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회의원 이성윤-109화 (109/300)

< 사과. - (3) >

“본인은 대한민국과 일본의 과거를 직시하지 못했습니다. 제 발언으로 상처받았던 분들께 진심으로 죄송하다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쓰씨 의원의 구구절절한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 절반을 피해자를 위해 쓰겠다는 말과 함께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다쿠야 간사장의 시선은 휴대폰의 작은 화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간다.

“이, 이게 대체......”

채정학 대표는 처음과 똑같이 한결같은 표정이다.

그가 찻잔을 손에 쥐며 입을 연다.

“공동 연설문 발표를 계속 늦추면 안 되겠지요? 수정하시려면 바쁘시겠습니다.”

다쿠야 간사장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그는 아쓰씨 의원이 사과할 경우 배상 문제를 언급하겠다고 말했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했던 발언이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극우 중의 극우가 한국을 향해 사과했다.

다쿠야 간사장은 손에 쥐고 있던 연설문을 콱 움켜잡았다.

연설문이 구깃구깃 구겨진다.

손은 파르르 떨린다.

그가 더듬더듬 입을 연다.

“...죄송합니다. 실언이었습니다.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다쿠야 간사장은 간절히 말했다.

하지만 채정학 대표는 단호하다.

“그럼, 결정권이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고 오세요. 50년 넘게 기다린 시간입니다. 몇 분 정도는 더 기다릴 수 있습니다.”

채정학 대표는 찻잔을 내려 둔다.

그리고 손목시계를 본다.

“5분이면 되겠지요?”

다쿠야 간사장은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모든 대화는 서기가 기록 중이다.

이 대화는 역사에 남을 거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

그날 밤.

성윤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화면에 다쿠야 간사장이 나온다.

그가 상당히 불편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혼란과 수난 속에서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한 한국에 경의를 표합니다. 과거 일본의 행동으로 고통을 겪은 모든 분께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다쿠야 간사장은 배상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큰 성과였다.

하루 동안 극우 성향 정치인 둘이 사과했다.

이번 일로 평행선을 그리던 과거사 문제가 좁혀지고 있었다.

대한민국 언론은 떠들썩해졌다.

물론 그들의 사과에 ‘또 말 바꿀 게 분명해!’라며 냉정하게 보는 시선도 존재했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은 이번 특사단을 향해 칭찬을 이어갔다.

“의원님, 이것 좀 보세요.”

정우가 성윤의 앞으로 휴대폰을 내밀었다. “뭐야?”

“이번 사과에 대한 일본 반응이요.”

일본의 극우 성향 네티즌도 난리가 났다.

그들이 지지하던 극우 정치인 둘이 고개를 숙이자 게시판이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한국은 강하다. 일본은 쓰레기.

-다쿠야나 아쓰씨나 등신 인증.

-또 어떻게 매수한 거야? 한국은 매수의 국가잖아!

-고개 숙이는 게 미덕인 줄 아는 일본.

-꼬리를 내렸네.

-이 새끼들 전부 돌 맞아 죽을 거다.

-오늘부터 다쿠야와 아쓰씨는 척결 대상.

-한국 특사단에 야쿠자 보스가 끼어 있을 때부터 느낌이 이상했어.

-그 야쿠자 보스가 혐한 단체에게 잘못된 역사 교육을 했잖아. 그걸 가만히 보고 있던 것도 웃기는데 정치인이 사과해? 나라 잘 돌아간다.

성윤이 정우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야쿠자 보스는 도대체 뭐야?”

“의원님 얼굴이죠.”

정우가 실실 웃으며 거울을 가리킨다.

다른 사람이 말하면 몰라도 정우가 말하면 기분이 나쁘다.

“네 얼굴을 고민해야 하지 않겠어?”

“전 포기했어요. 흐흐.”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정우가 문을 열었다.

채정학 대표의 보좌관이다.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밖을 가리킨다.

“대표님이 맥주 한잔하자고 하시는데요. 다 모여 있어요.”

“다?”

