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사구팽. - (2) >
***
“증상이 없기 때문에 발견이 쉽지 않은 것이지, 초기에 발견하면…… 완치율이 95%예요.”
며칠 후, 새벽 2시.
성윤은 성종 그룹 정기화 비서실장의 도움을 받아 성종 병원에 와 있었다.
앞에 앉은 남자, 이 분야만큼은 대한민국 최고라 꼽히는 의사다.
쉬지 않고 수술 일정이 잡혀 있던 사람이라 이 시간이 되어서야 잠깐 짬을 낼 수 있었다.
성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쁘신 시간에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안심이 되네요.”
“뭘요. 유명하신 분과 이렇게 차도 한잔 마시고 좋습니다.”
의사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빙긋이 웃었다.
“그럼, 이민 일어나겠습니다. 나중에 뵙죠.”
의사는 바쁘다.
시간만 있으면 머리를 대고 잠을 자야 한다.
계속 바쁜 시간을 뺏을 수는 없었다.
성윤이 떠나려 하자 의사가 묻는다.
“그런데, 암에 걸린 분이 누굽니까? 결혼은 안 하셨다고 들었는데, 혹시 부모님?”
성윤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요. 어떤 관계인지는 저도 확실하지 않아서요.”
의사는 더 묻지 않는다.
정계, 재계에 속한 인물들은 비밀이 많은 법이니까.
“의심이 간다면 하루빨리 모시고 오세요.”
“감사합니다.”
성윤은 병원을 나섰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꿈속의 미래, 정혜성은 위암이었다.
젊은 나이에 덜컥 듣게 된 위암 말기.
운 좋게 치료에 성공했지만 이후 정치 공격이라는 지옥 같은 스트레스 속에서 재발했다.
그리고 사망했다.
그 이후, 성윤은 괴물이 되었다.
복수심에 가득 차서 앞뒤 보지 않고 적의 목을 베는 데 열중했다.
정치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오로지 복수, 복수, 복수…….
‘안 돼.’
현실은 꿈과 다르다.
정혜성은 건강한 미래를 선물받을 것이고 성윤은 추악한 괴물이 되지 않을 테니까.
미래는 스스로 만드는 거다.
‘어떻게 설득할지, 그게 문제네.’
정혜성이 위암 말기로 고통 받는 것은 2~3년 후.
의학적 지식이 없는 성윤은 지금 그녀의 몸 속에 암세포가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만약 지금 설득해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없다고 하면…….
‘다음에 또 받아야 하는데…….’
차에 올라탄 후 시동을 걸 때까지도 성윤의 머릿속은 계속해서 복잡했다.
***
이른 아침.
성윤은 정덕진 서울 시장과 만나고 있었다.
아직 취임 전이다.
그래서 그는 아직 선거 캠프를 사무실로 이용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죄송합니다.”
정덕진 시장은 성윤을 앞에 두고 숙취 음료를 입에 털어 넣었다.
“매일 술이에요. 법복을 입고 기록물을 읽을 때보다 더 피곤한 것 같아요.”
정치라는 게 그렇다.
사람을 만나고 또 만나야 하는 게 일이니까.
정덕진 시장이 얼굴을 쓸어 만지며 묻는다.
“식사 안 하셨죠? 두 개 시켰으니까 함께 들어요.”
사무실의 문이 열리며 정덕진 시장의 보좌관이 황태 해장국을 들고 왔다.
아침 식사가 되는 식당에서 배달시킨 거다.
아직 보글보글 끓고 있는 황태 해장국이 테이블에 놓인다.
“이 집 맛이 꽤 괜찮더라고요. 하하하.”
그가 성윤의 앞으로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았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두 사람은 식사를 시작했다.
정덕진 시장은 시원한 국물을 마시며 기분 좋게 웃는다.
전날의 과음으로 뒤집어진 속이 좀 풀렸나 보다.
“그런데, 아침부터 어쩐 일로……?”
“부탁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부탁요?”
정덕진 시장의 앞에 A4 용지를 내려 뒀다.
그는 물끄러미 용지에 적힌 글자를 바라본다.
“장소, 성종 병원. 날짜는 주말…… 시간은 오후 1시. 이게 뭐죠?”
“건강검진 예약해 뒀습니다. VIP로 예약했으니까 병원에 갔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가족분들 전부 받을 수 있게 준비했으니까 이참에 검사 한번 받아 보세요.”
뜬금없는 말이다.
정덕진 시장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건강검진이라면 정기적으로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박무혁 의원님의 지시입니다. 의원님은 당선자들의 가족이 건강하기를 바라시거든요. 공무를 수행하시다가 갑자기 건강상에 이상이 생기면 당은 물론 국가적으로도 큰일이니까요.”
정덕진 시장이 종이를 들고 가볍게 흔든다.
“박무혁 의원님의 지시입니까?”
“네.”
박무혁 의원의 이름은 여러모로 편하게 쓰인다.
