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욕심내지 않고 모종 심기. - (2) >
* * *
정우가 미국에 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성윤은 박대철과의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늦둥이 딸 세진이를 보살피겠다고 했던 약속이다.
박대철이 구속된 후 그의 아내는 곧장 미국으로 떠났다.
언론에 그녀의 얼굴도 공개됐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호빠 중독이라며?”
“맨날 젊은 남자랑 만난대.”
그녀는 도망쳤다.
어린 딸을 친척에게 맡겨 둔 채로······.
젊은 남자와 함께 떠났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충청도의 한 아파트.
초인종 소리가 딩동하고 울렸다.
문이 끽 열렸고 중년의 여성이 얼굴을 내밀었다.
“누구세요?”
그녀는 세진이의 이모다.
성윤은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안녕하세요. 박대철 의원님께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
“네?”
세진의 이모는 눈동자만 움직여 성윤의 위아래를 살폈다.
그러다가······.
“이성윤?”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세진이는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성윤은 거실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50평대의 넓은 아파트.
성윤이 사는 집에 비하면 운동장 같다.
성윤의 시선이 앞으로 향했다.
맞은편에 세진의 이모가 보인다.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눈빛, 그리고 손가락에는 주름을 가리기 위한 반지가 가득하다.
꿈속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녀의 남편은 국회의원이었던 박대철의 도움을 받아 관공서에 물건을 납품하는 사업가다.
“데려가겠다고요?”
성윤은 품에서 종이를 꺼내 올렸다.
박대철이 쓴 편지다.
“걱정되시면 교도소에 확인해 보셔도 좋습니다.”
세진의 이모는 박대철의 편지를 슥 쳐다봤다.
그 편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상관하지 않는 눈빛이다.
그녀가 편지를 뒤집으며 말한다.
“세진이 엄마가 약속했어요. 애를 보살펴 주면 돈을 주겠다고요.”
“얼마를 약속했죠?”
“음······ 5천요. 그동안 먹여 주고 입혀 준 게 있으니까요.”
쌀쌀맞고 사무적인 목소리, 진짜 이모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5천요?” “······네.”
잠깐이지만 눈동자가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성윤의 시선을 피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다.
성윤은 그녀의 마음을 듣기 시작했다.
-5천······. 이미 받은 것도 있는데 너무 많이 불렀나? 아니지, 형부는 우리가 돈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모르잖아? 이성윤도 모르겠지? 그럼, 5천은 주지 않을까? 애 봐주는 게 얼마나 힘든 건데······.
이미 돈을 받았다.
그런데 또 5천을 요구한다.
하지만 성윤은 주기로 마음먹었다.
세진이를 잘 돌봐 주기만 했다면······.
꿈속에서 세진이는 성윤을 잘 따랐었다.
부모의 정을 받고 자라지 못한 아이라 더 그랬다.
용돈을 모아 넥타이를 사 주고 구두도 닦아 주고······.
그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비록 꿈속이지만 미래가 뒤틀리지 않았다면 이번에도 그랬을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성윤이 미래를 바꾸며 조금 더 나은 삶을 산다.
하지만 세진이는 아니다.
친척집을 전전하며 부모 없이 살고 있다.
마음 한편으로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
그래서 5천은 아깝지 않았다.
그때, 현관문이 열렸다.
책가방을 멘 세진이 온 거다.
성윤의 시선이 세진이를 향해 틀어졌다.
‘어?’
항상 깨끗한 옷을 입고 다니던 세진이다.
그런데 지금의 옷은 다 헤졌다.
목은 늘어났고 무릎은 툭 튀어나와 있다.
얼굴도 마찬가지······.
어린아이의 피부가 상해있다.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떡이 져 있고 하얗던 얼굴엔 구정물이 보였다.
“세, 세진아?”
성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오던 세진이 고개를 들어 성윤을 본다.
처음엔 못 알아본 것 같다.
꿈속에선 오래 봤지만 현실에서는 일곱 살에 잠깐 만난 것이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이내 기억했다.
