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회의원 이성윤-112화 (112/300)

< 사람이 많으면. - (3) >

퇴임사를 쥔 강정기 시장의 손이 가늘게 떨린다.

“시민을 위해서라......”

오랜 시간 잊고 있던 말이다.

강정기 시장도 처음은 지금과 달랐다.

약자를 위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정치인이 되었다.

성윤이 입을 열었다.

“시장님은 꽤 괜찮은 시민 운동가셨어요. 노조마저 버렸던 노동자의 편에 섰던 분이셨죠. 대학 다닐 때였나? 시장님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요. 돈도 명예도 필요 없다. 사망한 사람의 명예만 지켜 달라......”

강정기 시장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훌륭했던 과거인데,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다.

부끄러운 이유는 하나다.

자신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그의 초점 없는 눈동자는 과거를 떠올렸다.

시민 운동가였을 때다.

경기도의 한 공단에서 추락 사고가 일어났었다.

사고자는 이십 대 청년, 엊그제 아기가 태어났다고 행복해하던 남자다.

그날, 공장 천장에 매달린 기계에 이상이 생겼다.

남자는 모든 기계를 정지한 뒤 안전장비를 갖추고 수리하려 했다.

하지만 공장장은 반대했다.

하청을 준 대기업이 촉박한 시간을 줬기 때문이다.

기계를 정지하면 그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공장장의 닦달에 남자는 맨몸으로 올라갔다.

윙윙 돌아가는 기계.

그리고 십 미터가 넘는 높은 위치......

아슬아슬한 서커스를 보는 것 같았다.

‘어? 어?’ 하는 말과 함께 남자는 결국 추락했다.

쿵! 소리가 났고 남자는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런데, 회사의 안전 관리팀은 구급차를 부르지 않았다.

구급차를 부르면 기록에 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회사에 두지도 않았다.

회사에서 죽으면 큰일로 번지기 때문이다.

회사는 그를 트럭 짐칸에 실어 이송했다.

병원에 도착한 남자는 장기 파열로 사망하고 말았다.

사고 후 바로 조치를 취했다면 살 수도 있던 일이다.

갓 태어난 아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 끝났다.

남자는 세상을 떠났다.

어찌 된 일인지 모르지만 기업과 노조는 손을 잡고 사망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사망한 남자는 술에 취해 안전을 미준수한 멍청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남자의 아내는 젖먹이를 품에 안고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도와주는 사람 없었다.

정치인은 물론 회사의 동료도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당시 나섰던 유일한 인물이 강정기였다.

그가 기자들을 불러 목 놓아 외쳤다.

“저는 돈도 명예도 필요 없어요! 사망한 분의 명예만 살려주면 됩니다! 단지 그뿐이에요! 그러니까, 진실만 밝혀주세요. 진짜... 이건 아니잖아! 이건 살인이에요! 살 수 있던 사람을 죽인 살인이라고요!”

강정기 시장은 서럽게 울었었다.

옛 생각을 하던 강정기 시장이 시선을 들어 성윤을 봤다.

그가 억지로 웃는다.

“생각해 보니까 그런 인터뷰도 한 적이 있었네요.”

“그 기사를 보며 저도 시장님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강정기 시장은 눈을 꾹 감았다.

끝이 되면 지난날이 보인다.

약자를 지키기 위해 정치인이 되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민국당의 당원이 되었고 정치에 입문했다.

승승장구해서 시장까지 됐다.

하지만 그 자신이 강자가 되며 약자를 잊었다.

피눈물을 받아먹는 괴물이 되었다.

돌이키고 싶지만 이제는 끝났다.

후회의 한숨만 남았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의원님은... 저처럼 되지 마세요.”

성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그럼, 퇴임식 때 뵙겠습니다.”

강정기 시장은 퇴임사로 시선을 돌린다.

나가는 성윤을 보며 작게 말한다.

“퇴임사... 써 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제가 다시 쓰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시민들에게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성윤은 다시 한번 강정기 시장에게 허리를 굽혔다.

이제 그는 다시 시민 운동가로 돌아갈 거다.

그리고 서안시 시장 자리는 재보궐 선거로 돌입한다.

그 시각, 정우는 서안시 사무실에 있었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노트북을 가방에 담는다.

