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회의원 이성윤-266화 (266/300)

< 세 개에서 다시 두 개. - (3) >

***

인생의 끝을 기다리는 노인, 오랜만에 만난 윤 회장은 안쓰러울 정도였다.

팔과 다리는 마른 나뭇가지 같았고 주름진 피부는 퍼석퍼석해 보인다.

기력이 다한 목소리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도 다행히 정신은 또렷했다.

윤 회장이 억지로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으며 입을 연다.

“전재익 대표가 우리 호텔의 분식 회계를 건드린다고요?”

“네.”

윤 회장의 얼굴에 불쾌감이 스쳤다.

성종의 후계 과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막대한 증여세와 상속세를 피하기 위해 긴 시간에 걸쳐 차근차근 이어지는 중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전재익 대표가 엿을 던져 대기 시작했다.

윤 회장이 정기화 실장을 향해 입을 연다.

“대한당 원로에 누가 앉아 있지? 오늘 저녁에 병실에 들르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윤 회장의 입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스쳤다.

현 장관부터 국세청장 그리고 새로 올라간 검찰총장까지.

놀라운 것은 그중에 박무혁 대통령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인물도 존재했다는 점이다.

모든 이름을 거론한 윤 회장이 성윤에게 시선을 옮겼다.

“여당 대표께서 옆에 있는데, 내가 괜히 출석부를 부른 것은 아닌지 걱정되네요.”

출석부란 뇌물을 받은 사람들의 명단…….

윤 회장은 일부러 성윤의 앞에서 그 이름을 거론했다.

자신의 한마디에 국정이 마비될 수 있으니 여당 대표는 이번 게임에서 빠지라는 의미다.

그리고 성윤은 그 의미를 잘 알아들었다.

“괜찮습니다.”

윤 회장의 생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에게 마지막이 왔을 때, 지금 호명된 사람들의 이름도 함께 관 속에 파묻힐 거다.

지금은 대한당에 집중할 때다.

성윤이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며 입을 열었다.

“대한당 전재익 대표…… 시간 끌지 않고 빠르게 끝낼 방법이 있습니다.”

사실 윤 회장이라 하더라도 거대 정당의 대표와 싸우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빠르게 끝낼 수 있다니…….

윤 회장이 눈을 반짝였다.

“빠르게?”

“저는 자세히 모르지만…… 정기화 실장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성윤과 눈이 마주친 정기화 실장이 크게 당황했다.

“저, 저요?”

“네.”

지금부터 꺼내야 할 이야기는 윤범성 부회장이 금괴를 밀수했고 어쩌고 하는, 말 그대로 개망신당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런 치부를 외부인인 성윤의 입에서 전해 듣는다면?

가뜩이나 건강이 악화된 윤 회장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다.

성윤 나름의 배려였다.

윤 회장이 정기화 실장을 보챘다.

“정 실장, 말해 봐.”

“그, 그게…….”

“왜?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인가? 괜찮으니까 말해 봐.”

머뭇거리던 정기화 실장이 한숨을 내뱉으며 답했다.

“윤범성 부회장이 해외로 빼돌린 돈 중 일부를 홍콩으로 모았습니다. 그 돈으로 금괴를 사들였고 밀수를 저질렀죠. 그리고 그 금괴는 정치자금으로 바뀌어 대한당에 전달될 예정이었습니다. 액수는 약 100억 원…….”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윤 회장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가 허옇게 질려 갔다.

삐쩍 마른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밀, 밀수?”

성종이라는 거대 그룹이 100억 원대의 금괴 밀수를 저질렀다는 충격적인 사실…….

“정 실장……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지?”

더 큰 문제는 정치권에 닿아 있다는 것.

이게 밖으로 새어 나가면 성종을 아니꼽게 보던 세력들이 이 기회를 틈타 일어날 거다.

그들은 성종의 모든 것을 씹어 먹기 위해 팔을 걷어붙일 게 분명하다.

그러면 성종은 말 그대로 박살 날 거다.

‘그렇게 말했는데, 정치권과는 적당히 거리를 두라고 했는데…….’

윤 회장은 한참 동안 한숨만 내뱉었다.

그리고 한참 후, 그의 눈동자가 성윤에게 향했다.

“이거 민망하게 됐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당은 이 일로 성종을 공격하지 않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 이유를 들어 볼 수 있겠습니까?”

정치인은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는 족속들…….

게다가 박무혁 대통령은 성종을 잡아먹기 위해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다.

그 세력인 여당이 공격하지 않겠다니, 그 이유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성윤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윤 회장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전해 줬다.

“재벌에 대한 상속세와 증여세, 정치권에서 어떤 의미로 눈감고 있는지 아시잖아요? 저도 그걸 활용하고 싶을 뿐입니다.”

많은 정치인들은 재벌을 개혁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카메라 앞에서 지껄이는 가식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재벌이 망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 앞에 무릎 꿇기를 바라지…….

