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룡들. - (3) >
순간 주진만 원내대표의 눈빛에 푸른빛이 돌았다.
“그렇지, 정치적으로 크려면 도전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 거물 중에 쉬운 길을 걸었던 사람은 없어.”
주진만 의원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신문으로 향했다.
‘누굴 선택할 것인가......’
성윤이 나서면 언제나 파란이 일어났다.
주진만이 원내대표를 할 때 김대성 계파를 끌고 온 것이 성윤이다.
백형욱의 입이 나불대려 할 때 그 입을 가지고 놀았던 것 역시 성윤이다.
김대성을 끝장냈던 것도 마찬가지로 성윤이었다.
대한당의 흐름은 성윤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번에도......’
혼돈이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용우?’
지지율 1위, 서용우 전 총리는 아니다.
성윤이 얻을 것이 적다.
‘그럼, 박상혜?’
전 당대표의 계파인 박상혜 의원도 아닐 것이다.
이미 튼튼한 계파를 가진 그녀가 성윤에게 나눠 줄 콩고물은 거의 없다.
주진만 원내대표의 시선이 조진성 전 충북 지사의 이름에서 멎었다.
인지도는 높지만 계파가 모래성이다.
현역 의원들과의 접촉면이 크지 않다.
‘조진정 전 지사라면......’
성윤이 원하는 만큼 배를 채울 수 있다.
주진만 의원의 시선이 다시 성윤에게 향했다.
그러자 성윤의 손이 움직였다.
길쭉한 손가락이 각 잠룡의 이름을 스친다.
그런데, ‘탁’ 신문을 덮어 버렸다.
“......!”
주진만 원내대표가 눈을 깜빡였다.
성윤이 말한다.
“채정학 의원이 어떨까요?”
“채, 채정학?”
채정학 의원은 주진만 원내대표의 비주류 계파다.
꼼꼼하고 능력이 좋다.
하지만 그뿐이다.
이름이 없다.
언론이 꼽은 잠룡 열 명에도 끼지 못했다.
“채정학이라니......”
채정학 의원이 당선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당선만 된다면 가장 극적이다.
성윤은 단순한 킹메이커가 아니게 된다.
누구도 예상 못 했던 사람을 당권에 올리는 것.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다. 잠시 멍하니 있던 주진만 원내대표가 고개를 저었다.
“무모해. 어려운 일이야.”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주진만 원내대표가 다시 신문을 펼친다.
그리고 사람들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쭉 훑었다.
“이 중에서 고르는 게 좋아.”
성윤은 빙긋이 웃었다.
그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누구를 당대표로 만들까......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중에 떠오른 사람이 채정학이다.
꿈속에서 봤던 미래.
채정학 의원은 꽤 멋진 사람이었다.
당내 서열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언제나 국민을 우선했다.
그래서 비주류였고 이름이 높지 않았다.
채정학 의원의 미래가 꿈속대로 흐른다면 그저 그런 사람으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성윤의 손으로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리고 정말 그가 당선되면 성윤이 얻을 것은 상상 이상이다.
“험로를 가보고 싶습니다.”
성윤의 눈빛은 날카롭다.
주진만 원내대표의 가슴속에는 섬뜩한 기분마저 들고 있었다.
성윤은 배를 채우는 것으로 모자라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주진만 원내대표는 주먹을 꽉 쥔다.
그는 성윤의 탐욕이 어디까지 먹으려 할지 궁금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 봐.”
성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퇴원하셨는데, 술은 전당대회 끝나고 축하주로 사겠습니다. 원내대표님이 가장 좋아하는 술은 소주가 아니라 축하주잖아요.”
성윤이 떠났다.
주진만 원내대표는 전화를 건다.
“채 의원, 나야. 잠깐 이쪽으로 와줬으면 해.”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채정학 의원이 들어왔다.
얼굴은 시커멓다.
눈은 참 선하다.
머리는 벅벅 긁어 댄 것처럼 산발이다.
그를 보면 시골 농사꾼이 떠올랐다.
“어쩐 일로......”
채정학 의원이 주진만 원내대표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주진만 원내대표가 식어버린 찻잔을 손에 쥔다.
“자네가 지금 앉은 자리, 방금 이성윤이 앉아 있었어.”
“텔레비전으로 봤습니다. 원내대표님이 어깨동무하고 계단 올라가던 거요. 하하.”
“이성윤과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하지 않나?”
“글쎄요.”
채정학 의원은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차만 홀짝였다.
“전당대회에 얼굴 좀 내밀어.”
“그런 것 관심 없지만 원내대표님 말씀이면 해야죠. 누구를 서포트할까요?”
“자네가 주인공이 될 거야.”
차를 홀짝이던 채정학 의원의 몸이 바위처럼 굳었다. 그가 눈동자만 움직여 주진만 원내대표를 본다.
