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의 매듭. - (7) >
“하…….”
이제야 이해했다.
살아난 거다.
긴장이 풀렸는지 김용준이 비틀거린다.
“씨발…….”
김용준은 소파에 앉아 한참 동안 얼굴을 문질러 댔다.
거리낌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잠에 들 때면 항상 상상했으니까.
목을 스쳐 핏물에 젖은 시뻘건 면도날을…….
하지만 이제 살았다.
그렇게 긴장을 풀던 김용준이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우, 우리 가족은요? 아내는요? 딸은!”
그의 눈이 간절하다.
박영훈 부회장은 악마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얼마 전에도 그랬다.
박영훈 부회장은 김용준의 가족을 인질로 삼았었다.
사정없이 떨리는 김용준의 눈동자를 보며 성윤이 품에서 쪽지 하나를 꺼냈다.
“개인 수영장이 딸린 가평의 풀빌라에서 쉬고 있어요. 주소는 제 손에 있는데, 어떤 것과 바꿔야 할지 잘 알고 있죠?”
“네?”
“한 달 정도 푹 쉬다 오세요.”
김용준이 웃기 시작했다.
약속했던 대로 안전이 보장된 거다.
한참을 웃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뉴욕에 있습니다. 그리고 박영훈 부회장의 비리……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겠습니다. 법정에 서라면…… 서겠습니다.”
박영훈 부회장은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렸다.
바로 가족…….
그리고 막내딸…….
새끼 가진 짐승은 건드는 게 아니다.
박무혁 의원의 시선이 성윤에게 향했다.
“그럼, 이지현의 오빠와 살인범만 끌고 오면 되는 건가?”
“네.”
“그럼, 내가 할 일은…….”
박무혁 의원이 휴대폰 화면을 보였다.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 번호는 박 회장이다.
“아버지와 밥 한 번 먹는 거지?”
“네.”
“그러지.”
박무혁 의원이 휴대폰을 귀에 댄다.
박 회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들어와.
그 목소리가 무겁다.
하지만 박무혁 의원은 가볍게 답한다.
“알겠어요.”
통화를 종료한 그가 책상에서 일어섰다.
성윤의 어깨를 가볍게 쥔다.
“이 의원, 마지막까지 부탁하지. 바삐 움직여야 할 거야.”
***
성윤은 서안시 사무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장한수 실장이 보인다.
“만나고 왔습니다.”
장한수 실장은 사망한 이지현의 오빠를 만나고 왔다.
그러니까 그 오빠는 이지현의 사망을 외면하는 대가로 대정 그룹에서 1억을 받은 사람.
지금은 불법 성매매 업체를 운영하며 강남의 값비싼 아파트에 사는 쓰레기.
성윤이 재킷을 벗어 걸치며 물었다.
“뭐래요? 협조하겠대요?”
“네, 지금쯤 박정우 보좌관과 함께 기자를 만나고 있을 겁니다.”
“어떻게 회유하셨어요? 쉽게 고개 숙일 사람은 아닌 것 같던데…….”
장한수 실장이 슬쩍 웃는다.
“제가 한 일은 잡아 놓은 게 전부였고요. 나머지는 박정우 보좌관이 다 했습니다. 윽박지르고 구슬리고 그러면서 필요한 것을 얻어 내는 게 능숙하던데요?”
장한수 실장의 표정을 보니까 정우가 얼마나 살벌하게 대했을지 예상됐다.
점점 꿈속에서 봤던 정우처럼 악랄하고 노련하게 변하고 있다.
‘예상보다 빠르게 완성되는 중이네.’
어쨌든, 정우가 그 앞에 있으면 안심이다.
기자들의 질문을 조율하고 박무혁 의원에게 민감한 부분 또는 불필요한 내용은 잘라 낼 테니까.
성윤이 장한수 실장에게 시선을 옮겼다.
“죄송하지만 부탁할 게 하나 더 있는데요.”
“말씀하세요.”
