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회의원 이성윤-113화 (113/300)

< 사람이 많으면. - (4) >

***

며칠 후, 아침부터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조금 전 오전 9시 50분, 강상원 의원이 검찰에 출석했습니다. 피해자와 국민께 죄송하며 검찰 수사에 성실히 임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채널이 돌아갔다.

[검찰은 강상원 의원의 아들 강 모 씨에 대한 수사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국적 포기 과정과 탈세에 관한......]

삑 소리와 함께 텔레비전 화면이 검게 변했다.

성윤은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하늘이 우중충했다.

비가 언제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강상원은 끝났어.’

강상원 의원은 길고 가늘게 살자는 정치관을 갖고 있었다.

언제나 한발 물러난 채 권력의 단 꿀을 빨아 왔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끝이다.

성윤에게 뒷덜미가 잡히며 교도소에 내동댕이쳐졌다.

이제 남은 생은 뜨신 아랫목이 아니라 차가운 교도소 바닥에 누워야 할 거다.

하지만 지었던 죗값을 치르기엔 부족하다.

문이 열렸다.

정우가 비닐봉지를 손에 들고 들어왔다.

기분 좋은 일이 있는지 실실 웃고 있다.

“왜?”

“의원님의 이름값이 높아지기는 했나 봐요.”

아침부터 생뚱맞은 소리를 하고 있다.

“뭔데?”

“대선 주자들한테 계속 전화가 오네요. 진 의원도 있고 서 의원도 있고 안 의원 그리고......”

이제 12월이다.

대권을 꿈꾸는 사람들은 몸을 풀기 시작했다.

대선은 2년 남았지만 대권 후보를 정하는 전당 대회는 1년 후다.

지금부터 존재감을 박아야 했다.

“스케줄 잡아볼까요? 대통령이 되면 장관을 시켜주겠다는 사람도 있는데......”

“뭐야? 대통령도 되기 전에 인사권부터 뿌리는 거야?”

정우가 킥킥 웃는다.

“그러게요.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어요.”

“안 해.”

정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그리고 성윤의 앞으로 다가왔다.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책상 위에 내려둔다.

안에서 토스트가 나온다.

“드세요.”

성윤은 오늘 아침을 못 먹었다.

일본 특사 이후 외국어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그래서 일본어, 중국어 학원의 새벽반을 다니는 중이다.

일어나서 도시락 배달을 하고 학원도 가고.

식사할 시간은 부족했다.

성윤이 토스트를 손에 쥐었다. 정우도 자신의 것을 꺼낸다.

“정효순 주임님은?”

“야채 토스트 사다 드렸죠. 흐흐.”

“잘했어.”

정우가 토스트를 한입 베어 물며 묻는다.

“그런데, 의원님은 누구를 지지할 거예요?”

다음의 대선, 꿈속에서는 전 당대표가 출마했었다.

하지만 꿈속과 현실의 상황은 다르다.

역사는 심하게 틀어졌다.

알 수 없는 미래로 나아가는 중이다.

전 당대표도 그렇다.

꿈속의 그는 권력자였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지나간 역사의 인물일 뿐이다.

잠시 꿈속을 기억하던 성윤이 입을 열었다.

“지지하는 사람?”

“네.”

“임인희.”

“임인희요? 임인희?”

정우는 임인희가 누구인지 떠올려봤다.

하지만 처음 듣는 이름이다.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누구예요?”

“변호사. 나이는 마흔둘. 이력이 특이해. 서른두 살까지 공장에서 3교대로 일하다가 뒤늦게 사법시험을 봤거든. 그리고 합격. 지금은 변호사.”

“그러니까 그게 누구예요?”

“서안시의 다음 시장.”

정우는 허탈하게 웃었다.

대권 주자를 말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서안 시장이라니.......

성윤이 말을 이었다.

“대권을 고민할 필요는 없어. 아무도 모르는 거야.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이 당선되기도 하잖아. 천운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대통령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란 말이 있다.

그리고 지지하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성윤이 책상을 짚으며 일어섰다.

“대선은 대선이고. 우리는 다음 보궐 선거를 준비해야지.”

내년 4월의 재보궐 선거는 대선 전의 모의고사였다.

각 정당의 거친 싸움이 예상됐다.

서안시 시장도 마찬가지다.

대한당과 민국당은 총력을 기울일 거다.

성윤은 그 자리에 자신의 사람을 앉힐 생각이다.

대한당도 민국당도 아닌 무소속으로......

정치인의 가장 큰 힘은 사람이다.

사람이 많을수록 그 힘은 거대해진다.