“외교관들이랑 뭐......”

성윤과 정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채정학 대표의 보좌관을 따라갔다.

호텔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테이블을 붙여 자리를 만들었다.

거기엔 채정학 대표와 외교관 그리고 함께 온 한국의 기자들이 앉아 있었다.

일본 측이 전체를 예약해줬기에 다른 손님은 없었다.

그리고 강상원 의원에게 치욕을 당할 뻔한 여자 외교관도 보이지 않았다.

채정학 대표가 반갑게 반긴다.

“주인공이 왔네. 마지막 날이라 술 한잔하기로 했어.”

채정학 대표는 벌써 몇 잔 마셨나 보다.

얼굴이 붉다.

취기가 올라 있다.

이번 특사에서 가장 긴장했던 인물이 채정학 대표였다.

단장이었고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으니까.

게다가 한국과 일본은 외교 빙하기란 소리를 듣던 중이었다.

사람들은 어떤 성과도 기대하지 않았다.

망신만 당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극우 정치인에게 사과를 받았다.

비록 말뿐인 사과지만 이것은 시작이다.

과거 역사 문제를 풀어나갈 한 걸음을 디딘 거다.

채정학 대표가 입을 연다.

“방금 맥주 마시면서 기자들과 인터뷰했거든. 이성윤 의원이 아쓰씨 의원과 담판을 지었기 때문에 공동 연설문까지 쉽게 이어질 수 있었다고 말했어. 기사로 나갔고.”

앉아 있던 기자들이 성윤을 보며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한국은 지금 난리래요.”

“난리요?”

“이 의원님 기사 확인해 보세요. 폭발적일걸요? 그리고 댓글 보면 이제 의원님을 장판교 장비라고 불러서는 안 된대요.”

“네?”

“의원님 별명이 장판교 장비잖아요. 지능 캐릭터라면서 장판교 장비 말고 다른 별명 찾자는 운동이 시작됐어요.”

기자는 붉어진 뺨을 손으로 만지며 웃어 보였다.

옆에 앉은 정우는 재빨리 휴대폰을 들고 성윤의 기사를 검색해 본다.

입가에 만족한 미소가 걸린다.

그중 가장 댓글이 많은 기사를 찾았다.

성윤이 아쓰씨 의원과 담판을 지었다는 기사다.

물론 내용은 실제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점잖게 밀실 대화를 나눴다고 적혀 있다.

정우는 화면을 내려 댓글을 본다.

그러가다 댓글을 적는다.

-그럼, 다음 별명은 야쿠자 보스? 이것도 괜찮을 것......

성윤은 정우의 행동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정우야?”

“네?”

정우는 성윤에게 딱 걸렸다는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성윤이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댓글 적지 마.”

“...네.”

정우는 토라진 표정으로 맥주만 홀짝인다.

성윤은 채정학 대표에게 시선을 옮겼다.

채정학 대표가 이번 특사의 단장이다.

일어났던 모든 일을 자신의 성과로 돌려도 된다.

하지만 그는 성윤의 성과를 훔치지 않았다.

고스란히 성윤의 공으로 넘겼다.

고마운 일이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자네가 한 일이 맞잖아?”

채정학 대표는 즐겁게 웃으며 맥주를 입에 댔다.

본격적으로 술자리가 시작됐다.

하지만 부어라 마셔라 하지는 않는다.

내일이 마지막 날이지만 남은 일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술자리다.

떠들썩했고 즐거웠다.

성윤의 옆으로 외교관이 왔다.

계속해서 쫓아다니며 통역했던 사람이다.

성윤이 그의 앞에 캔맥주를 뒀다.

“정말 고생하셨어요.”

외교관이 캔맥주를 손에 쥐며 낄낄 웃는다.

“네, 진짜 고생했어요. 의원님께 그 말 듣기 위해 옆에 온 겁니다.”

이번 특사는 통역관이 아니라 외교관을 붙였다.

얼어붙은 양국이다.

정치인의 대화는 민감했고 외교적 용어로 풀어야 했다.

