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가 내리면. - (1) >
‘몸값?’
사과 박스 안에 가득 든 오만원은 아닐 거다.
성윤이 돈을 보고 침이나 질질 흘릴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몸값으로 장관, 청와대 고위직 또는 민국당의 공천권이나 텃밭으로 지불한다는 건데…….
성윤이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지만 파격적인 제안을 하면서까지 영입할 필요는 없다.
깊게 생각해 봤지만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영입하려는 이유를 모르겠다.
성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느릿하게 물었다.
“대략적인 몸값을 들을 수 없나요?”
관심이 있는 척, 상대의 경계를 무너뜨려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한 화법…….
김정만 의원은 성윤이 관심을 가진다고 생각했다.
민망하게 웃으며 답한다.
“흐흐, 나도 잘 모르지. 파격적인 대우를 해 주겠다는 말만 들었으니까. 엘리트 코스를 잡아서 대선까지 길을 닦아 준다나 어쩐다나…….”
느낌이 점점 싸해진다.
이제 재선, 30대 초반의 국회의원에게 ‘대선’이라니.
모든 사기는 허황된 말로 인간의 욕망을 건든다.
게다가…….
‘엘리트 코스?’
정치인에게 엘리트 코스는 없다.
험지에서 피어난 꽃이나 짓밟히면서도 뿌리를 뻗은 잡초가 더 크게 성장하는 법이니까.
그런데, 저 말을 즐겨 쓰던 사람이 있다.
‘이준대.’
성윤이 눈동자만 움직여 김정만 의원을 향했다.
“누구죠?”
“어떤 거?”
“제 몸값을 말해 줄 분이요. 누구를 만나야 들을 수 있는 거죠?”
“아…… 유원희 의원님.”
유원희, 여든이 가까운 나이로 민국당의 원로 중 하나다.
다음 총선에서 은퇴할 것이란 예측이 지배적이지만 뒷짐 쥐고 엣헴, 체면만 세우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아직도 최전방에서 상대 당과 멱살 잡고 삿대질하며 싸우는 노병이다.
‘이준대와는 접점이 없을 텐데…….’
고민하고 있는데, 김정만 의원이 다시 묻는다.
“어때? 만나 볼래? 유원희 의원님이면 만나 봐서 나쁠 것 없잖아? 배울 것도 많고. 어때?”
김정만 의원은 싱글벙글 웃는다.
그는 성윤이 수락할 거라 생각하고 있다.
분위기가 좋으니까.
하지만…….
“아뇨.”
성윤은 단박에 거절했다.
유원희 의원은 많은 별명을 갖고 있다.
이름 때문에 유인원, 욕심이 많다고 놀부.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것은 국회의 여우다.
모략질의 선수란 뜻…….
상대가 어떤 의도가 있는지 모르는데 냉큼 만나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그리고 이준대에 대한 찝찝함도 있고.
“어?”
김정만 의원은 당황했는지 눈을 깜빡인다.
성윤이 유원희라는 국회 어른의 청을 가차 없이 거절할 줄은 생각도 안 한 것 같다.
“유원희 의원님께서 직접 제 사무실로 오시면 언제든 만나 뵐 수 있지만, 제가 찾아가는 것은 힘들 것 같아요.”
“건방진 말인 것 알지?”
“제가 유원희 의원님을 만나 뵈다가 기자들에게 걸리면요?”
“문제가 되나? 국회를 벗어나면 다들 얼굴 보고 식사하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많잖아?”
이들은 국회라는 무대 위에서 쌍욕을 하고 죽일 듯이 싸운다.
하지만 막이 내린 무대 뒤는 다르다.
멱살을 잡았던 사람들이 친형제처럼 지내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대선을 앞두고 있어요. 민국당의 지지율이 계속 떨어지고 있잖아요. 정치 전문가 중에서는 그 이유 중 하나로 저를 지목하기도 하고요.”
성윤은 이슈를 만든다.
게다가 어린 나이라는 신선함이 있다.
그 신선함이 신당과 합쳐지며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중이다.
얼마 전까지 사람들은 말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똑같은 그 놈이야!”
하지만 최근에 신당을 보며…….
“저놈은 다를지도 몰라.‘
대한당의 대안이 민국당만 있는 게 아니며 민국당의 대안으로 대한당만 있는 게 아니다.
신당도 있다.
“유원희 의원님은 이번을 마지막으로 은퇴할 생각이시죠. 마지막 업적으로 반드시 청와대를 손에 쥐려고 할 거예요. 그래서 그 타깃으로 저를 찍었을 수도 있고요.”
김정만 의원은 대답하지 못한다.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나 보다.
성윤이 쓰게 웃었다.
“유원희 의원님이 저와 만나 대화하는 모든 장면을 녹화하고 악의적으로 편집해서 인터넷에 올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악의적인 편집은 이준대의 특기였다.
그가 만든 시나리오에 잡히면 막장 드라마의 악역보다 더 한 쓰레기가 되어 버렸다.
“설마 그렇게까지…….”
“유원희 의원님의 별명이 여우예요.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어요.”
