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회의원 이성윤-280화 (280/300)

< 한일전 -(5) >

***

병원 입구에 성윤이 나타났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좀비처럼 몰려와 셔터를 눌러 댄다.

“마지막 날에 오셨는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평소 윤 회장님과 어떤 인연이 있었습니까?”

“혹시 발인까지 계실 생각입니까?”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대표님!”

기자를 뚫고 들어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성종 직원들이 달려와 기자들과 거친 몸싸움을 시작했다.

그제야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그리고 잠시 후, 윤 회장의 거대한 영정 사진 앞에 성윤이 섰다.

국화꽃 한송이를 올려 둔 성윤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윤 회장의 사진을 바라본다.

대한민국의 경제 대통령 또는 거인이라 불렸던 사람.

그는 언제나 ‘혁신!’을 부르짖었다.

건설에서 자동차, 조선, 전자까지…… 국가 기간산업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국내는 물론 해외 언론까지 그의 죽음을 비중 있게 다루는 중이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한 국민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말 그대로 대단한 인물의 죽음…….

하지만 그게 전부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어도 떠나는 길은 똑같이 빈손이다.

아니, 껍데기는 화려하지만 그 속은 더 비참할지 모른다.

그의 아들딸은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앞에 두고 계산기를 두들기는 중이다.

성종의 후계 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 윤 회장의 이른 사망은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뒀다.

윤 회장의 아들딸은 서로가 회장이 되기 위해 온갖 협잡질을 다 할 게 분명하다.

‘그리고 더 심각한 문제는…….’

꿈속을 기억하면 윤 회장의 사망 시기는 지금이 아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는 것은 몇 년 후…….

성윤의 기억에 따르면 대정 박 회장보다 더 오래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지금 사망했다는 것은?

‘믿고 싶지 않지만…….’

돈 때문에 부모를 죽인 쓰레기가 그의 자식 중에 있을 수도 있다.

성윤은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편히 쉬십시오.’

남은 일은 산 자의 몫이다.

성윤은 장례의 예를 갖춘 후 몸을 돌렸다.

윤범성 부회장과 윤재석 성종 복지 재단 이사장이 보인다.

먼저 윤범성 부회장이 고개를 숙였다.

“바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성윤은 윤범성 부회장의 속마음을 듣기 시작했다.

이어서 윤재석 이사장, 마지막으로 윤미나 성종 백화점 사장까지 성윤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어려운 걸음 하셨습니다, 대표님…….”

이들의 마음은 모두 똑같다.

왕자의 난이 시작되었을 때 성윤이 자신의 편에 서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성윤이 빈소를 벗어나자 한 앳된 여성이 앞에 섰다.

30대 중반의 아름다운 여성…….

처음 얼굴을 마주했을 때, 뜬금없지만 구미호가 떠올랐다.

그녀가 속삭이듯 말한다.

“윤지예라고 합니다. 성종 리조트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그녀는 윤범성 부회장의 배다른 형제, 족보에서 빠져 있고 모두 쉬쉬하는 존재다.

그녀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오늘은 보는 눈이 많아서 제가 누구인지 자세히 소개할 수는 없습니다. 나중에 따로 연락드려도 될까요?”

성윤은 그녀를 알고 있었다.

윤 회장의 막내딸이며 혼외 자식.

그녀가 정상적으로 데뷔했다면 그리고 나이만 조금만 더 많았다면…… 오빠들을 찍어 누르고 회장에 올랐을 거란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준대의 아내였다.

성윤이 고개를 끄덕인다.

“언제든 연락 주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윤지예가 살짝 웃는다.

“그럼, 나중에 뵈겠습니다.”

이곳은 장례식장, 하지만 그녀의 눈가에 슬픔은 없었다.

이미 메말랐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없었는지…….

그녀의 눈동자에는 그동안 윤범성 부회장과 그 형제들에게 당했던 것을 모조리 돌려주겠다는 복수심만 가득하다.

성윤의 옆으로 정우와 장한수 실장이 섰다.

“가시죠.”

“어.”

정우를 따라 비어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재벌의 장례식장이지만 놓인 음식은 똑같다.

육개장과 고기 등이 단출하게 놓여 있다.

그런데…….

‘이준대?’

이준대다.

‘이준대가 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이준대가 앉아 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보조개를 내보이며…….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안녕하셨죠?”

이준대의 인사를 받은 후 성윤의 시선은 옆으로 옮겨졌다.

이준대와 함께 앉아 있던 남자…….

50대 초반의 말끔한 외모, 처음 보는 사람이다.

‘민국당 당직자? 아니면 보좌진?’

궁금할 때는 물어봐야 한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성윤이라고 합니다.”

