게 이렇게 심력을 쏟고 있다는 것조차도 놀라웠다.

진주섭 PD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조연 한 명을 이렇게 주의 깊게 바라본다는 사실 자체를 놀라워하리라.

여하튼.

“액션!”

씬이 시작되었고.

그 순간.

도윤을 둘러싼 분위기가 달라졌다.

도윤의 마스크는 차갑다.

그건 강점도 존재하지만 단점도 존재한다.

특정 역할에 강세를 보일 수 있지만 특정 역할에는 약할 수밖에 없는 셈.

하지만 도윤은 지금 그 차가운 가면을 벗어던지고-

“아뇨,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혜선이가 당신을 선택했다 해도 난 포기 못 합니다.”

주인공 못지않게 여주를 원하는 순애보 가득한 ‘형찬’의 캐릭터를 펼치기 시작했다.

‘세상에.’

미나는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

“그래서, 돈도 아무것도 없는 당신이 혜선이한테 뭘 해줄 수 있습니까? 사랑? 그것도 가진 자나 할 수 있는 거죠. 안 그런가요, 도민우 씨?”

여주를 누구보다 원하지만, 그 방식이 서툴고 지금껏 힘으로 모든 것을 빼앗아오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남주에게도 그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는 ‘형찬’.

도윤은 세상 그 누구보다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마치 깔보듯 남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음 같던 가면이 깨지고 드러난 도윤의 얼굴은.

마치 변덕맞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쉼 없이 휙휙 바뀌며 지켜보던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원래 저렇게 연기를 잘했나?’

도윤의 재능이야 이 바닥에 슬슬 알려지던 참이다.

원래 연기를 하지 않았음에도 단숨에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블루칩.

업계 관계자 사이에서 평판과 관련된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음에도 도윤이 <그대 내 품에>에 캐스팅된 건 바로 그런 이유다.

인기 있는 배우를 원하는 투자사의 사정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특출나나 깊이는 부족하고, 다소 긴 대사에 약하며, 특정 연기에는 강하지만 나머지는 아직 두고 봐야 할 배우.

그런데.

“제안하죠. 여기서 적당히 물러나면 당신 아버지 병원비, 내가 대겠습니다. 난 돈을 내고, 당신은 그 돈을 받고 혜선이를 포기하고. 어때요? 이만하면 윈윈 아닙니까?”

“…….”

“당신에게는 좋은 제안일 겁니다. 자존심상 혜선이에게는 부탁할 수 없을 테고, 그렇다고 대출을 받자니 당신 아버지가 당신 명의로 벌인 사업 때문에 신용불량자 신세라 모두 거절당할 테죠. 난 지금 서로에게 필요한 제안을 하는 겁니다.”

“항상 이런 식입니까? 모든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려고?”

“대개 돈으로 모든 걸 살 수 없다고들 이야기하는데, 돈으로는 많은 걸 살 수 있죠. 지금도 그럴 거라 생각하고요.”

남주인공 ‘민우’와 연적 ‘형찬’이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하는 이 신에서 도윤이 보여준 연기는 기존의 우려를 모조리 불식시킬 만큼 훌륭했다.

아니, 단지 훌륭한 수준이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가 숨을 죽일 만큼 강렬한 몰입감을 선사했다.

특히 방금 남주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건네는 장면에서는.

‘웃는다고?’

묘하게 입꼬리를 비튼 ‘형찬’.

재력도, 뒷배도 없는 남주인공을 깔보고 있다는 시선을 다른 대사 한 줄 없이 완벽히 각인시킨 것이다.

심지어 저 장면은.

‘못해도 서너 번은 생각했는데 한 번에 오케이라고?’

주섭과 미나가 수정 후 건네준, 그러니까 도윤이 새롭게 건네받은 장면이다.

쉽게 말해.

도윤은 그 짧은 시간 사이 수정된 부분까지 완벽하게 숙지한 뒤 저런 연기를 펼친 것이다.

감탄이 나왔다.

거기에 더해.

“훗. 이거 보입니까? 도민우 씨의 친구분 가게 권리서입니다. 여기 안을 보면…… 뭐야, 이, 이거 왜 비어 있어? 어, 어디 간 거지? 분명 넣었는데!”

“가만 있어 봐! 여기 분명히…… 기다려! 차에 다녀올 테니까 거기 꼼짝 말고 기다려! 어억! 아이 씨! 길에 이딴 게 여기 왜 있는 거야!”

진지한 분위기를 이어가다 한순간에 서류도 잊은 멍청한 재벌 3세로 전락하는 연기에서는, 모두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차가우면서 날카로운 인상이 방금까지 진지함을 더해주는 역할을 했다면, 오히려 지금은 이른바 ‘갭 차이’에 간극을 더해주며 반전 매력을 느끼게 만든 것이다.

‘코믹 연기도 괜찮겠는데.’