보통의 사람과 생각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팔면 대부분 그러려니 한다.
정덕진 시장도 마찬가지다.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마침 주말 스케줄이 비어 있으니까 병원에 들러 보죠.”
“시장님만이 아니라 가족분들 전부 가야 합니다.”
성윤은 힘주어 말했다.
정덕진 시장을 위한 검진이 아니다.
이건 정혜성을 위한 거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그리고 하나 더.”
“말씀하세요.”
“제가 이걸 드렸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까요.”
정덕진 시장은 조용히 성윤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잠시 후, 성윤이 떠났다.
정덕진 시장은 테이블에 놓인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한평생 법정에서 기록물만 파고 살았던 사람이다.
말 속에 진실과 거짓은 판단할 수 있다.
‘무슨 생각일까?’
장소가 성종 병원이다.
‘박무혁 의원이 움직였다면 대정 병원을 지정했을 텐데.’
대정 병원이 의료 사고를 숨기고 있다는 소식이 간간이 들려오기는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대정 병원은 대한민국 최고의 병원 중 하나다.
게다가 박무혁 의원의 입김이 들어갈 수 있으니 완벽한 보안을 책임질 거다.
‘박무혁 의원이 준 것은 아니고 이성윤 의원이 직접 가져온 것인데…….’
정덕진 시장은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일단 성윤의 말에 속아 주기로 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나쁜 뜻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지만 성윤을 보고 있으면 마냥 예쁘기만 하다.
‘요즘 술도 많이 마셨는데, 확인 한번 하지, 뭐.’
정덕진 시장이 쭉 기지개를 켰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활짝 열렸다.
“아빠.”
정혜성이 들어왔다.
“학교는?”
“가는 길이에요. 오늘은 오후에 수업이 밀려 있어서요.”
정덕진 시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학비는 잔뜩 받아 놓고 왜 그렇게 수업이 없어?”
“그러니까요.”
정혜성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정덕진 시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쑥 작은 상자를 내민다.
“이거.”
“뭐야?”
“넥타이 샀어요. 맨날 우중충한 색깔만 하고 다니셔서, 이젠 좀 상큼하시라고요. 이젠 위엄 있는 법원장이 아니라 친근한 시장이 되어야 하잖아요.”
정덕진 시장이 슬쩍 웃으며 포장지를 풀었다.
파란색 넥타이가 보인다.
바로 하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 낸 후 정혜성이 가져온 넥타이를 맨다.
“어때?”
“잘 어울려요.”
정덕진 시장은 다시 한번 기분 좋게 웃었다.
“주말에 시간 어때?”
“주말이요? 특별한 약속은 없는데……. 왜요?”
“병원 좀 가자.”
정혜성의 얼굴빛이 흐려졌다.
“……어디 편찮으세요?”
“아니, 당에서 우리 가족 전부 건강검진을 받으라고 해서.”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건강검진?’
지난번, 성윤이 말했던 것과 겹치는 것 같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방긋 웃는다.
“저도 받아야 해요? 특별히 아픈 곳도 없고 아직 어린데요?”
정덕진 시장은 정혜성을 가만히 바라봤다.
어렵게 얻은 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
‘이성윤이 가족 전부의 건강검진을 예약한 이유…….’
성윤은 “가족분들 전부 가야 합니다.”라는 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어쩐지 그 말이, 논리로 표현할 수 없지만 어쩐지 정혜성을 위한 것 같다.
“우리 집에서 감기에 제일 잘 걸리는 사람이 누구지?”
“감기랑은 다르죠.”
“꼭 받으래. 그러니까 시간 빼. 아니면 시장 당선 무효시킨대.”
***
“정덕진 시장님 비서실에서 전화 왔어요. 가족 전부 건강검진 받을 거래요.”
서안시, 사무실.
정우의 말에 성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런데, 갑자기 건강검진은 뭐예요? 그런 거 있으면 저부터 시켜 줘야 하는 거 아녜요?”
“넌 건강하게 살다가 깡패들한테 맞아 죽은 후 시화호에 던져질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한 달 후에 발견될 거야.”
“……의원님? 지금 그 말 묘하게 진짜처럼 들리는 거 알아요? 시화호라니! 장소가 왜 그렇게 정확해요! 내 꿈이 자다가 죽는 건데, 맞아 죽는다니요!”
성윤이 픽 웃었다.
“그렇게 안 죽게 하고 있으니까 그것도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정우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후 중얼 거린다.
“깡패에게 맞아 죽는다니, 시화호라니……. 박무혁 의원님이 대통령이 되면 ‘범죄와의 전쟁’ 시즌 2 찍자고 말씀드려야 하나…….”
“정우야, 건강히 자다가 죽게 만들어 줄 테니까 다른 생각 말고 민국당 근황 좀 알아봐.”
이번 지방선거의 승자는 누가 뭐라고 해도 민국당이다.
