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도가 달라지다. - (3) >
***
집으로 돌아가던 길, 성윤은 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우의 시답잖은 개그가 그리웠다.
“퇴근했어?”
-했겠어요? 아직 사무실이죠.
“갈게. 소주 한잔하자.”
성윤은 시장에서 순대와 떡볶이, 튀김을 사 들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에는 키보드 소리만 들린다.
정우는 모니터에 시선을 처박고 일에 열중하고 있다.
성윤이 소파 앞 테이블에 순대를 펼치며 말했다.
“바쁘지 않으면 한잔하지?”
“옙!”
정우는 쪼르르 달려와 맞은편에 앉았다.
순대를 집어 입에 넣으며 묻는다.
“소개팅 어땠어요? 소주 마시자고 하는 것 보니까...차였나요?”
“응, 그런 것 같아.”
“하긴, 의원님 얼굴에 연애가 되면 전 의자왕이에요. 하하하.”
튀김을 쥐며 낄낄대고 있다.
차였다고 한 말에 정말 즐거워 보인다.
“넌 결혼할 거야?”
“여자 친구가 존재하는지부터 물어보는 게 예의 아닐까요?”
“미안.”
“연애할 시간도 없고. 그렇다고 집도 절도 없는 놈이 결혼은 무슨......”
괜히 말을 꺼낸 것 같다.
정우의 표정이 외로워 보인다.
분위기를 바꿀 때는 가볍게 ‘짠’이다.
성윤이 잔을 들었다.
“마시자.”
정우가 소주를 홀짝인 뒤 물었다.
“그런데, 의원님은 여자 만나서 결혼하셔야죠?”
“안 해.”
“해야죠. 의원님은 대통령 될 사람이잖아요. 집안이 화목해 보이면 사람들에게 안정적으로 보이고 영부인 외교의 비중도 크니까요.”
“먹어.”
성윤은 다시 술잔을 올렸다.
정우가 슬쩍 웃는다.
“앞으로 소개팅 같은 것 하지 마세요. 뚜쟁이 시장에서 가치 떨어져요. 미래의 영부인은 제가 골라드리겠습니다.”
“미래의 영부인보다 네 여자 친구부터 만들지?”
“아.”
정우의 표정이 다시 외로워졌다.
“마셔.”
잠시 후, 정우는 사무실 소파에 누워 잠들었다.
성윤은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의자에 눕듯이 앉았다.
그의 손에는 새로운 국회의 의원 명단이 들려 있다.
쭉 펼쳐 봤다. 각각의 이름과 얼굴을 살폈다.
공약을 보고 이력을 읽었다.
꿈속을 기억하며 그 사람의 미래도 떠올렸다.
훗날 권력을 손에 쥐고 악마가 될 사람들의 이름이 보인다.
성윤은 그들의 파일을 빼서 한쪽에 정리했다.
그리고 새벽 5시.
정우가 눈을 떴다.
눈을 비비며 말한다.
“잠들었었나 봐요.”
“푹 자더라.”
정우가 성윤의 앞으로 다가왔다.
“의원님은요?”
“나도 좀 잤어. 그리고 이 사람들 조사해줘.”
간밤에 조사한 사람들의 파일을 넘겼다.
정우가 어색하게 웃는다.
“의원님, 새벽 5시에 사무실 소파에서 일어나 몸도 찌뿌둥한데 상사가 일 시키는 기분 아세요?”
“정우야, 보좌관이 소파에 누워 코 골며 자는 모습을 지켜보는 의원의 마음은 알아?”
“글쎄요, 우리 보좌관이 참 열심히 하는 구나. 앞으로는 일찍 퇴근 시켜줘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 것 같은데요?”
한 마디를 안 진다.
“읽어보기나 해.”
정우는 책상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건네받은 파일을 넘겨본다.
“누구예요? 어제 말씀하셨던 손잡을 사람들?”
“아니, 이용할 사람들.”