남자는 자신에게 인사가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인사에 난처한 듯 움찔하더니 깍듯하게 허리를 굽힌다.

“곽부관이라고 합니다. 작은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사업요?”

“대표님께서 관심 갖기 어려운 정말 작은 유통업입니다. 하하.”

“유통업요?”

성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질문으로 남자의 답을 이끌어냈다.

그러자 입에서 나오는 말과 속에서 내뱉어지는 말이 모두 다르다.

그러니까 곽부관의 말은 모두 거짓…….

그는 일본에서 자본을 끌어온 대부 업자, CL 머니 한국 법인 대표다.

‘CL 머니?’

CL 머니는 성윤도 잘 알고 있다.

꿈속의 미래, 부끄럽지만 한국에는 해외 여러 자본이 판을 핀다.

중국, 일본, 태국, 필리핀까지…….

그들은 돈을 보따리째 들고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그리고 정치인과 고위직 등을 만나 입을 연다.

-한국에서 돈놀이 좀 해야겠습니다.

-대규모 차이나타운을 건설하고 싶네요.

-서울 한복판에 일본 문화 거리를 조성하고 싶어요.

물론 처음에는 거절한다.

그래도 대한민국 정치인, 어쨌거나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10억, 100억…… 놓이는 판돈.

돈은 귀신도 부린다.

그들은 기업과 부동산을 장악했고 그게 시작이었다.

이어서 필요한 것을 쪽쪽 빼 간다.

CL 머니는 일본 자금이 한국을 잠식하는 데 일조를 한 기생충 중 하나다.

성윤의 눈동자가 다시 이준대에게 향했다.

‘그런데 왜 이준대와 같이 있는 거지? 설마, 이준대가 브로커?’

가능성은 존재한다.

이준대는 더 큰 힘을 원하고 지금 그의 수준에서 손잡을 수 있는 것은 이런 양아치들이니까.

‘쓰레기통이 아니라 바퀴벌레였나?’

바퀴벌레는 가만히 두면 폭발적으로 증식한다.

지금이라도 죽여야 한다.

그 순간 성윤의 머릿속은 또 다른 방향을 향해 생각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저 멀리 서 있는 윤지예에게 향한다.

‘윤지예와 이준대…… 그리고 성종 윤 회장의 이른 사망.’

뭔가 소름이 쭉 돋아 오르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윤지예와 이준대는 부부였다.

그 연이 지금부터 시작됐을 수도 있다.

‘설마…… 윤 회장의 사망이…….’

성윤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꿈속의 역사와 지금의 역사는 다르다.

그 이유는 성윤의 개입 때문이다.

그런데 윤 회장의 사망에 성윤이 개입한 것은 없다.

윤범성 부회장을 비롯한 그 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지만 아직 그들의 역사는 뒤틀린 것이 없다.

그러니까, 윤 회장이 빨리 사망할 이유가 없다는 거다.

‘하지만 이준대의 인생은 달라.’

이준대의 삶은 성윤 때문에 완벽하게 뒤틀어졌다.

뒤틀린 것은 다시 제자리를 찾으려 애쓰는 게 당연하다.

‘윤범성을 누르고 윤미나를 회장에 올릴 생각인가?’

윤 회장이 오래 살면 살수록 성종을 장악하는 것은 무리다.

후계 작업이 완벽해질 테니까.

‘그래서 지금 죽인 것인가?’

윤미나가 회장에 오르면 이준대는 성종을 손에 쥘 수 있다.

‘그 시작이…… CL 머니?’

CL 머니 곽부관이 능글맞게 실실 웃고 있다.

‘쓰레기 같은 놈!’

완벽하지는 않지만 조금씩 그림이 그려진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말했다.

적에게 돈을 꿔 주면 그를 이기게 된다고…….

이준대는 CL 머니를 통해 윤범성에게 돈을 빌려줄 거다.

처음엔 어떤 담보도 없이 조금 하지만 나중엔 담보를 요구하며 많이.

그렇게 조금씩 성종의 지분을 잠식하면…….

성윤은 낮은 한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해외 자본이 우리 기업도 먹으려 하겠네……. 그 빌미를 주는 게 이준대고…….’

여기까지 생각한 성윤이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아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앉아서 식사나 같이 하시죠?”

성윤의 표정에 이준대를 적대하는 감정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완벽한 가면이다.

이준대도 마찬가지.

“대표님과 함께 식사할 수 있으면 영광이죠.”

언제나처럼 착한 척 웃고 있다.

그렇게 성윤과 정우 그리고 장한수 실장은 이준대와 곽부관의 앞에 마주 앉았다.

별것 없는 대화가 이어진다.

시답잖은 이야기.

경제 이야기 또는 세계정세…… 마지막으로 군대 이야기.

