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이지 않는 손. - (1) >
방송을 촬영하고 있어도 어떤 문제가 터지면 중단되는 경우가 많다.
여자, 술, 도박, 비리.......
하지만 진기성에게 그런 것은 없었다.
오래전, 성윤은 정우에게 진기성과 이준대에 관한 조사를 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다.
하지만 부실하다.
이준대는 미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조사의 한계가 명확했다.
그의 재산과 겉으로 보이는 활동이 전부였다.
하지만 진기성은 한국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다.
조사는 수월했지만 비리나 더러운 행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순수한 인권 변호사였다.
말로만 착한 척, 사람 좋은 척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약한 자를 돕고 있었다.
지금 시점에서 진기성을 비리로 털어낼 수는 없다.
성윤이 시선을 들어 앞을 바라봤다.
PD는 정우와 대화를 이어가는 중이다.
“PD님?”
“아, 네.”
PD가 고개를 틀어 성윤을 향했다.
“죄송하지만, 진기성 변호사의 방송 출연... 누가 의뢰했죠?”
진기성을 잡을 수 없다면 그 위를 치면 된다.
하지만 PD는 그 위를 가르쳐 줄 마음이 없다.
그가 슬쩍 웃으며 말한다.
“의뢰한 사람 없어요. 있다고 해도 말씀드릴 수 없고요.”
방송국은 외압에 약하다.
언론이라는 권력을 등에 업고 있지만 정치인이란 괴물의 도구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특정 정치인의 의뢰를 받았다는 소문이 돌면 반대 측에서 이를 악물고 박살내려 한다.
PD 정도는 힘 한번 써보지 못 하고 철저하게 부서진다.
그래서 PD는 얼버무렸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성윤의 귀에 들어오고 있었다.
-민국당 김상록 의원.
성윤은 입술을 쓸었다.
‘김상록?’
김상록 의원은 민국당 당대표의 오른팔이다.
능력보다 인맥으로 그 자리를 지켜가는 사람.
민국당의 깃발만 들고 있으면 당선되는 텃밭에서만 둥지를 트는 보신주의의 끝판 왕이다.
그리고 덩치가 꽤 큰 거물이기도 하다.
잘 못 건들면 대한당과 민국당의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겁낼 성윤이 아니었다.
“그럼, 촬영 내용을 좀 여쭤보겠습니다. 의뢰한 정치인과 진기성 변호사가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있나요?”
PD가 난처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진기성 변호사가 인권 변호사니까 정치인과 만나는 장면이 있기는 하지만... 의뢰한 사람은 정말 없어요.”
그럴 줄 알았다.
김상록 의원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진기성 변호사의 방송 촬영에 자신의 얼굴을 굳이 넣었다.
진기성 변호사를 등에 업고 자신의 이미지를 좋은 쪽으로 세탁하기 위해서다. 이미 김상록 의원의 방송 촬영 분 녹화는 끝난 상태.
성윤에게는 다행이었다.
‘김상록 의원의 문제가 터지면 촬영은 늦어질 거야.’
김상록 의원의 문제가 터지면 방송국은 그의 분량을 편집해야 한다.
또는 그 부분을 다른 내용으로 끼워 넣어야 한다.
시간이 늦춰질 수밖에 없다.
그럼, 임인희 변호사의 방송이 먼저 나갈 수 있다.
진기성과 임인희......
겉으로 보이는 스펙의 차는 크지 않다.
진기성은 약자를 돕는 인권 변호사.
임인희는 공단 노동자에서 에스 로펌의 변호사가 된 인생 역전의 스토리.
그래서 이미지 선점이 중요하다.
진기성보다 먼저 이름을 알려야 선거에 돌입했을 때 좋은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
PD와의 식사를 마친 후 밖으로 나왔다.
이제는 임인희 변호사에게 가야 한다.
차가 이동하며 성윤은 시선을 창밖으로 향했다.
머릿속에는 김상록 의원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셀 수 없는 많은 생각이 복잡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확실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는다.
꿈속에서 이 시기의 성윤은 대한당 박대철 의원의 보좌진으로 있었다.