성윤은 담배를 끄며 김정만 의원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럼,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어? 어…….”
김정만 의원은 성윤을 잡으려다가 만다.
저렇게까지 거절하는데 계속 만나 달라고 부탁할 명분은 없었다.
김정만 의원이 흐릿한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허 참.’
잠시 혀를 차던 그가 휴대폰을 귀에 댄다.
그리고 유원희 의원의 사무실.
검은색 소파에 앉아 있던 유원희 의원은 품에서 울리는 진동을 느꼈다.
그가 휴대폰을 꺼내 귀에 댄다.
발신 번호가 김정만 의원이다.
“그래, 말해 봐.”
-죄송합니다. 거절당했습니다. 대선 캠프에서 할 일이 많아서 그런지 많이 바쁜가 봅니다.
“거절해? 허허.”
유원희 의원은 이성윤이라는 새파란 핏덩이가 자신과의 만남을 거절할 줄은 몰랐다.
어이없이 웃는데 더 황당한 말이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의원님께서 직접 오시면 언제든 버선발로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김정만 의원은 ‘버선발’이라는 단어까지 넣으며 성윤이 했던 말을 포장했다.
하지만 유원희 의원의 미간엔 주름이 콱 잡혔다.
감히 직접 찾아오라니.
치아가 갈리며 빠득 소리가 들린다.
‘건방진 새끼!’
하지만 입 밖으로 그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래, 알았네. 나중에 식사나 같이하지.”
유원희 의원은 통화를 종료하고 휴대폰을 가볍게 테이블 위에 던져 뒀다.
그리고 앞을 보며 힘없이 웃는다.
“거절당했어.”
그 말에 앞에 앉은 남자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미소를 짓는다.
“아쉽네요.”
웃고 있는 남자는 이준대였다.
***
이준대는 유원희 의원의 사무실에서 나와 차에 올랐다.
뒷좌석에 앉자 운전수가 액셀을 밟는다.
이준대는 창밖을 보며 휴대폰을 귀에 댔다.
“레이첼, 한정식집에 설치한 카메라 모두 뜯어내라고 해.”
-실패했나요?
“그래.”
-알겠습니다.
이준대는 통화가 종료된 휴대폰을 옆자리에 던져 뒀다.
그리고 다리를 외로 꼰 채 창밖을 본다.
‘또 실패…….’
얼마 전, 이준대는 김종혁 의원의 아들을 살해하려 했다.
몰락의 위기에 처한 김종혁 의원이 아들의 죽음으로 동정표를 받아 살아나게 하려고.
살인은 나쁜 것이지만 대한민국의 역사는 피로 쓰이는 것이다.
작은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종혁 의원의 아들 옆에 이성윤의 경호원이 항상 따라붙고 있었다.
‘참 이상해…….’
이준대는 턱을 매만진다.
성윤은 계속해서 이준대를 방해하고 있다.
그래서 유원희 의원의 손을 빌려 살짝 옆으로 치워 두려 했다.
동영상을 촬영해서 악의적으로 편집하면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그런데, 이것마저 피해 갔어…….’
그때, 지이이잉.
옆자리에 던져 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준대가 손을 뻗어 휴대폰을 쥔다.
발신 번호는 레이첼.
“그래, 말해.”
-김종혁 의원이…… 선거캠프에서 부위원장을 맡았다고 합니다.
몰락하던 인간이 갑자기 부위원장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이성윤 의원이 추천한 것 같다고 합니다.
“이성윤이?”
-네.
휴대폰을 쥔 이준대의 손에 힘이 꽈악 들어가더니 파들파들 떨리고 있다.
그러더니 이준대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수화기 너머에서 레이첼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떻게 할까요?
“대기하고 있어.”
통화를 종료한 이준대가 운전사에게 입을 열었다.
“차 돌려요. 다시 유원희 의원님께 가죠.”
***
“한번 만나 보시지 그랬어요?”
“됐어.”
성윤은 의원회관 사무실에 있었다.
정우가 아쉬운 표정으로 성윤을 본다.
“몸값 궁금한데…….”
“됐어. 일이나 하자.”
성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보좌진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국감 준비하면서 선거 캠프까지 같이해야 할 것 같아요. 제가 맡은 보직이 경기도 중소기업대책위원장이지만 실제는 기획과 마케팅 쪽에 집중할 겁니다. 그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들 진지한 표정으로 성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성윤의 말이 끝났을 때 김현석 보좌관이 손뼉을 짝 쳤다.
“의원님이 대통령까지 만들면 진짜 킹메이커네요. 하하하.”
정우도 활짝 웃는다.
“킹메이커는 딱 두 번만 하고 최연소로 청와대에 입성하죠.”
김현석 보좌관이 고개를 흔든다.
“대통령 일찍 하면 재미없어요. 5년이면 퇴직이잖아요. 4년 계약직을 계속하다가 나중에 더 할 것 없을 때 하죠. 하하하하.”
성윤의 인지도는 물론 지지율까지 한창 오르는 중이다.
그 덕에 사무실의 분위기도 뜨겁다.
그때, 정우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네, 박정우……. 네?”
정우의 목소리가 이상하다.