“네?”
“그러니까 앞으로 정기적으로 조사해서 보고해줘.”
미래의 악마들이지만 지금은 초선의원이다.
아쉽게도 비리가 없을 거다.
있어도 가벼운 탈선 정도다.
하지만 계속해서 살피고 있다 보면 언젠가 머리채를 붙잡고 질질 끌고 다닐 수 있다.
정우는 성윤의 표정을 살폈다.
이제 막 배지를 단 의원을 조사하라는 지시가 의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윤의 눈빛이 사납다.
정우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이 사람들 조사는 안기부 출신 오강민에게도 부탁할게요.”
“오강민? 괜찮겠어?”
정우는 오강민에게 감정이 좋지 않다.
그런데, 그쪽에도 물어보겠다니......
정우가 슬쩍 웃는다.
“선거 때도 이미 도움 받았어요. 안종기 시사프로그램 비리, 그거 오강민이 물어 온 거예요. 말씀드렸잖아요? 전 개 주인이 밉다고요. 우리에게 꼬리치는 사냥개는 귀여워 해줘야죠. 언젠가는 잡아먹겠지만 그때까지는 예쁘다고 칭찬도 해주고 가끔은 고깃국도 줄 거
예요.”
성윤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너 참 무섭다.”
“이 바닥에서 착한 사람은 못 버티죠. 그리고 이성윤이라는 사람을 좋은 국회의원으로 만들려면 전 악인이 돼야 해요. 피는 제 손에 묻힐 테니까 의원님은 좋은 것만 만지세요.”
“네 손에 피 안 묻히게 할 테니까, 새벽부터 헛소리하지 말고 집에서 옷이나 갈아입고 와.”
정우는 슬쩍 웃으며 몸을 돌렸다.
“가시죠. 모셔다드릴게요.” ***
새로운 국회가 열렸다.
여소 야대의 상황, 앞으로의 혼란을 예고하듯 묘한 분위기가 국회를 채웠다.
먼저 등장한 것은 민국당과 진보당이다.
그들은 정권의 발목을 잡기 위해 손을 잡았다.
어깨에 힘을 주고 중앙을 차지한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 즐거운지 끼리끼리 모여 웃음꽃을 피운다.
성윤은 민국당 의원들의 옆에 서 있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음료를 마시며 그들의 속마음을 듣는 중이다.
민국당과 진보당은 친한 척 모여 있다.
덕담을 나누고 칭찬하고 오늘의 안건을 상의한다.
하지만 정치판에 영원한 아군은 존재하지 않는다.
믿었던 친구가 칼을 찌르고 식구라 여겼던 보좌관이 뒤통수를 치는 게 이 바닥이니까.
성윤은 알고 싶었다.
누가 누구와 손을 잡았는지.
잡은 척했는지.
누가 배신할지.
가장 필요한 자는 배신할 사람이다.
미꾸라지처럼 물을 흐리고 분열시킬 인간...
이기적인 악인.
그리고 성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서 멎었다.
‘김윤범......’
충남에서 당선된 국회의원으로 나이는 서른아홉이다.
잘생긴 외모와 부드러운 눈매는 새벽에도 무단횡단을 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성윤은 그를 알고 있었다.
굳이 속마음을 듣지 않아도 그의 음험함은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다.
꿈속의 그는 철저하게 숨어 있었다.
국민에게는 올바른 인간의 허상을 보여주며 조용히 의원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는 권력을 이용하는 실세 중 하나.
탐욕스럽게 단맛을 씹어 먹던 놈이다.
성윤도 김윤범의 손아귀에서 많이 놀아났었다.
그의 허상에 속았던 거다.
하지만 그것은 꿈일 뿐.
현실에서는 성윤이 가지고 놀 생각이다.
“이 의원, 혼자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 이리 와요.”
민국당 재선 의원이 손을 흔들었다.
가까이 가자 사람들의 거짓된 혓바닥이 움직인다.
