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욕심내지 않고 모종 심기. - (1) >
* * *
단아한 모습의 아나운서가 텔레비전 화면에 보였다.
그녀가 긴장감 넘치는 목소리로 입을 연다.
-재보궐선거 출구 조사 예측 결과입니다. 이번 재보궐선거는 시도지사를 포함하여 총 열네 개의 지역에서 선거가 이뤄졌습니다. 민국당이 여덟! 대한당이 셋! 진보당이 하나! 무소속 하나! 경합 지역 하나로 예측됐습니다! 민국당의 압승이 예상됩니다.
예측 결과의 발표에 민국당은 난리가 났다.
손뼉을 치고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마저 보인다.
누가 보면 월드컵에서 우승한 줄 알겠다.
하지만 대한당은 달랐다.
텃밭이라 여긴 곳에서도 죽을 쒔다.
찬물이 쏟아져 내린 것처럼 모두 굳은 표정이다.
방송국 카메라가 비추고 있지만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성윤은 담담했다.
대한당의 패배는 예상했던 것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로 대한당의 상징이 되어야 할 대통령이 뒷방 노인네가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경제는 계속해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이다.
부동산은 폭등했고 양극화가 심해졌다.
둘째로 강상원 의원의 일본 스캔들이었다.
연이어 터지는 대한당의 성 스캔들은 국민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셋째로 국민은 새로운 정권을 원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정치를 했는데 승리를 욕심내면 도둑놈이다.
대한당은 책임을 져야 했다.
성윤은 계속해서 텔레비전을 바라봤다.
주변에서 탄식이 들려왔지만 이번 재보궐선거의 승패는 관심 밖이다.
관심 있는 것은 오직 임인희 변호사와 오강민이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서안시 시장입니다. 무소속 임인희 예측 1위 52.6%.
성윤의 눈에 힘이 콱 들어갔다.
‘여기는 됐어.’
2위와 10% 이상 차이가 벌어졌다.
오차 범위를 생각해도 완벽한 당선권이다.
‘이제 지역구 한 명.’
이제 오강민이 남았다.
성윤의 머릿속에 앞으로의 계획이 착착착 정리되기 시작했다.
권력을 통해 화려한 생활만 고민하는 자들과 어떤 방식으로 싸워야 할지······.
그들을 치운 후 등장할 이준대를 어떻게 박살 내야 할지······.
성윤은 꿈속을 통해 미래를 봤다.
비록 간접 경험이었지만 수십 년을 정계에서 뒹굴었다.
그 과정에서 권력에 취해 흥청망청 보내는 인간들을 수없이 봤다.
그들은 인기를 위한 보신 정치를 했다.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며 국익보다 개인의 이익을 우위에 놓았다.
어설픈 정세 판단으로 대한민국 국민을 위기에 몰아넣기도 했다.
성윤의 번뜩이는 눈빛이 주변을 향했다.
지금 이 자리에도 그런 국회의원이 가득하다.
성윤이 그들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
뒤집어 버릴 생각이다.
그 자리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채울 것이다.
그럼, 기름진 배를 두들기며 국민을 내려다보는 거만한 사람은 사라진다.
진짜 일하는 사람만이 남아 있을 거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계속되었다.
-이어서 경합 지역인 수원 14선거구입니다. 예측 1위, 민국당 진기성 27.1%. 2위, 대한당 오강민 27%. 3위, 진보당 이정용 26%.
수원 14선거구가 0.1%의 차로 경합하고 있다.
당사로 오면서 봤던 자체 여론조사보다 지지율의 차가 더 줄어들었다.
가능성이 더 커진 거다.
그리고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은 의원들의 시선이 성윤에게 향했다.
‘오강민을 공천한 게 이성윤이지?’
지금 대한당의 상황은 텃밭에서도 똥을 싸며 병신 취급을 받는 중이다.
그런데 대한당의 깃발을 용납하지 않는 곳에서 오강민이 선전하고 있다.
의원들의 눈빛이 반짝인다.
‘생각해 보면 저놈이 들어간 선거에서 진 적이 없어.’
‘운이 좋은 놈······ 실력 좋은 놈보다 더 필요한 법이야.’
선거가 끝나면 대통령 후보 경선이 시작된다.
대한당의 각 계파는 지금껏 계파 내부의 교통정리를 했다.
경선에 나갈 후보를 정하고 적과 아군을 식별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외부 인재를 영입해야 한다.
