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회의원 이성윤-88화 (88/300)

< 전당대회. - (5) >

“...이기다뇨?”

수화기 너머에서 성윤의 낮은 웃음소리가 흘렀다.

-모른 척하는 건가요?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솔직해지세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말투에 박상혜 의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새로 산 휴대폰마저 집어 던질 기세다.

하지만 목소리는 침착했다.

“시간이 늦었어요. 내일... 내일 만나서 얘기하죠.”

그녀는 통화가 종료된 휴대폰을 조심스레 책상 위에 올렸다.

그리고 팔짱을 낀 체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녀의 눈빛은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고요함처럼 불길하다.

보좌관이 눈치를 본다.

“...의원님?”

“나가 봐.”

박상혜 의원이 뒤도 보지 않고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만 퇴근해. 생각할 게 있어.”

그녀의 목소리와 태도는 차가운 눈밭처럼 서늘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보좌관은 고개를 숙인 후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그녀의 눈이 살벌하게 빛난다.

‘스파이?’

그것 말고는 성윤의 등장이 설명되지 않았다.

오늘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박상혜 의원과 곁에 있던 보좌관 그리고 온종일 서용우 전 총리를 쫓았던 비서관이 전부다.

그 외에는 이 협잡질을 몰랐다.

‘둘 중 하나란 말이야?’

그녀가 붉은 입술을 깨문다.

그녀는 두 사람만큼은 믿었다.

정계에 입문하면서부터 쭉 함께해 오던 자들이다.

함께 고생했고 기뻐했다.

그런데, 둘 중 하나가 스파이라면 그녀는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거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박상혜 의원은 헛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그녀는 보좌관의 책상으로 걸어간다.

책상 서랍을 드르륵 연다.

안을 헤집기 시작한다.

문서가 바닥에 쏟아졌다.

눈을 시뻘겋게 뜨고 주섬주섬 문서를 확인한다.

아무것도 없다.

그녀는 보좌관의 컴퓨터를 켰다.

이것저것 확인하던 그녀가 ‘쾅!’ 키보드를 내리쳤다.

‘스파이가 누구야?’

그녀의 시선이 비서관의 책상으로 옮겨졌다. 잠시 후, 그녀의 사무실은 처참했다.

문서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고 사무실 집기가 바닥에 돌아다닌다.

그 한가운데에 그녀가 서 있었다.

짐승 같은 모습이다.

그 시각, 박상혜와 통화를 끝낸 성윤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복도로 들어서자 환하게 불이 켜진 서용우 전 총리의 사무실이 보인다.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던 서용우 전 총리의 보좌진이 성윤을 반겼다.

“고맙습니다. 이 의원님이 아니었다면......”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성윤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서용우 전 총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술이 아직 깨지 않았는지 얼굴을 세차게 비비고 있다.

하지만 눈빛은 지나칠 정도로 또렷하게 빛난다.

그가 손가락을 들어 구석에 앉아 발발 떨고 있는 남녀를 가리켰다.

대리 운전기사와 호텔에서 기다리던 여자다.

“그러니까, 감히 나를 상대로 꽃뱀 짓을 하려 했다는 거지?”

당장이라도 남녀의 머리를 찍어 버릴 기세였다.

사나운 눈빛에 두 사람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화장을 야하게 한 여자가 다급히 외쳤다.

“모, 몰랐어요. 총리님인지 정말 몰랐어요. 알았으면 안 했죠! 그냥 어디 중소기업 사장이라고만 들어서......”

남자도 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도요. 저도 총리님인지 알았다면 절대 안 했을 거예요! 전 무식해서 신문이나 뉴스를 안 봐요. 그래서 얼굴을 몰랐어요. 그러니까 한 번만 봐주시면......”

서용우 전 총리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탕탕탕! 세차게 내려쳤다.

“그만!”

서용우 전 총리가 두 사람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시끄럽게 떠들던 남녀는 입을 확 다문다.

“누구야? 누가 시킨 거야?”

