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이트. - (4) >
***
프린터 소리가 방을 울렸다.
인쇄된 종이에는 이백 여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일본, 중국 그리고 동남아 각지에서 돈을 받고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자들.
성윤은 그들의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 똑똑히 읽어 내려갔다.
적힌 이름의 대부분은 권력자다.
정치, 언론, 재계를 시작으로 판사와 검사, 경찰에서부터 각 공무원까지…….
심지어 학계와 종교계 그리고 연예계도 있다.
‘성공할 수 있을까?’
역사를 살펴보면 권력자의 목을 벤 적은 있어도 권력 카르텔을 박살 낸 적은 없다.
그들은 교묘하게 다른 형태로 유지됐고 이어졌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놈들이 힘을 합쳐 여론을 압박하면, 국민의 눈과 귀가 되어야 할 언론은 엉뚱한 말을 할 테고 진실을 밝혀야 할 검찰은 모른 척할 거다.
성윤은 정신병자나 음모론자가 되는 것이고.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몇 번을 생각해도 계란으로 바위 치기, 답이 보이지 않는다.
여당 대표라는 위치가 작게 느껴질 정도다.
성윤은 들고 있던 명단을 책상에 내려 뒀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내뱉어졌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잖아?’
대한민국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모른 척 외면하는 것은 죄악이다.
지금 고민해야 할 것은 완벽한 계획.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돼.’
만에 하나 잘못되거나 놈들이 눈치를 채면 안 된다.
주변 모두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
성윤은 화이트보드 앞으로 걸어갔다.
보드 마카를 들고 거침없이 글씨를 적어 간다.
처음 적힌 글씨는…….
이준대 게이트
그 아래로 성윤의 계획이 적혀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획에 걸맞는 이름도 적혀 간다.
최학인 대표, 윤범성 부회장 그리고 각 언론사 사장…….
성윤의 눈동자에 그들의 마지막이 보이는 것 같았다.
죄수복을 입고 명찰을 달고…….
판사의 입에서 형량이 결정된다.
“사형!”
성윤은 눈에서 살기를 내뿜으며 쥐고 있던 보드 마카를 툭 던져 뒀다.
조용히 화이트보드를 살펴본다.
변수와 오차는 어떤 것이 있을지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그러다가 크게 웃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서늘했던 방 안의 공기가 확 바뀔 정도로…….
성윤은 담배를 물고 소파에 앉았다.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괴로웠던 일주일이다.
그런데 지금은 마음마저 편하다.
‘평가는 역사가 하겠지…….’
잠시 그렇게 앉아 있다가 휴대폰을 손에 쥐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며칠 동안 잠들어 있던 휴대폰이 진동하며 화면을 밝힌다.
그동안 받지 못한 목록이 죽 떠올랐다.
‘정우, 정우, 정우, 대통령님, 정우, 정혜성…….’
그때 지이잉, 진동이 울렸다.
어머니다.
“네, 어머니.”
-오늘 갈 거야?
“네?”
성윤의 시선이 달력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
***
오전 9시 15분.
굵은 빗방울이 쏟아질 때, 교도소 밖으로 박대철이 나왔다.
박대철은 얼굴에 떨어지는 빗물을 쓸어내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함께 출소한 다른 사람들이 보인다.
가족 또는 친구들과 얼싸안으며 기쁨을 나누고 있는 모습.
박대철의 눈동자는 그들을 스치며 계속 주변을 살폈다.
혹시 딸 세진이가 왔는지 찾는 거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그러다 어떤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그가 아쉬운 듯이 웃었다.
‘학교에 갈 시간이지?’
지금은 오전 9시, 한창 수업받고 있을 시간이다.
‘공부는 잘하려나 몰라.’
가방을 오른손에 쥐고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갔다.
세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에 도착하려면 바삐 움직여야 한다.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애들 방학이에요. 학교 안 가요.”
“……!”
“일부러 안 데리고 왔어요. 아빠가 이곳에 있는 것을 더 보여 주고 싶지 않았거든요.”
박대철이 천천히 시선을 틀었다.
검은 우산을 쓰고 있는 성윤이 보인다.
성윤이 터벅터벅 걸어와 들고 있던 두부를 건넸다.
“드세요.”
박대철이 어색하게 웃는다.
그는 성윤이 밉다.
자신을 감옥에 집어넣은 사람이니까.
하지만 고마운 마음이 더 크다.
세진이를 돌봐줬고 도망간 아내의 발자국도 쫓아 줬으니까.
성윤이 자신의 차를 가리켰다.
“타세요.”
박대철이 고개를 끄덕인다.
성윤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슬쩍 조수석에 앉은 박대철을 바라봤다.