“이성윤 대표님도 군대에 다녀오셨어요? 어디요? 육군 병장?”

군대 이야기가 나오자 CL 머니 곽부관이 상당히 흥미를 갖는다.

“높으신 분들은 다 안 가는 줄 알았거든요. 하하하.”

성윤은 그 말에 맞장구쳐줬다.

“그런 분들도 꽤 많으시죠.”

누가 보면 이들의 사이가 무척 가깝고 친밀한 줄 알 거다.

하지만 서로가 가식이다.

성윤은 이 와중에도 이준대의 속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언제 윤지예와 눈빛 교환을 하는지, 두 사람이 지금부터 만나고 있는 게 맞는다면…….

‘내가 예측한 것이 맞을 확률이 높아.’

이준대가 윤 회장의 죽음에 관련된 것부터 성종을 잡아먹으려는 일본 자본까지…….

그리고 이준대의 은밀하고 달콤한 속마음이 들렸다.

-밖에서 봐.

성윤은 눈동자만 움직여 이준대를 향했다.

이준대의 눈동자는 정확히 윤지예를 보고 있다.

그리고 윤지예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사랑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이준대를 바라본다.

성윤의 주먹이 꽉 쥐였다.

이들은 쓰레기가 맞다.

잠시 후, 성윤은 장례식장을 빠져나왔다.

이제 차를 타고 떠나야 할 시간이다.

뒤쫓아 나온 이준대와 곽부관이 성윤을 향해 허리를 굽힌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성윤도 정중히 인사를 전했다.

“나중에 또 뵙도록 하죠.”

성윤은 ‘또 보자는’ 말과 함께 곽부관에게 시선을 옮겼다.

곽부관이 멋쩍게 웃는다.

“따로 연락드려도 되겠습니까?”

대부 업자는 정치권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이율이 1%가 낮아진다는 것은 이들의 이득이 1%, 아니 그 이상 낮아진다는 거니까.

그래서 고위직과의 커넥션은 언제나 환영이다.

물론 그는 성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처음부터 “대부 업자입니다!” 하면 거부할 게 분명하니까.

하지만 상관 않는다.

양주 몇 병 마시며 아가씨 끼워 주고 돈 좀 쥐여 주면 어느 고위직이고 “나중에 또 만나요!” 하며 좋아했으니까.

그의 생각에는 성윤 역시 똑같은 인간이었다.

성윤이 조용히 웃었다.

“언제든 좋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찍 만날 것 같은데요?”

곽부관은 성윤의 말을 농담으로 알아들었다.

호탕한척 크게 웃으며 말한다.

“일찍요? 저는 내일이라도 좋습니다. 대표님이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하하하.”

두 사람은 서로 힘주어 악수했다.

그리고 성윤이 차에 올랐다.

“출발하겠습니다.”

장한수 실장이 액셀을 밟는다.

차가 출발하자마자 성윤은 휴대폰을 손에 쥐고 국정원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CL 머니 한국 법인 곽부관의 정보가 필요합니다. 가능하다면 CL 머니의 자금 흐름도 파악했으면 좋겠습니다.

자동차의 밖.

이준대와 곽부관은 멀어지는 성윤의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희미하게 웃고 있던 이준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증발한다.

그가 차가운 눈으로 성윤의 차를 뒤쫓는다.

‘웃을 수 있을 때 많이 웃어라.’

이준대가 천천히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앞으로 웃을 일은 없을 거야.’

***

며칠 후.

사람의 죽음은 그런 거다.

산 자는 살아가야 한다.

윤 회장은 역사의 인물이 되었고 떠들썩했던 장례식 역시 과거의 일이 되었다.

사람들은 다시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서초구 한정식집.

성윤은 박중석 검사와 김재형 검사를 만나고 있었다.

박중석 검사…….

성윤은 김재형 검사를 통해 자신의 칼이 되어 줄 스무 명의 검사를 찾았다.

그중에 지휘자가 된 사람이 박중석 검사다.

안산 지원에 있던 그는 지금 중앙 지검에 자리를 잡고 있다.

성윤이 태블릿 PC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톡톡 건든다.

화면에는 능글맞은 얼굴이 보였다.

모두의 시선이 화면으로 향하자 성윤의 목소리가 살벌하게 흘렀다.

“CL 머니 한국 법인 대표이사 곽부관. 일본의 자본을 끌어와 우리 서민들의 골수를 뽑아 먹는 기생충 같은 놈……. 서민이 악을 지르며 외치는 비명이 이놈에겐 달콤한 음악으로 들릴 겁니다.”

지금부터 뿌리를 뽑아 버릴 거다.

이준대의 계획이 또 박살 나는 것은 덤이고.

< 한일전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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