“모... 몰라요.”

여자가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답했다.

하지만 이곳에 여자의 눈물에 마음이 흔들릴 사람은 없다.

눈물도 사람에게나 통하는 거다.

이곳은 괴물만 존재한다.

서용우 전 총리의 보좌관이 서류를 들고 다가왔다.

“두 사람의 통장 기록과 통화 내역 확보했습니다. 특이사항으로 오늘 낮에 5천만 원씩 통장에 찍혀 있습니다.”

“보낸 사람은?”

“노숙자 명의의 대포 통장이랍니다. 세탁이 잘 되어 있어서 출처 확인은 어렵다고 합니다. 그리고 통화 기록에서 겹치는 부분은 없습니다. 계속 확인은 해보겠지만......”

배후를 알아내기 힘들다는 뜻이다.

서용우 전 총리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도대체 누가......”

성윤은 대리기사와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영혼이 빠진 눈동자로 후회하는 중이다.

속마음을 살펴봤지만 두 사람 모두 누가 시켰는지 모르고 있다.

경제적 상황이 어렵던 두 사람은 단지 5천만 원 때문에 앞뒤보지 않고 움직인 거다.

슬프지만 돈의 위력이다.

성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곳에 더 있을 필요는 없었다.

대리 기사와 여자의 처분은 서용우 전 총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다만 언론에 터뜨리거나 감옥에 보내지는 못할 거다.

서용우 전 총리는 피해자지만 사람들의 인식에는 강자니까. 여자를 건드리려 했다가 안 되니까 고소했다는 등 억울하고 더러운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서용우 전 총리에게 저 두 사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다.

성윤과 정우의 뒤를 서용우 전 총리의 보좌관이 뒤따라 나왔다.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리가 끝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보좌관은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

다음 날, 성윤은 정우와 함께 양평으로 향하고 있었다.

박상혜 의원을 만나기 위해서다.

성윤은 박상혜 의원에게 채정학 의원을 지지할 것을 지시하려 한다.

“서용우 사무실에서 연락 들어온 것 없지?”

“출발하기 전에 전화해 봤는데, 여전히 나오는 것이 없대요.”

성윤은 입술을 쓸었다.

범인은 박상혜 의원이지만 증거가 없다.

의원이란 사람이 노숙자 명의의 대포통장과 대포폰을 사용했으니까.

‘어떻게 쑤셔야 하나......’

성윤은 그녀를 낭떠러지로 밀어낼 블러핑을 이것저것 생각하기 시작했다.

증거가 없어도 씹고 즐길 방법은 많다.

성윤에게는 속마음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존재했다.

1:1 말싸움에서는 무적이다.

정우가 말한다.

“그런데, 쉽게 포기할까요? 의원님 말씀대로라면 박상혜는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잖아요?”

“글쎄. 해봐야지. 양심이 있다면 포기하겠지.”

정우가 짜증난다는 듯 머리를 북북 긁는다.

“그냥 서용우가 함정에 빠지는 것을 지켜봤으면 좋지 않았을까요? 그 표가 모두 박상혜한테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성윤이 고개를 저었다.

“채정학 의원이 서용우 급의 네임드는 꺾어야 줘야 당을 장악할 수 있어. 필요한 사람이야.”

꽃밭에서 태어난 정치인의 끝은 관상용일 뿐이다.

거물은 진흙탕에서 만들어진다.

거물을 꺾어야 인정받는다.

성윤이 어깨에 힘을 줄 수 있는 이유도 그것이다.

초선에서 5선 박광택을 꺾었고 재선 상대는 전국구 안종기였다.

채정학 의원이 기울어가는 대한당을 바로 세우기 위해선 장악력이 필요하다.

서용우 전 총리는 그 힘을 만들어 줄 거다.

박상혜 의원만 치우면 그림이 완성된다.

성윤이 와이셔츠의 소매를 걷으며 말했다.

“그리고 서용우는 대통령의 계파야. 나중에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어.”

