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능한 자의 자만. - (2) >
* * *
‘한상국 대통령이 의원님과 서용우 총리를 신임하게 할 기회라고?’
정우는 성윤의 말을 이해했다.
그는 통화를 종료하며 길가로 시선을 옮긴다.
국산 준대형차가 정차되어 있다.
그 차는 엄대필과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하지만 운전자는 내리지 않았다.
마치 엄대필이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정우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흐릿한 연기 속에 시선을 감추며 휴대폰을 귀에 댄다.
“오강민 의원님?”
-아, 보좌관님. 지금 가는 중입니다.
성윤이 오강민을 불렀다.
그는 강남으로 오고 있었다.
“그게 아니고요. 혹시 차량 번호를 조회할 수 있을까요?”
-아, 그럼요. 할 수 있죠.
“그럼, 부탁드릴게요. 번호가······.”
정우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담뱃재를 툭툭 털었다.
자동차는 여전히 정차되어 있다.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담배를 비벼 끌 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정우는 다시 귀에 댄다.
오강민의 목소리가 흘렀다.
-청와대 직원의 차량인데요? 비서실 소속요.
정우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걸렸다.
반대로 눈빛은 서늘해진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한상국 대통령이 보낸 사람······.
사냥을 할 시간이다.
“부탁하나 더 드릴게요. 차주의 정보를 부탁드립니다. 도덕성에 흠집 낼 만한 것이면 좋겠네요.
-알겠습니다. 30분은 걸릴 거예요.
통화가 종료됐다.
정우는 곧장 자동차로 다가갔다.
조수석 문을 똑똑 두들기자 창문이 열렸다.
반듯하게 생긴 40대 초반의 남성이 보인다.
남성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무슨 일이세요?”
“커피 한잔할까요?”
“네?”
“······아니면 엄대필 변호사님께 청와대에서 뒤를 밟는다고 말씀드릴까요?”
정우의 비틀린 미소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한숨을 내뱉는다.
선택은 존재하지 않았다.
“커피 한잔하죠. 그게 편하겠네요.”
남자는 찌푸린 표정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정우의 뒤를 쫓아 커피숍으로 향했다. 저녁 시간의 커피숍은 직장인들로 북적거렸다.
퇴근 후 각자의 스트레스를 풀고 있다.
하지만 정우와 남자가 앉은 자리는 얼음이 쏟아진 것처럼 싸늘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남자다.
“박정우 보좌관님 맞죠?”
“저를 아시나요?”
“알 수밖에 없죠. 핫한 인물 중 하나니까요.”
너를 알고 있으니 어서 본론이나 말하라는 눈빛이다.
하지만 정우는 상관하지 않았다.
“핫한 인물이라니, 기분 좋은 말이네요. 그런데, 청와대 비서실에는 차가 없나요? 개인 차량을 끌고 나오셨네요.”
정우는 본론을 피하며 커피를 입에 댔다.
오강민의 연락을 기다리는 중이다.
“할 말이 뭐죠?”
남자는 집요하게 묻는다.
찔리는 게 있어서다.
그때마다 정우는 대답했다.
“기다리세요.”
그리고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네, 박정우입니다.”
잠깐의 통화.
남자는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정우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네, 네.’가 전부였다.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통화가 종료됐다.
정우가 남자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눈빛이 어둡게 변했다.
“택지 지구 개발······ 연말에 발표하죠?”
남자의 표정도 바뀌었다.
입이 꽉 다물렸고 눈썹이 살짝 떨려 온다.
그가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전 모르는데요. 택지 지구라뇨.”
“대출까지 땡겨서 박아 놓고 모른다니······.”
“몰, 몰라요.”
정우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세차게 두들겼다.
쾅쾅쾅! 소리가 울린다.
커피숍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집중됐다.
정우가 뒤틀린 입술을 조용히 움직였다.