조금은 초췌한 모습으로 두부를 씹어 먹고 있다.
“세진이 학교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어?”
“전학하지 않고 계속 다녀도 괜찮을 것 같아요. 지금 다니는 초등학교에 친구들도 많고 사이도 좋거든요.”
박대철은 대답하지 못한다.
그곳에서 계속 학교를 다니려면 집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돈이 없다.
아내가 돈을 들고 미국으로 도망가며 무일푼이 되었으니까.
그가 한숨을 내뱉을 때 성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근처 아파트를 구해 놨어요.”
“어?”
“괜찮다면 그쪽에서 사셨으면 좋겠어요. 저희 부모님도 세진이를 정말 사랑하거든요.”
박대철은 대답하지 못한다.
충혈된 눈만 깜빡이고 있다.
성윤이 핸들을 틀며 계속 말한다.
“그리고 원래 부동산 하셨잖아요. 근처에 부동산이 매물로 나왔는데, 원하시면 그것도 매수할게요. 500세대 오피스텔이 바로 앞에 있어서 월세만 잡아도 먹고사는 것은 불편하지 않을 거예요.”
박대철은 자신도 모르게 왈칵 눈물을 쏟았다.
따지고 보면 성윤과 박대철은 어떤 사이도 아니다.
그저 국회의원과 수행 비서라는 계약관계였을 뿐이다.
아니, 오히려 원수에 가깝다.
박대철이 가진 모든 것이 성윤 때문에 송두리째 박살 났으니까.
그런데, 고맙다.
눈물이 흐를 만큼 감사하다.
“에이 씨, 빗물이 들어갔나.”
비싼 승용차다.
비가 샐 리가 없는데 박대철은 눈을 비벼 대고 있다.
잠시 후, 성윤과 박대철은 성윤의 부모님 집에 도착했다.
빌라 1층의 주차장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던 세진이가 박대철의 품에 안긴다.
박대철은 이번에도 흐느낀다.
일곱 살이었던 아이는 어느새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다.
작았던 아이가 어느새 컸다.
그리고 박대철은 아이의 그 시절을 함께하지 못했다.
“아빠가 다시는 떠나지 않을게.”
그는 계속해서 울고 또 울었다.
성윤은 조용히 부녀의 재회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다.
정치판에 들어와 처음 바꾼 미래가 박대철의 몰락이었을 거다.
그런데 그 바뀐 미래는 박대철의 성격마저 바꿨다.
오만한 쓰레기였던 그가 성윤의 부모님 앞에서 연신 허리를 굽실대고 있으니까.
그리고 세진이의 변화도 긍정적이다.
꿈속에서는 항상 어두웠던 아이가 지금은 행복해 보인다.
‘괜찮네…….’
성윤은 또 한 번 미래를 바꾸기 위해 준비 중이다.
이번엔 꽤 큰 변화.
그런데 그 변화를 앞두고 긍정적인 시그널을 마주한 것 같다.
이번에도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은 느낌…….
성윤이 주차장 기둥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틀었다.
어느새 비가 그치고 해가 솟고 있다.
빙긋이 미소를 그려진다.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해외 자본에 좌지우지되던 미래, 악귀같은 이준대가 국민의 지지를 받는 미래를 모두.
‘느낌 좋네.’
***
“수출을 위해서는 중국산 부품의 사용이 불가피하죠.”
풀벌레 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는 한정식집이었다.
이준대는 성종 테크놀로지 김규진 대표와 함께 복도를 걷고 있다.
성종 테크놀로지, 장갑차와 자주포 그리고 보안 장비를 만드는 대표 방위산업체 중 하나.
“저도 그렇게 생각하죠. 그런데, 의원들이 그렇게 생각을 안 하잖아요? 군 장비는 안보와 보안이 생명인데, 기밀 유지는 왜 생각 안 하냐고 지랄하잖아요? 도대체 뭘 안다고!”
김규진 대표가 씩씩거린다.
반대로 이준대는 보조개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게 바로 제가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입니다. 정치인과 기업인이 소통을 해야 문제해결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수출을 주력으로 삼아야 하는데, 가격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은 말이 안 되죠. 그러니까 오늘 최학인 대표님을 모시고…….”
그때 이준대의 휴대폰이 진동을 울린다.
발신 번호는 미국…….
이준대는 전화를 받지 않고 시선을 다시 김규진 대표에게 옮기며 말을 잇는다.
“전직 장성에게 브리핑 한번 하라고 하세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포 스타 출신이 보장하는데 최학인 대표님이 반대하시겠습니까?”
김규진 대표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북북 긁는다.
