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인과의 만남. - (1) >
할 말은 모두 끝났다.
계속 앉아 있을 필요는 없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다.
성윤이 가방을 손에 쥐며 입을 열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런데, 박근서 부장이 다급히 입을 연다.
“잠, 잠시만요. 부회장님께서 이성윤 의원님을 한번 뵙고 싶어 하십니다.”
“저를요?”
“네.”
성윤은 물끄러미 박근서 부장을 바라봤다.
한정식집에 들어오면서부터 박근서 부장의 속마음을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나를 보고 싶어 한다고?’
그가 말한 부회장은 성종 그룹 윤범성 부회장이다.
그런데, 그가 성윤을 보고 싶다는 등의 말은 박근서 부장이 제멋대로 내뱉은 말…….
‘왜 이런 거짓말을 하는 거지?’
속마음을 듣는 능력의 단점이다.
상대가 작정하고 다른 생각을 하면 알아내기가 힘들다.
성윤은 조심스레 박근서 부장의 표정을 살폈다.
상당히 초조한 얼굴로 성윤의 눈치를 보고 있다.
하지만 악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일단 속아 줘?’
윤범성 부회장, 뭐가 됐든 한 번쯤 만나야 할 사람이다.
이번 기회로 만나게 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성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시간 잡아서 알려 주세요.”
박근서 부장의 표정이 확 밝아진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성윤은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방을 벗어나 주차장으로 나왔다.
저녁이 되어 어두컴컴하다.
차 앞에 기다리고 있던 장한수 실장이 허리를 굽힌다.
“식사는 하셨어요?”
성윤의 질문에 장한수 실장은 곁눈질로 길 건너를 가리켰다.
“저쪽 식당에서 가볍게 해결했습니다.”
김밥 가게가 보인다.
뭘 먹었는지 묻지 않아도 알겠다.
김밥 한 줄 먹고 기다렸을 거다.
성윤이 언제 나올지 모르니까…….
경호원이자 수행 비서인 그들에게 개인 스케줄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시간을 의원에게 맞추며 대부분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쉽지 않은 일, 성윤도 수행 비서를 해 봤기에 그 고생을 잘 알고 있다.
“퇴근하시라니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장한수 실장의 건조한 목소리를 들으며 성윤은 한숨을 내뱉었다.
함께한 시간이 꽤 되었지만 그의 행동과 말투에는 거리가 느껴졌다.
속마음을 들어 보면 장한수 실장이 성윤을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친해지는 것이 느린 성격일 뿐이다.
이럴 땐 먼저 다가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실장님, 사무실 앞에서 맥주 한잔할까요? 치킨이 맛있는 집 있거든요.”
“치킨요?”
“박정우 보좌관도 아직 사무실에 있을 테니까, 불러서 같이 마시죠.”
성윤은 그의 대답을 듣지 않고 차량의 문을 열어 버렸다.
같이 맥주 한잔 마시자는 것은 부탁이 아니라 지시다.
계속 불편하게 있을 수는 없으니까.
장한수 실장은 고개를 끄덕인 후 운전석에 앉았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차량이 사무실을 향해 출발할 때, 성윤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박영훈 부회장의 비서실장 김용준이다.
‘이 시간에?’
시간은 9시가 넘어가고 있다.
뭔가 있다는 건데…….
“네, 이성윤입니다.”
-김용준 실장입니다.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잠깐 통화가 괜찮을까요?
“말씀하세요.”
-박영훈 부회장이 민국당 오항로 의원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오항로 의원이요? 혹시…… 민국당을 지원할 계획인가요?”
-네, 박영훈 부회장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민국당이 압승하기를 바라거든요. 반대로 신당이 무너지기를 원하고요.
선거는 합법적인 방식으로 정치인을 박살 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더군다나 신당이다.
사람들은 갑자기 툭 튀어나온 신당이 어디까지 올라갈지 지켜보는 중이다.
그런데, 처절하게 깨져 버린다면…….
‘국민의 기억 속에 박무혁 의원의 존재감이 흐릿해질 거야.’
박영훈 부회장은 이번 선거의 중요성을 정확히 집어냈다.
하지만 그가 알지 못하는 게 있다.
바로 김용준 비서실장이 성윤과 손잡았다는 거다.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알 수 있을까요?”
-지금은 대략적인 일정만 잡았습니다. 정확한 시간이 나오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성윤은 휴대폰을 내려 두며 한숨을 내뱉었다.
대한민국의 큰 기둥을 담당했던 대한당이 무너지며 역사의 급격한 변화가 성큼 다가왔다.
이득에 밝은 대정 그룹 박영훈 부회장이 민국당을 지원한다.
성종 그룹 박근서 부장은 신당의 성윤과 윤범성 부회장의 만남을 주선하려 한다.
