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의 편이 아니니까. - (5) >
미국을 방문한 이유, 각자의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했다.
레임덕에 휩싸인 미국 정부를 만나기 위해 먼 거리를 날아 올 리는 없으니까.
그런데…….
원내 대표가 낄낄 웃으며 말을 잇는다.
“미친놈들, 박무혁 대통령한테 아들이 있대.”
“……!”
성윤은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민국당에는 이준대가 있다.
그는 박무혁 대통령의 아들을 처음 거론했던 사람…….
그리고 한정이 기자가 있던 작은 지라시 업체를 통해 그 이야기를 세상에 퍼뜨리려 했었다.
처음엔 박무혁 대통령을 흔든 후 접근하려는 단순 계략인 줄 알았는데…….
‘이준대가 정말 알고 있었던 걸까?’
그럴 수도 있다.
이준대는 미국에서 꽤 오랜 시간을 지냈다.
이런저런 인맥이 가득 깔려 있고 박무혁 대통령의 아들 역시 그 인맥 중 하나였을지 모른다.
원내 대표가 계속 이죽댄다.
“가만히 보면 저놈들은 소설 쓰는 걸 정말 좋아해. 박무혁 대통령에게 아들이 있다니, 그게 말이 돼? 어디서 거지 같은 지라시를 듣고 와서 설쳐 대고 있으니……. 그래 놓고 내가 개라고? 에이, 한심한 인간들.”
여기까지 말한 원내 대표는 성윤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그리고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준비했던 말을 쏟아 낸다.
“저런 선동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우리가 힘을 합쳐야 해. 우리가 분열되면 표가 갈릴 게 당연하잖아. 그럼 민국당의 선동이 더 짙어지겠지. 그래서 난 결정했어. 내 계파를 끌고 여당으로 갈게. 박무혁 대통령을 지켜야지. 그런데, 그러려면 공천에 대한 확답이 필요한데…….”
기승전…… 공천이다.
성윤은 그의 말을 듣는 척 고개를 끄덕이며 정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대한당 원내 대표, 내 앞에서 치워 줬으면 좋겠어.
원내 대표는 성윤이 어떤 메시지를 보냈는지 모른다.
성윤의 표정을 살피며 긍정적인 대답을 원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생각해 보겠습니다. 원내 대표님이 계시면 든든할 것 같습니다.”
원내 대표의 표정이 확 밝아진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네.”
“고맙네, 고마워. 하하하.”
성윤은 생각해 보겠다고만 했다.
그런데 원내 대표는 그 말이 허락이라 생각했는지 즐거워하고 있다.
그때 원내 대표의 보좌관이 다급히 들어왔다.
성윤의 눈치를 잠깐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국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 누구?”
“그게…….”
성윤이 들어서는 안 될 말인가 보다.
보좌관이 원내 대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성종그룹 윤 회장님의 비서실장 정기화입니다.”
“……!”
원내 대표가 발딱 일어섰다.
성종 그룹 윤 회장의 비서실장이면 정기화다.
어지간한 정치인은 발밑에 둔 것처럼 깔보는 사람.
그런데 그 사람이 지금 이 시간에 연락했다는 것은…….
‘내가 미국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야. 그런데 연락을 했다면…… 미 정부를 상대로 부탁할 게 있다는 것인가?’
상대는 성종이다.
도움을 주면 묵직한 사과 박스를 받게 될 거다.
원내 대표의 시선이 성윤에게 향했다.
“전, 전화 좀 받고 오겠네. 하하.”
“아뇨, 하실 말씀 다 하신 것 같은데, 내일 뵙죠. 저도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원내 대표가 활짝 웃는다.
마음 놓고 정기화 실장과 통화할 수 있어서 기쁜 모양이다.
“그럴까? 그럼 내일 봐. 흐흐.”
원내 대표는 휴대폰을 들고 허겁지겁 밖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성윤이 중얼거렸다.
