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과 기름. - (4) >
잠시 생각에 빠졌던 전재익 대표가 눈을 떴다.
의원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시끄럽다.
“당하고만 있을 겁니까!”
“이러니까 우리를 무시하는 거예요!”
“전재익 대표님, 대한당의 마지막 당 대표가 되려는 겁니까!”
전재익 대표가 고개를 저었다.
“그만.”
“대표님, 지금은 존재감을 알려야 할 때입니다!”
“지금 당장 국회를 장악하고 투쟁을…….”
급기야 전재익 대표가 테이블을 쾅쾅쾅 내리찍었다.
“그만! 그만! 그만하세요!”
살벌한 목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전재익 대표가 한숨을 내뱉으며 의원들을 쏘아본다.
이대로 두면 대한당은 분열될 거다.
또 계파 싸움…….
가뜩이나 찢기는 중인데, 계파 싸움까지 일어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게 분명하다.
‘차라리…….’
이들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쏟아부어야 한다.
그래야 내부의 불만이 사라지고 결집하게 될 거다.
전재익 대표가 입을 열었다.
“신당과 민국당은 노골적으로 우리를 따돌렸습니다. 우리를 끌어내리고 자신들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거죠.”
“……!”
“놈들의 목표는 총선……. 이대로 있으면 우리의 미래는 뻔합니다. 완벽한 패배. 그리고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권력을 잃은 사람의 종말이 어떤지…….”
분위기가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전재익 대표의 말대로 총선에서의 패배는 확실하다.
그리고 패배한 정치인이 향하는 곳은 단두대…….
의원들은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전재익 대표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1년이란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
“나쁜 평판에 개의치 말고 탐욕적으로 움직이세요! 가만히 있으면 낙선! 죽고자 하면 사는 법! 악당이 되어 상대를 잔인하게 씹어 드세요! 그럼, 국민의 표는 다시 우리에게 쏟아질 겁니다.”
정치인은 치명적인 비리 외에는 모든 것이 플러스라고 말한다.
악평보다 존재감이 없는 게 더 슬픈 짐승들이니까.
그리고 당 대표가 직접 말했다.
악당이 되라고…….
회의실에 앉은 의원들의 눈빛에 살기가 가득해졌다.
그들을 보며 전재익 대표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죽이세요.”
“……!”
“우리의 먹잇감은 천방지축 날뛰는 서른둘의 애송이 이성윤! 그리고 국민이 아니라 도제성의 뜻을 받드는 멍청한 충신 최학인입니다.”
“……!”
“국민은 힘이 없어 골골대는 정치인이 아니라 사악하지만 강한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도자는 우리가 될 것입니다.”
***
먼저 대한당과 민국당의 대립이 시작됐다.
시발점은 SNS였다.
-신당과 민국당의 비밀 회담……. 가증스럽다. 이래서 민국당은 믿지 말라고 하나 보다. 민국당은 야당이 해야 할 일을 잊어 먹었나?
대한당의 뜬금없는 공격.
뺨 맞고 가만히 있을 민국당이 아니다.
그들은 곧바로 대응했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대한당의 발언에 일일이 대응하면 귀찮기만 하다. 멍청한 놈들.
대한당의 SNS가 또 올라온다.
-뭐요? 멍청? 지금 그 말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책임? 이런 것도 책임을 져야 하나요?
대한당과 민국당…… 물과 기름처럼 애초에 섞일 수 없었다.
신당이라는 공공의 적을 만들어 섞여 보려 했지만 역시나 실패…….
잠시 잡았던 손을 뿌리치자 날 선 목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비꼬고 비웃고 법적인 책임을 운운하고.
마주쳐도 인사조차 나누지 않는다.
오히려 죽일 듯한 눈동자로 서로를 노려본다.
그리고…….
성윤은 정우와 함께 의원회관 복도를 걷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정우가 속삭였다.
“생각보다 불길이 더 커졌는데요?”
분위기가 오싹할 정도다.
칼부림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눈빛으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정우의 속삭임이 이어진다.
“그런데 의원님, 최종 목적은 대한당의 흡수인 거죠?”
지금 이 상황은 성윤이 만들어 낸 그림이다.
그 목적이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그렇게 생각해? 왜?”
“이대로 총선이 시작되면 대한당하고 표를 갈라야 하잖아요. 그럼 민국당만 이득을 볼 테고, 우리는 또 과반을 못 잡고.”
다음 총선은 반드시 잡아야 한다.
실패하면 지도력을 인정받지 못한 채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야 할 거다.
그리고 박무혁 대통령 역시 힘들어진다.
국회를 장악하지 못한 채 정권의 정책을 추진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니까.
임기 내내 야당에 끌려다닌 힘없는 지도자로 역사에 기록될 거다.
정우가 계속 말한다.
“그걸 막으려면 대한당을 흡수하는 게…….”
“흡수는 아니야.”
“그럼요?”
흡수를 하면 도로 대한당이 된다.
그럼 대한당을 몰락으로 이끌었던 계파 싸움이 또 재현될 수 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썩어 버린 물은 하수구에…….
“없애야지. 대한당은 간판도 남지 않을 거야.”
