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인과의 만남. - (3) >
뒷말을 하다가 걸리면 참 난처하다.
그런데, 그 상대가 국회의원이라면…….
등산객들의 표정은 당황으로 물들었다.
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갔다.
“기부나 해외투자, 언플이 아니라 발로 뛰고 얻어 낸 성과입니다. 어르신들의 말씀처럼 우리 의원님이 어린 나이에 국회의원이 되어 경험은 부족합니다. 하지만 열정으로 부족한 것을 채우는 중이니까 계속 지켜봐 주십시오.”
정중한 목소리.
등산객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 네.”
“그리고 등산하시는데 당이 부족하면 큰일이니까 케이크 하나 사겠습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등산객들이 손을 저었지만 정우는 이미 케이크를 주문해 버렸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테이블 위에 케이크가 놓인다.
뒤늦은 사과를 하던 등산객 한 명이 용기를 내어 입을 연다.
“그런데, 이성윤 의원님.”
“네?”
“죄송하지만 사진 한 장 찍을 수 없을까요?”
“당연히 찍을 수 있죠.”
성윤은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등산객들에게 다가갔다.
정우가 휴대폰을 쥐고 단체 사진을 찍는다.
“한 장 더 찍겠습니다. 치즈 말고 김치.”
정우는 이 상황에서도 이상한 개그를 노리고 있다.
그렇게 잠깐의 촌극이 끝났다.
성윤이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 김태남이 붉은 캡을 벗고 인사한다.
“김태남이라고 합니다.”
“이성윤입니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눴다.
김태남은 40대 후반, 고된 일을 해서 그런지 손이 거칠하다.
커피숍의 문이 딸랑, 다시 열렸다.
사십대 후반의 여성이 쇼핑백을 들고 다급히 들어온다.
그러다가 성윤과 김태남을 보고 멈칫거린다.
“아…… 벌써 만나셨네요.”
난처한 표정의 그녀를 보며 김태남이 입을 연다.
“제 집사람입니다.”
성윤이 일어나 그녀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이성윤입니다.”
김태남의 소개에 여성이 주춤주춤 다가왔다.
손에 든 쇼핑백에는 김태남의 옷이 들어 있다.
그녀가 김태남에게 속삭인다.
“깨끗한 옷 입으라니까요. 왜 일하다가 와서……. 난 의원님이 벌써 와 계신 줄 모르고…….”
아내의 말에 김태남은 고개를 저었다.
“의원님은 내 옷을 보러 온 게 아니야.”
단호한 목소리다.
성윤이 옷으로 사람을 판별한다면 자신도 이 자리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들린다.
하지만 아내는 다르다.
한국 대학교를 중퇴하고 산속에 파묻혀 사는 남편이 안타깝다.
성윤에게 어떻게든 잘 보여서 기회를 살렸으면 하고 있었다.
그녀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성윤을 향했다.
“옷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돼지는 명품을 걸쳐도 돼지니까요. 하지만 사람이 명품이면 청바지를 입어도 멋진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태남 사장님을 뵈니까 기다린 세월만큼 세상을 들어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태남이 물끄러미 성윤을 본다.
분명 성윤의 나이는 어리지만 작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크다.
거칠 것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처음 본 자신에게 어떤 확신을 하는 것 같다.
남자는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친다고 했다.
그래서 성윤이 고맙기만 하다.
“하나만 여쭤보겠습니다.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전 제멋대로입니다.”
“감당은 김태남 사장님이 하셔야죠. 후보에 등록하시면 온갖 네거티브에 시달리실 텐데요.”
조용히 성윤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김태남의 아내가 긴장된 한숨을 내뱉었다.
어쩐지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아서다.
다시 자리에 앉은 김태남이 패딩의 안주머니에서 구깃구깃한 A4 용지를 꺼내 테이블에 올린다.
“제가 경기 도지사가 된다면 하고 싶은 일입니다.”
몇 문장 되지 않았지만 환경적인 문제부터 교통, 건설 등 많은 일이 총망라되어 있다.
오랜 시간 준비한 게 분명하다.
성윤이 A4 용지를 건네며 입을 열었다.
“미세 먼지……. 경기 도지사가 중국과 싸우겠다고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까요. 아무도 하지 않으니까 저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권력자들, 그들이 처음 정치를 시작할 때 하는 생각이 있다.
‘저 새끼도 하는데 내가 못 하려고? 나 정도면 국회의원 자격이 충분하잖아?’
그들은 자신의 이념이나 신념을 믿지 않는다.
오로지 스펙을 믿으며 ‘나도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공천을 받을 수 있는 당에 들어가 갑질이나 하는 거다.
하지만 김태남은 다르다.
‘아무도 하지 않으니까…… 나라도 나선다.’
그가 정치에 입문하려는 이유는 유명해지고 싶어서가 아니다.
권력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 마음은 진실이었고 성윤의 마음에 들었다.