그리고 드러나지 않으면 않을수록 두려워진다.

무소속은 성윤의 그림자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거다.

정우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성윤의 생각을 모두 이해했으니까.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연다.

“임인희 변호사... 알아보면 되나요?”

“알아볼 필요 없어. 약속만 잡아줘.”

“그럼, 바로 확인해 볼까요?”

“어. 소속은 에스 로펌이야. 연락해 봐.”

정우는 휴대폰으로 에스 로펌을 찾기 시작했다. 그동안 성윤은 꿈속을 더듬었다.

임인희, 꿈속에서 잘 알던 사람이다.

변호사로서 성윤의 옆에 섰던 적이 있다.

그러니까 성윤이 검찰에 소환되었을 때다.

모함이었고 음해였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은 거짓된 정보를 믿었다.

성윤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어떤 변호사도 변호하지 않았다.

하지만 임인희 변호사가 나섰다.

그녀는 진실만 보려 했다.

그 사건 이후로 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

그녀는 무소속으로 작은 도시의 군수에 출마했다.

당선됐고 꽤 열심히 움직였다.

괜찮은 군수로 평가받았다.

그녀가 서안시 시장에 당선된다면 훌륭한 조력자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정우가 휴대폰을 내려두며 말한다.

“지금도 볼 수 있다는데요?”

“그래? 오늘 스케줄 딱히 없지?”

“네.”

“그럼,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해.”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

어차피 만날 것, 시간을 질질 끌 필요는 없다.

영입을 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만나는 게 좋다.

잠시 후, 성윤은 조수석에 올랐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 차가 조금 막힌다.

깜빡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인연을 맺었던 임인희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 그런가 보다.

오랜만에 꿈을 꿨다.

성윤은 요양원의 침대에 앉아 있었다.

낡은 침대, 녹이 슨 창틀이 보였다.

다리는 없었고 가슴에 느껴지는 통증은 삶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줬다.

문이 삐걱 열렸다.

주름진 노인이 들어왔다.

“이성윤 의원, 오랜만이야.”

5선 의원을 지낸 진기성이었다.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던 권력자.

성윤과는 오랜 정치 생활 동안 함께 했던 사람이다.

때로는 적으로, 때로는 아군으로......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갔다.

서로 노려보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진기성이 떠났다.

성윤은 침대 옆 테이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진기성의 운전수가 들고 온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를 뒤져봤다.

돈이 만져졌고 이어서 차가운 금속이 느껴졌다.

‘설마?’

검고 칙칙한 쇳덩이, 권총이었다.

성윤의 주름진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권총이 파르르 떨렸다.

진기성이 어떤 의미로 돈과 총을 넣어 뒀는지 알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며칠 돈이나 쓰며 떠나든가......

아니면 인생의 원수 이준대 전 대통령에게 꿈틀대는 모습을 보여주고 떠나든가......

결정하라는 것이다.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

.

.

탕!

“의원님! 의원님!”

성윤은 눈을 떴다.

상당히 걱정스러운 눈빛의 정우가 보인다.

성윤의 몸을 흔들고 있다.

“괜찮으세요?”

“어? 어. 괜찮아.”

정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와, 진짜 깜짝 놀랐어요. 도대체 무슨 꿈을 꾸셨기에......”

“악몽.”

정우는 다시 핸들을 쥔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리며 말한다.

“외국어 학원 다니지 마세요. 잠을 못 주무시니까 그렇죠. 앞으로 도시락 배달도 제가 할게요.”

“그럼, 너 과로로 죽어.”

“아.”

정우는 그 생각을 못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성윤은 시선을 틀어 창밖을 봤다.

진기성의 얼굴이 스친다.

‘아군이었고 적군이었던 사람......’

현실에서 만난다면......

‘미안하지만 시작부터 밟아야지.’

꿈속에서 친했다고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가만히 놔두기엔 두려운 사람이었다.

인권 변호사 출신이지만 그의 뱃속에는 시커먼 구렁이들이 수백 마리 존재한다.

***

그 시각, 여의도에 있는 한정식집이었다.

“진기성입니다.”

하얀 피부, 딱 봐도 선할 것 같은 인상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인권 변호사 진기성이었다.

“말은 많이 들었어요.”

맞은편에 앉은 민국당 대표 민유헌이었다.

그는 진기성을 보며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정치는 외모도 한몫한다.

사람들에게 호감 가는 인상일수록 유리한 법이다.

게다가 진기성의 이력은 화려하다.

인권 변호사로서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는 것은 꽤 괜찮은 스토리텔링이 될 수 있었다.