즐겁게 떠들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줄어든다.
정우가 다급히 리모컨을 들고 텔레비전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아나운서가 나와 입을 연다.
-대정 자동차 노조가 총파업에 들어갔습니다. 노조 측에서는 임금 인상, 성과급 지급, 고용 보장 합의서, 정년 연장 등을 요구하며…….
김현석 보좌관은 재빨리 휴대폰을 들고 기사를 검색한다.
그리고 빠르게 입을 열었다.
“노조에서 박무혁 의원님의 정권 도전도 비난하고 있습니다. 재벌이 대통령이 되면 재벌 퍼 주기를 할 게 분명하다면서 끝까지 반대하겠대요.”
회계를 맡은 비서관도 휴대폰을 보며 말한다.
“여기 기사도 그래요. 박무혁 의원이 후보를 포기할 때까지 강도 높은 투쟁을 하겠다고요. 재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정경 유착을 넘은 것이다, 노동자는 재벌의 노예가 될 것이며 양극화가 더 심해질 것이다.”
온갖 나쁜 말은 다 갖다 붙이고 있다.
성윤은 휴대폰을 들어 기사를 확인했다.
대정 자동차만 검색해도 연관 검색어에 ‘파업’, ‘박무혁’의 이름이 같이 뜬다.
기사를 들어가 댓글을 확인했다.
-특정 몇 명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잘 살려면 박무혁은 대통령에 도전하지 말아야 한다.
-맞아. 박무혁이 대통령이 되면 노조가 불법이 될 수도 있음.
-지랄……. 박무혁은 경영에 신경 안 써. 그냥 대주주야.
-응, 전문 경영인 따로 있음. 이런 기사에 박무혁 물고 늘어지는 것은 억지지.
-전문 경영인? 바지 사장? 그걸 믿냐? 멍청한 놈.
-박무혁, 이성윤이 손잡고 AI회사를 끌고 왔어. 그 이유가 뭔 줄 알아? 사람 다 자르고 기계로 대체한다는 거야. 그런데, 박무혁이 경영에 신경 안 쓴다고? 풉.
-대가리 똥만 들었으니까 박무혁을 지지하지.
-노조에서 사측이랑 싸우는 게 아니라 박무혁 욕하는 게 이상하지 않냐?
-박무혁 대권 잡기 전에 노조에서 숟가락 얹는 거지.
-거지 새끼들아! 네가 박무혁을 왜 걱정해!
-간장에 밥 비벼 먹으면서 박무혁 식사 걱정할 놈들임.
-피융신들 ㅋㅋㅋㅋ
대정 자동차 노조, 귀족 노조란 말을 들으며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번은 박무혁에 관한 욕으로 게시판이 가득하다.
박무혁 의원을 두둔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손에 꼽을 정도다.
성윤은 휴대폰을 덮으며 생각에 빠졌다.
‘오늘 있었던 일…… 선거 캠프.’
선거 캠프가 구성됐다.
본격적으로 전투를 벌이겠다고 선언한 거다.
이에 맞춰 대한당이나 민국당이 움직였을 가능성이 크다.
될성부른 떡잎은 시작부터 뜯어내는 게 예의니까.
‘그리고 박영훈 부회장이 도와줬을 거야.’
대정 자동차는 박무혁 의원이 최대 주주다.
하지만 박영훈 부회장도 상당량의 주식을 손에 쥐고 있다.
‘박영훈 부회장은 박무혁 의원이 대통령이 되는 걸 가장 싫어해.’
박영훈 부회장이 대한당 또는 민국당에 도움을 주고 있을 가능성 역시 크다.
성윤의 시선이 다시 텔레비전 화면으로 향했다.
붉은 띠를 머리에 두른 사람이 가득하다.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지금 분명한 것은 박무혁 의원은 재벌이며 대권 후보라는 것.
네티즌들은 얼굴까지 잘생겼다며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라고 부른다.
박무혁 의원에 비하면 대정 자동차 노조가 철저한 약자로 보인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괴롭히는 것으로 여겨질 거다.
머릿속에 앞으로 일어날 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가을이 지나고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은 순간이다.
노조는 추운 곳에 앉아 오들오들 떨게 될 거다.
굶주리고 헐벗고…….
대선이 가까워지면 언론은 노조의 안타까움을 더 부각시킬 거다.
임신한 아내가 수염으로 가득한 남편을 보며 오열하는 모습, 부상당해 호송된 노조원이 다시 돌아가겠다며 울부짖는 모습 등등…….
사람의 심금을 울리면 박무혁 의원의 지지율은 폭락할게 분명하다.
그럼, 사람들은 말할 거다.
“대선 전부터 시끄러워. 그런데, 대통령이 되면 어떨 것 같아?”
“박무혁은 무조건 재벌 편이야. 우리 마음을 알 수가 없어.”
“박무혁은 아니지…….”
생각을 이어 가던 성윤은 고개를 저었다.
파업의 장기화만큼은 막아야 한다.
성윤이 의자에 걸어 둔 재킷을 손에 들었다.
“정우야, 가자.”
정우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 비가 내리면. -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