그들의 머릿속에 대한당은 없다.
누구도 대한당을 신경 쓰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권력 게임은 신당과 민국당의 싸움으로 치닫고 있다.
꿈속의 미래에서는 도제성 의원이 승리했다.
그의 지지율은 시간이 지날수록 폭등했고, 마지막에는 압도적인 표를 받으며 청와대의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를 것이다.
성윤이 있으니까…….
성윤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도착했습니다.”
어느새 서안시 사무실에 도착했다.
성윤은 상념을 떨치며 장한수 실장을 바라봤다.
“맥주 마시기로 했죠?”
“네.”
“그럼, 박 보좌관도 내려오라고 할게요.”
잠시 후, 성윤과 정우 그리고 장한수 실장은 근처의 호프집에 모여 앉았다.
딱 한 잔만 마시기로 한 맥주.
하지만 맥주는 소주로 바뀌었고 한 병, 두 병, 세 병…… 테이블에 쌓이기 시작했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장한수 실장의 행동도 조금은 흐트러진다.
“어? 의원님도 군대 가셨어요?”
“그럼 안 가요?”
“정치인들은 많이들 안 가는 줄 알았는데…….”
성윤이 자랑스럽게 어깨에 힘을 줬다.
“제가 오대장성 출신이에요.”
“오대장성?”
“대한민국 육군 병장이죠.”
군대 이야기는 사소한 것으로도 낄낄거리게 만든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들의 대화는 여자 이야기로 이어졌다.
정우가 물었다.
“장 실장님은 여자 친구 있어요?”
“있겠어요?”
“아뇨.”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있을 만한 얼굴이 없다.
조용히 잔을 들어 부딪친다.
***
그 시각, 성종 그룹.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열렸다.
박근서 부장이 보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가 곧장 복도를 걸었다.
곧 천장까지 치솟은 거대한 문이 보였다.
윤범성 부회장의 집무실이다.
단아하게 생긴 비서가 박근서 부장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박근서 부장이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한 문이 열리며 50평은 족히 넘어 보이는 공간이 드러났다.
그 끝에 윤범성 부회장과 정기화 비서실장이 소파에 앉아 있다.
박근서 부장이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이쪽에 앉아.”
정기화 비서실장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옆을 툭툭 친다.
박근서 부장이 그곳에 앉자 윤범성 부회장이 느릿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말해 봐.”
“이성윤 의원에게 서울시 비리를 건네주고 왔습니다.”
윤범성 부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박근서 부장은 있었던 일을 전하기 시작했다.
윤범성 부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런데, 정기화 실장의 표정이 묘하다.
‘멍청한 놈.’
그는 성윤과 한배를 탔다.
그래서 성윤의 생각을 조금은 알고 있다.
박근서 부장은 성윤에게 속고 있다.
완벽하게 성윤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중이다.
‘정치인은 자신에게 이득 되는 것이 생기면 최대한 쪽쪽 빨아먹지. 박근서는 자신이 빨리고 있다는 것을 몰라. 아직 멀었어.’
정기화 실장은 부드럽게 웃으며 찻잔을 손에 쥐었다.
그때…….
“부회장님, 외람되지만 이성윤 의원을 만나 보셨으면 합니다.”
정기화 실장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그의 눈동자가 박근서 부장을 향한다.
‘이 새끼가?’
정기화 실장만이 아니다.
윤범성 부회장 역시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박근서 부장을 보고 있다.
그는 성종 그룹의 실질적인 주인이다.
부장 따위가 조언을 할 위치가 아니다.
“지금 뭐라고 했나? 이성윤을 만나라고?”
윤범성 부회장의 뱀 같은 눈빛이 박근서 부장을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박근서 부장은 용기를 쥐어짜며 입을 연다.
“네! 이성윤 의원을 만나셨으면 합니다.”
박근서 부장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일개 대관 담당자가 부회장과 마주 앉았다.
인생을 바꿀 기회, 놓칠 수 없다.
‘대관 담당에서 부회장의 측근이 되려면…… 임팩트가 있어야 해.’
그런데, 옆에 앉아 있던 정기화 실장이 인상을 일그러뜨린다.
“당 대표도 만나기 어려운 분이야! 대통령은 되어야 체급이 맞아! 그런데, 뭐? 고작 국회의원 하나를 만나라고? 자네의 말은 지나가는 개도 웃을 거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정기화 실장의 눈빛이 사납다.
손에 쥔 찻잔을 집어 던질 기세다.
박근서 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 모습을 보며 정기화 실장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미친 새끼가…….’
정기화 실장은 윤범성 부회장과 성윤이 만나는 것을 막아야 한다.
혹시나 성윤이 정기화 실장의 손을 뿌리치고 윤범성 부회장으로 갈아탄다면…….
‘닭 쫓던 개가 되어 손가락이나 빨 수도 있어.’
