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과 기름. - (3) >
***
“이게 뭐예요?”
“뭐긴? 계약서지.”
의원회관 사무실…….
정우가 눈을 깜빡이며 구겨진 A4 용지를 보고 있다.
성윤과 국정원장이 적은 계약서다.
그러니까, 미국 공화당 경선에서 누가 승리할지에 대한 내기…….
물론 공천권이나 국정원 정보 공유 등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뭐예요? 스트립쇼? 지는 사람이 여의도에서 스트립쇼를 하는 건가요?”
“그건 아무거나 적은 거야. 진짜 내기는 다른 거야.”
“다른 거요?”
“어.”
정우의 표정이 불안해진다.
스트립쇼라는 말까지 써 가며 숨겼어야 할 진짜 내기.
그게 무엇인지 몰라도 가볍게 넘어갈 일은 아닌 것 같아서다.
“무슨 내기를 했기에…….”
“내가 이기면 국정원 정보를 공유하게 될 거야.”
“지, 지면요?”
“우리 당 공천권 스무 장.”
“의원님!”
성윤은 공화당 그레이슨 후보의 승리에 걸었다.
“그레이슨이라니요!”
지표로만 보면 성윤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현재 카밀라가 1등, 남은 지역에서도 그녀가 승리할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니까.
정우가 화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걸 보세요! 하늘이 무너져도 그레이슨의 경선 승리는 불가능해요! 그러니까……!”
“가능하다니까.”
성윤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걱정하지 마.”
꿈속에서 봤던 미래에서 그레이슨은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경선 따위에 무릎 꿇을 사람이 아니다.
기적적인 역전을 할 거다.
그리고…….
“만약에 내가 진다 해도 상관 없어. 국정원장이 공천권 스무 장을 요구하겠어? 그 정도로 바보였다면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어.”
정당의 공천권에 목숨 건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권력을 향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까.
그런데 그걸 국정원장 같은 외부인이 건들면…… 여당의 국회의원이라는 괴물들이 손을 잡고 국정원장을 갈아 버릴 거다.
“그럼 이런 내기는 왜 한 거예요?”
“국정원장은 자존심 싸움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나는…….”
성윤은 국정원을 손에 넣을 생각이다.
***
국정원장과의 내기 결과는 예상보다 빨리 나왔다.
5월 중순쯤에나 나올 줄 알았는데…….
-워싱턴에서 열린 여성 지도자 포럼에서 충격적인 발표가 있었습니다. 공화당 경선에서 선두를 달리던 카밀라 후보가 경선 포기를 선언했습니다.
갑작스레 그녀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그래서 2등을 달리고 있던 그레이슨의 승리가 기정사실화됐다.
텔레비전 화면에 카밀라 후보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가 쏟아지는 눈물을 꾹 참으며 입을 연다.
-그레이슨 후보의 성공을 바랍니다.
이 소식은 한국에서도 충격이었다.
왕좌를 노리던 열정적인 여성이 꿈을 포기하고 병마와 싸워야 한다는 소식…….
신의 잔인함은 누구에게나 평등했고 그녀를 응원하던 사람들은 침울해졌다.
그리고 성윤은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뉴스를 보고 있었다.
김현석 보좌관이 혀를 끌끌 찬다.
“이래서 건강이 제일이라고 하나 봐요. 미국 대통령에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라고 했는데…….”
송주현 비서관도 고개를 끄덕인다.
“아쉽네요. 이번에야말로 미국에서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나 싶었는데……. 카밀라는 우리나라에도 우호적이었죠?”
다들 텔레비전을 보며 아쉬움에 휩싸여 있을 때, 정우의 시선은 성윤에게 향해 있었다.
‘어떻게……?’
정우는 카밀라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성윤에 대한 놀라움이 컸다.
하늘이 무너져도 그레이슨의 승리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의원님?”
“잠깐만…….”
당황스럽기는 성윤도 마찬가지였다.
그레이슨이 미국의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과정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이런 식이었나?’
실력으로 누른 게 아니라 운이었다니…….
대통령은 하늘이 선택한다는 말이 확실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카밀라는 국무부 장관이었는데?’
그레이슨 정부에서 카밀라는 외교를 담당하는 국무부의 장관을 역임했었다.
건강이 안 좋다면 할 수 없는 일…….
잠시 복잡한 생각을 이어 가던 성윤은 고개를 저었다.
‘뭐,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다른 거다.
성윤은 휴대폰을 귀에 댔다.
신호음이 울리고 국정원장의 침울한 목소리가 들린다.
-네.
“뉴스 보셨죠?”
-……네.
“차 한잔 마시죠. 여의도로 오세요.”
-알겠습니다.
성윤은 통화를 종료하며 재킷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다가온 정우에게 속삭였다.
“국정원장이 올 거야. 조용한 찻집을 알아봐.”
“아, 네.”
정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지금은 일이 우선이니까.
