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전 -(3) >
***
납골함에 이지현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다니엘이 그 앞에 섰다.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든다.
그러자 빛바랜 증면 사진이 보였다.
‘……어머니?’
물끄러미 그녀의 사진을 바라봤다.
심장이 뛰거나 눈물이 흐르는 극적인 감정은 없었다.
하지만 눈을 떼지는 못 한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못 볼 것처럼 그녀의 사진을 바라본다.
그때 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착한 사람이었어. 어려운 사람이 보이면 어떻게든 도우려 했지. 자기는 굶더라도 옆집에 사는 소년, 소녀 가장의 밥을 차려 줬으니까.”
다니엘의 시선이 목소리를 향해 틀어졌다.
박무혁 대통령이다.
한국으로 오기 전 계속해서 검색했던 그 얼굴…….
그가 다니엘의 옆에 섰다.
그리고 말을 잇는다.
“공부도 잘했어. 항상 장학금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해. 시험 기간만 되면 잠을 자지 않고 공부를 했지. 내가 유일하게 이겨 보지 못한 사람이야.”
“…….”
“무모하기도 했지, 겁도 많은 사람이 자네를 살리겠다고 미국으로 넘어갔으니…….”
“…….”
“마지막으로…… 자네와 많이 닮았어. 이목구비, 분위기, 그 눈빛…….”
다니엘의 입술이 달싹였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그동안의 일을 성윤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박무혁 대통령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
-나를 버린 거냐?
-왜 혼자 뒀냐?
-찾을 생각은 하지 않았냐!
하지만 묻지 않는다.
박무혁 대통령의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역시 괴로웠다는 것을…….
다니엘은 다시 증명사진으로 시선을 틀었다.
그리고 자신의 또래처럼 보이는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어떤 대화도 없었다.
그저 적막이었다.
한참 후에야 그의 귓가에 박무혁 대통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다.”
“……!”
지금껏 평온했던 다니엘의 가슴이 울컥거렸다.
박무혁 대통령은 그를 보지 않는다.
이지현의 증명사진을 보며 말을 잇는다.
“많이 생각했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막상 떠오르는 것은 하나야. 밥…… 밥은 잘 먹고 다녔지?”
다니엘은 설움이 터져 나올까 봐 입을 열지 못한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전부였다.
박무혁 대통령이 희미하게 웃는다.
“다행이야.”
***
그 시각, 납골당의 흡연장.
성윤은 국정원장 그리고 민정수석과 함께 서 있었다.
“민정수석님? PI 전문가를 소집하세요. 의전 비서관에게 연락해서 행사 기획하시고요. 같은 사건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지니까 스토리는 적어도 5개 이상 뽑아 주세요. 스토리에 연민을 담는 것 잊지 마시고요.”
민정수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죠.”
성윤의 시선이 국정원장에게 향했다.
“국정원은 기밀 유지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겁니다. 방송국과 언론의 움직임에 신경을 써 주세요. 특히 민국당과 손잡은 언론, 그쪽에서 냄새를 맡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대통령이 아들을 찾았다고 감상에 젖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럴 때일수록 더 차가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변수를 예방할 수 있다.
잠시 후, 박무혁 대통령과 다니엘이 밖으로 나왔다.
성윤을 비롯한 사람들이 두 사람의 주변으로 몰려든다.
박무혁 대통령이 몰려든 사람들을 바라보며 입을 연다.
“밥 먹어야지?”
이후, 경기도 과천에 있는 찜닭집으로 향했다.
이지현과 첫 데이트를 했을 때 저녁을 먹었던 곳이라 한다.
“비가 많이 쏟아지던 날이었어.”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다니엘은 박무혁 대통령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어머니지만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가깝게 여겨진다.
그리고 보고 싶어졌다.
한참 이야기하던 박무혁 대통령이 다니엘의 잔에 술을 따랐다.
“마시지.”
박무혁 대통령은 다니엘과 단둘이 식사를 하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아직은 안 된다.
공식적으로 선언할 때까지는 우르르 몰려다니며 다니엘을 숨겨야 한다.
***
다음 날.
성윤과 민정수석은 청와대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박무혁 대통령의 호출을 받고 찾아온 거다.
박무혁 대통령의 눈빛은 어제와 다르다.
어제는 한없이 다정한 아버지였다면 오늘은 다시 대통령이다.
성윤이 찻잔을 내려 두며 물었다.
“발표는 언제쯤 생각하십니까?”
