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가 내리면. - (3) >
레이첼의 눈동자가 떨려 왔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성윤의 말과 이준대의 목서리가 겹쳐지고 있다.
이준대는 항상 말해 왔다.
-어차피 인간은 죽어. 지금 죽느냐 내일 죽느냐의 차이야. 이왕 죽을 것, 이 세상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지. 나쁘지 않잖아?
그 세상은 모두를 위한 게 아니라 이준대를 위한 세상이다.
그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다.
그녀가 바라본 이준대는 그 누구보다 탐욕적인 사람이니까.
그녀의 눈동자가 성윤을 향했다.
성윤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이준대는 또 말하죠,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그런데 당신도 똑같은 사람입니다.”
“……!”
성윤은 그녀의 속마음을 들으며 날카로운 말을 찔러 넣는 중이다.
그녀의 눈동자가 긴장으로 물들 때 성윤이 휴대폰의 화면을 바꿨다.
다시 이준대와 여성이 함께 찍힌 사진으로…….
그녀의 시선이 화면으로 향하자 성윤의 습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은 이준대의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 숨겨 둔 돈은 물론이고 살인자의 연락처까지……. 그런데 이준대가 다른 여성을 선택한다면…… 그리고 당신이 필요 없어지게 된다면, 이준대는 당신을 어떻게 할까요?”
그녀가 마른침을 삼켰다.
‘죽…… 죽을지도 몰라…….’
성윤이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몰아세우는 것은 여기까지.’
조금 더 몰아붙이면 그녀는 혼자 폭주할 수도 있다.
이준대를 찾아가 ‘진실이 무엇이야!’라며 길길이 날뛰는 것은 피해야 한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는 법이니까.
성윤이 잔잔한 미소로 그녀를 보며 입을 연다.
“그럴 일 없겠죠?”
“네?”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잖아요. 가끔 차 한잔해 주시면, 저는 이준대 대표의 옆에 있는 여자를 치워 드리겠다고요.”
지금껏 어두웠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밝아지는 것 같다.
“그럴 일이 없도록 제가 도와드리죠. 가끔 차나 한잔 마셔 주세요.”
성윤이 자리를 떠났다.
레이첼은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준대가 목적을 위해 무슨 짓을 했고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두렵지 않았다.
죽고 망하는 것은 타인의 이야기였으니까.
자신과는 동떨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삼스레 이준대가 무섭게 느껴진다.
그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 번호는 이준대 대표.
그녀가 긴장된 한숨을 내뱉으며 휴대폰을 손에 쥔다.
“네.”
-오늘은 일찍 들어갈 것 같은데…… 드라이브나 할까?
“좋아요.”
그녀는 맑은 목소리로 답한다.
하지만 눈동자는 메말라 있었다.
***
다음 날, 서안시 사무실.
성윤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방을 울린다.
-이번 여름의 마지막 휴가라고 하죠? 금요일 광복절을 기다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벌써부터 각 관광지의 호텔과 펜션은 예약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요.
문이 삐걱 열리고 정우가 들어왔다.
성윤의 책상으로 다가오던 정우가 텔레비전을 보며 착잡한 미소를 짓는다.
“우리는 안 쉬겠죠?”
“아니, 쉴 거야.”
정우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성윤을 본다.
“정말요?”
“응, 다른 사람은 다 쉴 거야.”
“네?”
“너하고 나는 일해야지.”
“하하.”
정우가 억지 미소를 지었다.
성윤이 손가락으로 텔레비전을 가리키며 말한다.
“쉴 시간이 어디 있어?”
텔레비전에서는 대정자동차의 파업 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어젯밤, 노조 측이 공장의 시설물을 파괴했습니다. 이에 사측은 파업 참가자들의 각종 불법행위와 생산 손실에 대해 법적책임을 물을 방침이라고 피력했습니다.
연휴라고 쉴 시간은 없다.
노조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까.
성윤이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의 전원을 끄며 말했다.
“그리고 이번 주말에 비 올 거야. 아쉬워하지 마.”
정우가 픽 웃는다.
“광복절에 완전 맑다는데요.”
“전국적으로 비 온다니까.”
특히 파업이 일어지는 공장에 물 폭탄이 쏟아질 예정이다.
하지만 정우는 믿지 않는 눈치다.
창밖을 보면 하늘마저 메말라 있다.
여기저기서 가뭄이 들었다고 시끄럽다.
기상청 예보를 보지 않아도 한동안 비 소식이 없을 것은 어린아이도 예측할 수 있다.
“크리스마스에 비 올 확률이 더 높겠네요. 흐흐.”
정우는 그 말과 함께 책상에 서류를 올려 뒀다.
성윤도 날씨에 대해 더 얘기하지 않는다.
다가오면 알 일이니까.
서류를 살짝 들춰 보며 물었다.
“이거야?”
대정 자동차 노조원의 인사 기록이다.
“네. 불법 자료니까 다 읽으면 다시 주세요. 파기할게요.”
“땡큐.”
성윤은 서류를 넘긴다.