“아, 아저씨?”
성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분노로 가득한 시선이 세진의 이모를 향한다.
그 눈빛이 악마 같았다.
그녀가 당황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애가 씻는 걸 싫어해서······.”
성윤은 벌떡 일어섰다.
성큼성큼 걸어가 세진이의 가방을 손에 들었다.
교과서를 꺼냈다.
초등학교 2학년의 교과서가 찢어지고 난리가 났다.
이번엔 몸을 살폈다.
세진이 이모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린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뭐하는 거예요! 지금 그거 성추행이에요!”
그녀는 성윤을 말리려 한다.
하지만 성윤은 거침없다.
세진이의 셔츠를 들어 올렸다. 통통해서 귀여웠던 아이는 깡말랐다.
뼈밖에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검은 멍이 여기저기 보인다.
꼬집고 맞은 흔적이다.
세진이의 이모는 주춤거린다.
“말, 말을 안 들으면 혼낼 수도 있죠. 밥 먹다가 밥풀 흘리고······.”
성윤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세진이를 향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맞았어?”
세진이는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속마음이 들려왔다.
맞았다.
매일 맞는다.
이모에게 그리고 그 자식들에게······.
현대판 신데렐라도 아니고 이게 뭔가 싶었다.
성윤이 세진의 어깨를 가볍게 쥐며 입을 열었다.
“병원에 가겠습니다.”
동시에 세진의 이모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병, 병원은 왜요!”
“경찰에도 연락하죠. 아동 폭행······. 미쳤네. 이 어린애가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청소도 안 해요! 그리고 또······ 징징거리고, 울고! 보호자로서 예의를 가르치려면······!”
“얼마 받았죠?”
“네?”
“세진이 엄마한테 돈 받았다면서요?”
“안, 안 받았어요.”
그녀의 속마음이 성윤의 귓속에 들려왔다.
3억이나 받았다.
그런데, 애를 때리고 툭하면 굶기고······.
용서하기 어렵다.
성윤이 천천히 휴대폰을 들어 귀에 댔다.
“경기도 서안시 동구 국회의원 이성윤입니다. 시장님 좀 바꿔 주세요.”
세진의 이모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시, 시장님은 왜요?”
성윤은 상관 않고 말을 이었다.
“시청에 물건을 납품하는 사업가 중에 장달주 씨라고 있습니다.”
-아, 네.
“전반적인 조사를 부탁합니다. 관련 공무원과의 뒷거래는 없었는지 그에 따른 탈세는 없었는지. 깨끗하다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성윤의 번뜩이는 눈빛이 세진의 이모를 향했다.
그녀를 집어삼킬 것 같다.
그녀는 발발발 떨기 시작했다.
더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면 겁먹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박대철이 구속된 후 사업권을 지키기 위해 공무원에게 돈을 먹였다.
뿌린 만큼 거두기 위해 단가를 속였고 더 큰 이득을 남겼다.
그 결과로 50평 형이 넘는 아파트를 샀다.
메르세데스 벤츠의 오너가 됐다.
하지만 이제 끝이다.
국회의원이 시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장은 현미경을 들고 조사를 시작할 거다.
뱉어 내야 할 돈이 많다.
게다가 아동 폭행에 연루되면······.
세진의 이모가 다급히 성윤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악어의 눈물을 글썽이며 간절히 말한다. “한, 한 번만 봐주세요! 그럼, 애엄마가 어디 있는지 말해 줄게요.”
미안하지만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세진의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 이미 속마음으로 들려왔다.
“몰라도 됩니다.”
성윤은 세진의 손을 잡고 몸을 돌렸다.
* * *
진단서를 받고 곧장 경찰에 신고했다.
그리고 세진이를 태우고 부모님의 집으로 이동했다.
“삼촌 집에 가면 세진이 친구도 있어.”
친척 조카 혜민이가 있다.
친척 누나가 일찍 사별하는 바람에 조카 혜민이는 낮 시간에 성윤의 부모님과 지낸다.