박무혁 대통령이 테이블에 놓인 담배를 손에 쥐며 묻는다.
“꼭 해야 하나?”
다니엘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양부모가 있고 아내가 있으며 자식이 있다.
지금껏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발표와 동시에 그 인생은 송두리째 흔들려 버릴 거다.
성윤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민국당은 물론이고 미국 정보원도 냄새를 맡았습니다.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겁니다. 상대가 때리기 전에 먼저 발표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됩니다.”
박무혁 대통령의 시선이 민정수석에게 향했다.
“자네는?”
민정수석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다는 거지?”
“네.”
박무혁 대통령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고민에 빠진다.
입을 연 것은 한참 후였다.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다.
“발표는 최대한 늦춰.”
성윤이 고개를 저었다.
“대통령님, 발표를 늦출 수 없습니다.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순간 발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앞서 말한 것처럼 상대측에서 다니엘의 정보를 획득하면 골치 아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무혁 대통령의 목소리는 단호하다.
“늦춰. 이왕 발표해야 한다면 최대한 활용해야지. 이번 일…… 재벌 개혁에 써야겠어.”
재벌 개혁…….
박무혁 대통령의 임기 중 목적 하나가 재벌 개혁이다.
정확히 말하면 부모 잘 만난 스펙으로 능력 없이 회장에 오른 자들을 퇴출시키는 것.
그는 다가올 다음 시대에 그들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먹거리가 필요한 때에 그들은 이기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배만 불릴 테니까.
그리고 방만한 경영으로 경제 위기를 초래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어려운 일이다.
이번엔 민정수석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안, 안 됩니다! 대한민국은 성 문제에 예민하고 대통령에게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합니다!”
박무혁 대통령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거랑 재벌 개혁이랑 무슨 상관이야?”
“죄송하지만, 사생아를 만들었던 과거가 있다며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연착륙만 성공해도 박수 받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재벌 개혁은 잠시 미루고 하나에 집중해야 합니다!”
박무혁 대통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재벌 집안의 남자와 평범한 집안의 여자. 사랑했지만 현대판 신분제도에 막혀 결혼을 실패. 여자는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재벌 집안의 협박을 못 이겨 미국으로 이민. 그리고 사망. 남자는 대통령이 되어 여자의 한을 풀어 주려 해!”
“……!”
박무혁 대통령이 민정수석을 향해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이게 재벌의 추악한 민낯을 끄집어 내기에 모자라나? 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대, 대통령님?”
“자네가 할 일은 하나야. 국민의 감성을 건드려서 관심을 모아. 그래야 여론이 딴짓을 못 하지. 그럼 개혁은 충분히 가능해.”
“민, 민국당이 재벌과 손잡고 태클을 걸면…….”
박무혁 대통령이 차갑게 웃는다.
“내가 민국당을 무서워할 것 같아?”
“민국당을 막아도 문제는 또 있습니다. 언론은 여론을 따르지 않습니다. 돈을 따르죠. 기업에서 광고비를 인질로 협박하면…… 언론의 총구는 우리를 향할 겁니다!”
언론과 틀어지면 빠른 레임덕이 올지도 모른다.
그들의 펜대에 대통령의 이미지가 좌지우지될 수도 있으니까.
박무혁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네?”
민정수석이 눈을 깜빡였다.
잠시 잊었다.
박무혁 대통령은 대정 그룹의 최대 주주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앉은 성윤은 AI 회사 리제의 최대 주주고…….
이들은 언론에 쏘아 줄 광고비를 걱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쟁이 시작되면 두 배, 세 배 얹어서 줄 사람들이다.
권력은 물론 재력까지 가진 괴물들…….
민정수석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그래도 대정의 박 회장님이나 성종의 윤 회장님이 움직이면 모든 게 막힐 겁니다.”
성종의 윤 회장과 대정의 박 회장…….
그들이 쏟아부은 돈은 정치권은 물론이고 검찰청과 국세청 등 대한민국 고위직 곳곳에 암세포처럼 박혀 있다.
그리고 회장의 한마디면 그들은 돈값을 위해 거침없이 일어날 거다.
박무혁 대통령의 목을 틀어쥐기 위해…….
물론, 박 회장은 박무혁 대통령의 아버지다.
하지만 이 시점에 부자지간의 정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박무혁 대통령은 박영훈 부회장까지 감옥에 처넣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사이는 꽤 냉랭하다.
부자지간으로 볼 수 없다.
민정수석이 계속 말한다.
