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냐 하면... - (2) >
실장이 말끝을 흐린다.
이제 타깃의 이름이 등장할 시간이다.
한정이의 눈빛에 긴장이 담겼다.
성윤도 마찬가지였다.
‘박무혁 의원을 미끼로 삼을 만큼의 거물……. 누가 있지?’
성윤의 머릿속에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나이가 지긋한 공대출 의원부터 서울 시장 정덕진까지…….
모두 거물, 하지만 누구도 박무혁 의원을 미끼로 삼을 만큼은 아니다.
‘그럼, 누구지?’
답 없는 생각이 복잡하게 이어졌다.
그때, 한정이의 눈동자가 스르륵 움직이더니 성윤에게서 멎는다.
그녀의 눈동자는 동그랗게 커진다.
그리고…….
“……이성윤 의원이요?”
성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누구? 나?’
잠시 후, 한정이는 통화가 종료된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의원님이라는데요?”
개똥 같은 소리다.
한정이와 통화한 실장이란 놈이 끝까지 수작을 부리는 것만 같다.
“나를 잡으려고 대선 주자를 미끼로 쓴다고요?”
한정이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도 실장의 말을 믿기 힘들었다.
“그러니까요……. 아무래도 아닌 것 같죠?”
“네.”
“사무실에 들어가면 본부장 노트북을 털어서라도 확인해 볼게요.”
“위험한 일은 하지 마세요.”
한정이가 픽 웃는다.
“위험요? 제 인생에서 진짜 위험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계속 베이한에 남아 있는 거예요.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면 위험이 아니라 기회죠. 그러니까 약속 꼭 지키세요.”
“…….”
“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본부장은 정시 출근, 정시 퇴근을 해요. 다른 직원들은 사무실에 거의 없고요.”
성윤이 고개를 저었다.
“일을 성공 못 해도 이직은 도와드리죠. 그러니까 위험하다 싶으면 그만두세요.”
“그럴게요. 하지만 공짜는 싫어하는 성격이라…….”
말을 마친 그녀는 작은 손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커피숍을 떠났다.
커피숍에는 성윤과 정우만 남았다.
정우가 입을 열었다.
“저는 가능하다고 보는데요.”
“뭘?”
“박무혁 의원님을 미끼로 의원님을 잡는 거요. 그런데 그 정도로 의원님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나름대로 무서운데요.”
“무서워?”
“본질을 보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거니까요.”
성윤은 고개를 저었다.
본질은 본다 해도 성윤과 박무혁 의원의 존재감은 다르다.
게다가 성윤을 찍어 눌러 봤자 얻을 것이 없다.
이런 번거로운 작업 과정이 낭비처럼 여겨질 정도다.
정우가 팔짱을 낀다.
“의원님이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거예요.”
성윤이 손을 저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정우는 성윤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됐어.”
성윤은 눈을 감았다.
어질러진 방처럼 생각이 복잡하다.
정리가 필요했다.
‘내가 타깃이라고?’
정말 성윤이 타깃일 수도 있다.
‘그럼, 이준대가 나를 알고 있다는 거야?’
이준대가 뉴스를 통해 성윤을 봤을 수는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성윤은 이준대와 직접적으로 부딪친 일이 없다.
감정적으로 좋고 나쁨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성윤은 얼굴을 쓸어 만졌다.
순간, 번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직접적인 접점은 없어도 간접적으로 얽힌 적은 몇 번 있었다.
AI 회사 리제에 대한 투자, 국회의원의 비리를 갖고 있던 정한보 변호사 등…….
성윤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 몇 번으로 나를 파악하고 신경까지 쓰는 거냐?’
소름이 쭉 솟아올랐다.
추측이 사실이라면, 꿈에서 봤던 것보다 더 무서운 놈일 거다.
***
그 시각…….
“박무혁 의원을 공격한다고 들었어요! 이게 뭡니까? 우리 대표를 병신으로 만들 생각이었습니까!”
김종혁 의원은 휴대폰을 귀에 대고 서무실을 서성이고 있었다.
얼굴엔 온갖 짜증이 가득하다.
“말해 보세요! 왜 입을 다물고 있습니까!”
수화기 너머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조금 당황스럽네요.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통화의 상대는 이준대였다.
태연한 목소리에 김종혁 의원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이준대 대표! 베이한에서 박무혁 의원을 타깃으로 잡았다고요!”
-주주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으니까요. 일단 알아보겠습니다.
“확실히 확인하세요! 바로잡아 주고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베이한은 은밀히 움직이는 언론사로 알고 있는데요. 들으신 말씀이 어디서 들어온 정보인지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난 이성윤이란 놈에게 들었어요. 이성윤은 어느 기자에게 들은 모양이고요.”
-이성윤이요?
같은 시각 뉴욕…….
