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회의원 이성윤-158화 (158/300)

< 눈이 올까 비가 올까. - (2) >

인기 걸 그룹이 들어온 줄 알았다.

“와!”

의원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들의 초조함은 극에 달해 있었다.

협박을 당해 대한당에서 나왔지만 신당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꽁꽁 비밀로 싸여 있던 상태.

미래가 어두컴컴한 길에 가로막혀 이도 저도 못 하던 상황.

박무혁 의원은 그들에게 한 줄기 빛이었다.

박무혁 의원은 당당히 상석에 앉는다.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박무혁 의원이 천천히 술잔을 손에 들었다.

모두 박무혁 의원을 따라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숨을 죽인 채 그의 말을 기다린다.

“의원님들의 손으로 대한민국의 정치 역사가 바뀔 겁니다.”

지나가듯 던진, 낮게 깔린 한마디.

하지만 어설프게 썩어 버린 대한민국 정치사에 진짜 변화가 시작될 것만 같았다.

그것도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신당에 의해서…….

박무혁 의원이 술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오늘은 즐기죠. 내일은 힘들 겁니다.”

다시 한번 의원들의 입에서 “와!” 하고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동안 초조함으로 억눌려 있던 감정이 나오는 중이다.

술잔이 돈다.

마시고 또 마신다.

여기저기 박무혁 의원에 관한 찬양이 흐른다.

성윤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입에 댔다.

분위기가 뜨겁다.

폭발할 것처럼 꿈틀대고 있다.

***

다음 날.

성윤은 주진만 원내 대표를 찾았다.

이제는 이름만 원내 대표다.

비대위가 갖춰지면 당직을 내려놓을 생각이다.

주진만 원내 대표가 물끄러미 성윤을 본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얼굴이 반쪽이다.

몹시 피곤해 보인다.

“……그랬다고?”

“네.”

“자네가 김선희 사무총장을 보낸 거라고?”

“네, 죄송합니다.”

성윤은 혼이 날 각오를 했다.

뺨을 맞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주진만 원내 대표는 대한당을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윤은 그 노력을 무너뜨렸으니까.

어두운 침묵이 공간을 지배했다.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하지만 주진만 원내 대표의 눈에 분노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한숨을 내뱉으며 소파에 등을 기댄다.

“죄송할 것 없어. 한 번쯤은 터졌어야 할 고름이야. 아프다고 놔두면 더 큰 병이 됐을 거야.”

김선희 사무총장이 덜컥 대통령에 당선이라도 됐다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어찌 되었을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주진만 원내 대표는 대한당의 의원들에게 큰 실망을 했다.

대한당은 좌초 위기의 상황에 있다.

그런데, 그들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개싸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꼴 보기도 싫었다.

주진만 원내 대표가 고개를 틀어 성윤을 본다.

언제나처럼 인자한 눈빛이다.

“너도 갈 거냐……?”

탈당을 묻는 거다.

숨기고 싶지 않았다.

“네.”

주진만 원내 대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성윤을 본다.

“이제 적인가?”

“원내 대표님도 함께 가셨으면 합니다.”

“내가 자네를 따라 신당에 참여하면…… 신당에는 독이 될 거야.”

“원내 대표님…….”

“난 이번 국회를 끝으로 정계를 떠날 거야. 마지막 해야 할 일은 내가 결정해.”

주진만 원내 대표는 계속해서 권력을 영위할 생각이 없다.

정치판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마지막은 나를 믿고 뽑아 준 지역구 사람들을 위해 쓰고 싶어. 이제 한심한 권력 싸움은 지긋지긋해.”

주진만 원내 대표의 마음은 이미 대한당을 떠났다.

아니, 정치판에서도 멀어졌다.

마지막 정치 인생은 지역구만 보려고 한다.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오지 마, 이 사람아. 괜한 의심받아.”

“의심받아도 괜찮습니다. 원내 대표님께 많이 배웠습니다.”