그리고 휴대폰을 찾아 성윤의 번호를 꾹 눌렀다.

잠깐의 통화 연결음 끝에 성윤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 정우야.

“네, 의원님. 끝났어요?”

-어, 지금 나왔어.

“외교관한테 갈 건데요. 같이 가실래요?”

외교관 서지유는 아직 호텔에 있었다.

-그래, 시청 앞 햄버거 가게에 있을게. 이쪽으로 와.

“거기 말고요. 서안 여고 앞에 햄버거가 더 맛있어요. 프렌차이즈가 아니라 개인이 하는 곳인데요. 단품으로 치즈버거 드셔보세요. 가성비 최고!”

-서안 여고? 알았어. 거기 가 있을게.

“네, 도착 5분 전에 연락드릴게요.”

정우는 통화를 종료했다.

시선을 돌려 정효순 주임에게 향한다.

“주임님, 부탁했던 것 조사됐나요?”

“인쇄만 하면 끝나요. 잠시만요.”

프린터기에서 인쇄되는 소리가 들렸다.

정우는 곧장 손에 들고 서류 봉투에 담아 가방에 넣는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정우의 목소리는 밝다.

강상원 의원의 나체쇼 성추행 사건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었다.

강상원 의원은 그렇게 악당이 되었다.

하지만 악당이 있으면 영웅도 있는 법이다.

성윤은 영웅이 되었다.

외교관의 손목을 잡아끄는 장면에서 시청자들은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보듯 감탄을 내뱉었다.

강상원 의원이 쓰레기가 될수록 성윤의 미담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었다.

게다가 정치 기사의 남녀 비율을 보면 보통 남자가 많다. 그런데, 최근 성윤의 이름이 적힌 기사는 여성의 비율이 72%로 압도적이다.

댓글도 심상치 않다.

-현실판 로맨스 드라마 주인공.

-저 외교관 부럽다.

-이성윤 존멋.

-저도 오늘 팬클럽 가입했어요.

보좌관에게 최고의 기쁨 중 하나가 모시는 의원의 성공이다.

정우의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잠시 후, 서안 여고 앞에 도착했다.

차를 주차하고 햄버거 가게로 향하는데......

‘어?’

정우의 눈이 깜빡였다.

햄버거 가게 앞 유리창에 여고생 몇 명이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다.

휴대폰으로 연신 사진을 찍어 댄다.

“이성윤이야! 이성윤!”

“어떡해! 이쪽 봤어!”

몇 명이 성윤을 알아봤나 보다.

호들갑을 떨며 좋아하고 있다.

정우가 최대한 다정다감한 표정으로 학생들을 바라봤다.

“들어와서 찍어요. 햄버거 사줄 테니까.”

“네?”

학생들은 경계의 표정을 보낸다.

성윤은 알고 있지만 정우는 모르기 때문이다.

“이성윤 의원 보좌관이에요. 들어와요.”

정우는 학생들과 함께 햄버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성윤은 햄버거를 다 먹고 콜라를 마시던 중이다.

“왔어?”

성윤의 시선도 자연스레 옆으로 향했다.

여고생 넷이 보인다.

“누구야?”

정우가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인증샷 좀 찍어 주세요. 싸인도 좀 해주시고.”

“싸인? 인증샷?”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성윤이 손을 내밀었다.

“연습장 주세요.”

정치인이 시민들에게 얼굴도장 찍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지금의 인사 한번이 선거에서 한 표가 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기다렸다는 듯 연습장을 내밀었고 성윤은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적었다.

성윤이 싸인을 하고 있을 때 정우가 학생들을 보며 묻는다.

“몇 학년이에요?”

“2학년이요!”

“아......”

정우는 일부러 뒷말을 끌었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여고생이 넙죽 대답한다.

“다음 선거는 저희도 투표할 수 있어요. 꼭 뽑을게요. 다른 곳 놀러 안 가고 꼭!” 정우가 슬쩍 웃는다.

“세트 메뉴 시켜줘야겠네.”

“그럼, 대통령 선거 때도 이성윤 의원님 찍을게요!”

싸인을 마친 성윤이 입을 열었다.

“치즈 스틱 추가!”

“꺄아악!”

학생들이 손뼉을 치며 방방 뛴다.

