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소 호흡기. - (1) >
머릿속이 복잡했다.
박무혁 의원이 제안한 성종 그룹 회장과의 전쟁.
원내대표의 교통사고.
병원에 나타난 성종 건설 부장.
각각 다른 퍼즐 조각이 아무렇게나 던져졌다.
그런데, 묘하게 이어지는 것 같다.
‘대체 뭐지?’
수많은 생각을 붙여봤지만 말도 안 되는 음모론만 떠오른다.
성윤은 마른 입술을 손으로 훑으며 픽 웃었다.
‘바보 같은 생각은 그만.’
지금 상황은 꿈에서 보지 못했다.
성윤의 행동이 바꿔버린 현실이다.
퍼즐 조각을 맞추면 어떤 흉악한 그림이 나타날지 알 수 없었지만 보고 싶었다.
시작은 작은 조각이 들어갈 곳을 찾는 거다.
“연락처 알아요?”
성종 건설에 전화하면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조용히 움직여야 했다.
미래를 모르고 내딛는 걸음이다.
어두운 동굴 속을 감각에 의지한 채 걷는 것과 같다.
동굴의 끝에 어떤 괴물이 숨어 있을지 알 수 없다.
최대한 조심히 행동해야 했다.
다행인 점은 상대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다는 것.
마담 설미혜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연락처까지는... 최근에 업소 여성이 성범죄 신고를 하는 사건이 있었잖아요. 염려하는 손님이 계셔서 저희는 연락처를 따로 받지 않아요.”
성윤은 품에서 수첩을 꺼내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적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툭 던졌다.
“다음에 이 사람이 오면 명함이든 연락처든 받아 주세요.”
그녀가 연락처를 빤히 보며 묻는다.
“알았어요. 그런데, 다른 일로 전화하는 것은요?”
“민원이라면 환영이지만 그 외는 반갑지 않겠네요. 청탁은 사절이고요.”
할 말을 끝낸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담 설미혜가 성윤의 옷깃을 살짝 잡는다.
“오신 김에 술 한잔하세요. 제가 따라드릴게요.”
“이런 곳에서 술 마실 만큼 돈이 많지 않아요. 그리고 그 예쁜 손으로 술잔 말고 다른 걸 쥐면 더 예쁠 텐데.”
“네?”
“연예인이었다고 들었어요. 제 후배가 그쪽 팬이었답니다. 나중에 볼펜 쥐고 싸인이나 해주세요. 그때는 소주 한잔하죠.”
성윤은 몸을 돌려 룸을 벗어났다.
마담 설미혜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그리고 성윤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녀는 휴대폰을 귀에 댔다.
“이성윤이 왔다 갔어요.”
-왜 왔지?
그녀의 시선이 노트북으로 향했다.
검게 변한 화면이 보인다.
화면을 걷어내면 성종 건설 부장의 얼굴이 나타날 거다. USB는 빼갔지만 영상을 끄지는 않았으니까.
그녀의 손이 천천히 노트북으로 옮겨졌다.
순간,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손에서 멎는다.
하얗고 길쭉하니 고운 손.
머릿속에서 지옥 같았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이어서 성윤의 말이 귓속에 맴돈다.
‘술잔이 아니라 볼펜 쥐고 싸인을 해달라고? 그때는 소주 한잔하자고?’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녀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떠들었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 싸인하고 웃을 수는 없었다.
부끄러웠으니까.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노트북에서 손을 치운다.
그리고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혼자 술 마시고 싶었나 봐요.”
통화가 종료됐다.
그녀는 자신의 옆으로 휴대폰을 던져둔다.
다리를 외로 꼬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회색 연기가 그녀의 입에서 흐른다.
“미친년.”
***
의원회관, 성윤의 사무실.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와 프린터 돌아가는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렸다.
프린터에서 빠져나온 A4용지가 두껍게 쌓였다.
한 여성이 A4용지를 손에 들고 책상에 앉는다.
