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회의원 이성윤-279화 (279/300)

< 한일전 -(4) >

-성종그룹의 회장으로 한국경제사에 큰 획을 그은 윤영진 회장이 오전 11시 서울 성종 병원에서 별세했습니다. 윤 회장은 최근 지병이 악화됐고 상반기부터는 병원에 마물며 치료를…….

채널이 돌아갔다.

-빈소는 서울 성종 병원 영안실에 마련됐으며 영결식도 이 병원에서 치러질 예정입니다.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지며 성종그룹은 장자인 윤범성 부회장을 중심으로 일단 회사장으로 치른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허가할 경우 사회장 또는 국민장으로 치를 계획입니다.

또다시 채널이 돌아갔다.

역시 윤 회장에 대한 소식이다.

-윤 회장은 한국 산업계의 대부였습니다.

리모컨을 들어 전원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꺼진다.

성윤이 시선을 돌렸다.

앞에는 최고위와 고위 당직자가 보였다.

“성종그룹의 주가를 1시간 단위로 확인해 주세요.”

윤 회장은 성종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성종은 대한민국 주가에 영향력을 갖는다.

윤 회장의 사망으로 대한민국 주가는 널뛰기를 시작할 거다.

물론 길어야 한 달이다.

그 후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동안 외국인들의 짤짤이 놀이터로 이용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그리고 근조 화환은 도착했나요? 민국당이나 대한당보다 앞에 서 있어야 합니다.”

화환의 위치는 사소한 이미지 싸움이다.

하지만 이런 싸움에 목숨을 거는 게 정치판이다.

카메라에 잡혔을 때 ‘역시 여당이 1등이구나?’라는 무의식이 국민의 머릿속에 파고들어가야 하니까.

당직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방송국 카메라에 가장 잘 잡히는 곳에 세워 뒀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계속해서 회의가 이뤄졌다.

어디에도 고인을 위한 시간은 없다.

성종을 발아래에 꿇리려는 게 목표다.

“윤범성 부회장에게 어떤 개목걸이를 선물해 줘야 앞으로 우리 말을 잘 들을까?”

“국민에게 정의를 보여 주기 위해 상속세 한번 제대로 때려?”

“그동안 돈 있다고 떵떵거렸지?”

그렇게 여러 주제를 두고 열띤 대화가 오가다가 회의가 끝났다.

흡연실에 올라 담배에 불을 붙이는데 김종혁 의원이 옆에 다가섰다.

“조문은 언제 갈 거야?”

“마지막 날에 가려고 합니다.”

“마지막 날?”

성윤이 휴대폰을 들었다.

누구누구가 조문했는지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다.

굳은 표정으로 장례식장에 들어가는 그룹의 총수와 청와대 비서실장 및 각 수석 마지막으로 여야 지도부와 장관…….

김종혁 의원이 말한다.

“까놓고…… 우리는 얼굴도장 한번 찍으러 가는 거잖아? 그런데 늦게 가면 영양가 없어. 가장 먼저 달려가야 주목받는 거야.”

성윤이 쓰게 웃었다.

“전 얼굴도장 필요 없어요.”

이미 유명해서가 아니다.

“윤 회장님과는 몇 번 대면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진심으로 조문하고 싶습니다. 장례식 복장을 고민하고 카메라에 어떻게 비칠지 고민하는 것은 싫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성종그룹의 후계는 윤범성 부회장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 오전 11시까지의 이야기다.

후계 작업이 끝나기 전에 윤 회장이 사망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구나 왕이 될 가능성이 만들어졌다는 것…….

그동안 윤 회장의 눈치를 보며 입 닥치고 있던 자식들이 움직일 게 분명하다.

이기기만 하면 성종이라는 거대 그룹을 꿀꺽할 수 있으니까…….

수조 원의 돈 잔치, 가만히 있으면 멍청한 거다.