하지만 성윤의 옆을 쫓아다니던 외교관은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

그는 이번에 극우 혐한 단체의 앞에 섰다.

강상원 의원과 아쓰씨 의원의 주먹다짐을 봤다.

아쓰씨 의원의 말을 전달해야 했다.

“외교적 용어를 고민한 게 아니라 쌍욕을 걸러내느라 힘들었어요. 하하.” 외교관은 캔맥주를 손에 쥐며 너스레를 떨었다.

성윤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다.

“죄송합니다.”

외교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그래도 의원님 따라다니면서 좋았어요. 일본에 있으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런데, 의원님은 다 질러 버리시니까. 흐흐.”

성윤과 외교관은 캔맥주를 부딪쳤다.

“한국에 오면 연락하세요.”

그렇게 술자리가 끝났다.

레스토랑에는 성윤과 정우 그리고 채정학 대표와 보좌관만 남았다.

정우와 채정학 대표의 보좌관은 구석으로 이동해 한국에 돌아간 후 일어날 스케줄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채정학 대표는 성윤의 앞에 캔맥주를 둔다.

“상대의 등 뒤에서 찌른 칼은 훌륭한 외교 수단이 된다는 말이 있지.”

채정학 대표가 빙긋이 웃는다.

성윤은 말없이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채정학 대표가 캔맥주를 따며 조용히 성윤을 본다.

“자네를 보고 있으면 박무혁 의원이 떠올라.”

성윤이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채정학 대표는 고개를 저으며 성윤의 입을 막는다.

채정학 대표가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박무혁 의원처럼 되지는 마.”

그 시각.......

주진만 원내대표는 아직 퇴근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노트북 화면에 집중하고 있다.

성윤에 관한 기사다.

흥분한 표정이다.

굵은 눈썹이 움찔움찔 떨렸고 말아 쥔 주먹도 떨렸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 성윤의 행동은 거침없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똥통이든 똥밭이든 다 헤집고 돌아다닌다.

주진만 의원은 역사는 소수 몇 명이 만들어 간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같은 사람은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 몸을 맡길 뿐이다.

하지만 성윤은......

‘정말 이 나라를 바꿀 수도 있겠어......’

***

다음 날, 오후.

일본에서의 모든 일정을 끝내고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에서는 금의환향한 아이돌을 기다리는 것처럼 많은 기자가 북적대고 있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특사단이 나오자 기자들의 행동이 분주해진다.

그들이 우르르 몰려간다.

인터뷰는 채정학 대표로 시작됐다.

채정학 대표는 교과서적인 답변을 내놓는다.

그리고 인터뷰가 성윤에게 향했다.

“일본의 극우 성향 혐한 단체와 토론을 하셨는데요. 어떤 기분이셨습니까?”

예상 못 했던 질문이다.

일본과의 외교성과를 질문할 줄 알았는데...... 성윤이 눈을 깜빡였다.

“기분이요?”

“네, 기분.”

기자들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성윤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말이 안 통했어요. 요샛말로 ‘답정너.’라는 말이 있죠? ‘답은 정해져 있으니 대답만 해.’ 딱 그런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외신에도 나갔는데요. 기사는 읽어 보셨습니까?”

질문이 계속 이어진다.

정우가 성윤과 기자들의 사이에 선다.

기자들과 성윤의 사이가 바닷길처럼 갈라진다.

“죄송하지만 다음 질문은 기자회견에서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빨리 이동해야 해서요.”

기자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길을 내줬다.

차를 향해 이동하며 채정학 대표가 말했다.

“난 바로 청와대에 들어갈 거야. 자네까지 올 필요는 없어. 고생했으니까 오늘은 푹 쉬도록 해.”

“그럼, 고생하십시오.”

밖으로 나왔다.

날씨는 제법 쌀쌀하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겨울이 느껴진다.

성윤과 정우도 차에 올랐다.

정우가 시동을 걸며 말한다.

“집으로 갈까요?”

그때.......

지이이잉.