대학을 다닐 때는 성윤이 돌봤었다.
“아빠가 돌아올 때까지 거기에 있을 거야. 재밌게 놀고 즐겁게 생활하고 행복하게 있을 수 있을 거야.”
세진이는 말이 없다.
갑작스레 바뀌는 상황에 당황한 눈빛이다.
이제 열 살짜리가 무슨 죄가 있는지······.
부모의 죄를 작은 아이가 모두 짊어진 것만 같다.
성윤은 쓰게 웃으며 액셀을 밟았다.
부모님의 집에 도착한 것은 밤 8시 30분이었다.
“얘가 세진이야?”
부모님은 세진이를 반갑게 맞았다.
성윤이 집을 떠난 후 두 분이서 적적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진이는 겁을 집어먹었다.
성윤의 다리를 잡고 등 뒤에 숨어 있다.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어머니가 다정히 웃으며 성윤에게 물었다.
“밥 안 먹었지?”
“네.”
“차려 놨어. 먹자.”
부모님은 세진이가 온다는 소식에 방을 준비해 뒀다.
도배도 공주풍의 분홍색으로 가득했고 침대도 아기자기하다.
세진이와 함께 방을 둘러봤지만 감흥이 없는 눈빛이다.
성윤이 세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함께 식탁에 앉았다.
순두부찌개와 정갈한 반찬이 보였다.
세진이가 숟가락을 들고 찌개를 뜬다.
조심스레 한입 먹는다.
어머니가 세진이를 보며 물었다.
“어때? 괜찮아? 맵지 않아?”
세진이가 울기 시작했다.
눈물을 글썽이더니 이내 엉엉 운다.
서럽고 서럽게······.
“매워요, 매워······.”
소매로 눈물을 훔쳤지만 쉬지 않고 흘렀다.
성윤과 부모님은 세진이를 달래지 않았다.
조용히 바라봤다.
때로는 우는 것으로 속상한 마음이 풀리는 법이다.
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앉았다.
현관문이 벌컥 열린다. “삼촌 왔어?”
조카 혜민이다.
혜민이가 신발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더니 거실로 들어왔다.
“삼촌! 학교에 왜 안 왔어!”
초등학교 수업 중에 부모의 직업 탐방 같은 게 있는 모양이다.
아빠가 없는 혜민이는 성윤을 원했다.
하지만 바빠서 갈 수 없었다.
“아, 미안. 삼촌이 가려고 했는데 계속 일이 바빴네.”
성윤을 향해 토라진 눈빛을 보내던 혜민이의 시선은 이내 세진이에게 향했다.
활짝 웃는다.
“안녕? 난 혜민이야. 프리파라 좋아해?”
아이들은 빠르게 친해진다.
고개를 숙이고 낯을 가리던 세진이는 금세 혜민이와 놀기 시작했다.
둘 다 외로운 아이들이다.
성윤은 두 아이가 자매같이 지냈으면 했다.
* * *
여의도 의원 회관, 성윤의 사무실.
문이 열리고 어느 의원의 보좌관이 들어왔다.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이성윤 의원님 출근 안 하셨어요?”
회계를 맡은 송주현 비서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윤 의원님 미국 가셨는데요.”
“미국요?”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사무실에 국회의원부터 보좌관까지 계속 드나들고 있다.
성윤을 찾는 전화 역시 쉬지 않고 울리는 중이다.
조금 있으면 뜨거운 여름이다.
이어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면 대통령 후보 경선이 시작된다.
주진만 원내 대표의 계파는 출마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각 계파는 성윤을 영입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문제는 성윤이 자리를 비운 거다.
찾아온 보좌관이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연다.
“혹시 이성윤 의원님께 연락이 오면 저희 의원님께 연락 좀 꼭 달라고 말씀해 주세요.”
“아, 네.”
그가 떠났다.
회계를 맡은 송주현 보좌관이 픽 웃는다.
