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속. - (1) >
***
창문을 열면 대정 그룹 사옥이 보이는 한정식집.
엘리베이터에서 김용준 비서실장과 전략기획실장 심경로가 내렸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정식집의 직원은 몸을 돌려 두 사람을 안내했다.
도착한 곳은 복도의 가장 끝에 위치한 VIP실이다.
직원의 손에 의해 미닫이문이 천천히 열렸다.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 남자가 몸을 돌렸다.
성윤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성윤입니다.”
성윤이 예의를 갖추며 허리를 굽혔다.
심경로 전략기획실장도 다급히 고개를 숙인다.
“심경로입니다.”
가벼운 인사를 마친 후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심경로 전략기획실장이 물컵을 손에 쥐며 슬쩍 성윤을 살폈다.
‘확실히 젊어.’
겉모습만 보면 앳되다.
사원, 대리와 같은 또래로 여겨진다.
하지만 어리다고 무시할 수는 없다.
성윤의 직업은 국회의원이다.
그것도 박무혁 의원과 깊이 관여된 권력자…….
심경로 전략기획실장이 물컵을 기울여 입을 적셨다.
‘왜 미팅을 제안했을까?’
심경로 전략기획실장은 노조 위원장을 만나 파업을 요구하며 돈을 건넸다.
검찰은 심경로 전략기획실장이 건넨 검은돈의 행방을 좇는 중이다.
‘설마…… 검찰에 자진 출두해서 모든 것을 자백하라는 협박?’
생각을 이어 가던 심경로 실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직은 박무혁 의원이 나설 때가 아니야.’
검찰이 냄새를 맡고 킁킁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는 사건 초기.
이럴 때 괜히 나서면 공범으로 의심받아 함께 죽을 수 있다.
지금은 어디로 튈지 모를 사건을 예의 주시할 시기다.
‘그럼…… 뭐지?’
미팅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야 호랑이를 마주하고도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다.
심경로 전략기획실장이 마른 입술을 핥으며 옆을 흘낏 바라봤다.
찻잔을 입에 대는 김용준 비서실장이 보인다.
분명 뭔가 알고 있을 텐데 입을 꾹 닫고 있는 게 참 얄미워 보인다.
‘넌 무슨 생각이냐? 박영훈 부회장의 최측근이라는 놈이 이성윤과 내통을 하고 있었다니……. 이러니까 회사가 이 모양 이 꼴이지…….’
심경로 실장의 시선이 다시 성윤에게 옮겨졌다.
이득일지, 손해일지 아니면 또 다른 제안일지……. 머리를 굴려 봐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그럼, 물어봐야 한다.
그게 호랑이의 아가리에 머리를 드미는 일이라 할지라도.
심경로 실장이 긴장으로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떤 일로 저를 부르셨는지……?”
“아시잖아요? 노조 위원장의 일이죠.”
하지만 심경로 실장은 모른 척 발뺌한다.
“노조 위원장이요?”
“네.”
성윤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심경로 실장은 ‘난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표정으로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의원님, 제가 노조의 일을 어떻게 압니까? 하하하하.”
심경로 실장은 발뺌에 발뺌을 이어 간다.
그럴 수밖에 없다.
성윤은 거짓말을 숨 쉬듯이 하는 정치인이다.
지금도 이 방 어딘가에 녹음기를 숨겨 뒀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순진무구하게 ‘네! 노조 잘 알죠!’라고 자백했다가 머리채를 잡힐 수도 있다.
“노조는 제 관심사가 아니라 잘 모르겠습니다. 하하.”
한참을 웃던 심경로 실장이 다시 물컵을 손에 쥔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입안은 갈라진 논바닥처럼 쩍쩍 말라붙고 있어서다.
‘새끼가…… 협박하려고 불렀구만.’
방금도 생각했지만 박무혁 의원이라면 이 시기에 심경로 실장을 불러 협박하지 않는다.
그럼, 성윤 혼자 나섰다는 것…….
‘어린놈이라 엉덩이가 가벼워.’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려는 공명심이 크다.
심경로 실장의 목을 베어 박무혁 의원에게 바치고 싶은가 보다.
심경로 실장은 성윤을 이렇게 정의 내렸다.
‘적당히 끝내고 일어나야겠어. 이 자리에 오래 있는 것은 시간 낭비야.’
심경로 실장은 힐끗 눈동자를 옆으로 옮겼다.
여전히 조용히 앉아 있는 김용준 비서실장이 보인다.
‘병신 새끼, 박영훈을 배신하고 앉은 게 마흔도 안 된 이성윤 옆이냐?’
그때, 심경로 실장의 구구절절한 속마음을 듣고 있던 성윤이 입을 뗐다.
“검찰에 제보한 사람…… 저예요.”
“뭐요!”
심경로 실장의 얼굴이 순간 확 일그러졌다.
지금껏 생각했던 성윤에 대한 판단과 정의는 찰나의 순간에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지금은 성윤의 멱살을 잡아 흔들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다.