“미안하네…….”
정기화 실장이 전화한 이유는 정우의 부탁이었다.
그러니 영양가 없는 말장난만 하다가 통화가 종료될 거다.
그런데 저렇게 좋아하는 원내 대표를 보니 괜히 짓궂은 장난을 한 것만 같다.
원내 대표가 완벽히 사라진 후 성윤의 시선은 최학인 대표에게 향했다.
최학인 대표는 심각한 얼굴로 보좌관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다.
성윤은 저벅저벅 그에게 다가간다.
“최 대표님?”
최학인 대표가 고개를 틀어 성윤을 본다.
냉랭한 눈빛이다.
“어쩐 일이지?”
“같이 한잔하시겠습니까?”
“같이 있던 철새는?”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성윤을 물끄러미 보던 최학인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지.”
성윤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최학인 대표와 마주하던 보좌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를 빠져나갔다.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는 거다.
최학인 대표가 맥주를 들며 입을 연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어서 해. 우리가 잡담 나눌 사이는 아니잖아?”
“미국에는 왜 오셨습니까? 저 혼자 끝내도 되는 일정인데, 갑자기 오신다고 해서 당황했습니다.”
“이유?”
“네.”
“별 이유 없어. 박무혁 대통령이 공화당 후보에게 공을 들이는 바람에 민주당 측이 기분 나빠하잖아. 그래서 그놈들 화 풀어 주러 왔어. 밥을 먹이고 선물을 주면 누그러지겠지.”
속마음을 들어 보면 민주당과의 미팅은 미국으로 온 명분일 뿐이다.
대한당 원내 대표가 했던 말처럼 최학인 대표는 박무혁 대통령의 뒤를 캐러 왔다.
그런데 최학인 대표는 그 아들에 대한 정보를 성윤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심지어 소재지까지…….
‘아들로 의심되는 사람이 뉴욕에 있다고?’
머릿속에 최학인 대표가 먼저 그 아들을 찾게 되는 최악의 상황이 그려졌다.
최학인 대표는 그 아들을 설득할 거다.
“박무혁이 널 버렸어. 참고만 있을 거야? 전면에 서서 그를 끌어내야 해! 우리가 도와줄게!”
간사한 혓바닥이 움직이고 막대한 돈이 눈앞에서 흔들리면 안 넘어갈 사람이 없다.
결국 아들은 수락할 테고 최학인 대표는 대통령에게 혼외자가 있음을 대대적으로 발표할 거다.
모든 언론이 아들을 향하면 그 아들은 이렇게 말할 게 분명하다.
“전 버림받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이 그립고 한국의 문화와 제 뿌리가 궁금하지만 돌아갈 수 없습니다. 어느 재벌 그룹의 협박 때문이죠. 그들은 말했습니다. 제가 한국 땅을 밟는 순간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고…….”
그리고 아들이 고개를 숙이며 ‘엄마가 보고 싶어요.’라는 말과 함께 눈물을 흘리면…….
‘박무혁 대통령은 끝이야.’
대다수의 사람은 이면을 보려하지 않고 미디어가 보여 준 일방적인 단면만을 신뢰한다.
게다가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스캔들이다.
지켜 보던 사람들은 ‘난 그럴 줄 알았어.’라는 말로 죄를 확정 지어 버릴 거다.
그럼 반토막 날 지지율이 문제가 아니다.
신뢰를 잃은 대통령은 빠른 레임덕에 처해질 수도 있다.
다음 총선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정국 역시 계획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망가지고 말 거다.
성윤이 얼굴을 쓸어 만졌다.
‘먼저 찾아야 해.’
최학인 대표보다 빨라야 한다.
그래야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상대의 정보를 파악하는 거다.
성윤이 고개를 들어 최학인 대표를 보며 묻는다.
“대표님, 내일 오전 이후의 일정이 어떻게 되십니까?”
“내 일정?”
“네.”
