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상과 다른 일. - (2) >
전화가 뚝 끊겼다.
성윤은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봤다.
‘뭐야?’
일본에 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근차근 준비하던 중이다.
‘그런데, 채정학 대표가 간다고?’
성윤의 계획은 잘 맞물린 톱니바퀴 같았다.
정밀한 시계처럼 오차 없이 돌아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 속에 채정학 대표가 들어왔다.
태평양에서 시작된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만드는 것처럼 채정학 대표라는 변수는 성윤의 계획을 모두 뒤틀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성윤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이 사람이......’
채정학 대표는 바보가 아니다.
일본 특사가 독이 든 성배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 독을 손에 들었다.
단번에 마실 준비까지 끝냈다.
이유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는 성윤의 정치 생명을 걱정한다.
어리고 경험 없는 성윤이 일본에 가서 맞을 비바람을 대신 맞으려 하고 있다.
이 바닥은 어제의 친구가 등에 칼을 쑤셔 박는 세계다.
정우 외에 믿을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살얼음판을 함께 걸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그래서 채정학 대표의 행동이.....
‘쓸데없이 고맙네.’
***
서안시 사무실.
시간은 새벽 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적막한 공간엔 정우도 정효순 주임도 없다.
성윤만이 의자에 앉아 화이트보드를 보고 있었다.
화이트보드에는 채정학 대표의 이름이 적혀 있다.
‘흠......’
채정학 대표가 들어오며 계획이 틀어졌다.
그 계획을 다시 맞춰야 한다.
‘외교 특사......’
원래는 성윤이 특사 단장으로 거론되던 상황이다.
성윤은 초선과 재선을 한 명씩 선택해 단원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특사 단장이 채정학 대표로 변경됐다.
여기까지 생각하던 성윤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가야지.’
채정학 대표가 특사 단장으로 나선 이유는 개인의 욕심이 아니다.
게다가 어떤 계획도 준비도 없을 게 분명했다.
외면할 수 없었다.
성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이트보드 앞으로 걸어갔다.
보드마카를 들어 채정학 대표의 이름 옆에 ‘이성윤’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단장 채정학, 단원에 이성윤......’
이번 일본 특사단은 세 명으로 구성된다.
성윤과 채정학 대표 외에 한 명이 더 필요하다.
‘주진만 원내대표?’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스친 이름이다.
든든한 사람 중 하나.
물심양면으로 도울 거다.
하지만 성윤은 그 이름을 적어 넣지 않았다.
당대표와 원내대표, 둘 다 당을 떠나 있을 수는 없었다.
성윤은 보드마카를 들고 망설인다.
머릿속에서는 여러 이름이 스치고 있다.
일본에 정통한 사람, 외교관 출신, 기업가 출신......
하지만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들에겐 혼돈을 뚫고 나갈 능력이 없다.
성윤은 화이트보드를 날카롭게 노려봤다.
머릿속에서는 사람의 이름과 얼굴이 스친다.
일본에서 벌어질 수만 가지 상황이 그려진다.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는 중이다.
‘이왕 날뛸 생각이면......’
결심이 섰다.
이름 석 자를 거칠게 적어 넣었다.
눈에서는 광채가 돈다.
하지만 입에서는 홀가분한 한숨이 내뱉어진다.
화이트보드에 적힌 이름은 여의도 호랑이 강상원 의원이다.
성윤을 일본에 보내려 했던 사람.
성윤은 그와 함께 일본에 가려 한다.
***
다음 날.
성윤은 이른 아침부터 당대표 사무실을 찾았다.
“저도 가고 싶습니다.”
채정학 대표가 고개를 저었다.
“이 의원, 내가 간다니까? 자네는 갈 필요가 없어.”
“단원으로서 대표님을 보좌하고 싶습니다.”
채정학 대표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성윤을 빼내기 위해 감투를 뒤집어썼다.
그런데, 꾸역꾸역 따라간다고 하니까 골치가 아팠다.
그가 한숨을 내뱉으며 말한다.
“이성윤 의원, 여론이 좋지 않아. 이런 시기에 특사로 간다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 아니야.”
일제 강제 징용 노동자에 관한 배상 문제가 세상을 울리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일본의 극우 정치인 아쓰시가 망언을 했다.
-한국은 감사할 줄 모르는 나라! 조선총독부가 한국의 정신을 개조했다. 일본이 없었으면 아직도 길거리에 똥이 굴러다닐 것! 강제 징용은 없었다. 모두 돈을 벌기 위해 나왔을 뿐이다. 한국인들은 불편한 역사만 기억하고 잘해준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 덧붙일 말이 있
다. 한국인은 일본을 욕하며 일본에 여행을 온다. 번화가에 나가보면 일본식 술집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일본인지 한국인지 분간을 못 하겠더라. 한국은 앞과 뒤가 다른 민족.
일본 정치인의 막말.