성윤은 싸인을 해준 후 학생들과 인증샷을 찍었다.

학생들은 SNS에 올리겠다며 엄지를 척 내민다.

뒤늦게 성윤을 알아본 햄버거 가게 사장도 다가왔다.

그는 싸인을 받더니 매장 한쪽에 걸어 둔다.

가보로 간직하겠다는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하면서......

그렇게 햄버거 가게를 일단락 지은 후 차에 올랐다.

호텔로 향하며 정우의 입꼬리가 찢어질 것 같았다.

“이래서 연예인 하나 봐요. 싸인회하는 기분이 괜찮네요.”

싸인회라고 말했지만 학생 네 명과 매장 주인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정우는 신났다.

그가 계속 말한다.

“종종 고등학교 앞에 나올까요? 2, 3학년 애들은 다음 총선에 투표할 수 있잖아요? 그럼, 3선은 보장! 흐흐.”

“됐다.”

“맞다. 깜박 잊고 있었는데요. 외교관 서지유에 관한 파일 가지고 왔어요. 뒷자리.”

성윤이 팔을 뒤로 뻗어 정우의 가방을 들었다.

서류 봉투를 열어 파일을 꺼낸다.

방금 사무실에서 정효순 주임이 인쇄한 것이다.

성윤이 파일을 무릎 위에 놓고 물었다.

“읽어 봤어?”

“아뇨, 전 아직.”

성윤은 파일을 넘기기 시작했다.

서지유에 관한 이력이다.

어느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성적은 어떠했으며 교우 관계는 어쩌고저쩌고.

“나이가 스물여덟이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고 여섯 개 국어를 하고...... 어떻게 생각해?”

“괜찮은 인재죠.”

“그렇지?”

“네.”

성윤은 서류를 다시 서류 봉투 안으로 집어넣었다.

‘인재......’

조만간 벤처 사업가 신중석의 아이가드 워치가 상장된다.

그럼, 성윤은 또 막대한 돈을 손에 쥐게 될 거다.

그 돈의 대부분은 재투자할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정치에 돈이 필요하니까.

돈이 궁하면 비리와 손을 잡게 되니까!

그런 것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전부를 재투자할 생각은 아니다.

남은 돈으로 정책 연구실을 만들려 한다.

경제, 법, 복지 등 각 분야의 전문가를 뽑아 갈아 넣을 생각이었다.

그중에는 외교도 포함된다.

호텔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정우가 입을 연다. “잠 못 잤겠죠?”

“아마.”

성윤은 서지유에게 텔레비전과 인터넷 사용을 금지 시켰다.

그 지시를 따랐다면 그녀는 밖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초조한 마음으로 성윤의 연락만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하다.

성윤은 그녀가 묵고 있는 객실 앞에 섰다.

초인종을 누르고 입을 연다.

“이성윤입니다.”

문이 딸칵 열렸다.

걱정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녀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하다.

“괜찮으세요?”

그녀가 살짝 웃는다.

“조금 무섭기는 했어요. 그런데, 의원님께서 괜찮다고 말씀하셨잖아요.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어요.”

성윤은 그녀의 속마음을 들어봤다.

그녀는 성윤의 지시를 따랐다.

텔레비전과 휴대폰을 만지지 않았다.

“대담하시네요.”

성윤은 창가 쪽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그녀가 맞은편에 앉는다.

성윤이 입을 열려 하자 그녀가 잠시 손을 젓는다.

“물, 물 좀 마실게요.”

대담한 줄 알았는데 그런 척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걱정되는 모양이다.

그녀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표정을 보니 장난을 치고 싶었다.

성윤이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죄송합니다. 큰일 났습니다.”

“네?”

그녀의 표정이 어지러워졌다.

눈빛은 초조하다.

“...큰일 나다니요?”

성윤이 얼굴을 쓸었다.

“여기까지는 저도 예상을 못 해서...... 죄송합니다.”

서지유는 마른 입술을 꾹 다문다.

잠시 고민스러운 표정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괜찮아요. 말씀해 주세요.”

성윤이 정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우 역시 무거운 표정으로 저벅저벅 다가왔다.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놓는다.

서지유는 눈동자만 움직여 화면을 본다.

댓글이 보였다.

