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전 -(2) >
성윤의 시선이 카밀라를 향했다.
그녀는 성윤의 입에서 나올 계획을 기대하고 있다.
그 계획이 많이 아프고 쓰릴 것은 모른 채…….
성윤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흘렀다.
어차피 해야 할 말이면 빨리 하는 게 편하다.
“남편을 신고하세요.”
“네?”
“경찰에 넘기세요.”
“그, 그게 무슨……!”
“마약은 범죄입니다.”
“이성윤 대표!”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하지만 성윤의 목소리는 더욱 잔인하게 그녀의 가슴을 파고 들어갔다.
“민주당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말을 잘 들으면 끝까지 숨겨 준다고 합니까? 그 말을 믿었습니까? 알잖아요? 숨기는 게 아니라 ‘킵’해 놓은 겁니다! 언젠가 자신들의 치부를 덮어야 할 일이 생기면 반드시 끄집어 낼 거예요! 공화당 카밀라의 남편이 심각한 마약중독자라고! 카밀라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숨기고 있었다고!”
카밀라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성윤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지만 그의 잔인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처박힌다.
“여기는 정치판입니다. 잡은 약점을 사용하고 싶어 미쳐 버릴 것 같은 악마들이 있는 곳이죠.”
“……그래서 남편을 경찰에 넘기라고요?”
“네.”
“전 세계가 다 알 거예요. 그럼, 해결이 아니라 내 정치 인생의 결말이에요!”
권력의 단맛은 전 세계 공용인가 보다.
그녀는 남편을 걱정하지 않는다.
남편의 마약 문제로 자신의 정치 꿈이 흐트러지는 것은 아닐지 두려워하고 있다.
성윤은 고개를 저었다.
“결말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흘리세요. 질질 짜는 것은 안 됩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딱 한 방울……. 그리고 말하는 겁니다. ‘Sorry’. 남편에 대한 미안함은 그것으로 끝내세요.”
“……!”
“기자들은 묻겠죠. ‘이혼할 겁니까?’ 그럼,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세요. ‘남편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는 내 아이들의 아버지다. 죗값을 치른 후 좋은 아버지가 되기를 바란다. 난 남편의 죄는 용서할 수 없어도 내 아이들의 아버지는 용서할 수 있다.’ 이렇게요.”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간단한 아이디어다.
하지만 그녀는 극한에 몰려 있었고 가장 심플한 것이 위대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며 성윤이 말을 이었다.
“가족보다 법을 우선하는 정치인, 하지만 아이들을 사랑하는 한 가정의 어머니……. 카밀라 의원님은 그 이미지를 얻게 될 겁니다. 민주당 사람들에게 밥 한번 사야겠네요.”
멍하니 있던 그녀의 입가에 조용한 미소가 걸렸다.
없을 것 같았던 탈출구가 보이는 중이다.
남편의 문제만 해결되면 그 뒤는 그녀에게 유리해진다.
성윤이 계속 말한다.
“그럼 남은 문제는 하나. 민주당의 사주를 받고 오진을 한 의사의 처분이죠. 의원님의 선택을 따르겠습니다. 의사가 자백하게 만들까요? 아니면 조용히 덮어 둘까요?”
카밀라가 엷게 웃는다.
“그 의사에게도 사정은 있었겠죠. 하지만 참고 있으면 우습게 보여요. 미안하지만 덮어 둘 수는 없어요.”
“그럼 자백하게 만들겠습니다.”
성윤의 시원한 대답에 그녀가 술잔을 들었다.
“한국…… 꼭 가 보고 싶은 나라였어요. 독도라는 이름의 한국 섬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
잠시 후…….
카밀라는 떠났다.
그녀가 앉았던 자리에는 정우가 앉아 있다.
성윤이 정우의 앞으로 쪽지를 밀어 뒀다.
정우가 물끄러미 주소를 본다.
카밀라에게 오진한 의사의 병원 주소다.
“자백하게 만들어.”
정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쪽지를 접어 품에 넣는다.
***
성윤의 다음 일정은 LA에 있었다.
교민을 만나는 등의 짧은 일정…….
그렇게 모든 일정을 마친 후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그 비행기에는 다시 여야 지도부가 함께 타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의 분위기가 심각하다.
처음 미국에 갈 때보다 더 살벌하게 느껴진다.
성윤은 최학인 대표가 있는 곳을 향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고 성윤에게 박무혁 대통령의 아들을 뺏긴 최학인 대표는 분노한 눈동자로 정면만 응시하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 찬바람이 씽씽 불자 난감한 것은 대한당 원내 대표다.
그는 성윤과 최학인 대표의 사이에서 눈치를 보다가 정우를 향해 조심스레 묻는다.
“무슨 일 있었나?”
하지만 정우는 대답하지 않는다.
어깨를 으쓱하는 게 전부였다.