사진을 보고 이름을 외우며 가족 관계를 기억했다.
서류에 적힌 모든 것을 머릿속에 담고 있었다.
***
다음 날 신당의 당사.
박무혁 의원은 심각한 표정으로 사무실로 향했다.
“계속 말해 봐.”
그 옆에 선 보좌관이 한숨을 내뱉는다.
“이번 파업으로 우리 당의 지지율은 물론 의원님의 지지율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도제성은?”
“가장 이득을 볼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캠프를 늦게 구성한 만큼 추석 전까지 바짝 당겨야 한다.
하지만 파업이 장기화되면 역효과가 난다.
박무혁 의원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제 집안도 간수 못 하면서 무슨 대선?”
“제발 파업이나 어떻게 하세요!”
이런 식으로 욕을 먹을 거다.
박무혁 의원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연다.
“방법이 없을까?”
보좌관이 박무혁 의원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답한다.
“안재열 대통령님이 우리 당에 들어오기로 되어 있잖아요? 앞당겨서 발표하면 어떨까요?”
안재열 전 대통령의 영향력은 크다.
그가 민국당을 탈당했을 때 대한민국의 모든 언론과 포털 사이트는 그의 이름으로 채워졌다.
민국당의 지지율이 출렁거렸고 쭉쭉 빠져 버렸다.
그런데, 그가 신당으로 들어온다고 선언하면…….
“파업 소식은 단신 뉴스로 전락할지도 모릅니다.”
사건을 또 다른 사건으로 덮는 가장 효과 좋은 방법.
그런데, 박무혁 의원이 고개를 저었다.
“이 상황에 안재열 대통령이 신당에 온다고? 명분이 있나?”
안재열 전 대통령은 민국당이 썩었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탈당했다.
그런데 파업으로 시끄러운 신당에 입당한다면 안재열 전 대통령은 미친 사람이 된다.
“그리고 파업은 장기화될 거야. 안재열 대통령 카드는 일시적인 처방이야.”
보좌관이 한숨을 내뱉는다.
이쪽저쪽 사방이 막혔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때 똑똑똑, 문이 열리고 비서가 들어왔다.
단정한 차림의 그녀가 허리를 굽힌다.
“이성윤 의원이 왔습니다.”
박무혁 의원의 표정이 밝아진다.
성윤이라면 뭔가 해결 방법을 들고 왔을 것 같다.
“들어오라고 해.”
잠시 후, 성윤과 박무혁 의원이 소파에 마주 앉았다.
박무혁 의원이 찻잔을 손에 쥐며 묻는다.
“말해 봐.”
“우선…… 이번 파업 사태의 뒤에 박영훈 부회장이 있습니다.”
박무혁 의원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대선이 시작되기 전에 어떻게든 훼방을 놓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파업이라니…….
잠시 생각에 빠졌던 박무혁 의원이 묻는다.
“박영훈 부회장은 리스크가 큰 게임을 좋아하지 않아. 이 정도 스케일을 혼자 주무를 사람은 아니고……. 또 누가 있지?”
성윤이 자신의 휴대폰을 박무혁 의원에게 건넸다.
“지금 막 들어온 기사입니다.”
열사병에 걸려 쓰러진 근로자와 유원희 의원.
감성을 건드리는 제목과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서 있는 유원희 의원의 사진.
사진만 보면 모든 국민을 정말 사랑하고 아끼는 원로 정치인이다.
가증스러운 위선…….
박무혁 의원의 시선이 성윤에게 옮겨졌다.
“유원희 의원이 얼굴마담인가?”
“네.”
“이 사람이 왜?”
유원희 의원은 이번을 끝으로 정계를 떠나려 한다.
“겉으로는 평생을 몸담은 민국당에 청와대를 안겨 주고 싶은 마음이겠죠.”
하지만 속마음은 다르다.
“민국당이 정권을 잡아야 은퇴 후에 편하다고 생각하겠죠. 그래야 법정에 설 일이 없을 테니까요.”
수십 년을 정계에서 여우 짓을 하며 살았다.
정권이 마음먹고 탈탈 털면 사돈에 팔촌, 심지어 손주, 손녀까지 법정에서 만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민국당의 정권을 간절히 바란다.
민국당 의원들이 자신을 타깃으로 총을 쏠 일은 거의 없으니까.
“얼굴마담은 유원희, 돈줄은 박영훈……. 그럼, 책사는 누구지?”
“아직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알고는 있다.
이준대다.
하지만 아직 박무혁 의원에게 오픈할 수는 없다.
어떻게 씹어 먹을지 결정하지 않았으니까.
“왜?”
“그놈을 통해 거대한 게이트를 그리고 싶은데 아직 확실한 스케치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명확해지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박무혁 의원은 물끄러미 성윤을 바라봤다.
“좋아, 그건 알아서 해. 그럼, 이제 돌파구를 들어 볼까?”
기대감으로 가득한 눈빛이 성윤을 타고 흐른다.
***
금요일 광복절.
뜨거운 여름은 끝까지 기승을 부린다.
숨을 쉬기도 힘들 정도로 푹푹 찌는 날씨였다.