-외교관 존예!

-보정 한 거지.

ㄴCCTV를 어떻게 보정하냐?

ㄴSNS 말한 거야. 가서 봐. 뽀샵이더라.

ㄴ전문가입니다. CCTV와 SNS 사진 비교 결과 뽀샵 아니라고 판정 났습니다. -길거리 나가면 흔한 얼굴.

ㄴ도대체 어느 길거리에 저런 얼굴이?

ㄴ방구석에 있지 말고 나가봐. 흔하지.

ㄴ그러니까 어느 길거리냐고! 알아야 나가지!

ㄴ예쁜 것은 그냥 예쁘다고 하자!

서지유가 눈을 깜빡이며 성윤을 본다.

“이, 이게 무슨.....?”

“이건 예상을 못 했어요. 외교관님이 예쁘다고 난리네요.”

“네?”

“다른 일은 다 잘 풀렸습니다.”

그녀는 멍하다.

눈만 깜빡인다.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진실인지 알 수 없다는 얼굴이다.

그러다가 성윤과 정우가 배를 잡고 웃는 모습에 긴장이 풀렸나 보다.

뚝뚝 눈물을 흘린다.

눈물을 닦으며 성윤과 정우를 흘겨본다.

“두 분 다 진짜... 못됐어요.”

그녀를 집 앞에 내려줬다.

경호원 두 명은 며칠 더 그녀를 보호할 거다.

일은 끝났지만 물리적 보복은 아직 마음 놓을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다시 서안시로 가는 길.

정우가 핸들을 틀며 물었다.

“왜 말 안 했어요?”

“어떤 거?”

“연구소 만드는 거요. 외교 분야에 들어와 달라는 말.”

“진짜 그만두게 되면, 그때 얘기해도 되잖아. 우리도 아직 시간이 있고.”

“어차피 그만둘 것 같던데......”

그녀는 이미 그만둘 마음을 먹고 있었다.

외교부 장관부터 자신의 윗선까지, 이번 사건을 겪으며 지긋지긋했으니까.

하지만 성윤은 보채지 않았다.

시간을 두고 지켜보려 한다.

성윤이 대답하지 않자 정우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때요?”

“뭐가?”

“집안 유복하고 학벌 좋고 예쁘기도 하죠. 그리고 이런 일이 벌어지면 남자들도 안절부절못하잖아요? 그런데, 신기할 정도로 침착한 게 마음에 들던데요.”

“그러니까 뭐가?”

“의원님 여자 친구. 그러니까 내 형수님.”

“됐다. 가자.”

성윤은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손을 저었다.

***

대한당 당사.

강상원 의원은 사무실에 있었다.

보좌관도 없이 혼자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내려 둔다.

화면에는 ‘나체쇼’라는 댓글이 가득하다.

깍지를 끼고 생각에 빠졌다.

어떻게든 탈출구를 찾아보는 중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그의 인생이 향하는 방향은 오직 교도소뿐이다.

불안했고 무서웠으며 화가 났다.

혼자만 죽을 수는 없었다.

그럼, 억울하다.

머릿속에서 의원들의 얼굴이 스쳤다.

권력의 단 꿀을 빨고자 쫓아다니던 똥파리들. 다들 모른 척 하고 있다.

전화조차 받지 않는다.

‘이 놈들을?’

다 같이 자폭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을 건들 수는 없다.

감옥에 가도 잡을 끈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밖으로 나올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세상이 잠잠해지면 놈들은 다시 얼굴을 기웃거릴 거다.

강상원 의원이 마른 입술을 손으로 훑었다.

‘이성윤만큼은 가만히 둘 수 없어.’

잠시 생각에 빠졌던 그가 서랍을 열었다.

서류를 파헤친다.

통장 하나가 콱! 손에 잡혔다.

강상원 의원의 주름진 얼굴이 환하게 웃기 시작한다.

1억 원이 들어 있는 대포통장.

이 통장이면 성윤과 함께 교도소에 갈 수 있다.

이것을 성윤의 것으로 만들면......

허접한 발상이고 모함일 뿐이다.

하지만 성공 가능성은 있다.

성윤은 원수가 많다.

자잘한 흠집 하나로 원수들이 대동단결할 거다.