“없애요?”
살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성윤을 보며 정우는 고개를 저었다.
성윤은 빙긋이 웃으며 앞서 걸었다.
‘일단 대한당을 없애고…….’
그다음은 민국당과 목숨을 건 도박판에 앉을 계획이다.
죽고 죽이고…….
생각만 해도 끔찍한 피비릿내가 나는 것 같다.
하지만 죽을 사람의 사정을 봐줘서는 안 된다.
걸려 있는 판돈이 이 나라의 미래니까…….
두 사람은 한 사무실 앞에 섰다.
주진만 의원의 방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 꾸벅 허리를 굽혔다.
“이성윤입니다.”
“아이고, 당 대표가 고개를 숙이면 어떻게 해!”
주진만 의원은 다급히 다가와 성윤의 손을 잡았다.
“어쩐 일인가?”
“차 한 잔 얻어 마시려고 왔습니다.”
주진만 의원이 신당에 합류한 지 며칠이 지났다.
두 사람은 다시 한배를 타게 됐다.
뜨거운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이 소파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테이블에 찻잔이 놓인다.
주진만 의원이 찻잔을 손에 쥐며 묻는다.
“자네가 차 한 잔 마시려고 찾아올 정도로 살가운 사람은 아니잖아? 이유가 뭐야?”
성윤이 슬쩍 웃었다.
“궁금한 게 있어서요.”
“어떤 거?”
“대한당에 돈이 얼마나 있나요?”
정치는 돈이 든다.
특히 대선 등 선거를 치를 때마다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야 한다.
물론 선거에서 쓴 비용을 되돌려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교과서적인 이야기.
뒤로 주고받는 돈을 생각하면 언제나 손해다.
주진만 의원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드러난 것은 500억 정도지.”
‘500억이나 있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한당의 권리당원이 약 20만 명, 매달 2천 원씩 꽂히는 돈만 해도 4억.
후원금이나 의원들의 특별 당비를 제외하고도 4억이다.
대한당의 긴 역사 동안 차곡차곡 모였을 돈을 생각하면 500억도 적다.
하지만 성윤이 궁금한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자금이 아니다.
“숨겨 둔 것은요?”
주진만 의원이 턱을 매만진다.
“글쎄, 내가 원내 대표일 때 확인했던 것을 기억하면…… 200억이 조금 넘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왜?”
주진만 의원은 갑자기 찾아와 대한당의 지갑을 확인하려는 성윤의 의도가 궁금했다.
“지금은 대한당이 민국당을 상대로 으르렁대지만 곧 총구를 돌려 우리를 노릴 것 같습니다. 대한당은 싸울 상대가 필요한 것이고 민국당에 비하면 우리가 훨씬 만만하니까요. 여당과 야당이라는 명분도 존재하고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대한당이 민국당과 싸워 얻을 이득이 없다.
같은 야당끼리 싸워 봤자 정권 창출과는 먼 일.
그리고 싸워서 이긴다 해도 민국당 지지자들이 대한당으로 옮겨 갈 리는 없으니까.
지지자를 늘리려면 신당을 물어뜯어야 한다.
주진만 의원이 마른 입술을 핥는다.
“전쟁이라…….”
“그래서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몰래 쓸 수 있는 자금이 얼마나 있는지.”
드러난 자금은 무섭지 않다.
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예측 가능한 범위의 군자금이다.
기껏해야 전단지, 현수막, 시위대 그리고 때에 따라 방송 정도다.
하지만 숨겨 둔 자금은 다르다.
정말 멋대로 쓸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살인범을 고용할 수도 있다.
‘200억?’
성윤의 머릿속은 200억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계산하느라 바빴다.
그때 주진만 의원이 입을 연다.
“대한당이 그 돈을 건들지는 않을 거야.”
“네? 건들지 않다니요?”
황당한 표정의 성윤을 보며 주진만 의원이 픽 웃는다.
“지금 몰라서 그렇게 보는 건가? 아, 이 대표는 돈이 많아서 모를 수도 있나? 아, 미안……. 비꼬는 게 아니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예상할 수 없었다.
그 표정을 보더니 주진만 의원이 또 껄껄껄 웃는다.
“이 대표…… 우리는 정치인이야. 대한민국에서 가장 탐욕적인 존재지. 그런데 전쟁 자금을 내 지갑에서 꺼내 쓴다고? 그런 정신 빠진 놈이 어디 있어? 밖에 나가면 과일 상자에 신사임당을 꽉꽉 채워 줄 놈들이 줄을 서 있는데.”
“……!”
주진만 의원이 찻잔을 들어 올린다.
그리고 주진만 의원의 예상은 맞았다.
잠시 후, 복도를 걷고 있는 성윤의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성종 그룹 윤 회장의 비서실장 정기화였다.
-대한당에서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전재익 대표가 윤범성 부회장에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
며칠 후, 성종 호텔 한식 레스토랑.
손님은 받지 않았다.
넓은 공간에 윤범성 부회장과 대한당 전재익 대표만 보였다.
테이블엔 한정식답게 색색의 음식이 가득했지만 젓가락 한번 대지 않아 이미 식어 말라 가고 있었다.