“크게 떠들어 볼까요? SNS가 시끄러워질 것 같은데······. 청와대 직원 특가로 30억을 대출받았나요? 이자는 1%? 그리고 하남 택지 지구 몰빵.”
“보, 보좌관님?”
남자는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대통령에게 레임덕이 오면 청와대는 살얼음판이다.
야당의 짐승들이 호시탐탐 군침을 흘리며 지켜본다.
직원의 작은 실수 하나가 손가락질의 타깃이 될 수 있다.
그럼, 역적이 된다.
한상국 대통령에게 직접 불려 갈 수도 있다.
남자가 몸을 바르르 떤다.
반대로 정우는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모른 척할게요. 대신 하나만 부탁드려요. 제가 말한 대로 보고하세요.”
“······.”
“대답하세요.” 남자는 굴욕적으로 대답했다.
“······네.”
정우의 표정은 더 악마같이 변했다.
대한민국 곳곳에 썩지 않은 곳이 없다.
청와대 일개 직원이 정보를 알고 땅을 산다.
그러면서 집값을 내려야 한다고 헛소리를 내뱉고 있다.
‘씨발······.’
그 시각, 한정식집은 엄대필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이성윤 의원도 흙수저죠?”
“아니요. 나름 행복하게 자랐습니다.”
“돈 말하는 거예요! 돈!”
상당히 예의에 어긋나는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그 자리에 서용우 전 총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일이 있다며 먼저 빠졌다.
예정된 행동이었다.
엄대필이 계속 말한다.
“요새 젊은 애들 보면 한심해요. 노력을 안 해 놓고 지랄들을 하고 있어. 클럽에서 처놀아 놓고 취업할 때 어렵다고 하면 도대체 뭘 어쩌라는 겁니까?”
모르는 소리다.
대학 졸업장 하나로 취업이 보장받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대학 졸업장만으로 취업이 힘들다.
각종 자격증, 어학 연수, 심지어 창업을 하는 이유도 이력서에 쓸 한 줄을 위해서다.
노력은 엄청나게 하고 있다.
“다 대기업에 가겠다고, 씨발. 우리 때는 안 그랬거든요. 돈이 없으면 막노동판에 갔어요.”
약 20년 전 막노동판 하루 일당이 5~7만 원.
지금은 9~12만 원.
물가 상승을 생각하면 오른 게 아니다.
자국민이 외국인 노동자와 경쟁하며 임금이 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대학 등록금은 크게 올랐다.
천만 원에 가까운 곳도 있다.
방학 동안 막노동만으로 대학 등록금을 벌었다는 것은 이제 옛말이다.
“내가 정치인이 되면 무한 경쟁의 시대로 되돌릴 겁니다. 노력 안 한 새끼는 굶어 죽으라고 하고!”
엄대필은 자신이 성공한 것을 신화처럼 포장했다.
물론 그가 노력한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판자촌에서 사법 고시까지 패스한 능력자니까.
하지만 이런 사람이 정치인이 되면 안 된다.
그는 자신과 같이 판자촌에 있던 사람들이 지금도 가난하게 있는 것을 병신처럼 생각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
위험한 발상이었다.
하지만 성윤은 이어지는 성공 신화에 감탄을 이어 갔다.
달콤한 대답은 뇌를 흐물흐물하게 만든다.
상대가 자신을 떠받든다고 착각한다.
엄대필의 어깨가 으쓱으쓱할 때 성윤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엄대필 변호사님을 만난다고 했더니 꼭 같이 만나자고 한 분이 있어요. 불러도 괜찮겠습니까?”
“저를 만나고 싶다고요? 누가요?”
“오강민 의원이라고, 이번에 수원 14선거구에서 당선된 분입니다.”
엄대필이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짝 쳤다.
“안기부? 오라고 해요. 나도 이제 대한당에 적을 둘 건데, 알아서 나쁠 것은 없죠.”
성윤이 휴대폰을 귀에 댔다. “오강민 의원님? 엄대필 변호사님이랑 같이 있는데 오시겠어요?”