눈으로 문서를 살피며 붉은 펜으로 중간중간 밑줄을 긋는다.
문 앞에 선 남자가 손을 든다.
“박 보좌관님, 우리 영감님이랑 친한 분이 누가 계세요? 법안 처리할 때 도장 잘 찍어줄 사람이요.”
서류를 넘기던 정우가 시선을 틀었다.
“원내대표님 계파는 웬만하면 읽지도 않고 찍어줍니다.”
성윤의 사무실에 새로운 식구들이 채워졌다.
민국당 의원의 아래 있던 4급 보좌관 김현석.
그를 도와 정책을 담당할 5급 비서관 송주현.
마지막으로 회계를 맡을 서진화였다.
모두 성윤과 정우보다 나이가 많다.
성윤의 사무실도 제법 구색을 갖췄다.
아직은 호흡을 맞추는 중이지만 곧 본격적인 업무에 들어설 거다.
정우의 옆으로 김현석 보좌관이 섰다.
“담배 한 대 피울까요?”
“좋죠.”
두 사람은 흡연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김현석 보좌관이 정우에게 담배를 건넸다.
그는 민국당 의원을 보좌하던 사람.
그 의원이 낙선하며 여의도 백수 신세가 되었었다.
하지만 정우의 눈에 띄며 간신히 복귀할 수 있었다.
둥긍둥긍한 뱃살이 인상적이다.
김현석 보좌관이 담배에 불을 붙인 후 물었다.
“제가 사장님을 잘 몰라요.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사장님은 국회의원을 지칭하는 말이다.
보좌진 중에는 의원 사무실을 회사라 부르고 의원은 사장 또는 영감이라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들에게 의원 사무실은 출근하고 퇴근하는 직장이기 때문이다. 술을 마실 때 ‘보좌관.’ ‘의원님.’ 등의 단어가 오가면 힐끔힐끔 보는 사람들이 불편하기도 했고.
“사장님은 어떤 분인가요?”
정우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의원님이요? 이 바닥에 어울리는 사람이죠.”
“이 바닥에 어울리는 사람... 좋은 말인가요?”
“혹시 그 사건 아세요? 고등학생이 수업을 거부하고 시위를 했던 것.”
김현석 보좌관이 옛일을 기억하며 턱을 만졌다.
“십 년 전? 그쯤에 그런 일이 있던 것도 같은데......”
“체육 시간이었어요. 뜀틀을 하는데 그걸 넘지 못한 학생이 있었죠. 그런데, 최고 점수를 받은 거예요. 체육 선생이 촌지를 좋아하는 생활인이었거든요. 그 학교에는 그런 선생이 한둘이 아니었어요. 심지어 교장까지. 학교가 아니라 학원이었죠. 돈을 준 학생의 내신
은 올라갔고 돈 없는 사람은 뭐......”
김현석은 정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성윤에 관한 질문을 했는데 난데없이 고등학교 이야기라니.
김현석은 정우의 얼굴을 보며 눈만 깜빡였다.
정우가 말을 이었다.
“그 학교에는 학부모들의 모임이 있었어요. 선생들을 데리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용돈을 주는 모임. 고1 엄마가 그 모임에 들어가면 고3까지 어떤 담임이 배정받을지 알 수 있었어요. 더럽죠?”
김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립학교에 들어간 고상한 엄마들이 치맛바람을 일으킨다는 것 정도는 들어봤다.
정우가 슬쩍 웃었다.
“그걸 뒤집어 버린 게 우리 의원님이에요. 고등학교 3학년 때, 학생들을 모아 수업을 거부했고 학교 옥상에서 부루마블 돈을 뿌렸죠. ‘부루마블은 서울 먹는 게 진리!’라는 명언을 외치면서요.”
“고3이요?”
“네.”
“그런데, 서울 먹는 게 진리라는 것은 무슨 뜻이에요?”
정우가 쿡쿡거렸다.
“몰라요. 가끔 이상할 때 있어요.”