“난 이 의원이 역사를 쓸 줄 알았어요.”
“누가 안종기 의원을 꺾을 줄 알았을까?”
“이 정도면 차세대 지도자 아닙니까? YS나 DJ처럼? 하하하.”
성윤은 가식적인 칭찬에 진심처럼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던 김윤범이 성윤에게 악수를 권한다.
“김윤범이라고 합니다.”
“이성윤입니다.”
“비록 당은 다르더라도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김윤범은 예의 있게 허리를 굽히며 소탈하게 웃는다.
참 사람 좋아 보인다.
실체를 몰랐다면 저 미소에 당했을 거다.
하지만 성윤은 그를 알고 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질수록 토할 것같이 역겨웠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김윤범이 뱃속에 괴물이 키우고 있다면 성윤은 괴물 잡는 사냥꾼이다.
성윤은 김윤범보다 더 맑은 미소를 지었다.
인사를 나눈 후 김윤범은 뒤로 물러났다.
대부분 초선 의원은 재선 및 중진 의원의 대화에 처음부터 끼기 힘들다.
분위기를 익히는 게 우선이다.
하지만 김윤범은 분위기를 익히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관찰하고 있다.
누가 자신에게 득이 될지 계산하면서.
하지만 그는 몰랐다.
성윤이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지.
민국당 의원들이 중앙을 선점하고 시끄럽게 떠들 때, 대한당 초선 의원들은 구석에 몰려 있었다.
대한당은 이번에 민국당에 머릿수가 밀렸다.
그런데, 기세조차 밀리는 중이다.
그들은 힐끔거리며 민국당 의원과 대화를 나누는 성윤을 본다.
곱지 않은 시선, 입을 삐죽이는 초선도 있다.
“같은 당이면 우리부터 챙겨야 하는 거 아냐?”
“나이도 어린놈이 재선이라고 거들먹거리기는......”
“재선인데 이제 2년 차잖아. 우리랑 다를 것 없지.”
성윤은 거들먹거린 적이 없다.
대한당 초선에게 인사도 먼저 했다.
그리고 조용히 음료를 마시다가 민국당의 대화에 끼었을 뿐이다.
하지만 대한당 초선은 자신들이 구석에 밀린 이유를 성윤에게서 찾고 있었다.
하지만 잠시였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여기저기 초선 의원들의 목소리가 크게 터졌다.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터지는 곳으로 향한다.
박무혁 의원의 등장이었다.
대한당의 지도부가 물러서며 그 역시 당직을 내려뒀다.
평소 당직에 관심이 없던 만큼 더 자유로워진 느낌이다.
그는 특유의 미소를 그리며 초선 의원들에게 가볍게 손을 든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민국당 의원들도 그를 향해 허리를 굽힌다.
“안녕하세요?”
박무혁 의원의 등장으로 대한당 초선은 조금이나마 기를 펴는 것 같았다.
그들은 박무혁 의원과 한 마디라도 나누길 바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박무혁 의원의 시선은 성윤에게 향했다.
“이 의원?”
성윤이 허리를 굽혔다.
박무혁 의원이 다가와 성윤의 어깨에 친근하게 팔을 두른다.
주변에 민국당 의원들이 몰려 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박무혁 의원이 성윤의 귀에 속삭인다.
“내 선물 거절했다며? 중고라 싫은 거야?”
얼마 전, 박무혁 의원의 보좌관이 국산 최고급 세단을 끌고 나타났다.
박무혁 의원이 딱 한 달 운용한 차.
세차는 물론 광까지 완벽하게 냈었다.
하지만 성윤은 애써 거절했다.
“아뇨, 너무 비싼 것이라......”
“나중에 더 좋은 거로 해줘야겠네.”
“네?”
“물건 말고.” 박무혁 의원이 속삭임을 멈추고 주변에 몰린 민국당 의원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얘기 중이었던 것 같은데, 이성윤 의원을 잠시 데려가도 될까요?”