성윤이 휴대폰을 내려 두며 다시 엄대필을 향했다.
“상당히 좋아하시네요. 금방 오신다고 합니다.”
국회의원이란 사람이 자신을 보러 친히 온다고 한다.
엄대필은 기분이 좋았다.
검사로 있을 때나 변호사로 생활할 때는 꿈도 못 꿨던 일이다.
잠시 후, 오강민이 들어왔다.
그는 성윤에게 지시받은 대로 엄대필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오강민이라고 합니다.”
“엄대필입니다.”
오강민과 엄대필 사이에 술잔이 오갔다.
성윤은 이쯤에서 술을 멈췄다.
엄대필을 취하게 만들려고 많은 술을 마셨기 때문이다.
엄대필이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그런데, 저를 어찌 보자고 하셨습니까? 저를 알고 계셨습니까?”
오강민이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알다마다요. 언제 정계에 발을 들이실지 계속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 그래요?”
“변호사님의 개인적인 커리어도 화려하지만 대통령의 사위라는 프리미엄은 누구도 없는 거니까요. 전 정보로 먹고살아 왔습니다. 흙속의 진주를 찾아내는 일은 누구보다 해박하죠.”
“제가 흙속의 진주입니까?”
“다이아몬드로 하죠. 하하하하.”
엄대필은 정말 좋아한다.
가식적인 혓바닥에 놀아나고 있다.
성윤도 슬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일이 있어서요. 두 분,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오강민은 일어나 성윤에게 악수했다.
엄대필은 손을 흔든다.
“들어가세요. 나중에 또 봅시다.”
성윤은 허리를 굽힌 후 몸을 틀었다.
이제는 오강민에게 맡길 차례다.
엄대필은 이제 착각 속에서 살게 될 거다.
국회의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을 보는 눈이다.
거기엔 감정이 담겨 있어서는 안 된다.
청사진을 그려서도 안 된다.
가장 부정적인 눈으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서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엄대필에게 그런 눈을 가질 기회는 없었다.
성윤이 떠나자 엄대필이 술잔을 쥐며 혀 꼬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성윤 의원······ 소문이 자자했는데, 실제로 만나 보니 별것 없네요?”
오강민은 순간 표정 관리를 못 했다.
황당한 표정으로 엄대필을 바라봤다.
“별것 없다고요?”
20대에 초선 의원.
20대에 재선 의원.
이것만 해도 별것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성윤이 가진 힘은 정보를 가지고 노는 오강민조차 모르고 있었다.
은밀하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자신의 세를 과시하지 않고 권력과 재력을 불린다는 것은 두려울 정도였다. ‘한심한 새끼.’
다행히 엄대필은 술을 많이 마셨다.
오강민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장인어른부터 이성윤, 이성윤 하기에 대단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운이 좋아 그 나이에 국회의원이 된 것 같네요. 거품이 꺼지면 사라질 놈이죠. 그때까지 그 거품을 좀 이용하고 싶습니다. 오 의원님이 도와주면 가능할 것 같은데요.”
오강민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물론 오강민은 엄대필을 돕는 척만 할 거다.
오강민은 성윤에게 자신을 언제든 무너뜨릴 수 있는 자료를 줬으니까.
엄대필이 말한다.
“어린놈은 어르고 달래면 됩니다. 토라지면 사탕 하나 던져 주고요.”
다시 술잔이 오갔다.
오강민이 넌지시 묻는다.
“오늘 변호사님을 만나서 기분이 좋습니다. 2차를 사고 싶은데, 가시겠습니까?”
“아, 좋습니다. 좋아요.”
2차 장소는 설미혜 마담이 VIP를 대접하는 곳이었다.
룸살롱이 있는 건물의 최상층.
쉐프가 바로 앞에서 요리를 하고 연예인 뺨치는 여자들이 쫙 달라붙는 스커트를 입고 서빙을 한다.