단지 극우 정치인의 발언으로 치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 주류 정치인들은 어떤 표명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우리 국민은 분노했다.
제대로 사과를 받아내야 한다고 외친다.
우리 정치인들에게 뭐하고 앉아 있냐 욕한다.
하지만 일본은 사과할 생각이 없다.
귀를 막고 눈을 감고 등을 돌렸다. ‘너희는 짖어라 난 갈 길을 간다.’라는 태도다.
성윤이 입을 열었다.
“특사 단장으로 제 이름이 거론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일본과 우리나라 상황을 살폈습니다. 나름 준비를 했고 대표님을 돕고 싶습니다.”
성윤의 눈빛은 단호했다.
채정학 대표는 한숨만 내쉰다.
그때, 대표실의 문이 열렸다.
비서가 들어와 고개를 숙인 뒤 입을 연다.
“대표님, 원내대표님께서 오셨습니다.”
채정학 대표가 눈을 반짝였다.
그는 주진만 의원이 성윤을 말려 줄 거라 생각했다.
“어서 들어오시라 해.”
하지만 착각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주진만 원내대표는 크게 웃는다.
“가고 싶으면 가야지. 하하하하.”
채정학 대표가 난처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원내대표님! 지금 일본을 가는 것은 큰일이에요!”
주진만 원내대표가 턱을 매만지며 입을 연다.
원래는 채정학 대표에게 말을 놓던 주진만 원내대표다.
하지만 성윤이 있어서 말을 올리고 있다.
대표에 대한 예의는 차려야 하니까.
“대표께서 그랬잖아요. 이성윤 의원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오토바이라면서요?”
성윤은 처음 듣는 말이다.
눈을 깜빡이는데 주진만 원내대표가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채정학 대표, 이번에도 고장 난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어 봐요. 원하는 대로 갈 수 있게 놔둬 봐요. 혹시 압니까? 이번에 도착할 곳도 천국일 수 있어요.”
채정학 대표는 한숨을 내뱉었다.
주진만 원내대표까지 나서자 그가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유약했다.
“알겠습니다.”
허락을 받았다.
성윤이 입을 연다.
“이번 특사는 세 명입니다. 대표님과 저 그리고......”
채정학 대표가 고개를 틀어 성윤을 본다.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 가?”
“네.”
“말해 봐.”
“강상원 의원입니다.”
“.......!”
주진만 원내대표와 채정학 대표는 얼굴을 찡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강상원 의원이 일본 특사라는 함정을 팠다.
그런데, 함정을 판 사람이 그 속에 들어갈 리 없다.
채정학 대표의 목소리는 바짝 말라 있다.
예상치 못한 이름에 상당히 당황한 것이 분명했다.
“이 의원.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주진만 의원은 눈을 감고 있었다.
‘강상원이라......’
함정을 판 사람이라면 벗어나는 방법도 알고 있을 거다.
그만큼 강상원 의원은 치밀했다.
‘특사단에 넣을 수만 있다면......’
일이 잘못되면 강상원 의원의 정치 생명도 흔들거린다.
어떻게든 좋은 방향으로 만들기 위해 애를 쓸 거다.
주진만 원내대표가 눈을 떴다.
“강상원 의원을 끌어들일 방법이 있다고?”
성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해보겠습니다.”
성윤은 당대표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걸으며 생각에 빠진다.
‘강상원 의원.’
강상원 의원은 지금 이 판을 자기 손 위에 올려놓고 주물주물 거리는 중이다.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처럼 즐기고 있다.
그 쌍판이 떠올랐다.
기름기 가득한 눈매로 미소 지으며 인자한 척 가식 떠는 모습.
성윤은 입술을 꽉 물었다.
그리고 꿈속을 떠올린다.
강상원 의원에 관한 기억은 거의 없다.
성윤이 정계에 데뷔할 무렵 그는 은퇴했으니까.
그가 만든 자신만이 행복한 세상에서 낄낄거리며 즐기다 천수를 누리고 사망한다.
가늘고 길게 간다는 원리원칙을 지켰기에 강상원 의원에 관한 사건사고, 비리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딱 하나 걸리는 게 있다.
바로 대통령이었던 악귀 이준대.
그는 강상원 의원의 라인을 타고 정계에 입문했다.
그리고 강상원 의원의 세력을 집어삼키고 거물이 됐다.
‘권력은 자식과도 나누지 않는 법.’
그런데, 강상원 의원은 이준대에게 권력을 통째로 넘겨줬다.
그때 잠시 있었던 스캔들이......
‘강상원 의원이 일본 대부업체의 뒤를 봐준다는 소문이 있었어.’
일본의 대부업체가 한국의 금융을 잠식하는 중이다.
일본의 저금리 자금을 들여와 한국 서민금융시장을 잠식하고 이윤 추구만 생각하고 있다.
