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후. - (2) >
-죽었으면 했는데, 귀찮게......
남자는 엘리베이터의 바뀌는 층수만 보고 있다.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정장, 와이셔츠 아래로 비싼 시계가 있다.
몸은 다부졌지만 눈빛은 칙칙하다.
남자는 3층의 정형외과 병동에서 내렸다.
성윤이 정우의 어깨를 툭 쳤다.
“따라가.”
성윤이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턱짓했다.
정우의 눈길도 남자에게 향했다.
“전화할게요.”
정우는 어떤 것도 묻지 않고 남자의 뒤를 밟았다.
스르륵, 엘레베이터의 문이 닫힌다.
성윤은 계속해서 남자를 쏘아본다.
음습한 그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멍청한 놈이, 자기가 하겠다고 설치다가 일만 크게 벌여서......
문이 완벽하게 닫혔다.
성윤의 눈은 더 사나워진다.
남자의 속마음과 이번 교통사고, 어떤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쑤셨다.
그리고 8층, VIP 수술실.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이 앞을 지키고 섰다.
그 뒤에는 김대성 의원을 비롯해 스무 명에 가까운 의원이 보인다.
다들 불안한 표정이다.
하지만 속마음은......
-원내대표가 과감한 성격은 아니잖아? 당권을 장악하긴 무리였지. 어쩌면 잠시 쉬는 게 우리에겐 좋을지 몰라.
-나에게도 기회가 오려나?
수술실을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
김대성 의원이 굳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담배 한 대 피울까?”
“네.”
김대성 의원은 비상계단으로 가려 한다.
“의원님? 밖으로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김대성 의원은 ‘왜? 밖에 비 오잖아?’라는 눈빛으로 성윤을 바라본다.
병원이 금연이란 사실을 모르는지, 아니면 아무도 뭐라 못할 것을 알아서 그런지......
성윤은 김대성 의원을 끌고 병원 밖으로 나갔다.
우산 끝에서 물이 줄줄 흐른다.
두 사람은 각자 담배를 입에 물었다.
김대성 의원이 말한다.
“3주는 병원에 있어야 한대.”
1주일 정도 입원 후 복귀할 줄 알았다.
그런데 3주라니.
시시각각 변하는 정계 구도에서 3주는 긴 시간이다.
특히 지금처럼 판이 바뀌는 순간에는 더 그렇다.
“비대위는 강상원 의원님이 맡을 거야.” 강상원, 대한당이 위기에 처하면 구원 투수로 등판하는 원로급 의원이다.
조용히 해 먹는 국회의원이 좋다며 대선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실용 노선을 선택한 사람.
김대성 의원의 말이 이어졌다.
“대표직을 노리는 사람이 많아. 난 원내대표님이 되기를 바랐는데, 이러면 장악력이 약해지지. 앞으로는 오늘보다 더 큰 비가 내릴 거야.”
지금 정치판의 화두 중 하나가 2년 후 있을 대선이다.
대한당이 패배하며 대통령의 레임덕이 가시화됐다.
이름을 높이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당대표 자리는 이름을 알리는데 최적이다.
성윤의 입에서 연기가 흘렀다.
‘벌써 대선......’
꿈속에서 대한당의 대선 후보는 전 당대표였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그는 당을 장악하지 못했고 결국 사퇴했다.
훗날 경선에 나올 수는 있겠지만 현시점에서는 대권 도전은 어렵다.
‘누가 그 자리를 노리지?’
권력욕을 가진 여러 인물이 머릿속에서 스쳤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그러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봤던 남자의 얼굴에서 생각이 멎었다.
‘원내대표가 테러를 당했다면... 대한당의 짓일 수 있겠어.’
꿈속에서 봤던 미래는 이미 크게 뒤틀렸다.
새롭게 권력을 노리는 자들이 이빨을 드러내는 것은 당연하다.
원내대표의 교통사고 소식에 손뼉을 치며 좋아할 인물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까.......’
꿈속에서 당대표가 정계를 떠나던 때도 그랬다.
구심점을 잃은 대한당은 지금처럼 혼돈이었다.
그때, 혼란을 수습하고 권력을 손에 쥔 사람이......
박무혁 의원이다.
‘설마?’
확인된 것은 없다.
그런데, 소름 끼치는 무엇인가를 만진 느낌이다.
박무혁 의원의 알 수 없는 속은 의심을 가져다준다.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고 있는데 김대성 의원이 헛소리를 내뱉는다.
“...그래서 당을 안정시키기 위해 당권에 도전하고 싶은데, 도와주겠나?”
성윤은 힐끗 김대성 의원을 살폈다.
‘위로 올려서 꼭두각시를 만들어 봐?’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어떤 사람들은 김대성 의원을 보며 남자답다고 말한다.
하지만 욕심만 많을 뿐 능력이 없다.
행동력은 높지만 신중하지 못하다.
민생보다 서열에 집중한다.
그리고 지금 원내대표가 수술받고 있다.
걱정하지 않더라도 걱정하는 척 연기해야 한다.