“마지막 날이면 대한민국 권력자가 대부분 들렀겠죠?”

“자네가 마지막이 되겠지.”

성윤은 윤 회장의 아들, 딸의 꿍꿍이가 궁금했다.

그들이 누구와 손잡았는지,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야 성윤 역시 다음을 계획할 수 있으니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성윤은 상대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

성종 윤 회장의 장례는 5일 동안 이어지는 강행군이다.

윤범성 부회장부터 윤미나 성종 백화점 사장, 윤재석 복지 재단 이사장까지…….

유가족의 얼굴에 슬픔은 없다.

지친 기색이 전부다.

하지만 정부와 각 기관의 고위직 등이 오면 언제 지쳤냐는 듯 눈을 반짝이며 다가가 말한다.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유가족은 권력자의 손을 잡고 구석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자신이 경영권을 잡게 도와 달라.

윤범성 부회장보다 지분은 적지만 도와주기만 하면 가능성은 충분하다.

회장에 오르면 돈방석에 앉게 해 주겠다.

앞으로의 정치 인생에 레드 카펫을 깔아 주겠다…….

청사진을 보여 주며 악수를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다른 형제를 찍어 누르려는 추악함만 보이고 있다.

그리고…….

장례식장에 박무혁 대통령이 서 있었다.

이미 권력자들은 한바탕 지나간 후였다.

지금 장례식장에 있는 정치인은 박무혁 대통령이 유일하다.

윤 회장의 사진 앞에 고개를 숙인 그가 몸을 돌린다.

그동안 권력자들이 나타나면 쪼르르 따라붙던 유가족…….

그런데 정작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인 박무혁 대통령에겐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다.

그들도 알고 있는 거다.

아무리 급하다고 호랑이 앞에 손을 내밀면 씹어 먹힌다는 것을…….

박무혁 대통령은 상주들과 인사 후 몸을 돌렸다.

먼 곳에 자신의 아버지 박 회장이 보인다.

그곳을 향해 다가갔다.

“계속 계신 겁니까?”

박 회장이 시선을 들었다.

“늙은이 가는 길은 봐줘야지.”

박무혁 대통령이 박 회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육개장과 고기가 놓였지만 박무혁 대통령은 숟가락을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버지 박 회장과 대화를 나누지도 않는다.

박영훈 부회장이 구속된 후 두 사람은 냉전을 이어 가는 중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마주 앉은 분위기가 참 어색하다.

박무혁 대통령이 소주병을 들어 박 회장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 주변으로 목소리가 흘러가지 않도록 속삭이듯 말한다.

“다행이지 않습니까?”

“뭘?”

“저놈들을 보세요.”

유가족들의 모습…….

그들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도움이 될 사람과 방해될 사람을 가리는 중이다.

형제보다 100원이라도 더 가지려는 탐욕…….

그들을 보며 박무혁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다행히 우리 형제는 저런 모습이 없을 겁니다. 이미 게임이 끝났으니까요.”

대정의 싸움은 끝났다.

박무혁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 가졌다.

게다가 권력마저 갖고 있다.

100원을 더 벌자고 박무혁 대통령에게 덤볐다가는 갈기갈기 찢겨 버릴 거다.

그래서 두 여자 형제 박시아, 박연희는 나눠 준 것에 만족하며 조용히 입 다물고 있다.

박무혁 대통령이 말을 이었다.

“박채준, 박영훈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소하면 적당히 챙겨 주겠습니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건 아버지의 마음이죠.”

박 회장의 얼굴이 굳어진다.

무서운 눈으로 박무혁 대통령을 노려보며 입을 연다.

“난 지금 윤 회장 저 노인네가 부러워. 이미 눈을 감아 버렸으니 자식들 싸움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잖아? 그런데 난…… 두 눈 뜨고 똑똑히 봤어. 형제를 감옥에 보내고 가진 재산을 빼앗고! 이곳이 지옥이야!”