잠시 후, 전통 찻집.

성윤과 박상혜 의원이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말없이 바라본다.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사람의 어색함은 찝찝한 공기가 살갗에 치덕치덕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박상혜 의원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백치 미소를 생긋 지어 보였다.

하지만 밤새 마음고생을 했는지 얼굴 곳곳에 피곤이 묻어 있다.

성윤이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올렸다.

그리고 주머니를 까 보였다.

“녹음 없어요.” 박상혜 의원도 휴대폰을 꺼내 테이블에 올린다.

“마찬가지.”

성윤이 빙긋이 웃었다.

“그럼, 이제 가면 벗고 이야기해 볼까요?”

박상혜 의원이 다리를 꼬며 희미하게 웃는다.

“전 여기서 전당대회를 끝내죠. 채정학 의원을 지지할게요. 언론 발표는 그쪽이 준비해요. 그것까지 내가 할 정도로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니까.”

성윤이 고개를 비틀었다.

예상하지 못한 느닷없는 항복 선언이다.

그녀가 범인인 것은 알지만 증거는 없어서 이것저것 블러핑을 준비해 왔는데, 난데없이 언론발표를 준비하라니......

‘뭐지?’

그녀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첩자가 있어서 위험해. 지금은 한발 물러설 때야. 이성윤과 손잡은 첩자가 증거를 넘겨줄지도 모르니까. 그놈을 찾을 때까지는......

성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첩자라니......’

머릿속은 많은 생각으로 가득했다.

최근 그녀와 일어났던 일이 쭉 늘어서서 정리됐다.

그리고...

‘속마음을 읽은 게 첩자를 심었다고 착각하게 만든 건가?’

가장 유력한 가설이었다.

성윤이 눈동자만 들어 박상혜 의원을 향했다.

그녀가 입을 연다.

“그쪽이 이겼네요. 축하해요. 하지만 다음은 없을 거예요.”

박상혜 의원은 쿨한척 말한다.

그리고 고상한 자세로 찻잔을 들어 입에 댄다.

하지만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속마음에서는 온갖 더러운 욕설이 튀어나왔다.

성윤은 빙긋이 미소 지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패배한 사람에게 듣는 욕설은 칭찬보다 값지다.

“축하, 감사합니다.”

박상혜 의원은 찻집에서 나와 차에 올랐다.

그녀가 고개를 비틀어 성윤의 차를 바라본다.

성윤은 재킷을 걸치며 차에 오르고 있다.

정우와 뭔가를 이야기하더니 휴대폰을 귀에 댄다.

채정학 의원에게 전화를 거는 모양이다.

그 모습이 모두 그녀의 눈에 담겼다.

‘이성윤...’

그녀의 얼굴에는 따듯함은 단 하나도 없었다.

눈동자에서부터 찬 바람이 쌩쌩 불어올 뿐이다.

그녀가 손에 쥔 핸드백을 꽉 움켜쥔다.

그녀의 눈동자가 성윤을 스쳐 그 옆에 선 정우에게 향했다.

같은 고등학교에 같은 대학 출신이라 들었다.

4급 보좌관이 수행비서 일까지 도맡아 하고 있다.

가족 같은 사이라는 것.

‘이성윤의 보좌관?’ 얼음처럼 차가웠던 그녀의 입술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그녀가 마른 입술을 혀로 핥는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성윤은 그녀의 사람에게 첩자 질을 시켰다.

이번엔 그녀가 성윤의 사람에게 지옥을 맛보여 줄 생각이다.

그때, 통화를 마친 성윤이 그녀의 차로 다가왔다.

그녀가 앉은 자리의 창문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든다.

창문이 내려갔고 표정을 수습한 그녀가 맑게 웃는다.

“무슨 일이죠?”

“저기...”

성윤이 볼을 긁적였다.

그리고 그녀를 내려다본다.

성윤의 모습이 악마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미소를 지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세요.”