“아, 네. 그러세요.”
민국당 의원들은 최대한의 미소를 그렸다.
박무혁 의원은 조용히 웃으며 성윤을 끌었다.
향한 곳은 아무도 없는 복도의 끝이다.
박무혁 의원의 보좌관이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
커피를 받은 박무혁 의원이 창가에 몸을 기대며 성윤을 본다.
그리고 나른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당선 축하해.”
“의원님도 축하드립니다.”
“나야 뭘, 우리 식구들이 찍어 준 표로 당선된 거지.”
박무혁 의원은 대정 그룹의 본사가 있는 경기도 지역에 깃발을 올렸다.
회사와 관련된 모든 사람이 우르르 몰려가 도장을 찍었고 언제나처럼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표를 70%나 가져갔다.
대한당이 아니라 민국당 깃발을 들었어도 비슷한 표가 나왔을 것으로 예측하는 사람이 많다.
박무혁 의원이 창틀에 커피를 두며 말한다.
“할 말이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4년 보장됐으니까 이제 누구와 싸울 거지?”
“네?”
박무혁 의원이 장난스럽게 웃는다.
“이성윤 의원, 싸움닭이잖아. 알고 있어.”
“......”
“싸울 사람이 없다면 내가 만들어줄까?”
지난 국회에서는 생존을 위해 싸웠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4년이 보장된 지금은 민생 안정과 세력 만들기에 열중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싸움이라니.......
“궁금하지 않아? 누구와 싸울지?”
“궁금합니다.”
어린애가 장난감을 원하는 저 눈빛.
도대체 어떤 장난감을 탐하려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의 속마음이 간단히 들려왔다.
-성종 그룹.
대한민국에는 크게 3대 그룹이 존재한다.
쇼핑의 제종, 자동차의 대정.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탑은 성종이다.
성윤은 잘못 들었나 싶어서 박무혁 의원의 말을 기다렸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성종 그룹.”
“아, 네.”
성윤의 반응에 박무혁 의원이 조용히 웃는다.
“안 놀라네?”
놀랐다.
아니, 놀랍다.
아무렇지도 않게 성종 그룹과 싸움을 거론하다니.
꿈속에서 성윤이 사망했던 장소가 성종 병원이다. 악귀 이준대가 손을 잡았던 곳도 성종.
사퇴한 당대표가 돈을 받아먹던 곳 역시 성종.
안기부 출신 오강민이 정보를 모으는 곳조차 성종.
모르긴 몰라도 300명의 국회의원 중 적어도 100명은 성종과 연관이 되어 있을 거다.
‘성종......’
성종과 전투를 결심하면, 대한당과 민국당의 괴물들은 언제 분열되었냐는 듯 힘을 합칠 게 분명하다.
자신들에게 용돈을 주는 그룹을 지켜야 하니까.
그들은 우르르 달려와 사나운 이빨로 성윤의 몸을 물어뜯을 거다.
그럼, 뼛조각 하나 남지 않는다.
그들에게 정의는 없다.
오로지 이득만 있을 뿐이지.
그런데, 성종과 싸우자니.
아무리 대정 그룹 출신이라 해도 이건 좀 너무했다.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박무혁 의원은 대정 그룹이다.
대정과 성종 사이에 알력 다툼이 있는지 궁금했다.
속마음을 들어도 나올 게 없다는 것을 알지만 최대한 집중하며 그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박무혁 의원이 팔짱을 낀다.
“이유?”
“네.”
“국회의원의 뒷주머니에 용돈을 꽂아 주고. 상속을 위해 권력을 움직이고. 수천억을 탈세하고. 불법 외화 유출, 직원 폭행. 술집 종업원 구타. 밤마다 이어지는 향락. 어쩌면 살인도 저질렀을 수 있지. 하지만 검찰은 못 해. 더 이상의 이유가 더 필요한가?”
< 판도가 달라지다. - (3) > 끝