“하나만 여쭤보겠습니다. 당선이 되면 성종 건설을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김태남은 성종 건설에 대항하다가 감옥에까지 다녀온 사람이다.
감정이 좋을 리 없다.
하지만 끌끌끌 웃는다.
“복수에 사로잡힌 사람이 정치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종 건설은 우리나라 최고의 건설 회사입니다. 비리를 걷어 내면 계속해서 일자리를 늘리고 외화벌이에 힘쓸 수 있는 기업이죠. 단지 개인적인 복수심 때문에 시비를 걸지는 않을 겁니다.”
“앞으로 큰 싸움이 벌어지겠네요.”
김태남이 당선되면 대한민국에 큰 바람이 불어올 것만 같다.
잠시 후, 김태남과 아내는 공장으로 향했다.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은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작은 용접 공장 사장에서 신당의 경기 도지사 후보가 될 수 있다니…….
인생은 한 치 앞을 모른다더니 그 말이 딱 맞는 것만 같았다.
김태남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여보.”
“말해요.”
“지금까지 고생했지?”
아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 역시 김태남과 결혼하며 모진 인생을 살아왔다.
피아노를 전공했던 그녀인데 남편을 감옥에 보냈고 산속에 들어와 공장 일을 해야 했다.
공장 사장이라지만 성종과 싸웠던 이력이 있어 큰 일감이 들어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끼니 걱정까지 했을 정도다.
“고생은요.”
하지만 이제 고생의 끝이 보이는 것만 같다.
경기 도지사는 서울 시장 다음이라고 불린다.
권력자이며 단번에 대선 주자로 올라설 수 있다.
당선만 된다면 앞으로 장밋빛 인생이 그려질 거다.
그런데…….
“앞으로는 더 힘들어질 거야.”
“네?”
“행동은 물론이고 입조심해.”
“……!”
“우리가 잘못되면 우리만 힘들어지는 게 아니야. 나를 추천한 공대출 의원님이나 이성윤 의원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거야. 인간이 그러면 안 되지. 그러니까 졸부 노릇 할 생각하지 말고 지금처럼 살아. 아끼고 아껴. 항상 고개 숙이고.”
권력자의 몰락 중 하나는 가정이다.
아내, 자식, 형제, 친척…….
김태남은 아내부터 단속을 시작했다.
***
“대한민국에 이런 곳이 있었습니까?”
서울 시장 후보 오항로 의원이 대정 호텔 VVIP 룸에 들어섰다.
앉기도 거북스러울 정도로 고급스러운 소파에 박영훈 부회장이 보인다.
“앉으세요. 한잔 괜찮으십니까?”
박영훈 부회장이 와인을 손에 쥐었다.
오항로 의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 일정은 여기가 끝입니다. 박영훈 부회장님과 한잔하는 것도 괜찮겠죠. 하하하하!”
오항로 의원이 호탕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술과 함께 이런저런 신변잡기 대화가 오간다.
그리고 적당히 얼굴이 붉어졌을 때, 박영훈 부회장이 본론을 꺼냈다.
“서울 시장에 도전하신다고요?”
“그렇게 됐습니다.”
“오항로 의원께서는 신당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항로 의원은 박영훈 부회장의 눈치를 살폈다.
신당의 주인은 박무혁 의원이다.
그리고 박무혁 의원은 박영훈 부회장의 동생…….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풍문으로 들어 알고 있지만 형제는 형제다.
좋지 않은 말을 내뱉기는 어려웠다.
그 마음을 박영훈 부회장이 알았다.
편하게 멍석을 깔아 준다.
“신당에 대해서는 재계에서도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아요.”
“그렇겠지요. 아무래도 박무혁 의원이 만만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이번에 도려냈으면 합니다.”
과감한 표현에 당황한 것은 오항로 의원이다.
그가 눈을 껌뻑이며 박영훈 부회장을 본다.
“도려내다니요?”
“난 지금 솔직하게 말하고 있어요. 무혁이가 내 동생이기는 하지만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면 큰 걱정거리예요. 재벌가에서 자란 놈이 재계를 적으로 삼고 있어요. 재계가 무엇입니까? 비록 나쁜 짓은 했지만 이 나라가 이만큼 잘 먹고 잘 살게 만든 것도 우리입니다. 공로와 과실을 따져 봐도 공이 더 커요!”
박영훈 부회장의 서늘한 눈빛에 넓은 VVIP실이 얼어붙고 있었다.
오항로 의원은 마른침을 삼킨다.
‘재벌이란 것들은…….’
창업주는 가난함을 안다.
하지만 후대는 가난을 모른다.
왕자로 자라 왔고 언제나 지시하고 사람을 부리기만 했다.
특히 박영훈 부회장이 그렇다.
그래서 밀고 당길 줄을 모른다.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 하는 성격이다.
그것도 빙빙 돌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쏘아붙이면서…….