성윤이 허리를 굽혀 그녀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낮고 무서운 목소리가 흘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나한테 해. 묻고 싶은 게 있어도 나한테 물어. 칼질을 해도 나한테 휘둘러. 치졸한 짓 하지 마. 내 동생 건들지 말고.”

박상혜 의원은 마른 침을 삼켰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박무혁 의원을 만났던 날이 떠오른다.

미소 지으며 성윤을 건들면 ‘안 돼’라고 했던 박무혁 의원.......

그 말이 꼭 건들면 ‘죽어’라고 들려왔다.

그런데, 지금 성윤도 마찬가지다.

아니, 박무혁 의원보다 더 지독하게 느껴진다.

박상혜 의원이 고개를 틀어 성윤을 향했다.

그녀는 지금 성윤이 반말을 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미리 말해두는 거야. 다른 생각하지 마. 내 동생 몸에 상처하나 생기면 넌 죽어.”

성윤은 그녀에게 속삭이던 얼굴을 뒤로 뺐다.

박상혜 의원은 성윤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앞을 본다.

성윤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가세요. 가서 할 일이 많을 텐데.”

박상혜 의원이 탄 자동차가 출발했다.

세상에는 그녀가 채정학 의원을 지지한다는 기사가 뿌려지고 있었다.

[박상혜 의원 채정학 의원 지지 선언!

박상혜 의원이 당대표 후보직을 사퇴하며 채정학 의원을 지지하는 큰 결심을 했다.

삐걱거리는 대한당에 새로운 얼굴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번 박상혜 의원의 후보 사퇴로 당대표는 서용우 전 총리와 채정학 의원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대한당 당원들은 심각한 고민에 놓이게 됐다.

선택의 숫자가 좁혀지면 고민은 깊어가는 법이다.

젊은 당원들은 채정학 의원을 지지한다.

채정학 의원은 엘리트 오대민 의원과 박상혜 의원을 흡수하며 거센 돌풍을 일으킨 주역이다.

젊은 당원들은 새로운 바람을 원한다.

그들은 채정학 의원에 대한 지지 선언을 시작했다.

원로들은 아니다.

그들은 경험 있는 사람이 당대표를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한당의 현 상황은 바다 한가운데서 풍랑을 만난 배와 같다.

경험 많은 선장만이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는 법.

그들은 서용우 전 총리를 지지했다.

그리고 지지율이 떴다. 1위. 서용우 51.1%

2위. 채정학 48.9%

2.2%의 차다.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다.

의원 회관에서는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이 얘기로 꽃을 피웠다.

“난 채정학. 판의 바람이 바뀌었어. 바람이 바뀌면 대통령도 못 막아.”

“바람이 바뀌긴 뭘 바뀌어? 판이 달궈진 거지. 대한당 몰라? 거긴 어르신들의 목소리가 커. 무조건 서용우야.”

정치 평론가들 납셨다.

흡연실에도 커피숍에도 모두 그 얘기다.

그중 민국당의 한 보좌관이 입을 연다.

“그런데, 이성윤이 대단하기는 하네. 오대민이나 박상혜도 다 이성윤이 섭외했다며? 채정학이 여기까지 치고 올라올지 누가 알았겠어?”

“이성윤이 행동하는 것 보면 우리 당이랑도 이념이 맞는 것 같은데, 못 끌고 오나?”

“오겠냐? 주진만 원내대표가 싸고도는데? 그리고 여기서 채정학이 승리하면 완전 스타 되는 건데?”

사람들의 관심 속에 잠실 실내 체육관에서 당대표와 최고 위원을 선출하는 전당대회가 열렸다.

아침부터 전국에서 온 대의원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

뉴스 전문 채널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되기에 카메라가 들어섰고 대한민국 모든 언론사의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나타났다.

전당대회가 열리는 체육관 안은 바깥과 공기부터가 달랐다.

결전을 앞에 두고 텁텁하고 묵직한 기운이 사람들을 짓누른다.

< 전당대회. -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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