공항에 내리자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쟁 속에 방미 일정을 소화하셨는데요. 함께 계시면서 국회 정상화를 위한 어떤 말씀이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국회 정상화? 오히려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지금 당장 최학인 대표가 성윤의 멱살을 잡지 않는 게 다행이다.
하지만 그런 대답을 할 수는 없다.
이럴 때는 모호한 대답이 정답이다.
“초당적 외교 활동을 통해 한미간 동맹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국회 정상화 역시 심도 깊은 고민을 함께 나눴습니다.”
짧은 인터뷰를 마친 후 공항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성윤이 달려간 곳은 집이 아니라 청와대였다.
“피곤할 텐데 왜 왔어? 내일 와도 되는데.”
박무혁 대통령의 눈에는 미안함이 한가득이다.
성윤은 미국에 있는 내내 비행기를 타고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그리고 다시 반나절을 날아와 한국에 도착했다.
시차 적응도 되지 않아 머리가 멍할 텐데, 오자마자 청와대라니…….
성윤은 피곤한 얼굴로 빙긋이 웃는다.
“비행기에서 푹 잤습니다.”
성윤은 그간의 일을 간략히 보고했다.
다니엘에서부터 카밀라까지…….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박무혁 대통령이 크게 웃는다.
“이 뉴스가…… 자네가 한 일인가?”
“뉴스요?”
“몇 시간 전부터 난리가 난 게 있어.”
박무혁 대통령은 리모컨을 들어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나타난 아나운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미국 대선에서 최악의 스캔들이 터졌습니다. 미국 민주당은 공화당 카밀라 의원이 대선에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민주당은 모든 것은 정치적 음모이며 말도 안 되는 거짓이라고 일축했습니다. 자백한 의사를 고소하겠다고…….
-청부 오진을 한 의사 션은 통장에 민주당에서 받은 돈이 있다며 통장을 증거로 제출하겠다고…….
채널을 돌려도 모두 미국 대선 스캔들에 관한 일로 시끄럽다.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은 것은 카밀라다.
그녀가 카메라 앞에 섰다.
그러자 카메라는 그녀의 얼굴을 확 끌어당긴다.
동시에 그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남편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는 내 아이들의 아버지입니다. 죗값을 치른 후…….
박무혁 대통령이 낮은 소리로 웃는다.
“갑자기 그레이슨에게 전화가 왔어, 뜬금없이 고맙다고 하더라고. 뭔가 했더니 자네의 힘이었어.”
민주당의 지지율과 공화당의 지지율은 반비례한다.
민주당이 악당의 이미지를 뒤집어쓰며 그레이슨의 지지율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그 뒤에 카밀라의 눈물이 있다는 것은 세상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보고가 끝났다.
박무혁 대통령이 손을 휘젖는다.
“어서 쉬어. 술은 나중에 사도록 하지.”
성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의를 갖추기 위해 허리를 굽히려다가 문득 뭔가 떠오른 듯 입을 연다.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든.”
“갑자기 아들이…… 그것도 장성해서 변호사가 된 아들이 생길지도 모른다면…… 어떤 기분인가요?”
박무혁 대통령이 물끄러미 성윤을 본다.
“솔직하게?”
“네.”
“믿지 못하겠어. 현실적이지 않아. 평생 혼자 살아왔는데, 갑자기 아들이라니……. 그것도 징그럽게 다 커 버린……. 키도 덩치도 나보다 크다며? 게다가 팔에 문신까지……. 결과가 나와 봐야 알 것 같아.”
***
며칠 후…….
인천공항에 입국한 다니엘은 이주성 팀장과 함께 VIP 통로를 이용했다.
철판으로 가림막이 쳐져 있어 누가 드나드는지 알 수 없는 곳이다.
혹시나 모를 민국당 또는 다른 세력에게서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VIP 통로의 끝에 도착했다.
“잠시만요.”
이주성 팀장이 다니엘을 막아섰다.
그리고 휴대폰을 귀에 댄다.
“문 앞이야. 주변 확인해 봐.”
-항상 상주하는 기레기 몇 명 있습니다.
“막아.”
이주성 팀장이 휴대폰을 품에 넣으며 다니엘을 바라봤다.
“모자 쓰시고요. 제 뒤에 바짝 붙어 오세요.”
다니엘의 얼굴은 기밀이다.
기자들의 카메라에 담겨서는 안 된다.
이주성 팀장의 말에 다니엘이 모자를 꾹 눌러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주성 팀장이 입을 연다.
“하나, 둘, 셋!”
두 사람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다급히 달리기 시작하자 기자들의 카메라도 빠르게 두 사람을 쫓는다.
“저거 뭐야? 누구지?”
“검은 머리? 중국인? 아니, 일본? 어디서 온 거야?”
“그게 뭐가 중요해!”