하지만 마냥 웃지는 못한다.
광역 단체에서 여덟 곳을 먹었지만 서울과 경기는 신당이 쥐었고 인천은 대한당이 차지했다.
수도권 광역 단체장에서 민국당의 깃발은 없다.
지방선거의 승리로 대선까지 차지하려던 계획이 삐걱거리는 중이다.
게다가 오항로의 대정 건설 커넥션.
검찰이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다며 칼을 뽑고 나섰다.
정치적 공세라고 지랄해 봤지만 현 정권은 대한당 한상국 대통령이다.
민국당의 난리법석에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어쨌든, 대정 건설 커넥셕의 여파가 서울 시장까지 낙선하게 만들었으니 그 충격은 숨도 쉬지 못할 정도다.
더 큰 문제는 오항로가 대선 주자인 도제성 의원의 오른팔이라는 거다.
그 시각, 도제성 의원의 사무실.
도제성 의원의 계파 주요 인물들이 자리했다.
모두 사나운 눈으로 한곳을 바라본다.
그곳엔 오항로가 쭈뼛쭈뼛 고개를 숙이고 있다.
오항로는 며칠 전만 해도 도제성 의원의 오른팔이라며 기세등등하게 눈을 부라리고 다녔다.
하지만 지금은 언제 씹혀 먹힐지 모를 초식동물이다.
한 의원이 입을 열었다.
“지방선거의 열기가 꺼지면 오항로 의원을 미끼로 공격을 시작할 겁니다. 대정의 커넥션이 도제성 의원님까지 닿아 있을 것이라며 국감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의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 대선 지지율을 보면 우리가 큰 폭으로 앞서고 있습니다. 이 지지율을 끌어내리기 위해 대정과 신당이 손잡을 것입니다.”
“의원님, 오항로 의원을 제명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도제성 의원이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자 의원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의원님께서 오항로 의원을 아낀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권 교체라는 큰 목표를 갖고 있어요! 어렵지만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제명해야 합니다!”
모두 이번 기회에 도제성 의원의 오른팔이 되고 싶어 한다.
그 목적이 빤히 보였지만 오항로는 어떤 말도 못 하고 고개만 숙였다.
단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인간은 입이 10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조용히 의원들의 말을 듣던 도제성 의원의 시선이 오항로에게 향했다.
“일단 말은 들어 봐야지. 오항로 의원, 대정과의 커넥션이 진실인가?”
오항로의 눈이 반짝였다.
“아뇨! 절대 아닙니다!”
지푸라기를 쥐고 있어야 한다.
검찰의 수사가 끝나고 재판이 시작되려면 빨라도 내년.
내년에 도제성 의원이 청와대에 있다면…… 지푸라기는 동아줄이 되어 자신의 목숨을 살려 줄 거다.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의 영향력이란 상상할 수 없으니까.
그가 피를 토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서울의 개발 문제로 전문가와 상의하던 중에 건설사를 몇 번 만난 적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돈을 주고받는 자리가 아니라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의견을 듣기 위해?”
“네! 맞습니다! 맞아요!”
다른 의원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 새끼는 입만 살았어.’
‘도제성 의원의 부드러운 성격을 보면 또 봐주겠지?’
‘안 돼, 저놈이 살아나면 오른팔이 될 수 없어!’
한 의원이 눈을 번뜩이며 외쳤다.
“도제성 의원님! 안 됩니다!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 우리는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깨끗한 정부! 흠집 없는 정부! 빚 없는 정부를 꿈꾸시지 않습니까!”
“제명해야 합니다!”
“제명하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시끄러운 목소리고 회의실을 울렸다.
하지만 지푸라기를 잡은 오항로도 쉽게 손을 놓지 않는다.
“정치적 공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겁니다! 그때마다 의혹만으로 제명하면 남아 있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대한당 놈들을 보세요! 저기는 어지간한 더러운 것은 눈감아 줍니다. 우리고 그런 뻔뻔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도제성 의원의 눈빛이 차가워진다.
“뻔뻔?”
“……!”
오항로는 자신이 잘못 말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 도제성 의원의 입에서 시린 목소리가 흘렀다.
“내 옆에 뻔뻔한 사람은 필요 없어.”
“의, 의원님?”
“내가 대통령이 되면 더한 권력을 갖게 될 거야. 그런데 국민을 위해 사용해야 할 권력을 앞에 두고 뻔뻔? 그런 뻔뻔스러움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거야!”
오항로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
뉴스가 시끄러워진다.
-민국당 중앙당 윤리심판원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당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오항로 전 국회의원을 제명했습니다. 검찰의 수사가 본격화되기도 전에 제명한 것을 두고 성급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발 빠른 행동력을 칭찬하는 지지자가 다수였습니다.
소식은 성윤의 귀에도 들어갔다.
텔레비전 전원 버튼을 누르며 성윤이 조용히 웃는다.
“괜찮네.”
< 토사구팽. -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