‘저 얼굴로 웃긴 연기를 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진짜 허둥대네.’

마치 집에 가스불을 켜 놓고 나왔다는 걸 깨달은 사람처럼 허둥대던 ‘형찬’.

“아이 씨, 쪽팔리게! 기다려! 차에서 서류 가져올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요!”

그리고 끝까지 자존심을 챙기며 허둥지둥 뛰어가는 모습을 끝으로.

“컷-! 오케이. 훌륭합니다!”

PD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주섭은 손에 대본만 없었다면 당장 박수갈채를 보냈을 것이다.

그 정도로 그는 방금 씬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섭뿐만이 아니었다.

‘미쳤네. 말이 돼?’

‘원래 저 정도였나?’

‘잘한다고는 들었는데…… 남주가 이러다 묻히겠는데?’

물론 대본의 이 장면이 수정되었음을 모두가 아는 건 아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사람들 일부는 남주를 압도하는 도윤의 연기력 자체에 순수히 감탄했다.

심지어, 상대 배우까지도.

‘이놈 봐라.’

차정수.

40대의 나이에도 동안의 외모를 유지하며 안방극장에서 주부들에게 ‘영원한 실장님’이란 소리를 듣는 배우.

출중한 연기력은 물론 이 바닥에서 어지간한 배우들의 면면은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오랜 경력과 인기를 지닌 배우.

도윤도 그가 아는 배우 중 하나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이 장면에서만큼은 도윤의 연기가 아주 매력적이었다는 사실을 깨끗이 인정했다.

그리고.

오히려 이에 대해 굴욕을 느끼기는커녕.

‘신기한데. 재미있는 녀석이야.’

하루아침에 확 바뀐 도윤의 모습에 더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단순히 연기뿐만이 아니다.

정수는 오늘 촬영장에 오자마자 자신에게 찾아와 깍듯하게 인사한 도윤을 떠올렸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비굴할 정도로 허리를 굽힌 건 아니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촬영장에서 선배 대우는커녕 얼굴을 봐도 힐끗거리던 도윤의 모습과는 전혀 매치되지 않는 변화.

때문에 정수는 PD 주섭의 컷 사인이 나자마자 씩 웃었고.

“잘하네. 진작 좀 이렇게 하지 그랬어?”

도윤을 떠볼 심산으로 툭, 던졌다.

그런데 도윤은.

“아닙니다. 선배님이 잘 받아주신 덕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웠습니다.”

오히려 공손하게 답하더니 아쉽다는 말까지 꺼냈다.

“아쉽다고?”

“예. 제 표현이 조금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형찬’이 ‘민우’를 조롱하는 장면에서 말입니다…….”

“음, 그래서?”

“네. ‘형찬’은 ‘민우’를 연적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민우’를 계속 방해하고요. 하지만 캐릭터의 본바탕을 들여다보면 인성이 아니라 그냥 자신의 방식이 왜 틀린 건지 인지하지 못하는 것에 있는 듯합니다. 예를 들자면…… 본성과 관계없이 그냥 그렇게 자라온 환경 탓이라고 할까요.”

“계속해 봐.”

“그래서 이 부분에 ‘형찬’의 연기에서 조롱의 감정보다는…… 정말 이해를 못 하겠다는 의문을 넣어보면 어떨까 합니다. 사실 형찬이 김 비서에게 하는 행동이나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걸 보면 마냥 악인이라고 보기 힘들기도 하고요.”

정수가 재미있다는 듯 도윤을 바라봤다.

“분석 좋네. 그런데 작가님이나 PD님한테 먼저 왜 안 묻고?”

“선배님 의견을 먼저 듣고 싶었습니다. 지금 ‘형찬’의 심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캐릭터가 바로 ‘민우’니까요.”

나쁘지 않은 핑계다.

하지만 핑계라고 할 수도 없는 게, 자신에게 잘 보이려 드는 건 아닌 듯했다.

그저 순수한 열망.

그게 눈에서 보였다.

그래서 더욱 흥미로웠다.

심지어 컷 사인이 나면 바로 담배를 피우러 가기 바쁘던 녀석인데.

그 모습은 마치 모든 게 궁금해 어쩔 줄 모르던 데뷔 초기의 자신을 떠올리게 만들어 정수는 저도 모르게 피식거렸다.

‘이놈 이거 물건이네.’

자신의 생각이 착각이 아니라면.

도윤은 더 크게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평판이야 조금 그래도 출중한 연기 재능.

받쳐주는 마스크.

배우고자 하는 자세.

대성할 배우의 모든 것을 갖춘 모습.

‘뭐, 운도 조금 따라줘야겠지만.’

정수는 도윤이 엄청난 행운과 함께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물론 여기엔 단서가 하나 붙는다.

지금 바뀐 이 모습이 씬이 끝났음에도 이어지는 ‘연기’가 아니라는 전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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