그 협박의 칼이 상속세와 증여세다.

윤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성윤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성종과 밀수를 연관시키려 해도 마땅한 증거도 없어요.”

윤 회장의 시선이 다급히 정기화 실장을 향했다.

‘정말?’이라고 묻는 눈빛에 정기화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도 성종의 흔적은 없습니다. 이 밀수 사건을 터뜨리면 대한당만 다칠 겁니다.”

정기화 실장은 평소처럼 대답했다.

그리고 말을 마친 후 소름이 쭉 돋는 것을 느꼈다.

말을 하고 나서야 알게 된 거다.

성윤의 첫 번째 목표…….

‘대한당을 없애려는 거구나!’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딱딱 들어맞는 톱니바퀴처럼 움직이는 중이다.

윤범성 부회장부터 대한당까지…… 성윤의 손가락에 의해 행동하는 마리오네트 같다.

그때 윤 회장은 말한다.

“대한당을 없애려 하는군요? 그래요. 예전의 대한당이었다면 절대 없앨 수 없었겠죠. 하지만 지금의 대한당이라면…… 그리고 전재익의 범죄 사실이 우리 손에 있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좋아요. 대한당을 역사에서 지우겠습니다.”

성윤이 손을 저었다.

“성종이 할 일은 대한당의 이름 앞에 지우개를 가져다 두는 것‘까지’입니다.”

“…….”

“죄송하지만, 대한당의 역사에 성종이 마침표를 찍을 자격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국민이 할 일이죠.”

정치는 국민의 선택이다.

그 역할을 장사꾼에게 넘길 수는 없다.

윤 회장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거기까지만 하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일로 성종과 이 대표님의 사이가 더 돈돈해졌으면 합니다.”

성윤과 윤 회장은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정기화 실장은 두 사람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윤 회장이 세상에서 가장 악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마저 성윤의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정기화 실장은 성윤이 두려워지고 있었다.

잠시 후, 성윤이 떠났다.

방에는 윤 회장과 정기화 실장만이 남았다.

윤 회장은 성윤과의 대화가 힘겨웠는지 가쁜 숨을 몰아쉰다.

그리고…….

“내가 대한당 원로를 부르라 했었나?”

“네. 장관과 국세청장, 검찰총장까지…….”

“부르지 마. 대신 언론사 사장들, 내 돈 먹고 빌딩을 산 놈들은 전부 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범성이 불러.”

윤범성 부회장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1시간 후였다.

“아버지, 부르셨어요?”

“안경 벗어.”

“네?”

평소 기력 없이 누워 있던 윤 회장인데, 그의 입에서 사자 같은 무서운 목소리가 흐른다.

윤범성 부회장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정기화 실장을 향해 의문으로 가득한 눈빛을 보낸다.

하지만 정기화 실장은 그의 눈빛을 외면항 채 부자의 뜨거운 만남을 위해 병실을 벗어났다.

그리고 복도를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내가 앞에 있을 테니까 30분 정도 담배 한 대씩 피우고 와.”

경호원들은 고개를 끄덕인 후 곧장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곧 병실에서 ‘쾅! 쾅!’ 하고 물건 던지는 소리와 ‘와장창!’ 하고 뭔가 깨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정기화 실장이 빙긋이 웃는다.

“회장님…… 아직 정정하시네. 몇 년은 거뜬하시겠어.”

***

그날 밤.

윤 회장의 병실에 메이저 언론사 다섯 곳의 사장들이 모두 모였다.

그들이 윤 회장의 마른 몸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윤 회장이 껄껄껄 웃는다.

“이 사람들아, 왜 그렇게 봐? 이 나이에 다이어트 좀 했는데 그게 이상해 보이나?”

“회장님…….”

우려 섞인 목소리에 윤 회장이 손을 저었다.

“됐어. 위로받자고 부른 거 아니야. 자네들이 어떻게 사는지 얼굴 한번 보고 싶어서 불렀어. 김 사장, 요즘 어때?”

한동일보 사장이 답한다.

“회장님께서 매달 넣어 주시는 자동차 광고 덕분에 먹고살 만합니다.”

“얼굴 보니까 소고기 꽤나 먹은 것 같아.”

“흐흐.”

한동일보 사장이 멋쩍게 웃었다.

윤 회장의 시선이 다른 사장에게 향한다.

“그래, 자네는 요즘 어때?”

“때마다 아파트 분양과 전자제품 광고를 넣어 주시는데요. 감사합니다.”

“애는 잘 크나? 내가 손주 돌잔치 때 참석했던 것 같은데.”

“벌써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윤 회장이 물었고 그들은 비슷한 대답을 했다.

윤 회장이 다시 입을 연다.

“요즘 종이 신문 보는 사람 없는 거 알아. 그런데 난 광고비 한 푼 깎지 않고 꼬박꼬박 넣어 줬어. 오히려 더 쳐줄 때도 있었고. 알지?”