조사에 따르면 일본 4개의 대부업체가 한국 시장의 40% 이상을 점유했다고 한다.
일본 회사는 국내 업체와 달리 개인 신용 대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시장 점유는 40% 지만 거래자 수는 국내 업체보다 3배 가까이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 뒤를 강상원 의원이 봐준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준대가 그걸로 강상원을 협박했나?’
우리 국민은 권력자의 돈놀이를 용서하지 못한다.
몇몇 연예인은 대부업 광고에 나왔다고 지탄을 받을 정도다.
하물며 강상원 같은 거물 정치인이 연루되어 있다면 아마 돌 맞아 죽을 거다.
성윤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생각은 계속 이어진다.
‘가능성은 높아. 그럼, 나를 일본에 보내려 한 것도......’
성윤은 강상원 의원이 일본 금융과 손을 잡았다고 가정했다. 그럼, 일본 정치인과도 연이 닿아 있을 수 있다.
돈 냄새가 나는 곳에 권력이 꼬이고 권력 냄새가 나는 곳에 돈이 꼬이는 것은 세상의 이치니까.
‘일본 정치인에게 부탁해서 나를 난처하게 만들 생각이었을까? 함정을 모두 만들어 놓고 청와대에 연락해 특사로 넣은 걸까?’
생각이 이어질수록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성윤은 안에 탔다.
그리고 강상원 의원의 사무실이 있는 층을 누른다.
그 시각, 강상원 의원의 사무실.
강상원 의원은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그가 빙긋이 웃으며 일본어로 말한다.
“굴욕 외교를 부탁합니다. 채정학 그놈의 성격에 아무 말 못 할 겁니다.”
-굴욕 외교라... 방법이야 많죠.
“그럼, 잘 부탁합니다.”
-저희도...... 계속 잘 부탁드립니다.
강상원 의원은 전화를 끊었다.
그의 얼굴에 미끈한 미소가 걸린다.
‘채정학 이 멍청한 놈.’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갈 것인데 괜히 나서서 불똥을 맞는다.
정말 등신 같다.
‘그건 그렇고 이성윤 이놈은 어떻게 하지?’
성윤 덕에 정치인 아들, 딸의 국적이 밝혀지는 중이다.
국민은 손가락질하고 한국 국적을 다시 취득하겠다고 발표하는 정치인도 있었다.
그 문제에서는 강상원 의원도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귀찮게 만든 이성윤을 박살 내고 싶었다.
그때,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성윤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강상원 의원의 눈빛이 순간 찌푸려진다.
하지만 잠시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반갑게 웃으며 일어선다.
잠시 후.
성윤과 강상원 의원이 마주 앉았다.
성윤은 강상원 의원의 모습을 살핀다.
고급스러운 맞춤 양복이지만 서민을 의식한 시계는 카시오.
빗겨 넘긴 머리가 매끈하다.
그가 푸근한 인상으로 묻는다.
“어쩐 일인가?”
“일본 특사... 채정학 대표에게 부탁해서 저도 같이 가게 됐습니다.”
강상원 의원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자네 같은 젊은이의 눈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기성세대가 보는 일본과 자네가 보는 일본은 다르니까. 그래서 나도 자네가 갔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어.”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말을 내뱉는다.
수십 년간 만들어진 정치인의 가면은 욕이 나올 정도로 두껍다.
성윤도 두꺼운 가면을 쓰고 최대한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찾아온 이유는.......”
“말해 봐.”
“특사 단장으로 제 이름이 거론되면서 나름 일본에 대해 많이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야지. 그게 단장의 임무지.”
“그 과정에서......”
성윤은 일부러 말을 줄였다.
그리고 눈동자를 들어 강상원 의원을 바라본다. 몹시 괴로운 눈빛으로.
그 눈빛에 강상원 의원의 표정에 변화가 생긴다.
‘뭐지?’
잠시 뜸을 들였던 성윤이 입을 열었다.
“일본의 금융 기업과 의원님 사이에 커넥션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순간적으로 강상원 의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더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어디서 샌 거야!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럼, 더 엿을 먹여야 예의다.
“일본 정치인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강상원 의원이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일어선다.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성윤을 쏘아 본다.
벼락같은 호통이 내리쳤다.
“누가 그런 헛소문을 내뱉고 다녀!”
성윤은 조심스레 강상원 의원을 바라봤다.
그의 손이 파들파들 떨린다.
눈에서는 분노가 흘러나온다.
생각했던 것 이상의 거친 반응이다.
예상한 것이 맞았다는 뜻.
성윤의 입술이 자신도 모르게 비틀어졌다.
어느 노병이 말했다.
-누군가가 팔아먹은 조국을 나는 지킨다.
강상원 의원은 나라를 팔아먹고.
국민은 지키고.......
‘...씨발.’
욕이 나온다.
성윤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이 참에 오해를 푸시죠. 일본에 가셔서......”
< 예상과 다른 일. -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