그들이 하나로 뭉쳐 들고 일어날 게 분명하다.

어차피 정치 싸움은 여론전이다.

‘이성윤도 어쩔 수 없을 거야.’

강상원 의원은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통장을 손에 쥐고 생각에 빠져 갔다.

‘어떻게 하지?’

이 통장을 어떻게 성윤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 생각해봤다.

생각은 하나로 모인다.

이런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니까.

그 사람은 박무혁 의원이다.

‘박무혁......’

박무혁 의원이 성윤을 아낀다는 정보는 있었다.

하지만 오래된 이야기다.

최근 박무혁 의원과 성윤이 함께 있었다는 정보는 없었다.

‘갈라진 걸까?’

박무혁 의원의 정보는 워낙 미미했다.

국회 출석률도 워낙 낮은 인물이다.

그래서 확정 짓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갈라섰을 가능성이 높다.

성윤의 행동을 보면 최근 주진만, 채정학과 연결 고리가 있었으니까.

‘박무혁이 주진만 채정학과 같은 라인은 아니지.’

정치의 세계는 냉혹하다.

라인이 다르면 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

‘갈라섰을 거야!’

그게 아니더라도 강상원 의원의 선택지는 없었다.

박무혁 의원의 바짓가랑이를 잡아야 한다.

강상원 의원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후, 그는 박무혁 의원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강상원 의원님?”

사무실에 들어가자 보좌관이 깜짝 놀란다.

‘왜 왔지?’ 하는 표정이다.

여의도 호랑이라 불렸던 강상원 의원은 어디서도 찬밥신세였다.

그가 억지로 웃으며 말한다.

“박 의원 있나?”

“잠, 잠시만요.”

보좌관은 서둘러 박무혁 의원의 방으로 향했다.

다시 나온 보좌관이 강상원 의원을 안내한다.

“들어오시랍니다.”

사건이 터진 후 어떤 국회의원도 강상원 의원을 만나주지 않았다.

그래서 연락 없이 찾아왔는데 박무혁 의원은 흔쾌히 맞아 준다.

강상원 의원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방으로 들어갔다.

박무혁 의원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고급 수트와 손목에 찬 수억 원의 시계가 잘 어울린다.

박무혁 의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강상원 의원에게 다가온다.

그의 눈빛엔 흥미로움이 가득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강상원 의원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도움을 받고 싶네.”

“일단 앉으세요.”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았다.

강상원 의원이 품에서 통장을 꺼내 둔다.

“바쁠 텐데, 본론을 말하지. 알겠지만 나는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할 거야. 적적할 거야. 심심할 테고. 대화할 사람이 필요해. 이성윤과 같이 들어가고 싶네.”

박무혁 의원은 테이블에 놓인 통장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든다.

그리고 차분하게 묻는다.

“그래서요?”

박무혁 의원은 느긋한 눈빛이다.

하지만 날카롭다.

강상원 의원은 온몸이 발가벗겨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강상원 의원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박무혁 의원이 다시 묻는다.

“말씀하세요. 그래서요?”

“...이 통장과 이성윤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줬으면 해. 평소라면 내가 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내가 빈손이어서. 내 돈 받아 처먹은 놈들이 다 입 닦고 있으니......”

강상원 의원은 어색하게 웃었다.

박무혁 의원이 길쭉한 손가락으로 통장을 손에 쥐었다.

통장을 펼쳐 본 박무혁 의원의 표정이 변한다.

방금까지 흥미롭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1억?”

‘고작 이걸로?’ 라고 말하는 듯했다.

강상원 의원이 변명처럼 말한다.

“자네에게는 작은 돈일지 몰라도 1억은 큰돈이야. 삐끗하게 만들기는 충분해! 그러니까......”

박무혁 의원이 고개를 저었다.

“누구는 여의도 호랑이라 불렀지만 스스로는 알고 있었을 겁니다. 호랑이가 아니라 늙은 여우라는 것을..... 인정하세요. 여우의 시대는 갔어요.”

“박, 박 의원!” 강상원 의원의 눈이 찌푸려졌다.

박무혁 의원의 몸이 강상원 의원을 향해 천천히 기울어졌다.

그리고 강상원 의원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작작 해.”

< 사람이 많으면. -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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