그런데 대놓고 권력욕을 드러낸다.
그가 집권하면 국정의 혼란만 가져다줄 거다.
“의원님이 나가시면 당연히 지지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을 지켜보는 게 더 우선일 것 같은데요.”
적당한 말로 거절했다.
김대성 의원도 민망한지 더 묻지 않는다. 잠시 후, 주진만 원내대표가 수술실에서 나왔다.
아직 마취가 깨지 않아 침대에 누운 채 회복실로 향했다.
의사는 수술이 잘 되었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한다.
원내대표의 아내와 아들, 딸은 안심하며 눈물을 흘린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의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술 약속을 잡고 있었다.
김대성 의원이 가장 적극적이다.
세력을 모으려는 수작.
“이 의원 같이 가지?”
김대성 의원이 성윤을 불렀다.
그의 속마음이 들려온다.
-만들어진 기회야. 원내대표가 병원에 있는 동안 그의 사람들을 내 손에 넣어야겠어.
인간이란 참 추악하다.
권력은 욕망의 절정이다.
성윤은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그곳에 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중진급 의원들이다.
손을 잡아도 따까리 노릇만 할 게 뻔하다.
“사무실에 일이 있어서요. 맛있게 드십시오.”
성윤은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에 오르자 정우가 USB를 건넨다.
“뭐야?”
“쫓았던 남자의 CCTV 파일이에요.”
성윤은 남자를 쫓으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정우는 CCTV 파일을 가져왔다.
정우가 말을 잇는다.
“이상했어요. 바로 비상계단으로 가더니 병원을 벗어났거든요.”
“병실에 들른 게 아니라?”
“네.”
정우가 성윤의 손에 있는 USB를 가리키며 말한다.
“혹시 몰라서 챙겨왔어요. 확인해 보세요.”
“땡큐. 그런데, 병원에서 영상을 순순히 넘겨줘?”
“원내대표님 핑계 댔죠. 오늘 온 의원들 확인해서 감사 인사 전해야 한다고 하니까 바로 주던데요.”
권력은 참 편리하다.
이름만 꺼내도 해결되는 일이 많다.
성윤은 USB를 품에 넣었다.
‘확인해봐야겠네......’
남자는 의심스러운 냄새만 풀풀 풍기고 떠났다.
확인할 방법으로 안기부 출신 오강민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김대성 의원과 관련됐다.
성윤의 질문이 김대성 의원에게 전해질 가능성이 크다.
그럼, 대한당에는 또 다른 혼란이 올 수 있다.
의혹만 가지고 혼란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놈이 했던 속마음이 원내대표와 관련 있다면......’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는데......
‘어?’ 정신이 없어서 놓치고 있던 게 또 있었다.
성윤의 능력은 속마음을 읽는 것.
그 능력은 상대에게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그 남자를 집중한 적이 없다.
‘멋대로 들린 거야?’
쓸데없이 불안해진다.
사람의 마음을 시도 때도 없이 듣는다는 것은 지옥이다.
세상에는 몰라도 좋을 것들이 너무나 많다.
멋대로 들리는 것은 아닌지 몇 번을 확인했다.
심지어 정우에게...
“좋아하는 노래 생각해봐.”
“저 음악 안 좋아하는데요.”
“그럼, 음식 생각해봐.”
“음식이요? 치킨?”
“말로 하지 말고 생각하라고.”
정우가 이상한 눈으로 성윤을 본다.
“왜 그러세요?”
다행히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창밖으로 빗소리만 들릴 뿐이다.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을 집중했나?’
무의식적인 행동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믿는 게 편했고 달리 확인해 볼 방법도 없었다.
정우를 보내고 집에 올랐다.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앞집 문이 삐걱 열린다.
“이제 오세요?”
가수 지망생 전소희다.
그녀가 부끄러운 얼굴로 한발 한발 다가오더니 시디 한 장을 쑥 내민다.
시디에는 그녀의 얼굴이 박혀 있고 ‘전소희’라는 이름이 큼지막하게 보였다.
“앨범 나왔어요. 가장 먼저 드리고 싶어서.......”
“데뷔하는 거예요?”
온종일 머릿속이 복잡했다.
권력과 암투 그리고 원치 않는 능력 발현.......
그런데, 마지막은 기쁜 소식이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며칠 후에 음원 사이트에 올라가요.”
“성공할 거예요. 노래가 좋으니까.”
“감사합니다. 가장 듣기 좋은 말이에요.”
잠시 후, 성윤은 시디를 들고 집에 들어왔다.
샤워를 하고 노트북을 무릎에 올린다.
외장 시디플레이어를 연결해서 그녀의 시디를 넣었다.
꿈속에서 들었던 서정적인 음악이 흐른다.
‘똑같네.’
하지만 다르다.
그때는 이 노래가 조금 더 늦게 세상에 나왔다.
가수도 달랐다.
현실에서는 곡의 주인이 노래를 부른다.
뭔가 좋은 일을 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이번엔 정우에게 받은 USB를 연결했다.