이준대는 책상에 앉아 김종혁 의원과 통화하고 있었다.
한참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 가던 그가 말한다.
“처리해 두겠습니다. 의원님이 해결한 것으로 하면 되겠네요.”
그는 통화가 종료된 휴대폰을 책상 위로 가볍게 던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리자 통유리로 만들어진 창이 보였다.
그곳으로 저벅저벅 다가간다.
유리창에 그의 모습이 비친다.
깔끔한 외모, 희미한 미소는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 것만 같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차갑고 이성적으로 느껴진다.
그가 넥타이를 슥 풀며 입을 연다.
“이번에도 이성윤이라니…….”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내 앞을 가로막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아.”
마지막으로 단정된 머리를 마구 헝큰다.
조금은 차가워 보였던 얼굴이 수더분하게 좋은 인상으로 바뀌었다.
그가 몸을 튼다.
“어때?”
그의 앞에는 굵은 펌을 한 금발의 여성이 정장을 입고 서 있었다.
배우라고 해도 믿을 만큼 완벽한 외모와 몸매다.
그녀가 이준대를 살핀다.
“좋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네.”
이준대가 다시 몸을 돌렸다.
유리창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점검하며 말한다.
“레이첼, 이제 돈놀이는 그만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한국으로 가실 겁니까?”
“어, 같이 갈래?”
***
며칠 후, 박무혁 의원의 사무실.
소파에 앉은 박무혁 의원이 손에 쥔 서류를 부채 삼아 펄럭이며 고개를 틀었다.
맞은편에 성윤이 보인다.
“방금 그 자리에 김종혁 의원이 앉아 있었어. 마시다 만 커피는 김종혁 의원 것이고.”
테이블에는 식지 않은 커피가 놓여 있었다.
성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박무혁 의원이 말을 잇는다.
“해프닝이었대. 베이한에 엄포를 놨으니까 쓸데없는 소리는 없을 거래.”
“아, 네.”
성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하던 일이다.
며칠 전, 성윤은 김종혁 의원에게 베이한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불똥이 튈까 두려웠던 김종혁 의원은 이준대에게 전화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이준대는 밟힌 꼬리를 가만히 둘 사람이 아니다.
도마뱀처럼 끊어 버렸을 거다.
그건 그렇고…….
김종혁 의원이 말했었다.
-내가 정보만 얻고 자네 숟가락은 묻어 둘 사람으로 보여? 당원들을 모아 놓고 혼자서 사건을 해결했다고 자랑할 것 같아?
그래 놓고 혼자 해결한 것처럼 입을 나불거렸다.
참, 믿을 놈이 못 된다.
박무혁 의원이 부채처럼 흔들던 서류를 성윤의 앞에 툭 던졌다.
“읽어 봐.”
성윤이 구깃구깃한 종이를 펼쳤다.
베이한의 지분 구조다.
박무혁 의원이 입을 연다.
“김종혁 의원이 측근 한 사람을 천거한다고 했어. 우리 당이야 사람이 부족하니 인재가 있다면 언제나 환영이지만…….”
박무혁 의원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성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천거한다는 사람이 이준대?’
조만간 마주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시기가…….
‘설마, 설마, 설마!’
박무혁 의원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인다.
“이준대라는 사람인데 미국에서 투자 회사를 운영하고 있대.”
성윤은 온몸에 핏기가 거꾸로 도는 것 같은 짜릿함이 느꼈다.
이준대는 꿈을 꾸기 시작할 무렵부터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이다.
꿈에서는 악귀 같았는데 현실에서는 어떻게 행동할지, 지금은 어떻게 생겼을지, 늙은 주름이 없는 그의 얼굴은 생각만 해도 설렜다.
그리고 찢어 죽이고 싶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베이한의 주주야. 김종혁 의원 말로는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하는데, 어쩐지 찜찜해. 그래서, 부탁할 게 있어. 이준대가 오면 이성윤 의원이 신경 써서 관찰해 봐. 사람은 이 의원이 잘 보잖아?”
기다렸던 거다.
성윤은 바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꽃다발을 들고 인사해야겠다.
한편, 정우는 커피숍에 있었다.
앞에는 베이한의 여기자 한정이가 보인다.
박무혁 의원의 사생아 헤프닝은 일단락 됐다.
하지만 아직 남은 일이 있다.
베이한에서 성윤의 어떤 점을 트집 잡으려 했는지 알아했다.
그래야 비슷한 일이 터졌을 때 막을 수 있으니까.
“여기요.”
그녀가 테이블 위에 USB를 내려 뒀다.
정우가 USB를 손에 들자 그녀가 말을 잇는다.
“남아 있는 자료는 이게 전부예요. 나머지는 모두 폐기됐거든요.”
“폐기요?”