“연예계에 그런 말 있잖아요? 자고 일어나 보니 스타라고······. 우리 의원님을 말하는 것 같지 않아요?”
전당대회에서 채정학 당 대표를 지지한다고 했을 때 갖은 무시를 당했었다.
오강민에게 공천을 준다고 했을 때 별의별 병신 취급을 당했다.
하지만 연이은 성공으로 ‘킹 메이커’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람 팔자는 모르는 거다.
성윤은 캐리어를 질질 끌며 공항을 빠져나왔다.
10시간을 비행기에 있었더니 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정우가 허리를 뒤틀며 말했다.
“다른 의원들은 해외 출장비를 사용해서 좋은 좌석에 앉아 다니는데······ 왜 우리는······.”
“그러게. 우리만 힘들면 약 오르니까 해외 출장비 삭감을 발의해야겠어.”
정우가 낄낄 웃는다. “그럼, 연로하신 분들은 해외에 절대 안 나가겠네요.”
차를 렌트해서 유니온스퀘어로 이동했다.
호텔에 짐을 풀기 위해서다.
예약된 곳은 한국의 콘도식이다.
직접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는 조리 시설이 갖춰져 있다.
침대도 두 개라 지내는 동안 불편함은 없을 것 같다.
짐을 풀고 시간을 확인했다.
“바로 움직이자.”
“지금요?”
“어.”
성윤은 수첩을 꺼내 주소를 적어 건넸다.
박대철의 아내가 지내는 곳이다.
정우가 수첩을 물끄러미 본다.
“그런데, 여기에 사는 것을 확인해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얼굴만 보고 와. 여기에 지내는 게 확인되면 사람을 붙여 두고. 나머지는 박대철이 알아서 하겠지.”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한다.
하지만 남자가 한을 품으면 동지섣달에도 땀띠가 난다.
가족 간의 일이다.
험악한 일은 막겠지만 그 처분은 박대철에게 넘기고 싶었다.
성윤이 정우의 어깨를 토닥였다.
“저녁에 보자.”
“그런데, 도대체 어딜 가시려는 거예요? 계속 말씀을 안 해 주시고.”
“돈 쓰러.”
“얼마요?”
“한 100억?”
“네?”
성윤은 손을 흔들며 호텔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성윤은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앞에 검은 모자를 비뚤게 쓰고 회색 후드 티와 갈색 면바지를 입은 남자가 보인다.
그의 이름은 짐 레이너.
가까운 미래에 AI 기술의 최강자 중 하나가 될 회사 ‘레이너’의 오너다.
꿈속을 통해 미래를 봤을 때 레이너의 가치는 수백 조에 이른다.
성윤은 이 회사에 투자하려 한다.
투자를 한 후 상장만 되면 벤처 사업가 신중석의 회사에 투자했던 것은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돈이 뻥튀기될 거다.
문제는 늦지 않았을까 하는 거다.
성종 윤 회장이 직접 확인하는 문서에서 이 회사의 이름이 거론됐다.
한국에서는 아직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곳.
하지만 미국에서는 어떤지 모른다.
이미 누군가 빨대를 꽂았다면 지분을 지키기 위해 투자받기를 꺼릴 거다.
짐 레이너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저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뭐죠?”
“AI 기술을 연구한다고 들었는데요.”
“아, 네.”
그의 표정이 찝찝해 보인다.
속마음을 들어 보면 계속 의심하고 있다.
아직 그의 연구가 세계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국에서 찾아왔으니 이해할 수 없을 거다.
“투자하고 싶습니다.”
짐 레이너는 성윤을 살폈다.
성윤의 복장은 고급스럽지 않다.
청바지에 가벼운 티를 걸친 게 전부다.
투자를 한다고 해도 얼마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짐 레이너가 심드렁하게 묻는다. “여기까지 날아왔으니 들어는 봐야겠죠? 얼마를 투자하실 생각인가요?”
“900만 달러.”
“What?”
900만 달러······. 약 100억이다.
< 욕심내지 않고 모종 심기. -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