미리 이야기를 들은 오강민도 놀랄 정도였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카펫은 밟기도 거북스러웠다.
하지만 곧 너스레를 떨었다.
“여기가 회원권이 있어야 올 수 있는 곳이에요. 국회의원이 되면 회원권을 받을 수 있죠.”
“아.”
엄대필은 술이 확 깨는 모양이었다.
그의 앞에서 설미혜 마담이 허리를 굽힌다.
“마담 설미혜라고 합니다.”
엄대필은 설미혜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바보 같은 질문을 한다.
“우리 장인어른······ 아니, 대통령도 이런 곳에 옵니까?”
* * *
“하룻밤에 1억에 가까운 돈. 소비는 습관이야. 끊을 수 없지. 게다가 엄대필은 허세가 있어. 자신의 검사, 변호사 친구들을 끌고 다시 찾을 거야. 그리고 돈을 쓰며 말하겠지. ‘내가 이 정도로 성공했다. 난 국회의원이 될 거다.’라고.”
성윤은 정우와 함께 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성윤이 창밖을 보며 말을 잇는다.
“하지만 돈은 한정적이야. 빌리겠지. 뇌물도 받을 테고. 한상국 대통령은 정권 말에 골치 좀 아플 거야. 우린 그걸 이용할 것이고.”
그 결말은 머지않을 거다.
정우가 힐끗 성윤을 향했다.
“미행했던 사람은 섭외했어요. 청와대로 달려가서 보고할 거예요. 이성윤과 엄대필은 만취했다고요. 엄대필이 미치지 않은 이상 룸살롱에 갔다는 것을 떠벌릴 이유는 없을 테고······.”
한상국 대통령이 그 보고를 들으면, 성윤에 대한 경계를 조금은 낮출 거다.
처음 만난 사람과 만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조심성 없는 인간이 정계에 계속 붙어 있기란 어려우니까.
“잘했어.”
“그런데요, 의원님은 서용우 전 총리를 지지할 건가요?”
“뭐, 지금은. 하지만······.”
달리 지지할 후보가 없었다.
그리고 성윤은 미래를 알고 있다. 서용우 전 총리가 후보 경선을 통과할 수는 있겠지만 대선은 어렵다.
대한당은 망가졌고 민국당은 승리의 환호를 지르는 중이다.
게다가 다음 대통령이 될 민국당의 도제성 의원······.
도제 바람 또는 태풍이라 불릴 정도로 거침없이 지지율을 높이던 그를 생각하면 이길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서용우 총리는 난세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야.”
난세가 온다.
밖으로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의 이기적인 외교가 펼쳐진다.
그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으로 대한민국을 위기로 몰아넣는다.
외교에 친구란 없다.
이익만 있을 뿐이다.
그걸 서용우 전 총리가 이겨 낼 수 없다.
그리고 안으로는 저 출산, 양극화,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는 경제······.
가장 큰 문제는 쌓여만 가는 정부에 대한 불만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거다.
서용우 전 총리는 견디기 어렵다.
암담한 미래를 생각하던 성윤은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은 우리 미래를 준비해야지······. 어렵고 힘들어도 몸을 낮추고 힘을 키워야지, 이기적으로······. 그래야 다시 설 수 있는 날이 올 거야.”
성윤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돈을 벌고 권력을 손에 쥔다.
그럼, 미래를 바꿀 수 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후대는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까?
여기까지 생각한 성윤이 픽 웃었다.
‘후대는 무슨······.’
내일 곧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리라.
비록 꿈속이었지만 수없이 많은 죽음을 경험했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어?’
발신 번호는 박무혁 의원이다.
재빨리 받았다.
“네, 의원님.”
-퇴근했나?
“이제 막 집에 가고 있습니다.”
-서안? 아니면 서울?
“서울입니다.”
-잘됐네. 이리 와, 오랜만에 술 한잔하게.
< 무능한 자의 자만. -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