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탄. - (3) >
***
-늦깎이 가을 태풍이 북상 중이어서 이동 경로가 주목됩니다. 가을 추수를 앞두고 농민들은......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아침부터 다급하다.
다가올 태풍의 영향인지 국회는 지나칠 정도로 평온했다.
하지만 그 안을 보면 달랐다.
권력자들은 이번 국감에서 정부 부처 예산을 건들지 말라 압력을 넣었다.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초선들은 앞에서 ‘네, 네.’ 거리며 기회를 노린다.
그들은 국민의 간지러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 국감 스타가 되고 싶었다.
성윤이 준비한 자료를 몰래 얻어 분석하고 있었다.
폭탄이 터질 시간이 째깍째깍.... 다가오는 중이다.
의원 회관에서 나온 성윤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뒷목을 꾹꾹 주무른다.
며칠 동안 숨쉬기도 힘들 정도로 바빴다.
분 단위의 스케줄. 술과 술, 회의에 회의 저녁은 매일 삼겹살......
아침에는 초선 의원과 차를 마시고 점심은 어느 언론사의 기자를 만나고 저녁은 재선 및 중진 의원과 술을 마시고.
집에 못 들어간 게 벌써 며칠이다.
어떤 정신으로 걷고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의 동의를 받아야 강상원 의원을 이길 수 있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어, 정우야.”
-나오고 계세요?
“지금 가고 있어. 조금만 기다려.”
오늘은 서안시 공유지 매각 문제를 마무리하는 날이다.
강정기 시장과 성종 건설 이사를 만나야 했다.
잠시 국회 일을 멈추고 서안시로 돌아간다.
성윤은 엘리베이터에 섰다.
맞은편에서 강상원 의원이 다가왔다.
인자한 모습으로 뒷짐을 쥔 채......
그가 성윤을 보고 빙긋이 웃는다.
참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이다.
강상원 의원은 성윤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 적대적인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겉으로 볼 때의 강상원 의원은 성윤을 아끼는 원로 의원일 뿐이다.
“퇴근하나?”
“네, 지역구에 볼일이 있어서요.”
강상원 의원이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입을 연다.
“일본에 특사로 간다며?”
강상원 의원은 자기가 꾸민 일이면서 아닌 척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 기사로 나가지는 않았지만 소문은 퍼졌다.
의원들과 보좌진은 청와대의 복수라며 성윤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하지만 정작 성윤은 담담하다.
원하던 것이다.
해결하고 싶던 문제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만 하면.......
지금보다 더 큰 국민의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강상원 의원이 계속 말한다.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어. 고통 받은 분들... 마지막 가시는 길에 정당한 배상과 사과를 받을 수 있게 해드려야지. 이미 가신 분들의 한을 풀어드리는 일도 될 테고.” 이렇게 말했지만 강상원 의원은 일본 배상 문제에 반대 입장을 내놓는 사람이다.
성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성윤의 자신감 있는 눈빛에 강상원 의원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젊은 사람이니까 이 정도의 패기는 있어야지. 하하하하.”
서로 마주 보는 따듯한 눈빛.
하지만 주변의 공기는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안에 오른다.
엘리베이터에는 성운과 강상원 의원만 있었다.
강상원 의원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일본... 가고 싶지 않다면 방법이 있어.”
“방법이 뭔가요?”
“모른 척 눈감으면 되는 거야.”
성윤이 무릎을 꿇고 모른채 하면 편안히 살 수 있다.
그가 말을 잇는다.
“난 권력이나 이런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야. 있다면 단 하나. 내 자식들이 행복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지.”
국민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아니다.
강상원 의원의 남은 자식들이 행복한 세상이다.
성윤이 슬쩍 웃었다.
“의원님의 솔직한 부분은 존경합니다.”
다른 의원들은 가식적이었다.
입으로는 모든 사람의 행복을 원한다며 개인의 행복만 추구했다.
하지만 강상원 의원은 서슴지 않고 검은 속내를 드러낸다.
강상원 의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이딴 식으로 해서는 이 바닥에서 버틸 수 없을 거야. 국민은 좋아하겠지. 자네는 지금 국민의 힘을 얻었다고 착각하는 중이고. 하지만 잠깐이야. 국민은 멍청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일을 했었는지 금세 잊어버려. 자신의 목을 찌르는 법안
보다 연예인의 연애 기사에 관심 있는 게 국민이니까. 늙은이의 충고네.”
성윤이 희미하게 웃는다.
강상원 의원이 계속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멈춘다면 내가 자네를 키워줄 수 있어. 이 바닥에서 계속 버틸 수 있게. 가늘고 길게 갈 수 있도록......”