이들의 머릿속에 성윤의 이름이 각인되었다.
운 좋은 사람을 이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윤은 여전히 텔레비전을 응시하고 있었다.
출구 조사가 끝났고 본격적으로 개표가 시작됐다.
누군가 팔을 툭 쳤다.
고개를 돌려 보자 채정학 대표다.
“담배 하나 태울까?”
“아, 네.”
“대표님, 저도 가죠.”
다른 의원들이 같이 피우자며 엉덩이를 뗀다.
결과가 나오려면 오랜 시간이 남았다.
그동안 초조함을 달래고 싶었다.
하지만 채정학 대표가 손을 저었다.
“이 의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엉거주춤 일어났던 사람들이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자리를 잡는다.
따라붙는 사람은 없었다.
성윤은 채정학 대표를 따라 흡연실로 이동했다.
채정학 대표가 담배를 입에 문다.
성윤이 채정학 대표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걱정이 많으시겠습니다.”
“한 방 맞았어. 그런데, 얻어맞는 것은 지금부터 시작이야.”
당 대표는 선거의 결과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지도력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첫 선거에서 참패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덤벼들 놈이 한둘이 아닐 거다.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라는 놈.
의견을 들어 주지 않으면 탈당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계파까지······.
모두 당 대표의 목에 개 목걸이를 채우기 위해 난리를 피울 거다.
채정학 대표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서안시 시장은 임인희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된 것 같지?” “네.”
성윤은 힐끗 채정학 대표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지금 서안시의 시장까지 살펴볼 여력은 없다.
‘그런데······ 왜 서안시를?’
채정학 대표의 말이 이어졌다.
그의 목소리가 무겁다.
밀담을 나누려 했던 목적이 나올 것 같았다.
“자네가 임인희 시장의 명함을 받아서 돌린 적이 있다고 하던데······.”
채정학 대표는 말끝을 흐렸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서안시 대한당 시장 후보 정청호의 유세를 도울 때였다.
성윤은 임인희 변호사와 마주친 적이 있다.
그녀에게 명함을 대신 돌려주겠다며 달라고 했었다.
몇 장 되지 않았고 개인적인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 일을 채정학 대표가 알고 있다.
물론 당 대표에게 정보 라인이 존재한다.
그래서 안다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문제는 말을 꺼낸 이유다.
성윤은 채정학 대표의 속마음을 들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도와줬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우리 당 후보의 지지율이 압도적이었고 임인희 후보는 당선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명함을 같이 돌려주면 우리 당의 배려나 배포를 보여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지 그뿐?”
채정학 대표는 물끄러미 성윤을 바라본다.
그의 속마음이 들려온다.
그 목소리가 간절하다.
-자네가 의미 없이 움직일 사람이 아니잖아?
성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큰 의미는 없었습니다.”
채정학 대표가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다.
속마음에는 아쉬움이 쌓이고 있다.
그의 입에서 뿌연 연기가 입에서 내뱉어졌다.
“이 의원,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말씀하십시오.”
“임인희 후보······ 우리 당으로 영입할 수 있을까?”
“영입요?”
“서안시는 원래 우리 당이 유리했잖아? 임인희 후보도 우리 당에 들어오는 게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 같은데. 자네와도 원활한 소통이 될 것이고.”
채정학 대표의 마음은 다른 의원들과 달랐다.
자기 이득을 따지지 않는다.
그녀를 영입해서 단 하나의 지역이라도 더 손에 얻으려 하고 있다.
그래야 다가올 대선에서 청와대의 자리를 뺏기지 않을 테니까.
그는 대한당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윤은 대한당을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인은 당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국민이 뽑아 준 거다.
성윤은 당을 넘어서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의견은 전달해 보겠습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대한당에 넘겨줄 마음은 없었다.
그녀는 성윤의 계획에 필요한 사람이다.
앞으로 그릴 큰 그림에 시작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입으로는 대한당의 충신이 되어야 했다.
채정학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네.”
채정학 대표가 담배를 비벼 끄고 흡연실을 떠났다.
혼자 남은 성윤은 긴 한숨을 내뱉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흐릿한 연기가 흐른다.
채정학 대표에게 조금은 미안했다.
성윤은 채정학 대표가 진심으로 잘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는 썩어빠진 대한당을 바꿀 성격이 못 된다.
더 나빠지지 않게 유지하는 게 전부다.
그의 성격은 부드럽다.
모두를 만족시키려 한다.