성윤이 그에게 쪽지를 건넸다.
김용준에게 받은 이지현을 살해한 사람의 주소와 사진이다.
“이 사람을 잡아 왔으면 해요. 지금은 배 나온 아저씨지만 예전에는 인간 백정이었어요. 위험하니까 현지에서 함께할 사람을 준비해 둘게요. 혼자 움직이지 마세요. 그리고 정우도 같이 갈 테니까 이번처럼 협박과 회유는 맡기고요.”
성윤은 정말로 장한수 실장을 걱정하는 눈빛이다.
장한수 실장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상처를 입으면 아픈 건 똑같으니까.
장한수 실장이 슬쩍 웃는다.
“저도 대통령 경호하기 전까지는 죽거나 다치고 싶은 마음 없습니다.”
***
그 시각, 대정 그룹 박 회장의 자택이었다.
가족 외에는 접근할 수 없다는 서재.
그곳에 박무혁 의원과 박영훈 부회장, 두 사람만이 앉아 있었다.
박무혁 의원이 비웃듯 말한다.
“오십 넘은 사람이 아버지한테 쪼르르 달려와 고자질한 거야?”
“닥쳐.”
“참 한심해. 이런 사람이 대정 그룹의 부회장이라니…….”
“야, 박무혁!”
“소리 지르지 마.”
박무혁 의원은 박영훈 부회장을 하대하고 있다.
박영훈 부회장이 치아를 깨문다.
그리고 분노를 참으며…….
“여기서 멈춰.”
“살려 달라고 빌어 봐.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파리처럼, 벌레처럼……. 그러면 생각해 볼게.”
박영훈 부회장이 ‘쾅!’ 하고 테이블을 내리치며 일어섰다.
“끝까지!”
박무혁 의원이 빙긋이 웃으며 다리를 외로 꼬았다.
“아니다. 생각이 바뀌었어. 빌어도 안 봐줄래. 이지현은 얼마나 빌었을까? 겁도 많은 앤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겠지. 그런데, 결국 죽였지. 그리고 세 살짜리라고 들었는데, 울었겠지? 무서워서, 엄마를 찾고 얼굴도 보지 못한 아빠를 찾고…….”
박영훈 부회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생각 좀 하고 살아! 그딴 계집 때문에 집안을 망쳐 먹을 생각이야!”
“그딴 계집?”
“그래, 그딴 계집!”
박무혁 의원의 눈빛이 사납다.
말없이 손가락으로 톡톡 테이블만 두들긴다.
그리고…….
“형, 난 대통령이 될 거야.”
“……!”
“솔직히 별생각 없었어. 강대국을 만들고 싶은 게 전부였어. 다른 나라에 빌어먹을 눈치 보는 게 싫었으니까. 단지 그게 전부였지. 그런데, 지금은 한 가지 목적이 더 생겼어.”
박무혁 의원이 손가락으로 박영훈 부회장을 가리켰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너 같은 새끼가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게 꼴 보기 싫어졌어. 실력도 없으면서 부모 잘 만나 설치는 새끼들, 그런 새끼들이 국민을 무시하고 법 위에 선 것처럼 의기양양한 것!”
“박무혁!”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 새끼야!”
그 순간…….
“어디서 큰소리야!”
호통 소리가 들렸다.
박무혁 의원과 박영훈 부회장의 시선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틀어진다.
박 회장이 보인다.
박영훈 부회장의 눈에 반가운 기색이 번쩍인다.
“아, 아버지!”
하지만, 바로 혼났다.
“입 열지 마! 멍청한 놈!”
박영훈 부회장이 고개를 숙인다.
박 회장이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그가 양옆에 앉은 자신의 아들들을 바라본다.
복잡한 심정이다.
잘못 키운 두 아들…….
하지만 여기서 끝내야 한다.
집안 망신도 망신이지만 박영훈 부회장이 무너지면 회사를 챙길 사람이 없으니까.
“무혁아.”