“알겠어요. 국정원장의 스트립쇼를 볼 수 있는 것인가요?”
그 시각, 국정원장은 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당연히 성윤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가 고개를 틀어 창밖을 본다.
‘카밀라의 건강 이상? 그래서 그레이슨이 후보라고?’
그레이슨이 후보가 된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기적적인 일이다.
하지만 국정원장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그의 머릿속에 성윤의 자신만만한 모습이 떠올랐다.
‘설마…… 건강 이상을 알고 있었나?’
그렇지 않고서는 그토록 확신에 차 있기 어렵다.
여당의 당 대표라는 사람이 확률에 0에 가까운 무모한 내기라니…….
‘멍청했어.’
국정원장은 그때 깊은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성윤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
카밀라의 승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냉정해야 할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졌어.’
국정원장은 패배를 인정했다.
하지만 표정은 어둡지 않다.
오히려 밝다.
‘괜찮네.’
그는 여당의 당 대표가 성윤인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야당의 괴물들이 사나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대는데, 여당의 당 대표가 서른둘 애송이…….
갈기갈기 씹혀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성윤을 직접 마주하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잠시 후, 성윤과 국정원장이 마주 앉았다.
한복을 입은 사장이 직접 차를 달이는 전통찻집이다.
방에는 미닫이문이 있어서 조용한 대화를 나누기에 괜찮았다.
“카밀라의 건강 이상…… 알고 계셨습니까?”
국정원장은 찻잔이 놓이자마자 물었다.
성윤은 고개를 끄덕인다.
“네.”
“어떻게 아신거죠?”
국정원의 최정예 요원들을 갈아 넣었어도 알아내지 못한 정보인데 성윤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성윤은 알려 주지 않는다.
“그냥 알고 있었습니다.”
꿈을 통해 미래를 봤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냥 알고 있었다고 대답했는데, 국정원장은 오히려…….
“AI 회사 리제에서 얻은 정보입니까?”
성윤과 미국의 유일한 커넥션이 AI 회사 리제다.
그리고 리제는 꽤 많은 돈을 로비로 지출하고 있다.
리제의 도움을 받았다면 국정원이 알아내지 못한 정보를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성윤은 고개를 저었다.
“대답은 하지 않겠습니다. 제 주머니를 확인하기 위해 오신 것은 아니잖아요?”
성윤은 정보를 얻으러 온 것이지 내놓기 위해서 온 게 아니다.
그런데 국정원장은 지금 호기심에 취해 성윤의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이 현실로 벌어져서…….”
“됐습니다. 그럼 계약 이행에 대한 이야기나 해 볼까요? 정보 공유를 해 주시겠다고 했죠?”
“……하나 여쭤보겠습니다.”
“또 질문인가요? 주머니 확인은 그만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국정원장이 고개를 저었다.
“주머니 확인이 아니라 제게 걸릴 개목걸이가 무엇일지 궁금해서요.”
국정원장은 계약서를 꺼내 테이블에 올리며 말을 이었다.
“자존심 싸움이 만들어 낸 치기 어린 장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계약서는 애초에 계획되었죠. 저를 흥분으로 몰아넣고 이 자리에 끌어내기 위한 계약서였죠. 갑과 을을 확실하게 만든 계약서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게 무엇을 요구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정보 공유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죄송하지만 불가합니다.”
“국회의원도 아니고 약속을 가볍게 여기시네요?”
“욕하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대표님께서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만약 대표님이 졌다면 공천권 스무 장을 넘기셨겠습니까? 그러니까…… 정말 원하는 것을 말씀하십시오.”
“제가 원하는 것은 정보 공유입니다.”
“의원님!”
성윤이 억지를 부리는 것만 같았다.
국정원장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국정원은 대통령의 직속 기관으로 안보에 대한 정보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당 대표라 해도 공유할 수 없습니다!”
“공유라고 했어요.”
“안 됩니다.”
“읽어 보세요.”
성윤이 품에서 쪽지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그리고 찻잔을 입에 댄다.
국정원장은 힐끗 성윤의 눈치를 본 후 쪽지를 손에 들고 펼쳤다.
그리고…….
“……!”
다급히 고개를 들어 놀란 눈으로 성윤을 보다가 다시 쪽지에 시선을 파묻는다.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가 허옇게 질리기를 반복했다.
“이, 이건…….”
“정보 공유죠. 내가 알고 있는 것, 그리고 원장님이 알고 있는 것. 서로 공유.”
성윤이 이번 미국 대선을 지켜보며 알게 된 것이 있다.
국내 정세는 틀어졌지만 세계사는 그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
각국은 여우 같은 외교를 그만두고 힘의 우위를 강조하고 있다.
그 틈에서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일본과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쪽지에 적힌 것은 가까운 미래에 확정적으로 일어날 몇 가지 일.
물론 결과만 알고 있는 내용이다.
