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과 기름. - (2) >
***
4월…… 때아닌 눈이 내렸다.
살짝 덮인 게 아니 게 쌓일 정도다.
그 덕에 SNS는 난리다.
예상하지 못했던 눈 구경에 사진을 찍기도 하고 차가 더러워졌다며 울상도 짖고.
청와대 역시 바쁘다.
직원들이 눈을 치우느라 난리도 아니다.
그들은 나무나 풀에 쌓인 눈은 건들지 않고 오로지 길만 치운다.
그래서 조경을 덮은 눈과 바짝 마른 길이 어우러져 최고의 경치를 만들어 내는 중이다.
그리고 박무혁 대통령은 집무실에 서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
뒤에서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통령 님, 이성윤 대표입니다.”
박무혁 대통령이 천천히 몸을 돌린다.
문 앞에 성윤이 보인다.
“축하해.”
신당의 머릿수가 일흔네 명이 되었다.
말 그대로 폭발적인 증가다.
과반수가 되지 않아 국회를 장악할 힘은 없지만 의미 있는 숫자다.
그동안 성윤의 어린 나이 때문에 우려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나이에 당 대표라고? 제대로 하겠어?”
“그냥…… 총알받이야.”
“신당은 진짜 사람이 없는 것 같아. 어떻게 이성윤이 당 대표지?”
“서른둘? 우리 대리보다 어리네?”
“나라가 어찌 되려고…….”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그 소리가 쏙 들어가게 되었다.
당 대표의 덕목은 지지율과 장악력이니까.
박무혁 대통령이 소파에 앉으며 느긋하게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또 축하할 게 있어.”
성윤이 맞은편에 앉으며 눈을 깜빡였다,
더 축하받을 일은 없는 것 같은데…….
생각하고 있을 때, 박무혁 대통령이 입을 연다.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하지만 평범한 연인들처럼 틈만 나면 얼굴을 보고 손을 잡기는 힘들다.
서로가 바쁘기 때문이다.
주말에 가끔 보는 정도…….
당황한 성윤의 표정을 보며 박무혁 대통령이 슬쩍 웃는다.
“대통령이잖아.”
지라시가 첫 번째로 놓이는 곳이 대통령의 책상이라더니…….
성윤의 연애사가 지라시에 적혀 있었나 보다.
박무혁 대통령이 말을 잇는다.
“기자들한테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까.”
정혜성은 대한민국 3대 로펌이라는 에스 로펌에 들어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대한민국 최고 중 하나에 들어갔다며 자랑질을 했을 거다.
하지만 정혜성에게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아빠 백으로 들어갔다는데?”
“로스쿨이 어떻게 바로 에스 로펌에 들어가냐? 아빠가 서울 시장이니까 가능한 거지.”
“그리고 학부 때 공대 졸업했대!”
“개뜬금 로스쿨.”
“이래서 로스쿨이 현대판 음서제죠!”
공대 출신의 변호사, 검사도 많다.
하지만 정혜성은 아버지가 서울 시장이다.
그래서 무조건, 이유 없이, 그냥 욕을 먹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거기에 여당의 당 대표 성윤이 보태지면…….
“말 그대로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주유소를 집어 던진 거지. 전국에서 그 불길을 다 보게 될걸?”
순간 꿈속에서 봤던 미래가 떠올라 섬뜩해졌다.
그때도 정혜성은 세상의 손가락질을 버티지 못했으니까.
“조심하겠습니다.”
정치인과 엮인다는 것은 이런 거다.
잘못이 없어도 돌을 맞아야 하고 뱉어 낸 침에 더렵혀져야 한다.
반대편에서 보면 뭐든 삐딱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정혜성이 이 생활을 견딜 수 있을까?’
다시 가슴이 묵직해진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데 부르신 이유가……?”
박무혁 대통령이 손목을 틀어 시간을 확인했다.
“올 거야.”
“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국무총리, 비서실장, 민정수석, 정무수석, 외교부 장관, 차관, 안전행정부 장관 그리고 국정원장까지…….
박무혁 대통령이 소파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방미 일정을 계획하는 중이야. 그런데 뭔가 아쉬워. 그래서 자네의 동물적인 통찰력이 필요해.”
꿈을 통해 미래를 봤기 때문에, 그리고 상대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어서 해낼 수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성윤의 개입으로 미래가 바뀌었다.
대통령이었던 도제성은 정계를 은퇴했고 그 왕좌를 박무혁이 차지했다.
미래가 어떻게 튈지 예상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미국이라니…….’
한국 정치인이라면 찾아가서 속마음이라도 들어 봤을 거다.
그럼 미래는 몰라도 성향은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는 미국 정치인.
찾아가기도 어렵고 만나 본 적도 없다.
‘뒤틀어진 미래와 처음 보는 인물을 상대로 통찰이라…….’