“지옥에서 하나 빼먹으셨어요. 후계가 되기 위해 내 아이의 엄마를 죽이고.”

“뭐?”

“아시잖아요? 제 여자 친구였던 사람, 박영훈이 죽인 것. 그게 지옥이죠. 돈 없고 백 없는 사람, 교통사고로 죽이고 살려 달라고 빌어도 봐주지 않고. 형제를 감옥에 보낸 것보다 살인이라는 죄가 더 무거운 것 같은데요. 그 지옥은 용케 참으셨네요.”

박 회장이 일그러진 눈빛으로 박무혁 대통령을 쏘아봤다.

“그깟 하찮은 여자보다 내 아들이 중요하니까.”

“몇 번 말씀드렸어요. 저도 아들입니다. 아버지…….”

“그래, 너도 아들이지. 그래서 널 살려 두는 거야. 아니었다면…….”

박 회장은 뒷말을 줄였다.

아마…… 죽였을 거다.

자신의 두 아들을 감옥에 보냈으니까.

박 회장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하지만 박무혁 대통령은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연다.

“손주는요? 손주는 안 중요했나요?”

“뭐?”

“방금 말했잖아요, 내 아이의 엄마를 죽였다고…….”

“그게 무슨……?”

박무혁 대통령이 시선을 틀었다.

“앉아.”

그러자 따라온 경호원 중 한 명이 박무혁 대통령의 옆에 앉는다.

경호원이 식사 중인 대통령의 옆에 앉는 것, 이례적인 일이다.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박무혁 대통령은 원래 파격적인 사람이니까.

그는 땀에 젖은 노동자와 아무렇지도 않게 막걸리 잔을 나누는 사람이며 경호원과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다.

이번에도 그런 줄 알고 있다.

그런데…….

“아버지, 아버지의 손주입니다.”

“뭐?”

“아버지가 묵인했던 그 손주입니다! 살아 있었어요, 그 지옥 속에서…….”

박 회장의 눈동자가 떨려 온다.

그의 시선이 박무혁 대통령과 옆에 앉은 다니엘을 번갈아 본다.

박무혁 대통령이 희미하게 웃었다.

“닮았죠?”

박 회장은 어떤 말도 못 한다.

그저 멍하니 다니엘을 바라보다가…….

“손, 손주……?”

다니엘이 박 회장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박 회장이 다시 더듬더듬 묻는다.

“살, 살아 있었다고?”

박무혁 대통령이 박 회장의 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꽤 잘나가는 변호사라고 합니다.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도왔고 금융권에서도 서로 도움을 받으려는 능력자라고 합니다.”

“……!”

“……아버지, 세상에 하찮은 생명은 없습니다.”

박 회장은 다니엘의 눈을 바라보지 못한다.

고개를 숙인 채 몸 둘 바를 몰라 하고 있다.

박무혁 대통령은 술잔을 입에 댄다.

‘이제 시작이야…….’

그가 시작하려는 재벌 개혁…….

그것을 막으려는 거대한 괴물 두 명이 있다.

윤 회장과 박 회장.

그중 윤 회장은 사망했다.

그리고 박 회장은 결국 개혁을 허락할 거다.

후계가 되고 싶다는 이유로 형제지간의 칼부림, 타락한 자본주의의 끝을 지켜봤으니까.

이번에는 재벌 개혁을 묵인하며 그 죄를 속죄해야 할 거다.

박 회장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니엘의 손을 꽉 잡는다.

“……면, 면목 없지만 살아 있어 줘서 고맙네.”

***

박무혁 대통령도 떠났다.

그리고 발인 전날 밤.

윤범성 부회장은 새로운 비서실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최학인 대표는 왔다 갔고 대한당 원내 대표도 왔고…… 각 당의 최고위…… 다 왔고. 장관들은?”

“장차관 다 왔다 갔습니다.”

“대통령까지 왔으니까…… 올 사람은 다 온 것인가?”