그 마음을 겨우겨우 참고 있는데, 또다시 폭탄 발언이 터진다.
“박영훈 부회장님에게 용돈 받아 승진한 검사님들있잖아요? 지금 종이호랑이 신세가 돼서 아무것도 못 하는 분들이요.”
“……!”
“그 검사님들을 막고 있는 것은 대한당이고요. 대한당에 부탁은 제가 했어요.”
“이, 이성윤 의원님!”
심경로 실장의 얼굴이 뻣뻣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성윤은 여유롭다.
“만만히 생각하지 마세요. 대선을 앞둔 상황이에요. 대한당과 신당 그리고 검찰이 요란하게 칼을 뽑았어요.”
대선을 앞둔 상황…….
칼을 뽑아 놓고 배추나 무를 썰고 국민을 향해 흔들 수는 없다.
적어도 산 제물 하나는 바쳐야 훌륭한 퍼포먼스가 될 거다.
로마의 검투사 싸움에서 황제가 엄지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처럼…….
“죽여!”
그 말 한마디에 국민은 열광할 거다.
심경로 실장의 얼굴근육이 씰룩였다.
‘산 제물?’
그 제물이 누가 될 것인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내가 제물?’
성윤이 심경로 실장의 눈과 마주쳤다.
그리고 그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똑똑히 전한다.
“아시겠지만 사건이 박영훈 부회장님까지는 안 올라갈 겁니다. 용돈 주던 검사 몇 명이 쓰러졌다고 무너질 박영훈 부회장이 아니죠.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것은 언제나 새우입니다.”
“……!”
“이대로 있으면 심경로 실장님은 감옥에 가게 될 겁니다. 노조 문제뿐만이 아니라 박영훈 부회장의 다른 비리도 어깨에 짊어진 채로요. 그럼, 실장님은 대정 그룹의 순교자가 되겠군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심경로 실장은 여유를 가장한 채 억지로 웃고 있었다.
이 상황을 애써 부정하는 중이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쿵쿵거렸다.
성윤이 그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스물여섯 살에 입사해서 약 40년……. 그 긴 세월 동안 대정 그룹을 위해 일하셨네요. 야근하느라 자식 크는 것도 몰랐고, 주말에 출근하느라 부모님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고…… 아들이 군대 갈 때는 미국에 계셨다고요?”
심경로 실장은 대답하지 않는다.
입을 꾹 닫고 성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성윤이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대정 그룹의 사옥을 보며 말을 잇는다.
“저 회사…… 박영훈 부회장의 것이 아닙니다. 실장님께서 인생을 많은 것을 포기하며 키운 회사입니다.”
심경로 실장은 숨을 멈췄다.
성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어떤 뜻인지 예측되기 때문이다.
성윤이 다시 그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가지세요.”
“……!”
연 수조 원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를 손에 넣어라…….
고작 서른한 살, 어린놈의 입에서 내뱉어진 말이다.
헛소리한다고 무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성윤이다.
어린 나이에 재선에 성공했고 단시간 내에 상상할 수 없는 돈을 불렸다.
결코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두렵게 느껴진다.
하지만 심경로 실장은 모른 척 외면한다.
“하하, 농담도 잘하십니다.”
심경로 실장은 애써 웃고 있다.
여유를 잃지 않은 척 허세를 부리는 중이다.
반면 성윤의 표정은 처음부터 똑같았다.
진지하게 말을 잇는다.
“대정 그룹의 형제들이 등을 돌리고 싸우는 이유는 잘 아실 겁니다.”
승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싸우는 거다.
법정에 가 보면 1천만 원 2천만 원을 놓고 피를 나눈 형제, 한 침대를 쓰던 부부가 쌍욕을 하며 싸운다.
그런데, 이들은 그 단위가 몇조 원이다.
교통정리가 될 때까지 피를 흘리며 싸울 것은 인간의 욕망을 생각하면 당연한 거다.
“승계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은 기회입니다. 순환 출자를 타고 올라가면 그 중심에 대정 홀딩스가 있죠. 그런데, 박영훈 부회장이 가진 것은 고작 9.4%. 해볼 만하지 않나요?”
심경로 실장이 마른침을 삼켰다.
여전히 가슴이 쿵쿵 뛰고 있다.
그런데, 다르다.
방금까지 겁을 집어먹고 긴장으로 울려 대던 심장인데 지금은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터질 뜻 뛰는 중이다.
성윤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박무혁 의원님이 가진 지분, 다른 두 여자 형제분이 가진 지분 그리고 심경로 실장님이 가진 지분. 김용준 비서실장님이 가진 지분, 마지막으로 두 분이 얻을 우호 지분!”
청사진이 다다다다 쏟아졌다.
정신없이 귀를 기울이던 심경로 실장이 고개를 틀어 김용준 비서실장을 향했다.