성윤은 한숨을 내뱉으며 박무혁 대통령을 쫓아 회의 테이블로 향했다.
테이블에는 국무총리에서 국정원장까지,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기라성들이 앉아 있다.
그들과 가볍게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는데 그들이 성윤을 보는 표정이 묘하다.
조금은 불편해 보인다.
서로가 실세가 되고 싶은데 성윤이 그 앞을 가로막고 있어서다.
속마음을 들어보면…….
[전음]-대통령님은 이놈이 뭐라고 회의에 참여시키는 거지? 그래, 얼마나 잘났는지 보자.
한껏 비꼬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특히 국정원장이…….
그때 박무혁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시작하지.”
그 말과 동시에 비서실장이 입을 열었다.
“이 대표님도 오셨으니까 정리를 하겠습니다.”
청와대 고위직의 회의다.
대단한 내용이 펼쳐지지는 않을까 조금은 기대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민주당에서 앤서니와 와이엇. 공화당에서 그레이슨과 카밀라.”
연말에 있을 미국의 대선을 고민하는 중이다.
누가 당선될까…….
“지금 미국의 양당을 책임지고 있는 민주당과 공화당이 한창 경선 중인데 그 결과가 7월에 나옵니다.”
문제는 박무혁 대통령의 방미 일정이 5월이다.
그러니까 경선 결과가 나오기 전이다.
“그런데 공화당은 얼추 결정이 난 것 같은데 민주당은 뚜렷한 시그널이 보이지 않아요. 박빙이죠.”
새로운 주인이 누가 될지 예측하고 얼굴 도장을 찍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약 일주일의 방문 기간 중 대선 후보를 만나 친분을 쌓았으면 합니다. 그런데, 일정상 네 명을 모두 만나기는 빠듯하죠. 그래서 한 명만 만나기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네 명 중에 한 명…….
확률은 25%.
미국의 대통령도 사람이다.
당선되기 전에 인사 한 번 나눈 사람이 기억에 남는 법.
“누구를 만나냐 할지가 고민인 것이고요.”
비서실장은 여기까지 말한 후 한발 물러섰다.
그러자 국정원장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입을 연다.
“해외 정보를 종합하면 민주당 앤서니가 대통령이 될 것 같습니다. 확장성이 가장 높고 지지율의 오름세도 괜찮죠. 광적인 지지자는 유리한 무기가 될 겁니다.”
이번엔 외교부 장관이 말한다.
“공화당의 카밀라 역시 만만치는 않아요. 여성과 약자의 표가 결집되었고 공화당의 몰표가 합세하면 게임은 뒤집어질 수도 있을 겁니다.”
외교부 장관의 입에서 카밀라 후보가 당선될 것이라는 논리가 펼쳐졌다.
그리고…….
“민주당 앤서니는 약점이 많아요! 우유부단한 모습이 언론에 자주 비쳤어요! 그러니까 카밀라를 만나는 것으로 하고 나머지 후보들에게는 성의만 보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름의 논리가 통했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저울은 기울어졌고 박무혁 대통령이 외교부 장관의 손을 들어 주면 끝나는 거다.
그런데 국정원장이 자신만만하게 웃는다.
“어제 일본에서 들어온 정보입니다. 일본 총리가 이번 달 말에 방미를 하는데 누구를 만날 계획인지 아십니까?”
“설, 설마……?”
“민주당 앤서니와 골프 외교를 약속했다고 합니다.”
“……!”
일본의 대미 정보력 역시 만만치 않다.
그런데 선택과 집중이라는 순간에 민주당 앤서니의 손을 잡았다면…….
“앤서니를 만나는 것으로 스케줄을 계획하고 나머지 후보들에게는 꽃이나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게임은 끝났다.
외교부 장관은 고개를 숙였다.
국정원장은 기분 좋게 미소 지으며 박무혁 대통령을 향한다.
이제 최종 결정을 기다리는데…….
‘어?’
그런데, 박무혁 대통령은 성윤을 보고 있다.
“이 대표. 어떻게 생각해?”
국정원장과 외교부 장관의 눈동자 역시 성윤을 본다.
그런데…….
뭔가 성윤의 표정이 이상하다.
성윤은 대선의 결과를 알고 있다.
결과적으로 국정원장이 밀어붙이는 앤서니는 아니다.
당시 일본 총리가 미국까지 날아가 골프를 치고 부부 동반 식사를 하는 등 앤서니가 대통령이 될 것처럼 설레발이었지만…….
‘패배했지.’
일본 총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부랴부랴 비행기에 올랐었다.
하지만 새로운 미국 대통령은 심드렁하게 그를 맞이했었다.
그때 네티즌들이 일본의 굴욕이라며 놀려 댔던 게 기억난다.
성윤이 입을 열었다.
“앤서니는 힘들 것 같습니다. 경선은 통과하겠지만 대선에서 크게 패배할 것 같습니다.”