한정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대표가 호들갑을 떨더라고요. 정부가 우리를 압박하기 시작했다고, 그래서 이 사건을 계속 끌고 가면 우리가 큰일 난다고. 그러면서 자기들 노트북에서 이번 사건의 자료를 모두 삭제하던데요?”
한정이는 자신이 말하고도 어이가 없었나 보다.
한심한 표정으로 웃고 있다.
“정부가 이름도 없는 지라시 업체를 왜 압박할까요? 제대로 시작한 것도 없는데.”
정우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바지 사장의 한계죠. 대주주가 폐기하라고 말하면 쪽팔리니까 정부 핑계를 댔나 보네요.”
정우가 노트북을 펼친 후 USB를 꽂았다.
“그런데, 우리 의원님은 무슨 내용이죠?”
“믿거나 말거나죠. 일단 추진 중이었던 시나리오는 두 개. 하나는 성종 그룹과의 커넥션이에요. 얼마 전 성종 윤 회장님을 만났다면서요?”
정우의 머릿속이 확 차가워졌다.
성종그룹 윤 회장과의 만남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 정도로 비밀스럽게 움직였다.
하지만 낮에는 새, 밤에는 쥐가 돌아다니는 법이다.
하지만…….
“아뇨. 소설이에요.”
기자에게 굳이 떠벌릴 필요는 없다.
정우의 단호한 목소리에 한정이는 방긋 웃는다.
직업병 때문인지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빛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그럼, 박대철 의원을 친 것은요?”
“네?”
“박대철 의원이 애들 보육비를 슈킹해서 룸살롱에 다닌 사건, 그거 이성윤 의원님이 터트린 거라면서요?”
“그게 무슨……?”
“그런 걸 터뜨릴 수 있는 사람은 수행 비서밖에 없고 당시 이성윤 의원님이 박대철 의원의 수행 비서였으니까…….”
정우가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사람들이 그러던데요? 이성윤 의원님이 박대철을 잡아먹고 지역구를 가졌다고…….”
당시 성윤은 내부 고발자였다.
그리고 내부 고발자는 양면의 이미지를 가진다.
정의를 위해 발 벗고 나선 용기 있는 사람 그리고 배신자…….
정우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거…….’
많은 내용과 사진이 담겨 있다.
상당히 오랜 시간 성윤의 뒤를 밟아 온 것 같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거다.
성종그룹 윤 회장을 만났다는 것도 누군가의 증언.
박대철을 잡아먹었다는 것 역시 상황의 짜깁기.
‘그래도 조심해야겠어.’
언론이라는 게 그렇다.
기사 내용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기자들이 이 악물고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사람 하나 병신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다.
정우가 다시 그녀를 향했다.
“그런 것 없습니다. 이건 모두 소설,”
정우는 이번에도 단호히 말했다.
그리고 ‘탁’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노트북을 덮었다.
한정이가 눈웃음을 흘린다.
“아니면 말고요. 어차피 자료는 폐기됐고 저는 이성윤 의원님의 손을 잡았잖아요.”
“그거 참 다행이네요. 어쨌든, 한동일보에서 곧 연락이 갈 겁니다. 낙하산이란 이야기는 없을 거고 경력직으로 면접 볼 테니까 준비 잘하셨으면 합니다.”
이제 할 말은 끝났다.
정우는 노트북을 가방에 넣는 등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커피의 스트로를 만지작거리던 한정이가 조심스레 묻는다.
“가끔 뵐 수 있을까요?”
“글쎄요. 기자님의 보직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정치에 계시다면 가끔 뵙겠죠?”
“……제가 기획 기사를 잘 써요.”
“네?”
짐을 챙기던 정우가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가 멋쩍은 듯 눈을 깜빡이며 말한다.
“기획 기사 잘 쓴다고요. 그리고 베이한에 있었기 때문에 작은 언론사를 많이 알아요. 분명 필요할 거예요. 연락 주세요.”
정우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우를 향해 허리를 굽힌다.
“감사합니다. 의원님께도 전해 주세요. 정말로 베이한에 있고 싶지 않았거든요.”
잠시 후, 정우는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건 후 휴대폰을 귀에 댄다.
상대는 물론 성윤이다.
“지금 한정이 씨와 미팅 끝났어요. 자료 받았는데, 그럴듯한 소설을 준비하고 있었네요.”
-소설?
정우는 박대철부터 성종 그룹 윤 회장까지 노트북에 있던 자료를 이야기했다.
-꽤 오래전부터 준비했던 것 같네?
“네.”
-꽤 오래전……. 언제부터 나를 신경 쓰고 있었을까?
“글쎄요.”
***
인천공항.
오후 4시가 조금 지났다.
게이트가 스르륵 열린다.
그리고 이준대가 큰 캐리어를 끌고 나타났다.
< 누구냐 하면... -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