“네, 박 회장님과 윤 회장님! 그 두 분이 계시는 이상 재벌을 상대로 싸워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늦추자고 했잖아.”
“네?”
“늦추자고…… 둘 중 한 분이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
박 회장은 박무혁 대통령의 아버지이며 윤 회장은 박무혁 대통령이 어릴 적부터 함께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둘 중 한 사람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다니.
민정수석이 마른침을 삼켰다.
박무혁 대통령이 조용히 입을 연다.
“사람의 죽음을 입에 올리는 게 불경해 보이나? 그중에 내 아버지가 있어서 더 악랄하게 생각되나?”
“아, 아닙니다.”
“내가 대통령이 된 이유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야. 그런 사람을 꿈꿨다면 성직자나 봉사자가 됐을 거야.”
그 말에는 많은 게 담겨 있었다.
박무혁 대통령이 빙긋이 웃으며 말을 잇는다.
“난 우리나라를 위해서라면, 어떤 비난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 그러니까 반대만 하지 말고 좀 도와줘.”
멍하니 있던 민정수석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알, 알겠습니다.”
***
성윤과 민정수석이 복도로 나왔다.
민정수석이 한숨을 내뱉으며 성윤을 바라본다.
“이 대표님?”
성윤이 고개를 틀어 민정수석을 향했다.
민정수석이 간절한 눈빛으로 입을 연다.
“다음 총선 자신 있으십니까? 아니, 자신이 없어도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꼭요…….”
박무혁 대통령은 위태한 길을 가려 한다.
재벌 개혁, 그 과정에서도 온갖 비난을 받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그게 시작이다.
재벌 개혁이 끝나면 또 다른 싸움이 계획되어 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나라 곳곳에서 비명이 들리는 것 같다.
하지만 민정수석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대통령의 뒤를 쫓으며 지시를 따르고 보좌하는 것이 전부다.
대통령이 가는 길을 지켜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성윤은 지켜 줄 수 있다.
국회의 하이에나를 앞에 두고 싸울 수 있는 것은 여당 대표니까.
그러려면 일단 총선에서 승리해야 한다.
성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겨야죠, 반드시…….”
성윤은 뚜벅뚜벅 앞서 걸어갔다.
시선이 창가로 틀어진다.
‘재벌 개혁이…… 둘 중 한 분이 돌아가실 때라고?’
박무혁 대통령이 기다리는 것은 박 회장과 윤 회장의 사후…….
성윤의 입에서 한숨이 흐른다.
꿈속에서 봤던 미래를 기억하면 두 사람의 사후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그동안 준비해야 할 게 산더미다.
윤범성 부회장의 후계 작업을 막아야 하고 정기화 실장의 지분 작업도 해야 하고…….
물론, 변수는 있다.
윤 회장의 건강이 꿈속에서 듣던 것보다 더 좋지 않다는 것.
하지만 의사는 신이 아니며 세상에는 기적이란 말이 있다.
윤 회장이 침대에서 일어나 병원 밖을 돌아다닐 수도 있는 일이다.
성윤의 시선이 다시 복도 끝을 향했다.
‘최악의 상황도 가정해 둬야 해.’
***
“산업재해 트라우마?”
“재해를 목격한 사람도 트라우마가 생길 수 있잖아요? 지원 범위를 확대할 수 있는 개정안이에요.”
당사 대표 사무실.
성윤은 서류를 쭉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당 차원에서 밀어붙일 법안을 확인하는 중이다.
“여기서 더 확대할 수는 없나? 상담 인력을 확충하고 지원 범위를 확대하는 것, 예산 문제인지 아니면 중간에 빼먹는 놈이 있는지 확인해 봐. 그리고 프로그램이 있어도 몰라서 안 쓰는 분들이 많아. 광고 확실히 할 수 있도록 하고.”
“네.”
정우가 수첩에 지시 사항을 적고 있을 때 성윤은 서류를 한 장 더 넘겼다.
“산재보험령 개정안?”
성윤이 서류의 가장 앞장을 확인한다.
“노동부 것만 있네?”
“의원님이 환노위였잖아요. 그래서 노동부와 환경부가 힘을 받는 모양이에요. 흐흐.”
그때 정우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 번호가…… 정기화 실장이다.
“네, 박정우입니…… 네?”
정우의 표정이 좋지 않다.
정우가 통화를 종료하자 성윤이 보챈다.
“왜? 무슨 일이야?”
“성종 윤 회장님이 별세하셨대요.”
“……!”
< 한일전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