민국당에 관한 정보는 많지 않다.
신문에 나왔던 사건 사고만 기억한다.
내부적인 일은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정우야, 난 저기서 내려줘.”
“어? 여기요? 임 변호사는요?”
“혼자 가도 되는 일이잖아. 끝나면 연락해.”
정우는 핸들을 틀었다.
“그런데, 어디 가시려고요?”
“오강민 좀 만나려고.”
“오강민? 안기부요?”
“어.”
정우는 더 묻지 않는다.
일이 끝나면 성윤이 어련히 잘 이야기해 줄 거다.
차가 멈췄다.
성윤이 안전벨트를 풀자 정우가 모자를 건넨다.
“요새 의원님 얼굴이 많이 알려졌잖아요. 웬만하면 모자 쓰고 다니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됐어. 알아봐 주면 감사한 거지.”
성윤이 차에서 내렸다.
정우가 손을 흔든다.
“그럼, 연락드릴게요.”
정우가 떠났다.
성윤은 휴대폰을 귀에 댄다.
통화 연결음이 두 번 이어지기 전에 오강민의 목소리가 다급히 들린다.
-네, 의원님!
오강민은 나이가 더 들기 전에 공천을 받고 싶어한다.
성윤의 전화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볼 수 있을까요?”
-아, 그럼요. 어디십니까? 제가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상암동입니다.”
성윤은 전화를 끊고 커피숍에 들어가 앉았다.
주변에 방송국과 직장이 많아서 그런지 앉을 자리도 부족해 보였다. 겨우 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주문한 아메리카노를 입에 대는 데 사람들이 힐끔힐끔 성윤을 본다.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맞지?”
“에이, 닮은 거야. 국회의원이 이 시간에 왜 여기 혼자 있냐?”
“그렇겠지?”
“그런데, 닮긴 닮았다.”
성윤이 슬쩍 웃으며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닮은 게 아니라 저예요.”
여성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맞잖아!”
“진짜야! 대박!”
가볍게 인증샷을 요구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싸인해 달라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실제로 보니까 잘생기셨어요! 앞으로도 좋은 일 많이 해주세요! 파이팅!”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은 한 여성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다.
성윤도 함께 주먹을 쥐어줬다.
“파이팅!”
그리고 잠시 후, 안기부 오강민이 성윤의 앞에 나타났다.
그가 정중히 허리를 굽힌 후 맞은편에 앉는다.
성윤이 슬쩍 주변을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여기서 대화하기는 불편하시죠?”
듣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오강민은 예순이 훌쩍 넘었다.
커피숍의 딱딱한 의자는 불편했다.
하지만 오강민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사람 많고 시끄러운 편이 보안에는 좋을 때가 있으니까요.”
“그럼, 여기서 이야기하죠.”
오강민은 긴장된 한숨을 내뱉는다.
정치라는 그의 꿈이 성윤에게 달려 있어서다.
이 바닥은 공천권 가진 놈이 왕이다.
물론 성윤에게 공천권은 없다.
하지만 성윤이 추천하면 될 가능성이 크다.
성윤이 입을 열었다.
“공천권... 세 가지를 주시면 추천하겠습니다.”
“세 가지요?”
“하나는 목줄.”
성윤이 줄을 잡듯 주먹을 쥐었다 폈다.
오강민에게 권력을 주었다가 오히려 당할 수도 있다.
그 같은 인물이 어린 성윤의 손바닥 위에서 쫄랑쫄랑 뛰노는 것으로 만족할 일은 없어서다.
오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리겠습니다. 제 목을 날릴 수 있을 겁니다.”
“다음은 숨은 사람......”
오강민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숨은 사람이라뇨?”
“군사 정권이 끝나며 안기부 사람들은 짓밟혔습니다. 그런데, 정권의 칼을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 꽤 많다고 들었어요. 그중에 가장 큰 죄를 저지른 사람......”
성윤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건들며 말을 잇는다.
“헤드. 어디에 숨어 있죠?” 이것은 정우의 한이다.