진동이 울렸다.

정우가 휴대폰을 귀에 댄다.

“국회의원 이성윤의 보좌관 박정우...... 네?”

정우의 표정에 조금 당황함이 비쳐졌다.

그가 천천히 성윤을 본다.

“의원님, 성종 그룹 윤 회장님의 비서실장이라는데요.”

성윤은 빙긋이 웃는다.

“아, 그래?”

연락이 올 줄 알았다.

생각보다 늦게 와서 이상할 뿐이다.

‘그런데, 비서실장?’

***

이번 외교로 인해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 정리를 위한 정부 차원의 TF가 만들어졌다.

일본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레임덕에 빠졌던 한상국 대통령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상원 의원에 관한 처분은 아직 쉬쉬하는 중이다.

찌라시를 통해 어떤 일이 있었는지 돌아다닐 뿐 본격적으로 터뜨리지는 않았다.

청와대에서는 특사의 일이 여론에 가라앉은 후 터뜨릴 생각이다.

그리고 며칠 후.

성윤은 성종 호텔 레스토랑에 서 있었다.

성종 그룹 윤 회장의 비서실장을 만나기 위해서다.

지금 시간이 저녁 일곱 시. 손님이 한참 있어야 할 저녁 타임이다.

하지만 레스토랑 내부에는 직원만 있을 뿐 손님은 없다.

성윤과의 미팅을 위해 통째로 빌렸기 때문이다.

한 끼에 수십만 원이 오가는 곳을 한 번에 빌리다니, 돈이 썩어 빠질 정도로 많기는 한가 보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창가 쪽으로 걸어가자 고급 수트를 입은 남자가 보인다.

나이는 쉰이 조금 넘었다.

성종 그룹 윤 회장의 비서실장 정기화다.

그가 성윤을 보더니 부드럽게 웃는다.

“처음 뵙겠습니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다가 이렇게 실제로 보니까 더 잘생기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앉으세요.”

정기화 비서실장은 앞자리를 가리켰다.

성윤이 앞에 마주 앉았다.

“와인과 식사는 제가 알아서 시켰어요. 입맛에 맞으셨으면 합니다.”

“식사 전에... 부르신 이유를 듣고 싶은데요.”

정기화 비서실장이 조용히 성윤을 본다.

보통 정기화 비서실장 정도의 급이 성윤을 처음 보면 조금 무시하는 눈빛을 보낸다.

그놈의 나이와 경력 때문이다.

하지만 정기화 비서실장은 다르다.

눈빛부터 예의를 갖추고 있다.

이런 사람이 더 어려운 법이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격이 급하시네요.”

그가 손을 든다.

웨이터가 다가왔다.

“와인 먼저.”

와인이 테이블에 놓였다.

빈 잔에 술이 채워진다.

붉은 와인이 찰랑거릴 때, 정기화 비서실장이 가벼운 말투로 묻는다.

“서안시 공유지 매각에 2조를 요구하셨다고요?”

“네.”

성윤은 희미하게 웃으며 정기화 비서실장을 바라봤다.

‘이렇게 보니까 또 반갑네.’

꿈에서 봤던 인물.

꿈속에서 성윤은 정기화 비서실장과 손을 잡았었다.

가까운 미래, 윤 회장이 사망한 후 성종 그룹은 혼란에 빠진다.

정기화 비서실장은 성종 그룹을 손에 쥐려 했다.

성윤도 그를 도왔었다.

돈은 정치에 필요한 것이니까.

그가 성종의 왕좌에 앉으면 꽤 괜찮은 스폰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는 혈통에서 밀렸다.

장남에게 깨지며 재계의 역사에서 빠졌다.

성종의 왕좌 싸움의 이득은 고스란히 악귀 이준대가 먹게 되었었다.

성윤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들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할까?’

성윤의 관심은 2조가 아니었다.

받기로 한 것은 받아야 하니까.

생각은 다음이다.

‘정기화... 괜찮은 악당. 이번에는......’

< 사과. -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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