“충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보여드리고 싶네요. 이딴 식으로 해도 이 바닥에서 버틸 수 있다는 거요.”
성윤은 강상원 의원의 제안을 거절했다.
처음부터 예정된 거절이지만 강상원 의원의 입에 걸렸던 미소가 처음으로 식었다.
그가 성윤을 바라보며 입을 연다.
“기대하지.”
“부응해 보겠습니다. 물론 제가 부응할수록 의원님의 속은 쓰리겠지만요.”
“그것도 기대하지.”
엘리베이터가 ‘띵!’ 소리와 함께 멈췄다.
성윤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닫히는 문을 보며 정중히 허리를 굽힌다.
강상원 의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하지만 눈빛은 날카롭다.
“기대하지.”
잠시 후, 성윤은 차에 올랐다.
정우가 곧장 시동을 건다.
“뒤에 자료 있어요. 박무혁 의원님 사무실에서 얻은 정보예요.”
“땡큐.”
성윤은 뒷자리에 손을 뻗어 자료를 손에 들었다. 정우가 말을 잇는다.
“그리고 대표님 비서실에서 연락 왔어요.”
“대표?”
“당대표님.”
“어, 뭐라고?”
채정학 당대표는 성윤의 행동에 어떤 입장 표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켜보고 있다.
“의원님, 여자 친구 있냐고......”
성윤이 헛웃음을 지었다.
“내 연애사에 관심 있는 분들이 참 많아.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솔직하게 없다고 말했죠. 있다고 말했어야 했나요?”
“앞으로는 있다고 해. 소개팅이나 선 자리 들어오면 거절하는 것도 귀찮으니까.”
또 소개팅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불안하게 다가온다.
정우가 말한다.
“지난번에 의원님 여자 친구는 제가 구해주겠다고 했었잖아요?”
“그랬지.”
“마음 같아서는 진짜 그러고 싶은데요. 제가 다른 사람을 만날 시간이 없어요. 보는 여자가 담배 사러 가는 편의점 알바생, 정효순 주임님 그리고 회계를 맡은 서진화 비서관. 끝. 이 일을 하면서 인간관계가 더 좁아지는 것 같아요.”
성윤도 인정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오히려 사람은 좁아지고 있다.
편히 술한잔 할 친구가 사라진다.
정우의 말을 들으며 서안시에 도착했다.
소고기 전문점이다.
강정기 시장과 성종 건설의 이사, 그리고 부문장이 불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성윤은 자연스레 상석으로 향했다.
“제가 같이 식사를 하면 체하실 것 같은데...... 본론이나 말하고 떠나겠습니다.”
강정기 시장이 입을 연다.
“성종 건설에서 9800억을 이야기했어요.”
성윤의 시선이 성종 건설 이사에게 향했다.
그가 소고기를 집어 앞 접시에 올리며 말한다.
“9800억이면 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1조에서 200억 빠진 금액.
강정기 시장이 성윤의 눈치를 보며 말한다.
“그럼, 이걸로 계약하겠습니다.”
아직 공유지를 매각한다는 발표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격은 이미 결정되고 있었다.
성종 건설 부문장이 계약서를 꺼냈다.
“싸인은 나중에 하시면 되고 일단 입찰가와 계약 내용을 보시면......”
부문장의 손에 있던 서류가 성윤에게 옮겨졌다.
성윤은 차분한 눈으로 서류를 읽어간다.
“아파트가 들어오는 건가요?”
“세대수는 3~4천 세대. 미분양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성종 쇼핑 본사가 완공되면 직원들의 수요가 있을 겁니다. 취,등록세에 따른 세비 확충도 되겠죠. 그리고 일정 부지에는 초등학교와 스트릿 상가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분양가는요?”
“시세를 생각해서 적절하게 할 겁니다. 저희가 그것까지 의원님께 보고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종 건설 이사의 목소리는 차갑다.
그는 성윤을 무시하고 있다.
성종 건설은 거물들이 뒤를 봐주고 있다.
그들에 비하면 성윤은 애송이일 뿐이다. 어린놈이 시장의 비리하나 잡았다고 천방지축 날뛰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성윤에게 보고하는 것도 짜증 났다.
이사가 말을 잇는다.
“그럼, 계약은 이렇게 진행하겠습니다.”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성윤이 받아들이고 떠나면 된다.
그럼, 이들은 소고기를 먹으며 성윤의 욕을 실컷 할 예정이다.
부문장이 성윤의 앞에 놓인 계약서에 손을 올렸다.