민유헌 대표가 입을 열었다.

“원래는 다음 총선에서나 공천을 주려고 했어요.”

진기성이 조용히 웃는다.

“공천에 욕심내지 않고 있습니다. 권리당원으로 있을 뿐입니다.”

물론 거짓이다.

한 발 빼는 것은 당연한 예의였다.

민유헌 대표는 빤히 알면서도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진 변호사 같은 사람이 국회의원을 하지 않으면 감히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과찬입니다.”

민유헌 대표가 술병을 들어 진기성의 잔을 채웠다.

“어쨌든, 보자고 한 것은 단 하나예요. 내년에 있을 보궐 선거..... 등판을 좀 해줬으면 해요.”

“보궐 선거요?”

진기성에게 보궐 선거는 관심 밖이었다.

시작부터 반쪽짜리 권력을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민유헌 대표가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내년 보궐 선거는 대선에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측되고 있어요. 대한당도 우리도 악을 쓰고 덤빌 예정이지요.”

“아, 네.”

“대한당이 집권한 십년 동안 이 나라의 경제는 파탄 났어요. 양극화는 심해졌고 가계 빚은 산더미처럼 불어나는 중이에요. 그뿐입니까? 대한당 의원들은 허구헛날 스캔들이 터지죠. 여기저기서 바지를 벗고 있어요.”

민유헌 대표의 목소리는 높아졌다.

대한당 의원들의 최근 스캔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특히 강상원 의원의 경우는 국가 망신이었으니까.

민유헌 대표가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이번에는 우리가 청와대의 주인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서 민국당은 보궐 선거에 진기성을 넣으려 한다.

보궐 선거에서 승리하면 대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된다.

그럼, 대한당의 대권 주자를 자근자근 짓밟을 수 있다.

진기성이 물었다.

“출마 지역은 어딥니까?”

“미안하지만 텃밭은 아니에요. 격전지입니다. 그래서 내가 직접 찾아와 부탁하는 거예요. 격전지에서 승리할 사람은 진기성 변호사뿐이 없다고 생각되었으니까요.”

진기성은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민유헌 대표의 말이 길다.

그렇다는 것은 격전지가 아니라 적진 한복판일 가능성이 높다.

나갔다가 개처럼 얻어맞고 돌아오는 곳......

“말씀해 주세요.”

“서안시 시장입니다.”

진기성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걸렸다.

서안시, 꽤 시끄러운 곳이다.

최근에 민국당 출신 시장이 중도 사퇴해버렸다.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사퇴하며 서안시에서의 민국당 지지율은 병신이 되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서안시에는 가장 핫한 인물이 존재한다.

바로 이성윤이다.

이성윤은 서안시에 성종 쇼핑 본사를 이전시켰고 1조 원의 공유지를 2조 원에 팔아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청년 벤처 사업가를 찾아내 서안시에서 창업시키는 중이다.

서안시는 전국에서 가장 창업률이 높고 실업률은 낮다.

그 덕에 서안시만큼은 대한당 지지율이 계속 치고 오른다.

“격전지가 아니라 적진 한복판이네요.”

민유헌 대표가 어색하게 웃는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진기성 변호사라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진기성이 술잔을 들어 단번에 마신다.

그리고 잔을 탁! 내려두며 시원하게 대답했다.

“해보겠습니다.”

민유헌 대표가 활짝 웃었다.

“큰 결심했어요.”

진기성도 정치권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이 나라의 권력을 송두리째 뒤바꾸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알고 있다.

정치권에서 크려면 강한 놈과 싸워 이겨야 한다.

성윤이라면 괜찮은 상대였다.

물론 이번 보궐 선거에서 성윤과 직접 싸우는 것은 아니다.

성윤은 이미 국회의원이다.

그저 대한당 후보자의 선거 운동을 도울 뿐이다.

‘하지만 간접 대결로 만들면?’

대한당의 후보를 꼭두각시처럼 만들고 성윤을 무대 위로 올리면 그리고 그 싸움에서 승리하면......

많은 것이 따라올 거다.

진기성의 입가에 조용한 미소가 걸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갖은 권모술수가 이뤄지는 중이었다.

***

“무소속으로 나가 달라고요?”

“네, 선거 비용은 제가 전부 대겠습니다.”

에스 로펌 건물 1층의 커피숍.

성윤은 임인희 변호사와 만나고 있었다.

임인희 변호사는 눈을 깜빡인다.

“의원님... 대한당 아닌가요?”

< 사람이 많으면. -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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