성윤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주진만 원내 대표는 한숨을 내뱉으며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비대위 위원장은 원동현 의원님이 맡을 거야. 누군지 잘 알지?”

원동현, 일흔이 훌쩍 넘은 대한당의 원로.

여의도 마귀라 불리며 6선을 해 먹었다.

대권에 대한 욕심이 끝이 없었지만 때마다 터진 악재에 2인자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한상국 대통령이 취임한 후 중심에서 한발 물러서 뒷짐만 지고 있었다.

그가 다시 중심으로 복귀하고 있다.

성윤의 꿈속에서는 없던 일이다.

“음흉하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면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야. 당을 추스르는 즉시 신당을 공격할 거야. 몸조심하도록 해.”

성윤은 소파에서 일어나 주진만 원내 대표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주진만 원내 대표는 어서 가라는 듯 손을 휘휘 젓는다.

***

-채정학 당 대표와 주진만 원내 대표가 오늘 오전 열시 당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채정학 당 대표는 “당원 동지께 죄송하다. 이번 일을 계기로 대한당이 더 투명해질 거다. 후보 경선을 통해 새로이 발돋움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습니다. 대한당은 원동현 의원을 비대위 위원장으로…….

대한당 당 대표와 원내 대표의 동반 사퇴라는 초유의 사태.

하지만 대한당이 모든 책임을 채정학 당 대표의 어깨에 올리고 출구로 삼을 전략을 꾀한다는 것은 일찌감치 예견됐던 일이다.

별다른 효과 없이 미미하게 지나갔다.

그리고…….

박무혁 의원, 창당 선언할까?

여론의 관심은 박무혁 의원에게 쏠렸다.

탈당 후 어떤 외부 활동 없이 조용히 있던 박무혁 의원의 첫 나들이가 정해졌다.

국회 의사당 의원회관에서의 기자회견이다.

기자들은 이번 기자회견이 창당 선언이라고 확신했다.

드디어 소문으로만 돌던 판도라의상자가 열리는 거다.

의원회관에는 기자들로 바글거렸다.

그들이 노트북을 열며 수군대고 있다.

“지금까지 대한당에서 탈당한 사람이 몇 명이지?”

“공대출 의원, 신동만 의원……. 얼마 전에 이성윤 의원도 탈당했잖아? 그럼, 서른넷? 다섯?”

“설마 다 모이는 거야?”

기자들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실시간으로 기사를 올려 대고 있다.

거대 신당 창당? 의원 숫자, 서른네 명으로 예상

박무혁 의원의 신당, 시작부터 교섭단체 지위 얻어

이따위 제목에 내용도 없지만 클릭 수는 쏠쏠하다.

“첫 지지율 얼마나 나올까? 대한당에 실망한 사람도 많고 대선 시즌이라 5%는 쉽게 잡겠지?”

“5%가 뭐야? 10%는 찍고 시작하는 것 아냐?”

“이것도 올려야겠다.”

또 기사가 올라갔다.

박무혁 의원의 신당, 첫 지지율 10% 목표

그나마 메이저 언론사가 이 정도다.

소규모 언론사는 가십성 기사로 눈길을 끌어야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다.

의원회관 주변을 서성이며 오가는 의원들을 기다렸다.

젊은 남자 기자가 머리를 북북 긁었다.

“하, 씨발. 날씨는 우중충하고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보이네. 어쩌지? 국장이 특종 찍어 오지 못하면 퇴근 안 시켜준다고 개소리를 지껄였는데.”

옆에 선 여자 기자가 킥킥 웃는다.

“야, 너희 회사 수준에 국장이 뭐야. 그냥 과장이라고 해.”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곧 죽어도 국장이래. 과장이라고 하면 조인트 맞아. 그런데, 특종 잡을 시나리오 없냐? 고소당해도 좋으니까 좀 말해 봐.”

여자 기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종? 이성윤 어때? 결혼 안 했고 어리니까 연애 스캔들 써먹기 좋잖아. 박무혁 의원이 대정 그룹이니까 ‘그쪽 집안의 누구누구와 약혼했다.’ 이런 것.”