김용준 비서실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박무혁 의원님은 경영에 손을 대지 않을 겁니다. 그럼, 심 실장님과 제가 일선에 서겠지요.”
심경로 실장의 눈동자가 다시 성윤에게 향했다.
성윤이 빙긋이 웃는다.
“박영훈 부회장이 잠시 나랏밥을 먹을 동안 두 분이 회사를 장악하면…… 불가능할까요? 저는 가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
출처를 알 수 없는 지라시가 곳곳을 누비는 중이다.
며칠 전 대정 자동차 파업이 순수한 게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룹 내 경영권 다툼에 이용되었다고 하는데요.
검찰이 노조 위원장을 소환하려 했으나 현재 외국에 있어 조사가 늦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검찰은 노조 위원장이 단순 여행으로 나갔는지 아니면 도망간 것인지 알 수 없어 전전긍긍하는 중이라더군요.
검찰은 대정 그룹 고위 간부를 수사 대상에 놓고 조사할 계획이지만 노조 위원장이 돌아오지 않는 이상 밝히기 어려운 일이죠.
그런데, 여기서 검찰이 또 수사 대상으로 만지작거리는 카드가 있습니다.
야당의 원로 국회의원인데요. 은퇴할 나이에도 왕성하게 활동하는……(후략)…….
유원희 의원의 주름진 손이 지라시가 적힌 종이를 콱, 콱, 콱 구기기 시작했다.
지라시에 적힌 ‘야당의 원로 국회의원’, ‘은퇴할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 등은 조금만 생각해도 모두 유원희 의원을 가리키고 있다.
‘대정에서 뿌린 건가?’
성윤이 언론사 ‘리얼 팩트’의 도움을 받아 증권가에 뿌린 지라시다.
하지만 유원희 의원은 성윤의 이름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오직 대정 그룹 박영훈 부회장을 의심하고 있다.
‘나를 압박하려고? 검찰을 막지 않으면 물귀신 작전을 쓰겠다고? 이런 미친 새끼가…….’
유원희 의원의 눈이 시뻘겋다.
말년에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하는데 멋대로 설치고 다닌 결과가 이런 것 같다.
“어떻게 할까요?”
유원희 의원의 옆에서 보좌관이 우물쭈물 입을 연다.
“뭘 어떻게 해?”
“지금 SNS를 보면…….”
보좌관이 태블릿 PC를 내려 뒀다.
정치관련 지라시, 그것도 주름진 할아버지의 이야기다.
그래서 대중의 흥미를 얻지는 못했고 다행스럽게도 널리 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라시를 본 사람들은 예상했던 대로 똑같은 말을 한다.
-이거 유원희잖아?
“아니라고 해명해.”
“알겠습니다.”
보좌관이 고개를 숙인 후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보좌관은 유원희 의원의 계정으로 로그인해서 글을 올릴 거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출처를 알 수 없는 지라시를 봤습니다. 저를 의심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그런데 아시겠지만, 제가 그럴 리 없습니다. 정치 인생의 마지막을 대한민국만 생각하는 중입니다. 정치 음모가 아닌 민생만 고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정 그룹과는 식사도 한 적이 없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여유롭게 보이려면 뒤에 웃는 이모티콘은 필수다.
그때 유원희 의원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다.
유원희 의원이 눈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귀에 댄다.
“유원희입니다.”
-의, 의원님…… 대정 그룹 전략기획실장 심경로라고 합니다.
“전략기획실장?”
유원희 의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군지 기억을 떠올리려는 거다.
재벌 오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원희 의원이 그 아래 노예들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으니까.
……결국 떠올리지는 못했다.
그가 노조 위원장에게 돈을 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기억 속에 없던 거다.
“아, 그래. 말해요.”
-잠깐 뵙고 싶은데, 시간이 괜찮으십니까?
초조한 목소리에 유원희 의원의 표정이 굳어진다.
그가 조심스레 묻는다.
“박 부회장 모르게?”
-……네.
전략기획실장은 박영훈 부회장의 수족이다.
그런 사람이 박영훈 부회장 모르게 만나자고 한다면…….
유원희 의원의 시선이 테이블에 구겨진 종이로 향했다.
‘알 수 없는 지라시. 그리고 박영훈 부회장…….’
잠시 생각에 빠졌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볼까요?”
-전통 찻집이 있습니다. 어떠십니까?
“좋습니다.”
유원희 의원이 전화를 내려 뒀다.
그의 눈동자에는 의심이 한가득 담겨 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의원회관 성윤의 사무실.
“고생하셨습니다.”
성윤이 통화를 종료했다.
심경로 실장과의 통화였다.
성윤이 고개를 틀어 정우를 향했다.
“정우야, 30분 후.”
정우가 토스트를 입에 물고 일어선다.
곧바로 재킷을 걸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윤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손목시계를 본다.
유원희 의원이 그물에 걸리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의 위에 서서 떵떵거리며 살던 마귀가 지옥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 약속. -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