“언젠가 최학인 대표님께 욕먹었던 게 생각나네요. 국감이었던 것 같은데, 뭐라고 그랬더라? ‘국민의 목숨이 달린 일을 하면서 돈 아끼겠다고 미오 장비 쓸 거냐? 책임질 거냐? 돈은 집에 가서 생활비나 아껴라.’ 뭐, 그러셨던 것 같은데……. 아, 이번에도 욕먹는 거 아닌가 몰라요.”
“그건 작년이고요. 올해는 괜찮을 겁니다.”
“어떻게 확신하세요?”
이준대가 엷게 웃는다.
최학인 대표는 다음 총선에 정치생명을 걸고 있다.
하지만 아슬아슬하다.
여당을 이길 거라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다들 내년 총선을 전망하며 ‘네거티브가 극에 달할 거다. 국민감정이 분열될 거다.’라고 말한다.
“이런 싸움에는 사람 한 명보다 신사임당 한 분이 더 쓰임세가 많은 법이죠.”
결국 장성 출신의 브리핑은 액션이다.
돈을 주라는 거다.
김규진 대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치인들은 기업인을 호구로 보는 것 같다.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최학인 대표가 원하는 것은 신사임당이고 이준대 대표가 원하는 것은 뭡니까? 우리 회사 주식 샀어요? 아니면 똑같이 신사임당을 원합니까?”
“아뇨.”
“그럼?”
“내년 총선에 성종 테크놀로지가 있는 지역에 출마하려고 합니다.”
이준대의 본심이 나왔다.
김규진 대표의 눈이 반짝인다.
“아.”
직원들을 설득해 달라는 거다.
기업 하나로 먹고사는 동네는 그 기업의 대표가 최고의 킹메이커다.
그를 어깨에 짊어지는 순간 표를 받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니까.
게다가 민국당의 텃밭으로 유명한 곳이다.
지금의 거래가 성공하면 깃발을 드는 순간 당선이다.
선거운동을 하지 않아도…….
김규진 대표가 낄낄낄 웃는다.
“영감님 되실 분이었네요. 좋습니다. 내가 오늘 일만 잘되면 티가 날 정도로 밀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이준대 대표도 나중에 배지 달고 모른 척하지 마세요.”
“물론이죠.”
두 사람은 기분 좋게 방 앞에 도착했다.
한복을 입은 여성이 허리를 굽힌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동시에 이준대와 김규진 대표의 앞으로 경호원들이 다가와 몸을 수색한다.
혹시 모를 날붙이나 녹음기 같은 게 있는지.
샅샅이 확인이 끝나자 경호원들이 바구니를 꺼내 들었다.
“휴대폰을 넣어 주십시오.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이준대와 김규진 대표는 휴대폰을 바구니에 넣었다.
그때, 이준대의 휴대폰이 또 진동한다.
이번에도 발신 번호는 미국.
경호원이 받을 거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이준대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이번에도 이준대는 받지 않았다.
지금은 한국 정치에 집중할 때니까.
급한 일은 조금 후에 처리해도 괜찮다.
그러자 한복을 입은 여성이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었다.
안에는 야당 대표 최학인, 포 스타 출신 장성, 그리고 중국 통신 장비 제조 업체 미오의 대표 션후안, 마지막으로 CL 머니 대표 곽부관이 앉아 있었다.
“긴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장성 출신이 간단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내용은 중국 통신 장비 업체 미오에 대한 안전성.
한국 사람들의 인식 문제일 뿐, 안전성은 확실하다 어쩐다.
브리핑이 끝났다.
다음은 술이다.
문이 열리고 반라의 여자들이 몰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
여자들과 함께 최학인 대표의 보좌관 우경도도 함께 들어오고 있다.
심각한 표정으로…….
그가 최학인 대표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동시에 최학인 대표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뭐? 사기라니!”
그의 눈매는 사나웠고 목소리는 험했다.
술자리는 얼음이 던져진 것처럼 조용해진다.
그렇게 잠시…… 눈치를 보던 장성 출신이 조심스레 물었다.
“대표님, 무슨 일이십니까?”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다.
최학인 대표는 이준대를 보며 턱짓할 뿐이다.
우경도 보좌관과 함께 나가 보라고…….
“네?”
“나가 봐.”
이준대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최학인 대표의 얼굴이 정말 심각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왜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우경도 보좌관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휴대폰을 건넸다.
“대표님도 개인 자산을 투자하신 것 같습니다.”
“투자?”
“보세요.”
이준대는 휴대폰을 건네받아 화면을 확인했다.
기사가 보이는데…….
실리콘 벨리의 여왕, 유나렛의 대표 크리스티나 ‘희대의 사기꾼’으로 전락
이준대의 몸이 와들와들 떨려 온다.
“씨…… 씨발…….”
< 게이트. -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