하지만 연휴를 맞이한 사람들로 고속도로가 정체되었고 바닷가는 물 반, 사람 반이었다.
성윤은 텔레비전을 켜 놓고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뉴스만 보고 있다.
‘하…….’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꿈과 달리 비가 오지 않고 아무도 다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한쪽에서는 이번 비로 신당의 지지율이 얼마나 상승할지 기대하고 있다.
가장 최근 발표된 지지율을 보면…….
1위. 민국당 34.1%
2위. 대한당 23.7%
3위. 신당 21.2%
이번 파업으로 신당의 지지율이 3위까지 떨어졌다.
박무혁 의원의 지지율도 마찬가지다.
위기관리 능력이 없다며 끝을 모르고 흔들리는 중이다.
그래서 성윤은 스스로의 간사함을 욕하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가락만 빨고 있던 것은 아니다.
자연은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지만 피해를 최소화할 수는 있다.
박무혁 의원을 통해 파업 근로자들에게 하천 밖으로 나와 있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비가 왜 와! 다리가 침수된다고? 별 거지 같은 변명을 하고 있어!”
욕만 처먹었지만…….
성윤은 얼굴을 쓸어 만졌다.
이제 해야 할 일은 피해의 최소화와 신당의 이득이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민국당 유원희 의원의 얼굴이 나온다.
트럭에 빵과 우유를 가득 채워 파업 근로자들에게 보내고 있다.
그리고 공장을 배경으로 인터뷰를 한다.
-박무혁 의원이 이곳에 와서 노동자들의 현실을 봤으면 좋겠습니다. 저 안에서 배를 굶주리고 있어요.
유원희 의원이 착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는 유원희 의원의 인터뷰가 실검에 올랐다.
기사의 댓글을 보면 박무혁 의원은 쓰레기로 전락하고 있다.
-박무혁은 굶주리는 것을 몰라!
-아닐걸? 오히려 간헐적 단식은 몸에 좋다고 권하고 있을 거야.
-유원희 의원, 연세가 지긋한데, 더운 곳에 서 있지 말고 몸 생각 좀 했으면…….
오후 3시 20분.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투툭,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공장의 외벽에 기대 담배를 피우던 노조원들이 시선을 들어 하늘을 봤다.
“오늘 날씨 맑다고 하지 않았어?”
“소나기겠지…….”
“뭐가 됐든, 오늘 놀러 간 사람들 꼴좋다. 흐흐흐.”
노조원들이 낄낄거린다.
그런데, 한 노조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하늘을 봤다.
“그런데, 사측에서 비 오면 큰일 난다고 하지 않았나?”
“여기 침수된다고?”
“응, 어제였나…… 그런 말 했다며?”
노조원이 고개를 저었다.
“개소리지. 하수구가 이렇게 잘되어 있고 앞에 물 빠지는 하천이 있는데 여기가 왜 침수돼?”
“괜히 찝찝하네.”
그때, 번개가 번쩍이며 빗줄기가 굵어졌다.
이어서 하늘이 무너질 듯 크게 울린다.
빗줄기가 떨어지는 ‘쏴아아아!’ 소리를 들으며 노조원들이 조용히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
박무혁 의원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가 눈을 꾹 감는다.
‘정말로…….’
비가 왔다.
성윤이 말했던 대로다.
속는 셈치고 말을 들었던 게 신의 한 수처럼 여겨진다.
‘도대체 뭐 하는 놈이냐…….’
그동안 박무혁 의원도 성윤을 관찰해 왔다.
말하는 게 이뤄지는 녀석.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성윤과 함께 있으면 정말 대권도 가능할 것 같다.
‘일단…….’
그의 시선이 텔레비전의 화면으로 향했다.
폭우로 다리가 잠기는 게 보인다.
시뻘건 흙탕물에 커다란 나무가 빠르게 쓸려 내려오고 있다.
박무혁 의원이 화면을 보며 인터폰을 눌렀다.
“최고위원, 그리고 고위 당직자 모두 회의실로 오라고 해.”
한 시간이 되지 않아 회의실이 가득 채워졌다.
의원들과 당직자들의 표정은 똑같다.
불안과 초조…….
박무혁 의원이 최대 주주로 있는 대정 자동차가 고립되었다는 소식이 뉴스를 때리는 중이니까.
그들이 수군댄다.
“들었지?”
“다리가 끊겼다며?”
“하, 설상가상이네……. 이러다가 다치는 사람이라도 나오면…….”
정말 대선은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몇 달 안에 엎어진 분위기를 뒤집기는 힘든 일이다.
“대표님 들어오십니다.”
당직자의 말에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문이 열리고 박무혁 의원이 들어온다.
모두 불안한 눈동자로 그를 살핀다.
그런데, 박무혁 의원은 느긋하다.
모인 의원들의 얼굴을 천천히 살피며 조용히 입을 연다.
“그렇게 걱정하지 마세요. 이성윤 의원이 잘 해결할 겁니다.”
“이성윤이요?”
< 비가 내리면. -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