“오, 괜찮네?”

이들은 소규모 언론사다.

성윤과 단독 인터뷰는 물론이고 얼굴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젊은 정치인과 돈 많은 여자의 연애 스토리는 착착 작성되는 중이다.

“야, 저기.”

여 기자가 턱짓했다.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뽑아내던 남자 기자가 시선을 튼다.

네이비 컬러에 더블 버튼의 양복을 입은 남자가 걸어오고 있다.

성윤이었다.

남자 기자가 입술을 핥는다.

‘특종, 씨발…….’

박무혁 의원의 기자회견이 시작되기 전에 성윤의 단독 인터뷰를 따면 회사에 들어가 예쁨 받을 거다.

그럼, 이따위 연애 소설을 쓸 필요도 없다.

곧장 성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의원님, 오늘 박무혁 의원님의 기자회견에 관련해서…….”

하지만 그는 말을 못 했다.

그의 앞을 막아선 딱 벌어진 어깨, 경호원 장한수가 그를 막아섰기 때문이다.

국가 대표 유도 선수 출신이다.

포스만으로 두렵다.

남자 기자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선다.

“……질문을 좀 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때, 뒤에서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났다.

“회사가 어디시죠?”

이번에는 살인마의 얼굴을 가진 정우였다.

장한수가 다가서기 힘든 포스라면 정우는 다가서면 안 되는 얼굴을 가졌다.

남자 기자는 마른침을 삼킨다.

“2, 23세기 코리아 저널요.”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안다.

특종은 물론 단독 인터뷰도 날아갔다.

저런 얼굴을 가진 인간들이 소규모 언론사에게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나마 친절한 얼굴의 성윤이 조용히 미소를 짓는다.

“명함 주세요. 지금은 좀 그렇고 기자회견 끝난 다음에 연락드릴게요.”

“아, 네.”

남자 기자는 명함을 꺼내 성윤에게 건넸다.

성윤은 연락 준다는 말을 남기고 의원회관으로 들어간다.

옆에 서 있던 여자 기자는 성윤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깜빡인다.

“얼굴은 별론데, 되게 멋있네.”

“역시 남자는 자신감…….”

“넌 자신감 있어도 오징어야.”

***

널찍한 회의실.

의원들이 기자회견 시간을 기다리며 대기하는 공간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중압감이 더해진 묵직한 공기가 온 몸을 찍어 누른다.

의원들은 어떤 말도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함께 온 보좌관들도 마찬가지다.

긴장을 풀기 위해 피우고 온 담배 냄새가 없었다면 마네킹으로 오인할 만큼 움직임이 없었다.

“아, 왔어?”

성윤의 앞으로 공대출 의원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도 긴장으로 가득하다.

오늘 이들은 대한당 배신의 아이콘이 된다.

온갖 욕을 다 처먹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신당이 성공하면 성골의 인생을 살 수 있다.

성공과 실패는 극단적인 인생의 갈림길이다.

그가 입을 연다.

“박 의원이 찾아.”

“저를요?”

“옆 회의실에 있으니까 가 봐.”

성윤은 의원들이 대기하는 회의실을 벗어나 옆으로 이동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 고개를 숙였다.

“찾으…….”

말을 하려다 말았다.

대기실에 있던 의원들의 표정도 심각했지만 머리를 괴고 앉은 박무혁 의원의 표정은 그 이상이었다.

그가 눈동자만 움직여 성윤을 본다.

“밖에 날씨 어때?”

“우중충합니다.”

“비가 올까, 눈이 올까?”

“글쎄요.”

“나이 들고 눈을 기다린 적이 없는데, 오늘은 눈이 왔으면 좋겠어. 첫눈이니까.”

기상청은 비를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믿기는 힘들다.

비 오는 날이 기상청 소풍날이니까.

박무혁 의원이 입을 연다.

“처음으로 고민하고 있어. 어떤 정치를 해야 하나, 그 전에 나라는 인간이 정치할 자격은 되는가. 저 문을 나서면 돌이킬 수 없으니까.”