기자들에게는 저들이 누구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VIP 통로에서 나왔다는 게 중요하다.
아무나 나올 수 있는 곳은 아니니까.
“찍어!”
기자들이 막 셔터를 누르려 할 때, 덩치 큰 사내들이 그 앞을 막아섰다.
험상궂은 얼굴로 카메라 렌즈를 가린다.
“여기서 사진 찍으시면 안 됩니다!”
찍지 말라고 안 찍으면 기자가 아니다.
덩치를 피해 카메라로 두 사람을 조준한다.
하지만 늦었다.
그들은 이미 리무진에 올라탔다.
기자들이 리무진과 앞에 선 덩치 큰 남자를 번갈아 바라봤다.
‘리무진, 그리고 과한 경호? 이건 누가 봐도 특종이잖아!’
기자들은 리무진의 번호를 머릿속에 욱여넣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차를 향해 달린다.
“쫓아!”
그사이 이주성 팀장과 다니엘이 탄 리무진은 빠르게 출발했다.
그런데 코너를 돌더니 바로 멈춰 섰다.
그리고 앞에 있는 다른 차에 올라탔다.
원래 타고 있던 리무진은 다시 출발하고…….
이주성 팀장이 손부채를 흔들며 긴장된 숨을 내뱉는다.
“아이고…… 찍히는 줄 알았네……. 이 정도면 성공이죠?”
그 말에 운전석에 앉아 있던 사람이 고개를 틀었다.
“네, 성공이에요.”
기사의 얼굴을 확인한 다니엘의 눈이 커진다.
“이, 이성윤 대표님?”
“한국은 처음이죠? 기분이 어떠세요?”
운전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성윤이었다.
다니엘이 크게 웃는다.
“묘하네요. 한 국가의 정당 대표가 운전하는 차를 다 타 보고.”
차가 출발했다.
이곳저곳에 붙은 간판, 그곳에 적힌 한글이 다니엘의 시선을 붙든다.
그가 중얼거리며 입을 열었다.
“낯선 분위기는 분명한데, 외국에 왔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요.”
그는 밖을 응시한다.
성윤도 이주성 팀장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수십 년 만에 돌아온 고국, 잠시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대정 호텔이었다.
역시 VIP 전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VVIP실로 이동했다.
박영훈 부회장이 온갖 비싼 그림으로 치장한 방이었다.
수억 원대의 그림과 도자기, 수천만 원대의 가구…….
미적 감각이 없는 사람도 비싸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다니엘이 눈을 깜빡이고 있을 때 성윤이 간단히 설명했다.
“저쪽 계단을 통해 내려가면 객실 전용 수영장이 있고요. 룸서비스는 마음껏 시키세요. 그리고…….”
성윤의 목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다니엘은 수영장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유리를 통해 수영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껏 봤던 어떤 수영장보다 호화스럽다.
고대 로마 신들이 이용할 것 같은 분위기……. 압권은 금으로된 수도꼭지다.
도금 말고 진짜 금…….
그가 어색하게 웃는다.
“제가 이 나라의 세금으로 이런 비싼 곳에 묵는 것인가요? 호화스러운 곳이 아니어도 괜찮은데요.”
“네? 대통령님이 이런 일에 세금 쓸 분은 아니세요.”
다니엘의 시선이 성윤을 향해 틀어졌다.
“그럼 자비? 부자라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 호텔이 박무혁 대통령님의 것이에요.”
“네?”
“원래는 박영훈 부회장의 것이었는데 뺏었거든요.”
“그게 무슨……?”
성윤이 빙긋이 웃었다.
“부담 갖지 말고 편히 쉬세요.”
***
그리고 다시 며칠 후…….
다니엘은 대정 병원 VIP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그의 옆자리에는 봉투가 놓여 있다.
그 안에는 유전자 검사에 대한 결과가 들어 있다.
다니엘이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시선을 튼다.
하지만 봉투를 손에 쥐지 못한다.
망설이고 있다.
같은 시각, 청와대.
박무혁 대통령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똑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국정원장이 허리를 굽힌다.
“결과가 나왔습니다.”
박무혁 대통령에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국정원장은 테이블 한쪽에 봉투를 내려 둔 뒤 다시 허리를 굽힌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국정원장이 떠났다.
집무실에는 박무혁 대통령만 남았다.
그는 한참 동안 창밖만 보고 있다.
10분, 20분이 지나도 그 자리, 그 자세다.
그러다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몸을 돌렸다.
뚜벅뚜벅, 테이블로 향해 봉투를 손에 쥔다.
하지만 망설이며 봉투를 열지 못한다.
맞은편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본 박무혁 대통령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신생아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박무혁 대통령이 거침없이 봉투를 뜯었다.
그저 확인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딱 그 정도다.
그런데…….
결과를 확인한 그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 한일전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