정우의 아버지는 조작된 혐의로 안기부에 끌려가 고초를 받다가 결국 사망했다.
정우가 정치권에 들어온 이유다.
물론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는 개인적인 이유는 아니다.
그런 더러운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을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다.
오강민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는 모릅니다. 하지만 계속 찾아보겠습니다. 그럼, 마지막은......”
“민국당 김상록 의원의 비리.”
“......!”
오강민의 눈이 커진다.
“김, 김상록이요?”
“네.”
오강민은 성종 그룹 내부에서 찌라시를 취합하는 일을 한다.
전공은 국회다.
그래서 성윤이 백형욱, 김대성을 보냈다는 것은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대한당의 일이었다.
내부에서 지지고 볶고 싸운 거다.
민국당은 외부다.
싸움을 거는 것은 위험하다.
어쩌면 국회가 전쟁터로 변할 수 있다.
그의 속마음을 들은 성윤이 깍지를 끼고 몸을 기울였다.
차가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며 입을 연다.
“다른 생각하지 마세요. 오강민 씨만 생각하세요. 제가 바라는 것을 가지고 와서 공천을 얻느냐, 아니면 성종에서 찌라시나 만지면서 여생을 보내느냐.......”
오강민은 멍한 눈으로 성윤을 향했다.
‘국회의원... 국회의원이 될 수만 있다면......’
그는 언제나 권력의 하수인이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움직였고 생각했다.
지금도 재벌의 정점이라는 성종 그룹 윤 회장의 아래에 존재하고 있다.
오로지 윤 회장의 미래를 위한 부속품으로 살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삶, 마지막은 스스로가 권력자가 되고 싶었다.
성윤의 손에 질질 끌려 다닌다고 해도......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가지고 오겠습니다.”
“좋은 결정하셨어요.”
성윤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 시각, 정우는 임인희 변호사와 마주 앉아 있었다.
전통 찻집이었다.
정우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그녀의 앞에 뒀다.
“뭔지 아시죠?”
“...뭐죠?”
“대포폰이요.”
임인희 변호사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녀는 변호사다.
법을 수호하는 사람.
그런데, 대포폰이라니.......
정우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우리 의원님은 대한당이에요. 게다가 덩치가 커지면서 파리가 많이 꼬이기 시작했어요. 감시하는 눈이 많아졌죠.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변호사님을 응원하려면... 보안이 필요해요.”
임인희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휴대폰을 손에 쥔다. “알았어요.”
잠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다시 시선을 들어 정우를 향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
“이성윤 의원님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죠? 조금 알아봤어요. 이성윤 의원님은 꽤 거물 측에 들어가더라고요.”
어느새 성윤과 함께 하는 사람이 많았다.
고등학생에서 노인까지, 지지하는 세력도 꽤 탄탄해 보인다.
그런데, 성윤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무소속을 만들어 아무도 모르는 세력을 손에 쥐려 한다.
그 의도가 궁금했다.
정우는 물끄러미 임인희 변호사를 본다.
성윤의 생각......
정우가 모든 것을 알고 있지는 않다.
가까이에 있으며 추측만 하고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안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만약 그게 아니라면......”
정우는 뒷말을 하려다 말았다.
만약 성윤이 초심을 잃고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려 한다면......
정우는 성윤을 박살낼 생각이었다.
모시는 의원이기도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형이기도 하니까.
추해지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정우가 시선을 들어 임인희 변호사를 본다.
“믿어도 좋아요.”
***
며칠 후......
민국당 김상록 의원의 사무실.
그의 책상에는 낡은 점퍼가 아홉 벌이 놓여 있었다.
김상록 의원은 신중한 태도로 낡은 점퍼를 본다.
오늘은 12월 31일.
올해의 마지막 일정은 암센터 방문이었다.
최대한 서민적으로 차려 입고 갈 계획이다.
그는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볼 살을 출렁이며 점퍼 한 벌을 손에 쥐었다.
“이거 몇 년 된 거야?”
보좌관이 옆에 서서 입을 연다.
“8년입니다.”