김현석 보좌관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학생에게 교사는 거대한 어른, 그리고 의원님은 몇 개월만 버티면 졸업, 모른 척 외면했다면 편했을 학교생활이었어요. 하지만 의원님은 불의에 물러서지 않아요. 사람을 모을 줄 알고 행동할 줄 알죠. 이 바닥에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지이이잉.
정우의 휴대폰이 부르르 떨렸다.
그가 휴대폰을 귀에 댄다.
“네, 의원님.”
-땡땡이치고 있어? 내려와. 간식 사 왔으니까.
정우가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김현석 보좌관에게 말했다.
“간식도 잘 사줘요.”
김현석 보좌관이 크게 웃는다.
“그게 제일 마음에 드네요. 전 직장에서 모셨던 사장님은 간식 사주는 것을 몰랐어요. 담배나 뺏어 피울 줄 알았죠.”
두 사람은 사무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테이블에 성윤이 사 온 떡볶이와 튀김, 순대 그리고 치킨이 가득하다.
“어서 앉아요.”
성윤의 말에 정우와 김현석이 자리를 찾아 앉는다.
잠시 업무가 중단되고 낄낄거리며 간식 먹는 시간이 시작됐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일에 관한 이야기는 나온다.
5급 비서관으로 채용된 송주현이 순대를 소금에 찍으며 말한다.
“시민단체에서 법안을 만들어 왔어요.” 시민단체에서 원하는 법안을 만들어 의원 사무실에 건네는 경우가 있다.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청부법안이라 부른다.
“뭔데요?”
“불법체류자의 인권을 위한 법안인데요.”
지난번 불법체류자 사건 이후 성윤은 불법체류자의 적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인권을 생각하는 시민단체 역시 성윤에게 적대적이다.
“그걸 왜 우리에게 줬을까요?”
대답은 정우가 했다.
“압박이죠. 이만큼 많은 사람이 불법체류자를 불쌍하게 생각하니까 더 핍박하지 말라는 압박.”
성윤이 시민단체에서 온 자료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휙휙 넘긴다.
그들이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지 보여주는 감성적인 사진이 가득했다.
마지막으로 불법체류자가 원하면 한국에서 일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법안이 적혀 있다.
김현석 보좌관이 말한다.
“그거 안 들어주면 냉혈한이라고 기사 날지도 몰라요.”
“냉혈한이요?”
“네, 그 단체장 만나서 적당히 타협하는 게 좋을 수도 있어요. 이런 법안은 이르다. 다른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식으로요.”
“타협?”
“그쪽도 이 법안이 통과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민국당 의원실에 그런 법안이 자주 들어와서 잘 알아요.”
김현석 보좌관의 걱정스러운 말.
하지만 성윤은 슬쩍 웃으며 법안을 쓰레기통에 툭 던졌다.
“우리 국민을 생각하기도 바빠요. 불법적으로 들어온 외국인까지 걱정할 시간은 없어요.”
보좌진은 국회의원의 생각이 기준이 된다.
단 한마디였지만 성윤이 의미하는 바를 머릿속에 기억했다.
성윤이 티슈로 입을 닦으며 김현석에게 고개를 틀었다.
“민국당에 계셨다고요? 아는 의원이 많다고 들었는데요.”
“오래 있었으니까요. 민국당에 필요한 정보라도 있으시나요?”
성윤은 조용히 김현석의 속마음을 들었다.
그는 당과 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생계형 보좌관이다.
배신의 문제는 희박하다.
“3선 이하로 해서 괜찮은 분들 있을까요? 극단적이지 않은 분, 당론을 따르지만 불만이 있는 분.”
김현석은 오랜 시간 국회에 머물렀기 때문에 성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예상할 수 있었다.
성윤이 원하는 것은 제3세력이다.
양 당의 균형을 잡고 목적을 이루는 것.
하지만 지금껏 제3세력이 살아남은 경우는 없었다.