당시 비서관으로 있던 성윤이 과정까지 알 수는 없으니까.
국정원장이 눈을 깜빡이며 묻는다.
“이게 사실입니까? 진짜 일본에서 이런 것을 준비하고 있다고요?”
“아마요. 과정은 모르지만 결과는 비슷할 겁니다.”
국정원장은 성윤의 말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여당 당 대표이기도 하고 이번 공화당 경선도 맞혔으니까.
그는 펼쳤던 쪽지를 다시 소중하게 접었다.
미래를 모르는 국정원장에게 그 쪽지는 어마어마한 보물처럼 여겨지는 중이다.
성윤이 입을 열었다.
“그 정보가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이런 정보를 어떻게 얻으셨습니까?”
“주머니는 안 깔 겁니다.”
국정원장은 잔뜩 궁금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성윤이 찻잔을 내려 두며 말을 이었다.
“다시 말씀드리죠. 정보 공유…… 원장님의 정보를 일방적으로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공짜 좋아하다가 탈이 날 수도 있으니까요.”
“…….”
“제가 알고 있는 것을 넘기겠습니다. 그러니까 원장님이 알고 있는 것을 주세요.”
국정원장의 얼굴에 고민이 가득하다.
‘이걸 어떻게 하지?’
그는 정보를 다루는 사람이다.
더 많은 정보가 손에 있을수록 강력한 힘을 얻는다.
그러니 성윤의 정보를 갖고 싶다.
그런데 그 대가로 자신이 가진 정보를 원한다.
한참 고민하던 그가 다시 성윤을 본다.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정치인이 정보를 원하는 것은 두 가지다.
정치자금 확보 또는 정적 제거…….
즉, 정당 싸움이다.
문제는 국정원이 정당 싸움에 끼어들었다는 오해를 사면 큰일이 벌어진다는 거다.
괴물들의 손에 갈기갈기 찢겨 해체될 게 분명하다.
그래서 정치와 연관될 때는 언제나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조심조심 움직여야 한다.
국정원장이 계속 말한다.
“정보는 생선과 같죠. 쉽게 썩고, 부패한 것을 먹으면 탈이 납니다. 그래서 유통 과정을 최소화했으면 합니다.”
“어떻게요?”
“심부름꾼의 손을 거치지 않고 대표님과 제가 직접 거래했으면 좋겠습니다.”
직접 거래하게 되면 밖으로 퍼질 일이 적어진다.
또한 다이렉트 거래이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물귀신 작전이 가능하다.
즉, 도마뱀 꼬리 자르기도 쉽지 않다.
서로에게 최소한의 안전 고리다.
성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두 사람은 빙긋이 웃으며 악수를 나눴다.
국정원장이 성윤이 건넸던 쪽지를 꺼내며 물었다.
“그럼 오늘이 첫 거래인 것 같은데, 저는 이미 받았고. 제가 드릴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
“대한당 전재익 대표의 재산이 궁금합니다. 신고한 것 말고 숨겨 둔 것으로…….”
성윤은 민국당 최학인 그리고 이준대를 테이블에 앉힐 계획이다.
하지만 그곳에 변수가 될 수 있는 전재익은 빠져야 한다.
결승은 셋이 치르는 게 아니라 둘이 치르는 거니까.
일단 목표는 대한당의 몰락이다.
국정원장이 고개를 숙였다.
“확인하겠습니다.”
며칠 후면 국정원에 의해 전재익 대표의 약점이 드러날 거다.
그때 카운터를 치려면 지금부터 잽을 던져야 한다.
찻집에서 나온 성윤은 복도를 걸으며 휴대폰을 귀에 댔다.
“그때 그 사진…… 터뜨리라고 해.”
정우의 목소리가 들린다.
-네.
***
대한당 당사.
회의실의 분위기는 어두웠다.
대한당은 과반에 가까운 의원 숫자와 여당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던 거대 정당이다.
하지만 이제 이들의 머릿수는 고작 육십여 명…….
신당이 탄생하며 찢기고 또 찢겼다.
과거의 영광은 추억이다.
이제는 존재감조차 없다.
게다가…….
“이용을 당했다니요!”
비록 지라시 뉴스였지만 성윤과 민국당 최학인 대표가 만나 밀담을 나누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시기를 돌이켜 보면 대한당 의원들이 쭉쭉 빠져나가던 시점이다.
의원들이 전재익 대표를 향해 책임을 추궁한다.
“민국당과 손잡고 신당을 치자고 했잖아요?”
“그런데 민국당과 신당이 한편이었던 겁니까?”
“우리만 머저리가 됐어요!”
“말씀을 하세요!”
전재익 대표는 시끄러운 의원들의 목소리에 눈을 감았다.
당 대표가 되자마자 대한당은 삐그덕거리는 중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성윤의 손바닥 위에서 일어나고 있다.
< 물과 기름. -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