화면이 재생되며 성윤의 표정은 날카롭게 변한다. 엘리베이터.
남자는 8층을 누른다.
하지만 성윤이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재빨리 8층 버튼을 눌러 취소하고 3층을 누른다.
이후 성윤과 정우가 8층을 눌렀다.
‘원내대표의 수술실에 가려던 게 맞지? 나를 보고 취소한 거고.’
8층에는 경호원이 서 있었다.
아마 남자가 올라갔어도 들어가지 못했을 거다.
‘그럼, 왜?’
성윤은 고개를 갸웃거린 후 다음 영상을 재생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남자와 그 뒤를 쫓는 정우.
남자는 비상계단을 통해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차에 올라 병원을 떠났다.
성윤은 화면을 멈췄다.
‘차량 번호가......’
성윤은 차량 번호를 수첩에 적는다.
그 시각, 성종 병원 중환자실.
주진만 원내대표의 자식들은 돌아갔다.
그의 아내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곳에 뚜벅, 뚜벅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박무혁 의원의 얼굴이 드러났다.
닫힌 철문 앞에 선 그가 원내대표의 아내를 바라본다.
그리고 다시 문을 본다.
지이잉.
문이 열리고 의사가 빠져나왔다.
박무혁 의원을 본 그가 급히 허리를 굽힌다.
“안녕하세요?”
“쉿.”
박무혁 의원은 입에 손가락을 대며 조용히 하라 부탁했다.
그의 시선이 다시 졸고 있는 원내대표 아내에게 향한다.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용히 묻는다.
“어떤가요?”
“괜찮습니다. 아침이면 일반 병실에 갈 수 있을 겁니다.”
박무혁 의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잘 부탁드려요.”
“네, 특별히 신경 쓰고 있습니다.”
의사는 떠났다.
박무혁 의원은 잠시 더 닫힌 문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복도에 그의 발소리만 들려왔다.
***
며칠 후 밤.
성윤은 룸살롱에 있었다.
몇 달 전, 주진만 원내대표와 정보를 얻기 위해 왔던 룸살롱이다.
마담 설미혜가 성윤의 앞에 앉았다.
달라붙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다.
“다시는 안 볼 것처럼 하시더니 오셨네요?”
그녀는 글라스 잔을 가볍게 흔든다.
표정은 자신만만하다. 이 세상은 정보가 돈이고 힘이니까.
“그래서 무슨 일로?”
“사람을 찾고 싶어서요.”
성윤은 품에서 USB를 꺼냈다.
병원 엘리베이터 CCTV가 저장된 USB다.
남자의 차량 번호를 확인했다.
하지만 대포차.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 이곳을 찾아왔다.
남자의 인상은 깡패 같았고 혹시나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다.
그녀가 살짝 웃는다.
“그렇게 무례하게 행동하시고 정보를 원하신다고요? 좀, 웃기지......”
그녀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성윤의 싸늘한 눈빛에 그녀가 움찔한다.
어리다 해도 국회의원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자.
마음만 먹으면 이런 룸살롱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
그녀가 한숨을 내쉰다.
“이 의원님? 사실 전 의원님을 좋게 보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도 자존심이 있어요. 조금만 대우를 해주면......”
“존댓말 해주는 게 대우 아닌가요? 말했던 것처럼 난 이런 곳을 싫어해요. 그래서 이게 최선인 것 같은데요. 더 대우해주기는 어렵고, 거래하죠.”
“거래?”
“112에 신고 안 할게요.”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싫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녀는 바지사장이다.
뒤에는 진짜 사장이 있다.
진짜 사장은 그녀에게 성윤을 지켜볼 것을 지시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성윤은 들고 있던 USB를 테이블에 놓았다.
“지금부터 보고 듣는 말은 모두 비밀. 만약 세어 나가면.......”
“진부한 협박은 그만 해요. 비밀로 할 테니까.”
그녀의 속마음을 들어보면 진심이다.
성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트북이 필요한데.”
웨이터가 노트북을 들고 왔다.
성윤은 USB를 꽂았다.
마담 설미혜가 화면을 보기 위해 성윤의 옆에 바짝 앉는다.
“좀 떨어지죠.”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한 뼘 정도 옆으로 떨어져 앉았다.
화면이 나온다.
엘리베이터 그리고 남자.
“누군지 알겠어요?”
화질이 좋지 않다.
“다시요.”
성윤은 화면을 되돌렸다.
그리고 남자가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장면에서 재생을 멈췄다.
마담 설미혜는 눈을 크게 뜨고 남자의 얼굴을 살핀다.
“어... 이 사람.......” 그녀는 기억을 더듬는지 큰 눈동자를 돌린다.
“알아요?”
“...성종 건설 부장이예요.”
“성종 건설 부장?”
“여기 자주 와요.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성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턱을 괴고 생각에 빠진다.
깡패인 줄 알았다.
그래서 룸살롱을 찾아온 거다.
그런데, 성종 건설 부장......
< 배후. -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