주진만 원내대표는 술도 좋아하고 농담도 잘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눈빛은 농담이 아니다.
진심이다.
“저요?”
“그래, 자네.”
“제가요? 당대표요?”
***
의원회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던 성윤은 커피숍이 있는 층에서 내렸다.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고생하며 일하는 직원들에게 커피를 배달해 줄 생각이었다.
복도를 걷는데......
“이성윤 의원?”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박상혜 의원이 보인다.
그녀는 아나운서 출신 의원으로 나이는 서른아홉.
피부와 체형 교정 등 미용에 쏟아붓는 비용이 연 수억이다.
돈을 쓴 만큼 예쁘고 고상해 보인다.
당연히 피부도 좋고.
그리고 이번 전당대회의 잠룡 2위다.
“바쁘지 않으면 얘기 좀 할래요? 여긴, 사람이 많고. 내 사무실에서.”
성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성윤은 박상혜 의원과 함께 그녀의 사무실로 향했다.
복도를 걸으며 그녀가 물었다.
“무슨 말씀하셨어요?”
“네?”
“원내대표님과 미팅했잖아요.”
“아.”
주진만 원내대표가 성윤과 함께 사무실에 간 모습은 모두가 봤다.
특히 잠룡들은 눈에 불을 켜고 확인했다.
“별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진실을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싸늘한 목소리가 흐른다.
“이미 소문났는데......”
“소문이요?”
“이성윤 의원이 원내대표실에서 나오고 곧이어 채정학 의원이 들어갔다는 소문. 난 바보가 아니고 그림이 이어지네요?”
박상혜 의원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녀가 보좌진들을 향해 말한다.
“10분간 휴식해주세요.”
모니터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보좌진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섰다.
“그럼, 커피 한잔하고 오겠습니다.”
보좌진들이 떠났다.
사무실에는 성윤과 박상혜 의원만 남았다.
두 사람이 소파에 마주 앉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날 도와줘요. 그럼, 고위급 당직은 어렵지만 적당한 자리는 줄 수 있어요.”
“적당한 자리요?” 그녀가 희미하게 웃는다.
“더 큰 것을 줄 수 없어서 미안해요. 하지만 서용우 전 총리나 조진성 전 지사에게 당을 맡길 수는 없잖아요. 그 사람들은 현실 정치를 몰라요. 이 꼴이 된 대한당을 정상화할 수 없을 거예요.”
성윤은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뒀다.
그리고 그녀의 속마음을 들으며 묻는다.
“의원님은 할 수 있다는 건가요?”
“네.”
자신감 있는 목소리다.
눈빛이 빛나고 있다.
그녀가 계속 말한다.
“알잖아요? 내가 전 당대표님의 계파인 것. 난 지금껏 당 운영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지켜봤어요. 장단점을 생각했고 고민했죠. 지금은 경험 있는 사람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분명 그녀의 눈빛은 빛나고 있다.
입술에도 고집이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속마음을 들어보면 당권 도전은 국민의 안녕을 위한 걸음이 아니다.
국가 안정을 위한 생각도 없다.
오직 개인의 입신양명만을 원한다.
이런 사람이 당권을 쥐면 결과는 뻔하다.
...비리로 얼룩진다.
그녀가 구불거리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한다.
“솔직히 채정학 의원은 아니잖아요? 될 사람을 뽑아야지. 무효표 던지려고 그래요?”
“투표함을 까보기 전에 알 수 있는 것은 없죠.”
단호한 대답이다.
성윤의 마음이 기울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미치겠네, 진짜 채정학 의원을 당대표로 만들겠다고? 차라리 이성윤 의원이 다음 대선에 출마한다고 말해요. 그게 더 가능성 있겠네.”
성윤은 대선에 나갈 나이도 안 된다.
그녀의 말은 채정학 의원의 당선을 불가능으로 보고 있었다.
“더 할 말 없으면 일어나겠습니다.”
성윤은 그녀와 쓸데없이 날 선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싸움은 전당대회에서도 충분하니까.
그녀가 싸느랗게 말한다.
“이성윤 의원 때문에 내가 본 손해가 있는데, 메꿔 주는 게 예의 아닌가?”
성윤이 고개를 틀어 그녀를 본다.
“제가 의원님을 손해 보게 했나요?”
“새 사랑 인권 협회, 거기 내 지지기반이었거든요.”
최명진 협회장이 성윤을 협박할 때 오대민 의원과 그녀의 이름을 거론했었다.
성윤이 크게 웃었다.
“웃어서 죄송한데요. 손해가 아니라 이득 아닌가요? 식사 하나로 시작된 인연이 돈을 주고받는 관계로 발전했고 이어서 서로의 뒤를 봐줬다고 들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 문제가 터졌다면 의원님의 이름도 뉴스에 올랐을 수 있어요.”