국정원장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이 대표님! 일본 총리가 만나러 간다고 했어요!”
“일본 총리가 점쟁이는 아니잖아요?”
“이 대표님!”
국정원장의 목소리가 커지자 박무혁 대통령이 손을 저었다.
한순간에 회의실이 조용해진다.
“그럼 카밀라를 만나라는 건가?”
외교부 장관이 싱글벙글 웃고 있다.
앤서니가 끝났으면 남은 것은 카밀라니까.
그런데…….
“아뇨.”
성윤의 목소리는 단호하다.
“공화당 그레이슨을 만나십시오.”
“……!”
모두가 조용해졌다.
외교부 장관이 “풉!” 하고 웃는다.
“그레이슨이라고요?”
“네.”
“그레이슨은 지금 한창 깨지고 있어요.”
국정원장도 입을 연다.
“그레이슨을 선택했다니……. 이 대표님,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그레이슨의 어떤 지표를 봐도 처참하다.
그의 승리를 예상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성윤은 지표를 신경 쓰지 않는다.
대선은 수치가 아니니까.
그리고 어차피 결정을 내리는 것은 이들이 아니라 박무혁 대통령이다.
박무혁 대통령이 입을 연다.
“회의는 여기서 마치지. 그리고 국정원장과 외교부 장관은 그레이슨에 대한 정보를 주워 와. 정보를 본 후에 최종 결정하도록 하지. 시간은…… 이틀 주면 되겠나?”
국정원장과 외교부 장관의 턱에 힘이 콱 들어갔다.
정보를 본 후에 최종 결정한다고 했지만 말투를 들어 보면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청와대에 있는 것은 이들인데 실세는 여전히 성윤이다.
***
잠시 후, 테이블에서 한 사람 두 사람 자리를 떴다.
성윤 역시 복도로 나와 홀로 걷고 있는데 국정원장이 옆으로 다가온다.
“이 대표님, 그레이슨은 경선도 통과하지 못할 겁니다. 카밀라에게 깨질 거예요.”
자신 있는 말투.
그리고 국정원장의 말투와 표정은 성윤을 무시하는 듯하다.
처음부터 그랬다.
나이를 보고 어리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런 것인지, 대한민국 여당의 수장 앞에서…….
성윤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잠깐 고민한다.
박살 내야 하나? 아니면…….
성윤이 시선을 틀어 국정원장을 향했다.
“원장님, 내기 하나 할까요?”
“내기요?”
“저는 그레이슨이 경선을 통과한다는 것에 걸고 원장님은 못 한다는 것에 걸고.”
국정원장이 껄껄껄 웃는다.
“재밌네요. 지금 국정원장을 상대로 내기를 한다는 겁니까?”
“네.”
눈빛이 진심이다.
국정원장의 표정이 굳어진다.
성윤이 말을 이었다.
“조건이 있어야 재밌겠죠? 제가 이기면 국정원의 정보를 공유해 주십시오.”
국정원장의 표정이 무시무시하게 변한다.
“그럼 제가 이기면 텃밭의 공천권 스무 개를 주시겠습니까? 국정원의 정보력이면 그 정도 가치는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좋죠.”
“하!”
“대답하세요. 하겠습니까, 말겠습니까? 못 하겠으면 빨리 말씀하세요. 그리고 앞으로 제 앞에서 공손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처음부터 그 눈빛과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요.”
“이 대표님!”
“그 잘난 정보력으로 알고 있지 않나요? 원장님의 자리, 제가 바꿔 버릴 수 있는데요.”
“……!”
국정원장의 얼굴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자존심이 박살 나고 있지만 입을 열지는 못한다.
성윤의 말은 사실이니까.
성윤이 국정원장을 향해 한발 다가섰다.
“내기 안 할 겁니까? 일개 국회의원의 정보력도 이길 자신이 없나요? 그럼 앞으로 조용히 지네세요.”
국정원장의 콱 다문 치아 사이로 분노가 흘러나온다.
“공천권 20개. 약속하십니까?”
“그레이슨이 경선에 패배하면 100개라도 드리죠.”
“좋습니다.”
성윤과 국정원장은 서로를 살벌하게 노려봤다.
그런데 미안하게도 국정원장은 앞으로 성윤의 정보통이 될 거다.
정보력보다 미래를 알고 있는 게 훨씬 압도적이니까…….
그리고 성윤의 힘은 더 강해질 거다.
국정원장의 정보는 조만간 앉을 최학인, 이준대와의 도박판에 유리한 판돈을 만들어 줄 게 분명하다.
“정 시장, 딸 이름이…… 정혜성이라고 했나? 잘 만나는 중이라고 들었는데.”
“그, 그걸 어떻게……?”
최근 정혜성과 만나기 시작했다.
< 물과 기름. -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