뜬금없는 질문에 최학인 대표가 조용히 성윤을 바라본다.
하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정이야 홈페이지만 가도 기초적인 것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내일 오후에 민주당 하원 원내 대표를 만나고 저녁에 뉴욕으로 넘어가겠지. 이유는 알지?”
“교민을 만나실 예정입니까?”
“그래, 자네는 LA로 넘어가나?”
“네.”
건조한 질문과 대답이 이어졌다.
최학인 대표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묻는다.
“그런데, 내 스케줄 물어보려고 한잔하자고 했던 거야? 시답잖은 소리로 잡담을 하다니, 자네답지 않은데?”
“한국에서는 적이지만 타국에서는 손잡아야죠. 그게 애국이고 맥주는 그 시작이죠. 잡담은 안주고요.”
최학인 대표가 껄껄껄 웃는다.
“웃기는 소리……. 난 자네가 참 무서워. 겉과 속이 전혀 다르거든. 앞에서는 웃지만 뒤에서는 칼을 갈고 있잖아. 그래서 타국이라 해도 손잡고 싶지 않아. 언제 당할지 모르니까.”
성윤이 손바닥을 펼쳐 보인다.
“오늘은 칼을 안 가지고 왔습니다. 손에 맥주만 있네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뒤에 숨기고 있나 보지.”
두 사람은 빙긋이 웃으며 서로를 바라본다.
하지만 서로의 속마음은 다르다.
최학인 대표는 박무혁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핵폭탄이 사실이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 핵폭탄을 청와대에 떨어뜨리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청와대가 박살 나면 지금은 은퇴한 도제성을 다시 모시고 올 수 있으니까.
반대로 성윤은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상황…….
복잡한 눈빛이 오갈 때 최학인 대표가 맥주병을 들어 올렸다.
“Cheers.”
성윤은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붉어진 얼굴을 보며 정우가 묻는다.
“맥주 마신다고 하셨잖아요? 도대체 얼마나 드셨기에…….”
“마시다 보니까 맥주가 위스키로 변했어.”
“네? 위스키요?”
“많이 마신 거 아니니가 괜찮아. 어쨌든, 고아원 명단 가져와 봐.”
정우가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성윤에게 건넸다.
고아원에 있었던 동양인 아이들.
여전히 LA에 살고 있는 아이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성윤이 찾는 것은 LA에 사는 사람이 아니다.
“우선 이 사람, 다니엘을 만나야 할 것 같아. 그러니까 LA 일정 중에 취소할 수 있는 것은 취소하고 미룰 것은 미뤄.”
“네?”
“내일 일정이 끝나면 곧바로 뉴욕으로 넘어갈 거야. 준비해.”
“뉴욕요?”
“어.”
정우는 갑작스러운 성윤의 지시가 의아했다.
하지만 묻지 않는다.
급한 불을 끄면 어련히 설명해 줄 테니까.
정우가 휴대폰을 들고 연락을 취할 때, 성윤도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이주성 팀장님?”
인천 공항에서 만났던 요원이다.
-네, 대표님!
목소리에 긴장이 서려 있다.
성윤이 공항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성윤은 분명 ‘제가 연락하면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었다.
-말씀하십시오.
“LA 고아원 출신의 다니엘이라고 있어요. 인적 사항 보내 드릴 테니까 조사할 수 있는 것은 전부 가져다주세요.”
요원은 성윤이 어떤 이유로 미국에 왔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성윤의 입에서 특정인이 지목되자 그 목소리가 더 은밀해진다.
-죄송하지만 다니엘이라는 사람이 설마……?
“더 묻지는 마시고요.”
-죄송합니다.
“언제까지 가능할까요?”
-이곳이 한국이 아니라 쉽지는 않을 겁니다.
“오래 걸릴까요?”
-오늘 당장은 힘들고 내일 오후까지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새삼 우리나라의 정보 수집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다음 날 오전, 공화당 하원 원내 대표와 기념 사진을 찍으며 워싱턴에서의 공식 일정이 끝났다.