“의원님, 외람되지만.......”
성윤이 손을 저었다.
“대한당과 민국당의 시선은 2년 후 대선에 집중되어 있어요. 눈앞에 닥친 현실은 외면하고 미래에 떨어질 콩고물만 생각하죠.”
이미 세력 싸움이 시작됐다.
민국당 역시 열띤 세력 이동이 이뤄지는 중이다.
대한당은 말할 것도 없다.
주진만 원내대표가 입원한 후로 각 잠룡들이 몸집을 키우느라 바쁜 상황.
정치인이 서열 싸움에 침을 흘리면 민생은 어지러워지고 불만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그럴수록 잠룡들은 좋아한다.
그들은 나라가 망할수록 물개박수를 친다.
어차피 모든 욕은 레임덕에 빠진 대통령이 꾸역꾸역 처먹을 테니까.
잠룡들은 눈치를 보다가 국민이 원하는 카드를 한 장씩 던져 줄 거다.
나라 사랑이 아닌 권력 사랑의 행동이다. “전 정치 때문에 나라가 흔들리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중심을 잡아줄 세력이 필요합니다. 그 역할을 우리가 했으면 하고요. 그러니까 일단 세 명, 괜찮은 분으로 찾아봐 주세요.”
몇 가지 말은 하지 않았다.
시작될지 모를 재벌 간의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질 수 있다는 것.
그에 대한 방비라는 것...
김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일주일내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감사해요.”
성윤은 지난 며칠간 대한당 의원들은 만나고 다녔다.
아직 아군이란 확신은 들지 않지만 베이스는 만들어지는 중이다.
거기에 민국당 의원까지 포섭한다면.......
적어도 애송이라 부를 사람은 없을 거다.
의원회관 사무실의 불이 꺼진 것은 새벽 1시가 넘어갈 때였다.
성윤은 정우와 함께 차에 올라 서안시로 향했다.
성윤은 창밖을 바라본다.
그의 머릿속은 다시 박무혁 의원과 성종 그룹 그리고 원내대표에게 향해 있었다.
‘성종 회장과의 전쟁?’
박무혁 의원이 어떤 의도로 말을 꺼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고맙네.’
성윤은 슬쩍 웃었다.
성종 그룹은 미래의 대통령 악귀 이준대와 손을 잡았던 곳이다.
그래서 성윤은 성종 그룹을 보며 먼 미래의 적이라고만 생각했다.
아직은 힘이 없어 싸울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저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성종 그룹이 눈앞에 덜컥 다가왔다.
‘성종 그룹......’
꿈을 통해 봤던 대한민국은 비참했다.
인구 절벽, 경제 몰락.
그 중심에 이준대와 성종 그룹이 있었다.
나라가 흔들리면 힘없는 국민이 고통받는다.
하지만 정치인은 그 고통을 모른다.
좋은 동네, 수십억의 아파트에 사는 그들은 서민의 삶을 알 수 없다.
그들은 한국에 온 외국인 노동자를 볼 일이 없었다.
아들딸의 취업 문제는 전화 한 통, 문자 한 줄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취업 문제로 낙담하고 경제 문제로 시름하며 외국인 범죄에 노출되었어도 상관하지 않았다.
국민이 피폐하게 살아도 자신은 정갈한 식탁에서 밥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윤이 입술을 쓸어 만졌다.
‘정말 그 일이 성종 회장과 관련이 있고 감옥에 보낼 수 있다면.......’
향후 등장할 이준대의 힘은 반으로 꺾일 것이고 비참했던 미래를 완벽히 바꿀 수 있다.
“의원님?”
갓길에 차를 세운 정우가 놀란 얼굴로 성윤을 보고 있다.
“왜, 또 무슨 일인데?”
성윤은 정우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불안했다.
정우가 휴대폰을 내밀며 멍하니 말한다.
“위요.”
“위? 당사? 원내대표님?”
“아뇨, 청와대......”< 산소 호흡기. -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