박무혁 의원은 지금까지 인생을 즐겨왔다.

어깨에 짊어진 짐도 없었고 그저 고고한 생활을 영위했다.

하지만 이제 그의 어깨에는 무거운 책임이 실릴 거다.

게다가 그는 재계와의 싸움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한다.

앞으로 펼쳐질 가시밭길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의 시선이 다시 성윤에게 향한다.

“이 의원, 우리 신당이 잘될까?”

“네.”

“확신하나?”

“네, 확신합니다.”

“그럼, 난 신당을 잘 이끌어 갈 수 있을까?”

“네.”

박무혁 의원이 기분 좋은 미소를 그렸다.

“판세를 훤히 읽는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문이 열렸다.

박무혁 의원의 보좌관이 얼굴을 들이민다.

“의원님, 시간 됐습니다.”

박무혁 의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방금까지 고민으로 가득했던 표정인데, 순식간에 사라졌다.

“가지.”

기자들의 앞에 보도 자료가 탁탁탁 놓였다.

기자들은 다급히 자료를 손에 든다.

박무혁 의원 신당 창당. 신당 이름은 한민당.

예상했던 것이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기자들은 곧장 노트북에 얼굴을 처박고 기사를 써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무혁 의원과 신당에 합류할 의원들이 위로 올라섰다.

수백 개의 카메라가 동시에 플래시를 터뜨린다.

박무혁 의원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공간을 채웠다.

“각국은 철저한 힘의 논리를 앞세워 자국의 이득을 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명분과…….”

***

대한당 비대위 위원장 사무실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사나운 표정의 원동현 비대위원장이 거칠게 들어온다.

흰머리 아래의 눈빛이 매섭다.

“박무혁이 결국 신당을 창당했다고! 막으라고 했잖아!”

“죄송합니다. 만나 주지를 않아서…….”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쩌렁한 목소리와 함께 재떨이가 날아갔다.

뒤따라온 보좌관은 몸을 움츠리며 겨우 재떨이를 피했다.

원동현 비대위원장이 보좌관을 노려본다.

“그놈…… 만나는 여자 없어?”

“알아봤지만 없는 것 같습니다.”

“기자들에게 연락 돌려. 대정과 성종의 부회장도 만나 봐. 어릴 때부터 봤을 테니까 코 묻은 돈 숨긴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거야.”

지금도 스캔들에 허우적거리는데 박무혁 의원의 신당이 잘되기라도 하면 걷잡을 수 없는 위기에 빠질 거다.

그 전에 박무혁 의원을 쓰레기로 만들어야 했다.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원동현 의원이 의자에 앉으며 지시를 이어갔다.

“비대위 위원들더러 모이라고 해. 지금부터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박무혁을 찍어 누르라고 해. 짓밟아.”

“알겠습니다.”

시원한 대답.

그때, 지이이이잉.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발신 번호는 검찰…….

뭔가 불길하다.

원동현 의원이 다급히 휴대폰을 귀에 댄다.

“무슨 일이야?”

-대한당에 성주령 의원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어, 왜?”

-조카가 취직할 수 있도록 공기업에 압력을 넣었다고…….

“뭐?”

원동현 의원의 얼굴이 마귀같이 변한다.

그런데, 이번엔 보좌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보좌관이 통화 버튼을 누르며 몸을 돌린다.

“어, 김 기자.”

-대한당 이영호 의원 있잖아요? 지금 제보가 들어왔어요.

보좌관의 얼굴이 문드러졌다.

“막아! 그거 언론에 나오면 안 돼. 알잖아? 우리 지금도 미칠 지경이야! 상부상조하자고!”

-저희도 그러고 싶지만 다른 언론사에서 가만히 있을까요?

“씨, 씨발!”

성윤이 퍼뜨린 거다.

신당이 자리 잡을 때까지 대한당이 정신 차릴 수 없도록…….

< 눈이 올까 비가 올까. -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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