“여당 대표가 아직 안 왔습니다.”

“이성윤?”

“네.”

윤범성 부회장의 인상이 콱 찌푸려진다.

‘새끼…….’

성윤은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다.

같은 편인 것처럼 움직이다가 뒤통수를 때리고 또 아닌 척하는 등 종잡을 수가 없어서다.

‘어쨌든 도움 안 되는 새끼인 것은 분명해.’

그때 비서가 다시 윤범성 부회장의 옆에 붙어 섰다.

“부회장님? 민국당에서 정책 고문을 맡고 있는 이준대라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이준대?”

윤범성 부회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민국당의 정책 고문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직책은 그렇다 치고 이준대라는 이름 역시 들어 본 적이 없어서다.

어쨌든…….

앞으로 일어날 상속 전쟁에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한 법이다.

“오라고 해.”

잠시 후, 이준대가 들어왔다.

국화를 올려 두며 예를 갖춘 그가 몸을 돌려 윤범성 부회장을 향한다.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연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여기까지는 의례적인 인사다.

그런데 윤범성 부회장과 가볍게 악수하며 이준대가 속삭인다.

“CL 머니 한국 법인 이사장이 부회장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

CL 머니, 한국에서 판치는 일본 사채 업체 중 하나다.

이들은 일본에 비해 규제가 덜하고 이자가 높은 한국에 터를 잡았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빨대를 꽂은 후 골수까지 빼먹는 중이다.

일본의 자금으로…….

“CL 머니?”

“네.”

그들이 윤범성 부회장을 만나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성종에 기생하기 위해서다.

평소였다면 거절했을 거다.

급도 되지 않는 대부 업체가 감히 어딜…….

하지만 지금 윤범성 부회장은 현금이 필요하다.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지분, 그리고 지분을 얻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돈이 있어야 한다.

은행 문이라도 부수고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담보를 원하지 않을 겁니다. 이자도 은행권보다 낮을 테고요. 돈은 원하시는 만큼 지원할 수 있을 겁니다.”

윤범성 부회장이 원하는 만큼 모든 것을 맞춰 준다.

그것도 고개를 살살 조아리며…….

윤범성 부회장이 슬쩍 웃는다.

잠시 쓰다 버려도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성종의 힘이면 대부 업체 하나 박살 내는 게 일도 아니니까.

지금의 상황을 타계하기 위한 가벼운 전략…….

“그래요?”

“그리고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CL 머니의 자본이 금융권과 사법부 그리고 정계에도 상당히 스며들어 갔습니다. 부회장님의 경영권 방어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비즈니스 상대로 제격입니다. 그래서 데리고 왔습니다. 민국당은 부회장님을 지지하니까요.”

“민국당이? 최 대표는 그런 말이 없었는데? 그쪽은 우리를 싫어하지 않나요?”

“대표나 되는 사람이 그런 말을 직접 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민국당까지 끄집어 내는 달콤한 목소리다.

윤범성 부회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이준대가 말을 이었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오라고 할까요?”

윤범성 부회장이 주변의 눈치를 보며 답했다.

“얘기나 들어 봅시다. CL 머니라는 정체는 밝히지 말고. 장례식장에 대부 업체가 찾아왔다면 좀 그렇잖아요? 직함은 적당히 구색 맞춰서 데리고 오세요.”

CL 머니를 무시하는 발언, 하지만 이준대는 바짝 엎드려 고개를 숙인다.

일단 그들의 돈을 윤범성 부회장이 받으면 기생을 위한 첫 번째 계획이 성공하는 거니까.

“알겠습니다.”

이준대가 막 CL 머니의 한국 법인 이사장을 데리러 가려는데…….

윤범성 부회장의 비서실장이 다급히 달려왔다.

그리고 윤범성 부회장의 앞에서…….

“이성윤 대표가 왔다고 합니다!”

< 한일전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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