박영훈 부회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시 말씀드리죠. 도려냈으면 합니다. 신당이 지방선거에서 참패를 당했으면 좋겠습니다.”
“제, 제가 어떻게……?”
“돈을 드리죠.”
오항로 의원의 턱에 힘이 콱 들어갔다.
면전에서 뇌물을 말하다니, 이것은 분명 자신을 우습게 보는 거다.
서울 시장이 되면 충분히 기업을 괴롭힐 수 있다.
서류 몇 장에 도장만 찍지 않아도 대정의 임직원들이 서울 시청을 쉬지 않고 들락날락해야 할 거다.
그게 진정한 ‘갑’이다.
오항로 의원은 불쾌한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박영훈 부회장님!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불쾌했다면 죄송합니다. 국가를 위한 일입니다.”
“전 그런 사람 아닙니다. 앞으로 그런 말 꺼내지 마세요.”
“250억 지원하겠습니다. 출처는 걱정하지 마세요. 냄새 안 나게 잘 씻어서 배달해 드릴 테니까요.”
오항로 의원의 입이 꽉 다물렸다.
자신도 모르게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러간다.
선거비용으로 쓸 수 있는 자금의 한계는 정해져 있다.
한계가 정해지지 않으면 말 그대로 쩐의 전쟁.
돈 많은 놈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서울 시장의 선거비용은 약 34억.
이 돈만으로 봉사자에게 월급을 주고 포스터를 만들어야 한다.
초과하는 경우 당선이 무효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법으로 정해져 있다.
하지만 눈 가리고 아웅이다.
법망을 피해 현금 박치기로 쓰는 돈이 몇 배는 된다.
낙선한 후보가 선거 후 보조금을 지급받았으면서도 뒤로 더 많은 돈을 썼기에 빚더미에 앉는 경우는 흔히 볼 수 있다.
박영훈 부회장이 다리를 꼬아 앉았다.
“박무혁의 신당이 서울 시장과 경기 도지사에 집중할 거란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걸 막아 주셨으면 합니다. 250억이면 서울과 경기도는 충분히 커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그게…….”
“국가를 위한 일입니다. 박무혁은 암 덩어리예요.”
250억이면 서울시 바닥을 전단지로 뒤덮을 수 있다.
등록하지 않은 봉사자를 고용해 선동도 가능하다.
방송국에 돈을 찔러주고 가장 핫한 시간에 자신의 이름을 돌릴 수도 있다.
“지금 의원님의 지지율이 42%죠? 100%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신당을 아무것도 아닌 동네 군소 정당으로 만들어 주세요.”
박영훈 부회장이 잔을 들며 말을 잇는다.
“제 말투가 직선적이라 돈 이야기를 먼저 꺼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건 시작입니다.”
“시작요?”
“저는 오항로 의원님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원하신다면 다음 대선에서 청와대로 향하는 길, 발에 걸릴 돌덩어리는 제가 다 치우고 싶습니다. 바닥을 뒤집고 아스팔트를 깔아 드리죠. 의원님은 주변 경치나 즐기며 청와대로 향하면 됩니다.”
박영훈 부회장은 부드럽게 미소를 그렸다.
“돈과 권력은 언제나 함께하는 겁니다.”
오항로 의원은 마른침을 삼킨다.
도제성 의원에게 걸리면 뺨을 맞을 일이다.
하지만…….
‘대통령을 노리려면 스폰이 필요해.’
언제까지 도제성 의원의 아래에 있을 수는 없다.
역대 대통령의 미래를 생각하면 5년 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아래에 있다가 함께 레임덕에 휩쓸려 병신 취급을 받으면 대통령이라는 꿈은 멀어질 수도 있으니까.
‘양다리를 걸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250억을 받으면 노후를 위해 뒷주머니를 채울 수도 있고.
오항로 의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전 대정이 잘되어야 우리나라 경제가 살아난다고 봅니다. 적극적으로 돕고 싶습니다.”
“이거 말이 통하는데요? 하하하하.”
두 사람의 잔이 부딪혔다.
***
-지방선거 후보등록을 마치면서 광역단체장 등 출마 후보들의 본격적인 행보가 시작됐습니다. 서울 시장에 도전하는 오항로 후보는 처음으로 맞는 주말에 각종 행사장을 돌며 지지세를 결집시키기 위해 몰두했습니다.
텔레비전을 보던 성윤이 정우에게 말했다.
“250억 받았대.”
“네? 250억요?”
“재벌이 돈이 많긴 많은가 봐.”
“꿍쳐 둔 돈이겠죠?”
“그렇겠지.”
화면에는 오항로 의원이 참 가증스러운 미소로 핫도그를 먹고 있다.
“꺼. 밥맛 떨어진다.”
“옙.”
정우가 텔레비전을 종료했다.
성윤이 몸을 일으킨다.
“우리도 슬슬 가 볼까?”
지방선거라는 이름의 전쟁의 시작이다.
< 거인과의 만남. -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