이제 여야 지도부는 개별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최학인 대표는 민주당 하원 원내 대표와 식사 후 뉴욕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다.
대한당 원내 대표는 시애틀에 일정이 잡혀 있고.
마지막으로 성윤의 공식 일정은 LA로 향하는 거다.
물론 공식 일정은 이미 뒤죽박죽되어 있지만…….
“출발하죠.”
성윤이 탄 차가 움직였다.
목적지는 공항이다.
그리고 성윤이 탄 비행기는 LA가 아니라 뉴욕을 향해 날아갈 거다.
그럼 최학인 대표보다 반나절 이상 빠르게 뉴욕에 도착할 수 있다.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창밖을 보던 정우가 성윤을 향했다.
“한국에 연락해서 PI 전문가하고 스토리텔링 전문가를 준비해 둘까요?”
PI 전문가는 President Identity, 대통령의 이미지를 관리하는 사람이다.
대통령의 이미지에 따라 정책의 실행에 힘이 실리기도 하니까.
“그 사람들은 왜?”
“대통령님의 아들이 맞는다면 슬슬 스토리를 메이킹해야 하지 않아요? 최대한 거부감 없는 이미지에 감동적인 스토리가 덮여야 이득이 될 것 같거든요.”
정우의 말을 듣다 보니 문득 어젯밤, 최학인 대표를 보며 생각했던 게 떠올랐다.
성윤과 최학인 대표는 같은 남자를 쫓는다.
그런데 그 사람을 두고 표현하려는 색깔이 전혀 다르다.
한쪽은 대통령의 파멸, 한쪽은 대통령의 승승장구…….
어느 쪽이 정의로운지는 모른다.
초록은 동색이니까.
그때 성윤의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요원인 이주성 팀장이다.
“네.”
-어제 말씀하셨던 사람, 조사 끝났습니다.
시간을 확인하니 딱 오후로 접어들고 있다.
-메일로 보냈습니다.
“감사합니다.”
성윤은 통화를 종료했다.
휴대폰을 확인하자 들어온 메일이 보인다.
박무혁 대통령의 아들로 추정되는 다니엘.
그는 지금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사진을 보는 순간 성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다니엘이 이 다니엘이었어?’
아는 얼굴이다.
약 15년 후, 입양아 출신으로 미국의 장관에 오르는 사람.
성윤과도 몇 번 마주한 적이 있고 가볍게 술을 마신 적도 있다.
그런데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과 한국을 연관한 적이 없다, 오히려 차갑게 대했지…….
‘그런데 이 사람이라고?’
***
뉴욕의 어느 호텔, 성윤과 정우는 1층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오래 걸리지 않아 문이 열리고 말끔한 정장을 입은 꽤 잘생긴 남자가 들어왔다.
바로 다니엘이다.
첫 만남이지만 다니엘은 성윤과 정우를 한눈에 알아봤다.
이 호텔의 커피숍에 앉아 있는 유일한 동양인이었으니까.
“Mr. Lee?”
그가 다가와 서글서글한 눈매로 악수를 건넨다.
성윤도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성윤입니다. 연락도 없이 찾아와 죄송합니다.”
“아, 괜찮아요. 그런데 바로 말씀하시죠. 10분 후에 들어가 봐야 해서.”
다니엘은 사람 좋은 미소를 보내며 손목을 틀어 시간을 확인한다.
10분이라는 짧은 시간을 걸어 버린 거다.
그리고 끝이 아니다.
“그리고 혹시나 한국과 저를 연관시킬 생각이시라면 지금 당장 돌아가시는 게 소중한 10분을 낭비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전 한국을 안 좋아하거든요. 그럼, 시작하세요. 왜 저를 찾아왔죠?”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분위기가 참 엿 같다.
< 정의의 편이 아니니까. -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