성윤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한당은 침몰할 겁니다.”
* * *
오강민은 초조한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개표가 거의 끝나 간다.
14개 지역 중 13개의 지역에서 당선자가 나왔다.
출구 조사와 다를 것은 없었다.
민국당이 여덟, 대한당이 세 곳을 먹었다.
나머지는 진보당과 무소속이 하나씩 가져갔다.
하지만 수원 14선거구는 아직이다.
흔해 빠진 당선 유력이라는 글자도 보이지 않는다.
진기성과 오강민 그리고 진보당 이정용이 쉬지 않고 엎치락뒤치락하는 중이다.
‘씨발······.’
오강민은 초조한 표정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어 냈다.
갑자기 스포츠가 떠올랐다.
축구의 펠레 스코어, 야구의 캐네디 스코어······.
지켜보는 관중은 즐겁겠지만 선수는 죽을 맛이다.
그것은 진기성도 마찬가지였다.
새벽 2시가 넘어갔지만 피곤한 줄 몰랐다.
스무 표, 서른 표 차이로 순위가 뒤바뀌는 중이었다.
피가 말라 갔다.
‘하······.’
대한당의 텃밭에서도 민국당의 깃발이 꽂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민국당의 텃밭에서 대한당 그리고 진보당 후보와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아니, 이제는 체면 따위는 필요 없다.
제발 이기기만을 바랐다.
그때······.
표가 진기성에게 확 몰리기 시작했다.
단번에 400표 차이!
“와!”
캠프 관계자들이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선대위원장은 휴대폰을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상자 끝난 거야? 아니야? 그럼, 몇 개 남았어? 거기가 어디야?”
통화를 종료한 선대위원장이 진기성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이제 마지막 상자를 쏟는다고 합니다.”
“그게 어디죠?”
“혁신 초등학교 쪽입니다.”
진기성의 입에서 낮지만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됐어.’
이제 남은 투표 상자는 하나.
혁신 초등학교가 있는 곳은 유리한 지역이다.
그곳에 민국당과 진기성의 지지자들이 몰려 있다.
두 사람이 속삭이는 말을 들은 캠프 관계자가 입을 열었다.
“혁신 초등학교가 남았고 400표 차이면······.”
선대위원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조용히 해. 부정 타.”
“아, 네.”
캠프 관계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앞에 긴 싸움의 승리가 보였다.
‘길어야 한 시간······.’
피 말리는 싸움을 안주 삼아 축하주를 마실 거다.
웃고 떠들다가 집에 가서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다.
모두 입술을 씰룩이며 화면에 집중했다.
* * *
지이이이잉.
성윤의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새벽 3시 15분, 오강민이었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성윤의 시선이 텔레비전으로 향했다.
아나운서가 상기된 목소리로 떠들고 있다.
-수원 14선거구! 최종 득표수 57표 차. 오강민 후보가 0.02% 앞서며 승리했습니다!
성윤이 입을 열었다.
“고생했습니다. 오늘은 편히 쉬십시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같은 시각······.
진기성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떤 감정도 들지 않는다.
그저 멍하다.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
* * *
며칠 후.
성윤은 메일을 확인했다.
주로 사용하는 국내 포털 사이트의 메일이 아니다.
해외 계정이다.
오강민에게 메일이 와 있다.
그는 약속대로 성종 윤 회장에게 들어가는 정보를 보냈다.
A4 용지로 37장.
성윤은 프린트해서 책상으로 가져왔다.
한 장씩 읽어 내려갔다.
다 읽은 것은 정우에게 넘겼다.
정우는 서류를 눈으로 훑은 후에 바로 파쇄기에 넣는다.
그렇게 하나씩 읽고 있다가······.
“정우야?”
“네?” “신중석 대표에게 연락해서 주식 매각해.”
“얼마나요?”
정우는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눈을 깜빡인다.
“전부.”
“네? 전부요?”
“그리고 미국 좀 다녀오자. 비행기 예약해.”
“의원님? 하나씩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성윤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말해 줘도 정우는 이해 못 할 거다.
성윤이 들고 있는 문서는 AI 기술 보유 회사를 조사한 보고서다.
여기에 대단한 수식어 없이 그저 이름만 적힌 회사가 있었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을 거다.
보고서의 분량 채우기로 생각하며 넘겼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성윤은 이 회사를 알고 있었다.
가까운 미래에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릴 회사다.
< 욕심내지 않고 모종 심기. -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