“말씀하세요.”
“그만해라.”
박무혁 의원이 조용히 웃는다.
“언제나 서재에서 모든 게 결정났어요. 영훈이 형이 여자를 성폭행해서 임신을 시켰을 때, 여기서 따귀 한 번 맞고 해결해 주셨어요. 그리고 둘째 형이 원정 도박으로 수백억을 날렸을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무혁아…….”
“이번에는 살인입니다. 어떻게 막아 주실래요?”
박 회장의 표정은 담담하다.
마치 알고 있던 것 같다.
“공소시효가 지났어.”
“안 지났다면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박무혁 의원의 눈은 박 회장을 시험해 보는 것 같다.
박 회장이 담담히 대답한다.
“밥을 먹겠지. 대통령, 대법원장 그리고 검찰총장. 이어서 언론사 사장.”
박 회장의 한마디면 대통령이 움직인다.
대법원장이 나설 테고 검찰총장이 발발 떨 거다.
언론은 입을 닫고 일 년 삼백육십오 일, 사건이 잊힐 때까지 매일같이 다른 사건이 터뜨릴 게 분명하다.
그게 대정 그룹 박 회장이다.
박 회장이 부드럽게 웃는다.
“그게 내 힘이야. 그리고 병원을 오가는 몸이지만 내 아들이 더 다치는 것은 볼 수 없어. 그러니까 여기서 멈춰.”
“저도 아들입니다. 아버지…….”
박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이어지는 목소리가 단호하다.
“멈춰.”
조용히 있던 박영훈 부회장이 박무혁 의원을 보며 빙긋이 웃는다.
“무혁아, 형이 진짜 미안하다.”
“…….”
“그러니까 여기서 끝내자. 여자가 필요하면 말해. 내가 예쁘고 날씬한 애로……. 그래, 요즘 인기 좋은 여배우 있는데, 너도 알지? 드라마에서 섹시 청순으로 통하는 애. 내가 광고 준다고 한번 만나기로 했거든? 네가 대신 만날래? 형이 양보할게.”
더러운 이야기에 박 회장의 주먹이 책상을 ‘쾅!’ 하고 내려쳤다.
“조용히 해!”
박영훈 부회장은 다시 입을 닫았다.
하지만 올라간 입꼬리를 지우지는 않는다.
박무혁 의원을 보며 여전히 실실 웃고 있다.
그리고 소리 내지 않고 입 모양만으로 말한다.
‘계집은 다 똑같아.’
박무혁 의원이 크게 한숨을 내뱉으며 박 회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 아버지의 가장 큰 기쁨은 자기의 아들이 자신보다 더 컸을 때라고 들었습니다.”
“……!”
“그 기쁨, 지금부터 드릴게요.”
“무혁아!”
“막아 보세요.”
박무혁 의원의 시선이 휴대폰으로 향했다.
성윤에게 온 메시지가 보인다.
-방송 나갑니다.
박무혁 의원이 리모컨을 쥐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텔레비전이 켜지며 아나운서의 모습이 보인다.
-대정 그룹 박영훈 부회장이 살인 청부를 했다는 의혹이 나왔습니다. 서울에 사는 이 모 씨는 한동일보 그리고 리얼 팩트와의 인터뷰에서…….
화면이 바뀌고 이지현의 오빠가 나타났다.
모자이크 처리되었지만 울먹이는 목소리는 진짜다.
-수십 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 제 동생이 교통사고로 위장되어 살해당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1억을 주면서 입을 다물지 않으면 다 죽일 거라고……. 그 지시를 한 사람이 박영훈 부회장입니다.
박무혁 의원이 다시 전원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검어진다.
동시에 박 회장의 분노 가득한 시선이 박무혁 의원을 쏘아본다.
“공소시효가 끝났어! 지나간 일을 가지고 와서 어쩌자는 거야!”
공소시효가 끝났다고 해도 여론이 움직이면 골치 아파진다.
그놈의 도덕성!