김상록 의원의 시선이 그 옆으로 향한다.
“이건.”
“12년입니다. 그때... 한 10만 원정도 했을 겁니다.”
김상록 의원은 12년이 된 점퍼를 손에 들어 입어 본다.
거울을 향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다.
거울 속의 김상록 의원은 12년 된 점퍼를 입으며 서민으로 변신했다.
“괜찮네. 이걸로 하지. 시계는?”
“여기 있습니다.”
김상록 의원은 2만 원도 하지 않는 카시오 시계를 손목에 채웠다.
거울을 보며 머리를 헝클었다.
제법 수수한 모습이 거울에 비친다. 재물에는 욕심 없고 서민을 위해 일하는 모습이다.
“어때?”
“멋지십니다.”
“기자들은?”
“시간에 맞춰 온다고 했습니다.”
김상록 의원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윤 보좌관, 정치인은 국민이 보고 싶은 모습을 보여줘야 해. 요즘 국민은 권위적이지 않은 국회의원, 서민적인 국회의원을 보고 싶어 해. 그런 사람이 자기들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지.”
“명심하겠습니다.”
김상록 의원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소파에 앉아 손톱을 만지작거리는 중년 여성이 보인다.
그의 아내였다.
김상록 의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가방이 그게 뭐야?”
“이게 왜요?”
에르메스다.
환자들 앞에서 패션쇼를 하는 것도 아니고......
저런 걸 손에 들면 서민 놀이를 할 수 없다.
기자들이 신나서 키보드를 두들기고 대한당을 지지하는 네티즌들은 ‘쑈하네.’ ‘또또 보여주기 한다.’ 등의 댓글을 남길 게 분명하다.
김상록 의원이 보좌관에게 말했다.
“윤 보좌관, 나 먼저 내려가 있을 테니까 코디 좀 해주고 같이 내려와.”
김상록 의원의 아내가 얼굴에 있는 모든 주름을 찌푸렸다.
“난 오늘 이거 들고 갈 거라니까요! 끝나고 동창회 있는데 비닐봉지를 들고 갈 수는 없잖아요!”
“나도 끝나면 당 간부들과 송년회 있어! 제발 말 좀 들어라.”
김상록 의원은 그녀를 흘겨보며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 담배를 입에 문다.
뿌연 연기가 흘렀다.
“젠장.”
김상록 의원은 민국당의 꽤 큰 거물이다.
그 역시 언젠가는 대권에 도전하는 것을 꿈꿨다.
하지만 아내가 문제였다.
과시욕이 컸고 뇌물이 들어오면 넙죽넙죽 받아 처먹었다.
‘대통령은 하늘이 내려주고 영부인은 따로 존재한다더니......’
아무래도 자신과 대권은 영 딴 세상 이야기 같았다.
그의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메시지다.
요즘 스폰으로 데리고 있는 여대생.
확실히 젊음이 좋기는 하다.
메시지만 주고받아도 통통 튀는 에너지를 얻는 것 같다.
아내에게는 오늘 일정이 끝나면 민국당 간부들과 송년회가 있다고 했지만 거짓말이었다.
오늘은 이 여대생을 만나기로 했다.
육십 대 중반의 주름진 손이 더듬더듬 메시지를 보낸다.
-기다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비벼 껐다.
대기하던 차량의 문을 열고 탔다.
탁, 문을 닫았다.
뒷좌석에 느긋이 등을 기대고 앉아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한다.
“윤 보좌관이랑 아내가 내려오기로 했으니까 기다려.”
그런데, 차가 출발한다. “기다리라니까!”
김상록 의원이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호통을 내리쳤다.
하지만 운전기사는 대답 없이 엑셀을 밟는다.
“야이 미친 새끼야, 멈추라고!”
“십 분만 드라이브를 했으면 합니다. 시간을 주십시오. 의원님.”
낯선 목소리.
김상록 의원은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그가 더듬거리며 묻는다.
“너... 너 누구야 이 새끼야.”
“서안시 동구 국회의원 이성윤입니다.”
< 보이지 않는 손. -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