다들 한목소리로 대답한다.

“알고 있습니다!”

“자네들 입장에서는 호구 아니었나?”

“아닙니다. 감사했습니다!”

“범성이한테 이야기해 뒀어. 앞으로도 자네들 광고비를 깎을 일은 없을 거야.”

“감사합니다!”

언론사 사장들이 동시에 허리를 굽혔다.

윤 회장의 사후에도 계속해서 광고가 들어온다니,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윤 회장이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연다.

“그래서, 부탁 하나만 하지. 자네 다섯이서 손을 모으면 대통령도 갈아 치울 수 있다고 자신하지?”

“……!”

대통령의 이름이 나오자 언론사 사장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대통령은 박무혁…….

대정의 주인이다.

성종 못지않게 광고비를 챙겨 주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성종이 대통령을 갈아 치우자고 하면?

말 그대로 난감한 일이 벌어지는 거다.

그들의 난처한 표정을 보던 윤 회장이 껄껄껄 웃었다.

“걱정하지 마. 대통령을 치우자는 게 아니니까.”

“그럼…….”

“대한당.”

“……!”

사장들의 눈에 긴장감이 확 서렸다.

대통령이 아니라고 해서 잠시 안심했는데 대한당이라니…….

지금은 존재감조차 없지만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다.

그들의 기나긴 역사를 무시할 수 없다.

한상국 등의 대통령을 배출했고 드러나지 않은 막후의 권력자가 존재한다.

그들과 싸우려면 팔 하나는 내줄 생각은 해야 한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인천에서 밀수 조직이 잡혔다지? 그런데 기자 양반들도 모르는 게 있어. 그놈들이 100억 원대의 금괴를 들여왔다는 거야.”

언론사 사장이 단신에 실린 밀수 조직 체포까지 알 수는 없다.

그들이 조용히 듣고 있는데, 윤 회장의 입에서 충격적인 발표가 흘러나왔다.

“금괴의 주인이 대한당이야.”

“네?”

언론사 사장들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

“왜? 내가 치매라도 걸린 것 같나?”

“아, 아닙니다. 대한당이 밀수라니 믿을 수 없어서.”

“더 충격적인 일을 말해 줄까? 총책은 대한당 대표 전재익, 대한당의 의원들이 그 뒤를 도왔겠지.”

사장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예사롭지 않은 이야기…….

머릿속에서는 이 사건을 기사로 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복잡한 계산을 하는 중이다.

윤 회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나도 알아. 그래서 그런가…… 죽어서 염라대왕을 만나면 마지막에는 좋은 일을 했다고 말하고 싶어. 천국에는 못 가도 지옥은 피하고 싶으니까. 그러려면 자네들이 도와줘야겠지?”

“…….”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 대한당의 가면을 벗겨야겠어. 창고를 열어 둘 테니 자금은 마음대로 가져다 써! 대신 대한당을 벼랑 끝까지 몰아넣도록 해.”

그들의 귀에 가장 듣기 좋은 소리는…… ‘창고를 열어 둘 테니’였다.

그들의 눈에 힘이 들어갔을 때 윤 회장이 빙긋이 웃으며 말을 잇는다.

“단, 벼랑 끝에 선 대한당을 밀지는 마. 그 일은 국민이 할 테니까.”

“……!”

몰아붙이기만 하고 대한당의 목숨은 끊지 않아도 된다니…….

그들은 거대 정당과 싸운 다윗의 이미지를 얻으면서도 대한당 지지자들에게 원망의 소리는 듣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윤 회장의 창고에서 돈도 꺼내 쓸 수 있고.

언론사 사장들은 망설일 필요가 없어졌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행동할 것이란 것도 성윤의 계획에 있었던 것이다.

정기화 실장은 힘차게 대답하는 사장들을 보며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윤 회장의 사후, 윤범성 부회장을 내쫓고 자신이 회장에 올랐을 때…… 성윤과 어떻게 지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하다.

병실에 윤 회장과 정기화 실장만 남은 것은 밤 10시가 다 되어서였다.

윤 회장은 오늘 평소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

피곤한 눈으로 창밖을 본다.

“정 실장, 마지막으로 부탁할 게 있어.”

“말씀하십시오.”

“밀수…… 아는 놈이 또 누가 있지?”

“윤범성 부회장의 비서실장이 알고 있습니다. 홍콩으로 넘어가 총지휘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윤 회장의 아들 윤범성 부회장이 밀수와 엮여 있다.

아무리 증거가 없어도 가만히 두면 언젠가 스캔들로 확산될 수 있는 일이다.

그 전에 모든 흔적을 없애 버려야 한다.

조용히 밖을 보던 윤 회장이 한숨을 내뱉으며 입을 연다.

“죽여.”

< 세 개에서 다시 두 개. -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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