기자들이 달려들고 거지 같은 놈들이 불매운동을 벌일 거다.
“당장 그만둬! 거짓 선동이었다고 포장해!”
하지만 박무혁 의원은 박 회장을 보지 않는다.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박영훈 부회장에게 멈춰 있다.
그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연다.
“형, 공소시효 안 끝났어.”
“뭐?”
“내가 요즘 법 공부를 하거든. 그런데, 형사소송법에 이런 말이 있어. 형사처분을 피할 목적으로 해외에 체류하는 경우, 그 기간은 공소시효가 정지된다. 그런데, 그 살인범이 미국에 있었네?”
이제야 이해했나 보다.
박영훈 부회장의 얼굴이 덜컥 거렸고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그,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이 새끼야, 난 살인범이 아니잖아!”
“공범이잖아? 처벌에 대한 형평 때문에 공범자에 대해서도 공소시효가 정지되거든.”
“……!”
박무혁 의원이 손목을 틀어 시계를 확인했다.
“며칠 안으로 범인이 입국할 거야. 곧바로 검찰에 넘어갈 거고. 공범도 잡히겠지.”
“개새끼야!”
“기억나? 우리 어렸을 때 술래잡기 많이 했잖아. 형은 도망가고 난 잡고. 그러니까 이번에도 도망가 봐. 그런데, 이번엔 잡히면 죽는 거야.”
“뭐?”
“선택하라는 거야. 죽을 때까지 감옥에 있을지, 아니면 도망가다 잡혀서 나한테 죽을지.”
박무혁 의원의 살벌한 음성과 눈빛에 박영훈 부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죽, 죽어?’
옆에서 아버지 박 회장이 소리를 지른다.
“예의 없이 어디 앞이라고 큰소리들이야! 콩가루 집안도 이러진 않아! 형제면 감싸 줘야지! 감옥에 보내? 무혁아, 그만해! 정말 이 아비와 싸우고 싶은 게야!”
박무혁 의원이 고개를 틀어 박 회장을 향한다.
안쓰러운 눈빛이다.
아들이 셋 있는데, 둘이나 감옥에 있게 생겼으니까.
돈은 많이 벌었지만 자식 농사는 실패한 인생.
하지만 연민은 연민이고 끊어야 할 것은 끊어야 한다.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았다면 식사한다고 하셨죠? 대통령, 대법원장 그리고 검찰총장. 이어서 언론사 사장. 그런데 아무도 안 나올 거예요. 저도 그 정도의 힘은 있어요. 아버지.”
박무혁 의원은 대선 후보다.
그것도 지지율 1위.
권력의 중심이 되는 중이다.
“지금은 모두 제 눈치를 보고 있어요. 당선된 후에 벌어질 칼부림에 목이 베이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면서요.”
“무, 무혁아…….”
“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영훈이 형 한 명 없다고 우리 회사가 무너지거나 하지 않으니까요. 유능한 전문 경영인도 준비되어 있고요.”
박무혁 의원은 오래전부터 준비해 놓은 것처럼 말을 이어 갔다.
박 회장은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게 전부다.
그렇게 할 말을 모두 마친 박무혁 의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박영훈 부회장의 어깨를 가볍게 쥔다.
“도망가. 내 마지막 배려야.”
“……!”
박영훈 부회장은 어떤 말도 못 한다.
그저 멍하니 굳어 있는 게 전부다.
박무혀 의원의 큰 손이 그의 어깨를 툭툭, 몇 번 두드린다.
그리고…….
“잘 선택해.”
박무혁 의원은 서재를 벗어났다.
복도를 걸으며 한없이 강해 보였던 박무혁 의원의 눈빛이 씁쓸하게 변해 간다.
밖으로 나와 찬 공기를 마시자 그 눈동자는 더 흔들린다.
박영훈 부회장도 끝장을 냈지만 기쁘지 않다.
‘젠장…… 보고 싶네.’
< 과거의 매듭. - (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