모든 게 어긋나는 거다.
어쩌면 윤 회장의 비리를 떠안고 검찰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
윤범성 부회장은 서슴지 않고 그런 짓을 할 수 있다.
‘거기에 이성윤이 윤범성을 돕는다면 내 인생은 정말 끝장이야!’
하지만 박근서 부장도 밀리지 않는다.
그는 이번 기회에 목숨을 걸었다.
‘임팩트가 없으면 어차피 부장으로 끝이야. 여기서 진급 못 하면 책상 정리하고 떠나야 해!’
어떻게든 윤범성 부회장의 측근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성종이라는 정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다시 고개를 들어 공격적으로 말한다.
“이성윤 의원은 신당의 중심이 될 겁니다. 신당이 서울 시장을 확보하고 대선까지…….”
하지만 윤범성 부회장이 그의 말을 뚝 끊으며 고개를 저었다.
“박 부장, 내가 왜 이성윤을 만나야 하지?”
“네? 이 의원은 신당의 중심이…….”
윤범성 부회장이 한심한 눈으로 박근서 부장을 바라본다.
“그러려면 무혁이를 만나겠지. 하찮은 국회의원 따위를 만나고 다닐 시간은 없어.”
“……!”
“그리고 이성윤을 만나고 싶으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자네는 자네의 일이나 똑바로 해 줬으면 좋겠는데?”
박근서 부장은 민망해졌다.
박무혁 의원을 생각 못 한 거다.
“죄, 죄송합니다.”
박근서 부장이 시뻘게진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그 모습을 정기화 실장이 차가운 눈으로 보고 있다.
‘이 새끼 잘라야겠어. 쓸데없는 충성심으로 이성윤과 부회장을 만나게 하려고 해?’
***
그리고 다시 성윤이 정우 그리고 한정수와 술을 마시는 호프집.
성윤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엔 정기화 실장이다.
“네, 실장님.”
-박근서가 윤범성 부회장과 의원님의 만남을 주선하네요.
“아, 네.”
-만날 생각입니까?
윤 회장의 건강이 악화되며 정기화 실장의 불안감은 극도로 올라가고 있다.
그가 윤 회장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새롭게 왕위에 오를 사람이 전대 왕의 충신이었던 정기화 실장과 함께 갈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를 달래지 않으면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모른다.
“만나 보고는 싶습니다. 하지만 실장님이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올해는 많은 곳에서 전쟁이 벌어질 거다.
지방선거를 시작으로 정계만이 아니라 재계에서도 지각 변동이 일어날 거다.
휴대폰을 내려 둔 성윤의 눈빛이 싸늘해진다.
‘단추를 잘 끼워야 해.’
앞으로 10년, 20년의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할 거물들의 등장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모든 것을 성윤의 손바닥 위에 올려야 한다.
그래야 꿈속에서 봤던 지랄맞은 대한민국을 변화시킬 수 있다.
***
-신당의 서울시 시장 후보가 결정되었습니다. 동부 지방법원 법원장이었던 정덕진으로…….
서울 시장 후보가 모두 등장하며 곧장 3자 가상 대결 지지율이 발표됐다.
아직 후보 등록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게 정치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1위, 민국당 오항로, 42.1%
2위, 대한당 최광주, 17.7%
3위, 한민당 정덕진, 12.3%
오항로 후보는 대한당의 몰락과 도제성 의원의 인기몰이 덕을 봤다.
의미 있는 공약을 내세우지도 않았지만 압도적인 지지율로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다.
지지율을 보는 성윤에게 정우가 말한다.
“무당 층과 무응답 그리고 기타를 합치면 약 28%예요.”
“그걸 다 합치면, 정덕진 법원장님은 40%로 올라갈 수 있나?”
“다 합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모두 합쳐도 오항로 의원에게 2% 차로 밀린다.
지지율 차가 너무 크다.
‘모자라…….’
성윤의 시선은 대한당 최광주의 지지율로 향했다.
최광주 시장의 지지율은 17.7%…….
그는 현 서울 시장이며 대한당이다.
신당이 대한당 2중대라는 말을 듣고 있으니 정덕진과 표를 나눠 먹는다고 볼 수 있다.
무당 층에 집중하는 것보다 최광주 시장의 표를 가져오는 게 훨씬 현실적인 답이다.
“정우야, 최광주와 단일화를 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최광주를 부숴 버린 후에 흩어진 표를 모으는 게 좋을까? 어떻게 생각해?”
“단기적으로는 단일화가 좋겠죠. 하지만 장기적으로 대선까지 생각하면…… 부숴 버리는 게 이득이죠.”
성윤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최광주의 이름을 가볍게 툭 친다.
“후보 등록 마치면 바로 부숴 버려.”
< 거인과의 만남. -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