전재익 대표가 입을 연다.
“청와대가 개업식으로 바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픈발이 끝나면 성종으로 시선을 돌릴 겁니다.”
박무혁 대통령의 의지는 간단하다.
능력 없는 재벌 2세, 3세의 퇴출.
경영한답시고 까불지 말고 뒤에서 배당금이나 받아먹으라는 뜻이다.
구겨진 윤범성 부회장의 표정을 보며 전재익 대표가 미소를 그렸다.
“그럼, 대한당의 입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개인의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데 앞장설 겁니다. 부자든, 가난하든…… 그게 재벌이든.”
“막아 주시겠다는 겁니까?”
“네.”
“감사하네요. 그런데 지금 대한당의 힘으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전재익 대표의 볼살이 꿈틀거렸다.
“……막을 수 있겠냐고요?”
“네.”
대한당이 백석이 넘는 거대 정당일 때는 재벌들이 설설 기었다.
돈을 싸 들고 찾아와서 발발 기었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와 다르다.
대한당은 약해졌다.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한다.
전재익 대표가 화를 꾹 참으며 입을 연다.
“막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머릿수가 적어 전면전은 힘들겠죠. 하지만 게릴라전이라는 게 있어요. 난 이성윤에게 불만 있는 놈을 찾아 죽창을 쥐여 줄 겁니다. 선수는 이미 찾아 뒀고요.”
전재익 대표는 이번 전쟁을 바둑과 같은 세력 싸움이 아니라 장기처럼 적장의 숨통을 끊어야 승리하는 게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적장이 성윤이다.
그가 계속 말한다.
“신당은 이성윤이 전부죠. 놈이 없어지면 엉망진창이 될 겁니다. 그사이 우리는 민국당과 손잡고…….”
조용히 듣던 윤범성 부회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민국당? 대한당은 민국당과 대치 중인 게 아니었습니까?”
전재익 대표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흐른다.
예전 같으면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한마디에 모든 게 이뤄졌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민국당과는 멱살 잡고 싸워도 금방 화해하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신당은 달라요. 놈들은 우리 영역을 침범했어요. 죽여야 합니다.”
죽인다, 어쩐다…….
당 대표와 어울리지 않는 험악한 목소리가 내뱉어진다.
그만큼 구석에 몰렸다는 뜻이다.
잠시 생각하던 윤범성 부회장이 말했다.
“도와 달라는 거죠? 원하는 것은 자금?”
“네.”
“죄송하지만 난감합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무혁이의 눈 밖에 나는 것은 아닌지……. 가뜩이나 사이가 좋지 않은데…….”
애써 거절…….
그러자 전재익 대표가 다급히 입을 연다.
“신당은 성종을 공격할 거예요! 이건 기정사실입니다! 국민은 재벌 잡는 재벌이라며 좋아하겠죠. 윤 부회장의 손에 수갑이 채워지는 순간 환호성을 지를 테고요!”
“제 손에 수갑이 채워진다고요?”
“네!”
“전 대표님, 우리도 판, 검사를 관리하고 있어요. 빠져나올 방법은 얼마든지…….”
“우리가 신당의 편에 서서 윤 부회장의 구속에 손을 들어 주면 어떻게 될까요?”
“……!”
“검찰이나 법원에서 윤 부회장의 말을 들을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에게 찍히면 끝인데? 부랴부랴 민국당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어쩌지 못합니다.”
청와대, 여당 그리도 대한당까지 움직이면 성종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전재익 대표는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입술을 뒤틀며 말한다.
“윤범성 부회장님…… 수의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전재익 대표님, 예의에 어긋나는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우리 당은 이번 전쟁에 목숨을 걸고 있어요. 당의 존립이 흔들리고 있으니까요. 궁지에 몰린 쥐새끼는 고양이를 무는 법입니다.”
뜻을 따라 주지 않으면 성종을 물고 늘어지겠다는 뜻이다.
윤범성 부회장은 주먹에 힘을 꽉 줬다.
당장 전재익 대표의 뒤통수를 때려 갈기고 싶었다.
‘빌어먹을 정치인들……. 우리는 세금이라도 많이 내지. 도움이 되는 게 없어.’
윤범성 부회장의 눈에 전재익 대표는 하이에나처럼 여겨졌다.
국가나 국민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썩은 권력을 찾아 해매는 하이에나.
전재익 대표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연다.
“선택할 시간을 드리죠. 3일……. 그 이상은 드릴 수 없습니다. 손에 금팔찌가 채워질지 아니면 은팔찌가 채워질지, 선택하세요.”
“…….”
전재익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윤범성 부회장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그럼, 긍정적인 검토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난다.
그 순간, 윤범성 부회장의 표정이 확 변했다.
“미친 새끼…….”
전재익 대표가 완전히 사라진 후, 윤범성 부회장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레스토랑에서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선다.
그런데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지 않는다.
바로 위층에 있는 객실, VVIP 룸.
문을 열고 들어가자 창밖을 보고 있는 한 남자가 보인다.
“오래 기다렸나요?”
남자가 몸을 돌린다.
성윤이었다.
< 물과 기름. -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