다시 가져가기 위해서.
그런데......
성윤이 계약서에 탁! 손을 올린다.
“아뇨.”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성종 건설 이사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성윤은 상관 않고 손가락으로 계약서를 가리켰다.
“가격이 아쉬운데요.”
“9800억입니다. 의원님.......”
“강정기 시장님과 성종 건설...... 돈으로 엮여 있어요. 그런데, 그걸 터뜨리지 않고 조용히 넘어간 이유를 모르시겠어요?”
“그것도 이 부지 가격에 포함시키라는 겁니까?”
“네.”
성종 건설 이사는 한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성윤이 이렇게 나올 것이란 것은 이미 계산되어 있었다.
적당히 손해를 보는 척......
“1조. 1조를 드리겠습니다. 더는 안 됩니다.”
성윤이 조용히 웃는다.
“할아버지들 집에 보일러 좀 놔드립시다. 1조 1천억.”
“의원님!”
200억만 올리려 했는데 성윤은 1천억을 입에 담고 있다.
성종 건설 이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성윤은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그러다가 다시 입을 연다.
“출퇴근 때마다 공단 들어가는 길이 심하게 막혀요. 시민들이 불편하죠. 지하 차도를 뚫었으면 좋겠네요. 1조 2천억.”
이사의 표정이 구겨졌다.
험한 눈빛을 숨기지 않는다.
“...지금 놀리시는 겁니까?”
“이사님, 그 땅은 지금이 제일 쌉니다.”
“무슨......”
성윤이 손목을 본다.
시계의 초침이 한 바퀴를 돌았다.
성윤은 다시 입을 연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이 모자라요. 대기표를 받아 기다려야 한답니다. 애들 교육은 항상 신경 써야죠.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더 만들어야겠습니다. 과잉이라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네요. 1조 3천억.”
이사가 ‘쾅!’ 테이블을 내리찍으며 일어섰다.
그가 어금니를 꽉 씹는다.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성종 건설 이사다.
기술력이 없던 시절에 바다에 다리를 놓았다.
중동으로 넘어가 모래를 파서 기둥을 세웠다.
테러리스트를 만났고 총을 마주한 적도 있다.
그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이 몇 명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 얼굴을 항상 가슴에 품고 있다.
그만큼 이 일에 자부심이 있었다. 인생 편안히 살아온 어린 정치인이 장난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살벌한 공기가 방안을 채웠다.
그런데 성윤은 손목만 보고 있다.
“1분 지났네요. 1조 4천억.”
“......”
“1조 5천억.”
“......”
“1조 6천억.”
성종 건설 이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한다.
옆에 앉아 있던 부문장은 눈치를 봤고 강정기 시장은 황당한 얼굴로 성윤을 본다.
성윤이 느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느 회사가 강남의 땅을 10조에 사서 부동산 놀이를 한다고 들었어요. 성종 건설도 서안시에 10조를 투입할 생각입니까? 1조 7천억.”
성윤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진다.
“1조 8천억.”
성종 건설 이사의 눈에 분노 대신 의구심이 올랐다.
‘뭘 믿고 이러는 거지?’
진작 생각해야 했던 거다.
국회의원이란 사람이 의미 없는 행동을 할 리가 없다.
그러고 보니 함께 온 보좌관의 가방이 수상하다.
성종 건설 이사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혹시... 우리 몸에 묻은 먼지를 찾아내셨습니까?”
“네.”
“그게 8천억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건 그쪽이 생각하세요. 가격을 정하는 것은 장사꾼이 해야 할 일이죠.”
성윤이 시선을 틀자 정우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박무혁 의원에게 얻은 것이다.
박무혁 의원은 성종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
회장의 비리를 터는 중이라 성종 건설의 비리는 우습지도 않았다.
성종 건설 이사가 서류를 넘겨본다.
성윤이 입을 열었다.
“성종 건설의 자회사, 성종 엔진의 일본 법인에서 몰도바공화국 은행 계좌를 통해 네덜란드 법인으로 자금을 보냈네요.”
“......!”
“네덜란드 법인이 빚을 졌는데, 빚을 진 회사의 자산과 자본금이 단돈 1파운드... 전형적인 유령회사. 가짜 채무 관계를 만들어 돈을 갚는다는 행동은 전형적인 자금 세탁.”
“......!”
“성종 회장님이 은퇴하시려나? 돈세탁해서 경영권 승계하려는 냄새가 슬슬 나네요.”
이사는 눈을 감는다.
그의 입술이 가늘게 떨린다.
“...제가 나설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 폭탄. -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