“뭐요?”
“아니, 어쩌면 이미 뉴스에 올라야 할 이름인데 검찰이 눈치 보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한 당의 당대표까지 출마하는 위대한 분이니까요.”
비리를 거론하는데 기분 좋을 사람은 없다.
박상혜 의원이 성윤을 칼로 자를 것 같은 예리한 눈빛으로 쏘아본다.
“난 비리를 저지른 적이 없어요.”
“그것도 까봐야 아는 거겠죠.”
“나를 적대적으로 대해서 좋을 것은 없을 텐데.”
참 지겨운 협박이다.
권력 가진 사람들의 레퍼토리는 똑같나 보다.
신선한 협박은 없다.
성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말하죠. 적당히 손을 잡는 것도 정치. 적당히 타협하는 것도 정치. 대쪽 같던 사람이 꺾여 쓰러지는 것 역시 정치. 자라나는 새싹의 뿌리까지 뽑아 버리는 것도 정치. 그런데, 내 손을 잡으면 서로 윈윈할 것 같은데요.”
성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허리를 굽히고 자리를 떠났다.
문이 탁하고 닫혔다.
혼자가 된 박상혜 의원이 입술을 꾹 깨문다.
그녀가 손에 쥔 휴대폰을 집어 던졌다.
성윤은 흡연실에 앉았다.
옆에는 사무실 보좌진들에게 줄 커피가 캐리어에 담겨 있다.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성윤을 본다.
그들이 수군댄다.
“들었어? 이성윤 의원이 채정학 의원과 손을 잡았대.”
“채정학? 채정학이 누구야?”
“나도 이번에 이름 처음 들었어.”
의원 회관의 분위기는 이미 대한당의 전당대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소문이 얼마나 빠른지 이미 청소하는 직원들까지도 모두 아는 모양이다.
“바보 같은 결정 아니야? 될 사람 등에 타도 모자랄 판에......”
성윤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씁쓸한 연기가 흐른다.
대한당의 일각이 무너지는 중이다.
지지율은 오르지 않고 민심은 흔들린다.
민국당은 전력을 다해 공격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고민하지 않는다.
누가 권력을 차지할지만 생각한다.
거지같은 상황이다.
그렇게 담배를 피우던 중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네, 이성윤입니다.”
-나 채정학 의원이네.
“네, 의원님.”
어쩌면 대한당을 바꿀 수도 있는 사람이다.
역사는 민심이 만들고 정치의 기본 역시 민심이다.
채정학 의원은 민심을 안다.
드러난 적이 없어서 그렇지......
-원내대표님께 들었어. 자네는 내가 전당대회에 나갈 급이 된다고 생각하나?
당황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성윤이 빙긋이 웃었다.
“네.”
***
그 시각, 오대민 의원 사무실.
오대민 의원의 보좌관이 서류를 펼치며 말했다.
“6위부터 10위까지 지지율 차이가 얼마 되지 않아요. 바꿔 생각하면 사람들은 누구든 상관없다는 뜻이죠.”
1위와 10위의 지지율 차가 얼마 나지 않는다.
물론 본격적으로 전당대회가 시작되면 이 지지율은 변동할 거다.
순위에 포함된 열 명의 의원이 전부 출격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지지율이 대한당을 보는 국민의 싸늘한 시선이다.
-누가되던 똑같아.
보좌관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당의 지도부로 새로운 인물을 원한다고 분석했습니다. 지금 지지율은 뒤처지지만 승산은 충분하다는 계산입니다.”
오대민 의원은 충분히 새로운 인물이다.
똑똑한 이미지는 만들어졌지만 지금껏 주류 정치에 나선 적이 없어서다.
“그래서?”
“이성윤 의원과 한번 만나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의원님의 이미지에 이성윤 의원이 더 해지면 시너지가 꽤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10억 기부로 여론을 달구기도 해서 폭발력도 있고요. 우리가 당권을 가지려면......”
오대민 의원은 잠시 성윤을 떠올렸다.
성윤이 냈던 지난 법안 발의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삐걱거렸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모두 아는 것처럼 법안을 낚아채 가져가던 건방진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오대민 의원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저었다.
“10위부터 포섭할 필요가 있나? 5위와 6위부터 비벼봐야지.”
그는 성윤과 함께 하고 싶지 않았다.
보좌관이 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휴대폰을 귀에 댄 보좌관의 낯빛이 흐려진다.
오대민 의원이 물었다.
“왜?”
“...채정학 의원이 출마한다고 합니다.”
채정학 의원에 비하면 오대민 의원도 올드 보이다.
새로운 인물을 원하는 표가 채정학 의원에게 쏠릴 거다.
표가 찢어지면 당선 확률은 줄어든다.
“그놈이 왜?”
“이성윤 의원이 지지한다고 합니다.”
< 잠룡들. -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